그해 가을이 다습게 익어 가도
우리 집 감나무는 허전했다.
이웃집엔 발갛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러운데
학교에서 돌아온 허기진 나는
밭일하는 어머님을 찾아가 징징거렸다.
왜 우리 감나무만 감이 안 열린당가
응 해거리하는 중이란다
감나무도 산 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해거리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
밭 아래를 지켜봐야 하는 법이란다
그해 가을이 다 가다록 나는
위를 쳐다보며 더는 징징되지 않았다
땅속의 뿌리가 들으라고 나무 밑에 엎드려서
나무야 심내라 나무야 심내라
땅심아 들어라 땅심아 들어라
배고픈 만큼 소리치곤 했다
- 박노해, <해거리> 中
나무가 열매 맺기를 거부하는 것. 이를 가리켜 '해거리'라고 한다. 말 그대로 열매를 맺지 않고 해를 거른다는 뜻이다. 어느 해에 열매를 너무 많이 맺고 나면, 다음 해 가을에는 어김없이 빈 가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왜 그럴까? 이유는 단순하다. 살아 남기 위해서다.
열매 하나를 맺는 데는 최소한 수십 개의 잎사귀에 해당하는 영양분이 필요하다. 광합성 등 나무의 모든 생명 활동이 잎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때, 잎을 희생한 열매의 가치는 다른 것과 비교할 게 못 된다. 나무에게 열매는 최고의 재산인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해에 걸쳐 열매 맺는 데만 온 힘을 다 쏟으면 어떻게 될까. 해가 거듭할수록 나무 안의 자생력은 사라지고 점차 기력을 다하게 된다.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무의 상태가 계속 나빠져 어느 순간 한계치에 달했을 때 나무가 또다시 열매를 맺으면 그 나무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나무는 해거리를 통해 한 해 동안 열매 맺기를 과감히 포기한다. 그리고 해거리 동안 모든 에너지 활동의 속도를 늦추면서 오로지 재충전하는 데만 온 신경을 기울인다. 그동안 물과 영양분을 과도하게 옮기느라 망가져 버린 기관들을 추스르고, 헐거워진 뿌리를 단단히 엮으며, 말라 비틀어진 가지들을 곧추 세운다.
그 어떤 생산 활동도 하지 않고 전원 스위치를 내린 나무가 해거리에 하는 게 있다면 오직 하나 휴식이다. 옆 나무가 여매를 맺건 말건 개의치 않고 쉴 때는 정말 확실하게 쉬기만 한다. 그리고 일 년 간의 긴 휴식이 끝난 다음 해에 나무는 그 어느 때 보다 풍성하고 실한 열매를 맺는다.
때가 되면 모든 걸 접고 해거리를 통해 과감하게 휴식을 취할 줄 아는 나무, 일부 식물학자들이 나무가 세상에서 가장 진화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사람도 하기 어려운 일을 나무들은 하나같이 당연하게 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 역시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에 휴식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다. 수천 년 전 시황제가 왜 사람들의 휴식을 금했는지는 한 번 되짚어 볼 일이다.
삶에서 진정한 휴식은 흔히 생각하듯 놀고 먹는 게 아니다. 삶에 대해 반성하고 더 큰 도약을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휴식이다.
한 번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에게 물어보자.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그것은 우리의 삶이 바쁘고 숨가쁘기에 더욱 필요한 일이다.
- 우종영,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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