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작성하는 글은 책을 읽고 나서 작성하는 리뷰가 아니라, 책을 읽기 전에 미리 블로그들을 통해 살펴 본 후, 정리한 것이다. 아직 구매를 망설이고 있고, 공공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아서 고민 중에 내린 방법이었다. 한 마디로 다른 사람들의 리뷰들을 짜집기해서 만든 리뷰라고 해두자.
전체적으로 <보도섀퍼의 돈>을 통해서 받은 느낌은 돈에 대한 투자에 대한 책이 아닌 돈에 대한 철학 및 재테크 초보자들에 대한 마음가짐을 정리한 책인 듯 하다.
현재 외벌이에 곧 태어날 둘째까지 4식구, 전세자금대출로 무엇인가 체계적인 돈 관리와 대출상환계획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졌다. 매달 계획하는 재테크 공부였는데 이제 정말 시작해야 안정적인 가계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 평생 돈 버는 기계로 살아갈지, 아니면 스스로 돈버는 기계를 소유한 사람이 될지 결정하라. ☞ 사람이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가능한 한 빨리 그 자유를 누려라.
책이 어떤 구성으로 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위의 두 구절에 대해서 생각하고 돈에 대한 나의 가치 정립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 생각하는 대로 살지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라는 말이 있다. 최근에 돈에 대한 생각을 하고 집안의 가계에 대한 뚜렷한 계획이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이 발생하는 대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집안의 금융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바로 돈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다. 우선 돈의 노예가 아닌 돈에 대해 자유롭게 대응하며 살겠다는 마음가짐을 항상 가져야 겠다는 생각한다.
이제는 여러 블로그에 등장하는 이 책의 내용을 일부 알아보고자 한다.
☞ 어제 내린 결정이 오늘을 만들고, 오늘 내린 결정이 미래를 만든다.
☞ 나이가 들면 당신은 오직 한가지 만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하지 않은 일들이다.
☞ 목표는 해결의 실마리를 함께 제공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에 대해 너무 오래 고심하느라 시간을 낭비한다 분명한 목표를 가진 사람은 그런 시간의 여유가 없다 그는 빨리 목표에 도달해야 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해결과 방법을 모색한다. 그는 오로지 목표에만 몰두한다. 오직 목표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한 두려움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 자신의 신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또 그것을 바꿀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바람을 마주보며 침을 뱉는 것이나 다름없다. 당신의 잠재의식은 당신에게 최선인 것을 추구한다.
항상 많은 책들이 그러하듯이 마무리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노력을 하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항상 이것이 답인데 쉽지가 않다.
################################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인생을 위해서, 몇 년간은 극기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하고, 또한 그 과정을 고통스럽게만 가져가면 너무 어려우니 긍정적으로 삶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성실하게 살고, 최종 목적을 절대로 잊지 말라.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그것으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시오.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질문을 매일매일 자신에게 던지고, 더 나은 대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기 위한 4종 경기 1) 책읽기 - 우리의 수입이 우리가 책을 읽는 양에 비례해서 늘어나기 때문 2) 자기만의 성공일지 쓰기 - 나의 모든 아읻3ㅣ어들이 기록된 아이디어 사전이자, 내가 만나서 반가웠던 모든 사람들을 기록한 인물사전이자, 실패를 통해 내가 몸소 배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지식사전이 되었다. 무슨 일을 끝냈고? 누구를 도와주었으며? 누구한테서 칭찬을 들었는가? 3) 세미나 참석하기 4) 모범찾기
창비에서 온 문자 강연 초대 문자와 이전에 읽었던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기존에 읽었던 책들과는 새로운 느낌을 얻어서인지 과연 김두식 교수는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강연에 참석하기 이틀 전에 서둘러 교보문고에서 <욕망해도 괜찮아> 책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강연 참석하기 전에 마지막 장을 마치며 김두식 교수의 강연을 보게 되었다.
우선 아쉬웠던 부분은 강의가 책의 한 챕터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강의를 하면서 흥미롭기도 하고 짜증나는 부분이 있었다. 강연이 끝이 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첫 질문은 바로 기독교 집사이신 어떤 점잖게 보이는 한 남자 분이 왜 책에 기독교 비판적인 부분이 많느냐. 그런 것 이외에 많은 좋은 부분이 있다는 식의 논리로 김두식 교수와 언성이 있는 질의 응답을 하였다.
하지만 그 질의응답을 보고 들으면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우선 책을 읽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는 그 질문자와 질문자의 질문에 한 번 더 생각하지않은 '죄송합니다. 선생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이런 식으로 약간은 비꼬는 방식의 대답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에게는 무언가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 다른 청중 한 명은 계속되는 기독교 관련 질문에 열을 올리는 그 질문자에게 고함을 지르며 "이 기독교 근본자야." 이런 말을 하고..... 다시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린 놈의 XX' 등이 난무하는 정말 멋진(?) 강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오호!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들기 시작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어느정도 이성적 판단이 가능하고 아니 이런 강연에 참석할 정도면 아마도 김두식 교수가 얘기하는 바로 A 독자 일 것을 가정하면 다른 이들보다 책과 인쇄매체를 더 많이 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바로 어쩌면 좀 더 욕망을 감추고 자신의 환경에 매몰되어 자신의 생각 속에 머물러 버리는 그런 욕망을 참고 또 참는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게 되었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그리고 최근 들어 대하 소설과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수필류를 읽게 되는 이유는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관음증과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지니고 살아가는 타인들에 대해 조금 더 경험해보기 위해서 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나름 생각해볼 만한 것이 많았던 책이었고 강연이었던 것 같다.
얼마전 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직도 종교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에서 이성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것들을 접하다 보니 아직 고민이 많은 상태이다. 심장과 머리로 생각하고 느낀 후, 다시 한 번 쯤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큰일이다. 또 다시 대하소설에 손을 대고 말았다. 작년에 시작해 올해 완독한 태백산맥을 계기로 대하소설에 매력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대하소설은 역시 조정래 작가의 <한강>과 황석영의 <장길산> 이다. 이것만 해도 22권이다. 그런데 <소설 프랑스 혁명>의 발간 소식을 듣고 작가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관심이 자연스럽게 가기 시작했다. 망설이다가 결국 다시 12권짜리 대하소설에 다시 빠져들어가 버렸다. 올해 몇 권이 출간될 줄 모르겠으나 이미 시작해버렸다.
[프랑스 혁명]은 세계사적인 측면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봉건적인 질서가 붕괴되고 시민, 인민, 국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부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 사건은 바로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위의 다른 대하소설도 그렇고 많은 이야기의 주요 흐름은 바로 가진자와 갖지 못한 자의 대립과 갈등이다. 여기서 유산과 무산이라는 것은 과거의 신분 제도에서 부터, 남성에 의한 여성 차별, 인종 간의 우월성 논란 등과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태어나기 전에 정해져버린 사항을 근거로 그 사람들을 틀 속에 규정 속에 묶어버린다. 그 역사는 수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그 프레임을 과감히 깬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과거의 프레임을 벗어난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었다. 바로 모순되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 프레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서로 생각하는 이상은 개인의 행복한 삶을 위한 자유와 평등을 위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였으나 여전히 대립하고 있다. 아무리 얇게 잘라내도 앞, 뒤가 존재하듯이 어떠한 혁명적인 변화가 발생해도 앞, 뒤는 있을 것이고 명, 암이 존재할 것이다. 그래도 조금 더 나은 명(明)을 위해서 그 중심적인 사상과 근본 정신을 알려고 한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그래서 프랑스 혁명을 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p9 "폐하, 개들이 짖고 있습니다. 저렇게 짖어대는 것을 보면, 이번에야말로 고대하던 멧돼지인지도 모릅니다."
"그래?그렇다면 서둘러야지. 아무리 즉흥적인 변덕으로 시작한 사냥이라 해도 사냥감이 비쩍 마른 토끼뿐이라면 나도 만족할 수 없으니까."
p83 고압적인 권력은, 부조리하고 어리석은 명령이 신성하고 현명한 법과 마찬가지로 충실하게 실행되는 것을 바라볼 때야말로 실컷 웃는 법이다. 자유를 위해 태어난 인간이 이렇게 불명예스러운 치욕에 영합할 수 있는가
p147 베르사유를 떠난다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을 언급하지 않은 무니에는 역시 온건파였다. 그 대신 원리 원칙만은 견실하게 확인한 그 발언은 현재의 정세에서는 가장 유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아, 그래.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결의야.
"바꿔 말하면, 국민의회는 왕국의 헌법이 제정되어 강고한 토대 위에 확립될 때까지 결코 해상하지 않는다는 것, 주위 상황이 요구하는 곳이면 어디서든 소집될 수 있다는 것을 한 사람 한 사람이 엄숙하게 선서하는 건 어떨까요?
p211 미라보는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라면서 더욱 따지고 들었다. 아아, 귀하한테는 아무 자격도 없소. 여기에는 의석도 없고 발언권도 없소. 따라서 폐하의 말을 생각하라고 우리한테 강요할 수도 없소. 번지수가 틀린 이상, 당장 돌아가서 당신을 보낸 자들에게 전하시오.
"우리는 인민의 의지에 따라 여기 와 있소. 총검의 힘에 의하지 않고는 떠나지 않을 것이오."
p267 "거대한 혁명이라는 것은 별로 신통찮은 이유로 시작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인민에게, 왕에게 치명적이라고 할 만큼 큰 사건도 불길하지 않은 사소한 사건, 경탄할 만한 일로도 보이지 않는, 얼핏보기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사건이 발단이 되는 법입니다.
처음 책이 집에 도착했을 때, 비교적 얇은 책에 겉표지도 위의 모습처럼 살짝 장난기가 있어 보였다. 제목 또한 그런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책머리글을 읽어내려가면서 오호! 이책 괜찮은데, 이번에 괜찮은 책 하나 건졌네.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탁 쳤다. 역시 읽어내려가면서 오~~ 하는 작은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첫번째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이다. 우선 현재 교육시스템과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학교등에 대한 일침으로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은 학교와 학년, 학번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비슷한 나이대가 아닌 같은 나이의 일정한 집단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나이가 다른 사람들과의 일종의 벽을 만든 다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주변의 사람들을 잠깐 살펴보면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 동기들, 회사 동기들 이렇게 같은 나이 대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지낸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제도가 만들어낸 획일화된 것 중의 하나인 것이다.
예전 18~19세기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 박지원, 이덕무 등 이들은 나이 차이는 비록 10살을 넘나들었지만 이들은 앎과 지식이라는 토대를 통해서 우정을 쌓고 진정한 벗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제도는 이런 것을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짧은 글을 통해서 나도 아~! 내가 이런 것에 얽매여 사는 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실은 나도 선배, 후배 이런 것들에 대해 나름 중시할 때도 많이 있는데, 이것은 결국 내가 보기좋게 이 사회의 정책에 순응하고 동화되어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들에게 조금 더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벽을 만들어 사전에 차단한다는 느낌을 받아서이다.
두번째는 예전의 배움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배우고 싶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명문대, 지방대, 전문대 할 것 없이 실제적으로 교수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학생들은 별로 없다. 이것은 학생은 학교를 단순히 취업을 위한 하나의 통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뿐이고, 교수 또한 학생들과 함께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 소통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연구와 대학내 시스템내에서의 역할만을 하기 때문이다.
대학, 말그대로 (大學) 큰 학문을 배우는 곳이다. 단지 일정한 나이가 되고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다음의 길을 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큰 학문이란 과연 무엇일까? 취업에 필요한 스텍을 만드는 그런 곳이 아니란 말이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사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관찰하고, 앎과 철학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자연과 우주에 대해서 한 번쯤 고민해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성찰과 사유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지금의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앎, 지식을 가지고 서로 가르치고 배움을 받는 과정에서 '질문'이 없다는 것은 바로 제대로 된 앎과 지식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져있는 소크라테스의 많은 일화와 말들은 바로 제자들과의 문답법을 통해서 사유되고 만들어진 것 들이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단지 암기식, 주입식 시험에 나오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시험에 나오는 것은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하고 답이 있어야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런 것은 질문의 여지가 많지 않다.
이게 어떻게 제대로된 교육이고 소통을 통한 지식의 향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떤 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거나 스승, 멘토로 삼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의 깊은 사유와 사색을 이끌어낼 질문을 하고 그곳에서 그의 앎과 생각을 내 몸 속으로 체화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호모쿵푸스]는 이렇게 총체적으로 내 몸과 마음을 모두 사용하여 공부를 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준다. 공부에는 시기도 없을 뿐더러, 무엇을 배우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알기를 원해서 배우는 것이고 그 시기는 죽기전까지 아니 어쩌면 그 후에도 계속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좋았다. 공부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접근하는 방식, 고전과 인적네트워크를 통한 소통을 중시하는 내용 마음에 들었다. 고미숙 작가의 다른 책을 한 번 읽어봐야 될 것 같다.
빈민들이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급진적'인 행동이다. 인문학에 대한 공부가 빈민들에게 정치적 삶을 가르치며 진정한 '힘'이 존재하고 있는 공적 세계로 이끌어주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 쇼리스, 희망의 인문학에서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이제 가문이 망했으니 네가 참으로 독서할 때를 만났구나."
실제로 지금 대학생들은 도무지 질문을 할 줄 모른다. 사회에 대해서건 삶에 대해서건 질문이 없다. 왜? 독서를 하지 않으니까. 눈앞의 이익만 좇아가느라 바쁜데, 무슨 질문이 있겠는가. 질문을 하려면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와 마주쳐야 하는 바, 독서를 하지 않고는 그런 마주침 자체가 불가능하다. 질문이 없으니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니 질문이 없고, 오, 이 악순환의 고리!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잇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즉, 기존의 배치를 거스르면서 전혀 다른 욕망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는 과감성, 전혀 다른 삶을 창안할 수 있는 상상력, 뭐 이런 것들이 창의성의 진짜 의미에 값한다.
토론이건 체험학습이건 그것이 강도 높은 학습의 과정이 되려면 고도의 훈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자기 생각을 바꾸겠다는 치열한 의지도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주 유치한 수준에서 헛바퀴만 돌 따름이다. 대학에서는 이런 문제가 이미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학생들의 자율에 맡긴 토론 수업들은 백발백중 실패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일단 지금 대학생들은 삶과 사회에 대한 물음이 없다. "공부하는 사람이 의심할 줄 모르는 것은 크나큰 병통이다. 오직 의심해야만 자주 분석하게 되고, 그렇게 하서 의심을 깨뜨리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라 했다. 그런데 바로 이 의심이 없는 학생들끼리 백날 토론을 해 본들 '그 나물의 그 밥', '다람쥐 쳇바퀴'일 뿐이다. 교수와 학생 간의 신뢰가 생기지도 않을 뿐더러, 수업의 생동감도 완전 땅에 떨어지고 만다.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고 한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공부다.
보통의 적성과 학습 의욕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만약 이러한 전통적인 방법(반복학습)의 교수를 받게 된다면 2~3개월 만에 습득할 수 있는 기능은 많이 있다.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는 날로 번성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소통을 단절되고 있다.
구술 능력은 리더십으로 연결된다. 사실 리더십의 많은 부분은 상황을 '언어화하는'능력이다. 어떤 상황에서 그걸 하나의 주제로 엮을 수 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 때 그는 그 그룹의 지도자가 된다. 한번 주변을 살펴보라. 어떤 그룹이든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이는 '썰을 푸는'인간이다. 상황을 언어화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그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만약 새로운 말과 이야기로 세상을 보는 눈을 홀라당 뒤집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혁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혁명은 늘 새로운 말, 낯선 이야기들과 함께 등장했다. 21세기 혁명의 거점인 사파티스타의 구호 또한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이지 않은가
'유머, 세상을 바꾸는 힘' 이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살이에서 웃음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웬만한 유머만 있어도 평생 밥 굶을 염려는 없다.왜냐? 유머스러한 사람들 옆에는 사람들이 꼬이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유머의 힘을 제대로 터득하려면 단순한 말장난이나 개그 정도로는 좀, 어렵다. 그건 잘못하면 푼수데기로 찍히거나 입만 살았다고 밉상이 되기 십상이다. 진정한 유머는 무엇보다 사건과 사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와 간극을 관찰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그의 말 속에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기발한 착상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고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유머의 기술과 구술 능력은 뗄 수없이 결합되어 있다. 이야기를 잘하다 보면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고, 웃음이 야기되다 보면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도 한다. 이렇게 현자을 장악하는 능력이 커지면 그게 다름 아닌 리더십이다.
송나라 때의 유명한 기철학자 장재가 말했듯이, "배움이 크게 이롭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기질을 바꿀 수 있어서다." 그리고 그 배움의 핵심은 다름 아닌 독서다. 책을 읽으면 제갈량이나 허생만큼은 아니더라도 누구든 신체의 에너지와 기운의 분포를 바꿀 수 있다. 한 권 읽으면 한 권만큼, 백권 읽으면 백 권만큼. 이건 절대 공허한 말장난이 아니다. 중국철학사의 이단아 이탁오는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은 책을 열면 곧 거기에 있다. 책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일 것이요, 정신은 또 천만 배나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 이탁오를 하루 종일 면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피노자에 따른 "모든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큼 신을 만나다"
너는 무엇을 먹고 마실까보다 누구와 먹고 마실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친구를 사귀려면 좋은 제도나 서비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진입하고 우발적 마주침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덕을 날마다 새롭게 하려면 모름지기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하고, 스승을 만나려면 모름지기 묻기를 좋아해야 한다.
"별로 아는게 없는데도 배울 수 있을까요?" 중요한 지식의 양이 아니다. 자신을 진정 비울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배움에 있어 가장 불리한 조건은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 혹은 이미 획득한 지식에 갇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성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양이 많건 적건 '비움'은 배움의 필수적 조건이다. 끊임없이 비울 수 있어야 더 큰 앎이 흘러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외부와의 '네트워킹'을 통해 증식, 변용되는 법인데, 그 통로가 막혀버리면 욕망의 흐름이 차단되어, 일종의 자폐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학문하는 묘리는 다른 것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다면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라도 물어야 한다. 어린 종이라도 나보다 한 자를 더 안다면 그에게 배울 것이다.... 옛날 순임금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그릇을 굽고 물고기를 잡는 것에서 임금 노릇을 하는 데 이르기까지 어느 것도 남에게서 배워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자는 말하기를 자기가 어려서 미천했기 대문에 상일에 아주 익숙하였다고 했으니, 그 역시 밭갈고 씨를 뿌리며 그릇 굽고 물고기 잡는 따위의 일일 것이다. 비록 순임금이나 공자와 같이 거룩하고 재주 많은 분도 물건을 보고서 기교를 생각해내며 일에 당해서 기구를 만들자면 시일도 부족하고 지혜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임금과 공자가 성인이 된 것도 남에게 묻기를 좋아해서 배우기를 잘한 데 지나지 않는다. - 박지원(북학의서)
연어는 모천 회귀성 물고기다. 태어나자마자 모천을 떠난 치어들은 저 먼 알래스카까지 헤엄쳐 간다. 그리고 다시 떠났던 길을 거슬러와 모천으로 돌아와 알을 산란하고 죽는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명을 낳고 죽는다는 것, 누군들 이 연어의 일생에 마음이 사무치지 않겠는가. 나 또한 연어라는 말만 들어도 연민이 솟았다. 이 글은 은빛연어 한 마리가 동료들과 함께 머나먼 모천으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누나연어를 여의고 눈맑은연어와 사랑에 빠지고 폭포를 거슬러오르며 성장해가는 내용이다. 언어 이야기를 하는데 인간이 보인다. 은빛연어는 말한다. 연어에게는 연어의 길이 있다고 쉬운 길을 마다하고 폭포를 거슬러오르는 한 마리의 은빛연어를 따라 헤엄치다보니 나도 연어가 되고 싶었다. - 신경숙
p43 "그건 마음의 눈으로 나를 보았기 때문일 거야. 마음의 눈으로 보면 온 세상이 아름답거든." 마음의 눈!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말인가. 마음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친구를, 눈맑은연어를 은빛연어는 오래도록 바라보며 해야 할 말을 잊고 있었다.
p50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른이 된다는 게 두렵기도 하다. 책임, 이라는 말이 언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죽은 누나가 전에 말했었다. 어른이 되면 책임져야 할 일들이 엄청나게 많아진다고
p55 "은빛연어야, 너는 너 혼자의 힘으로 강을 거슬러오른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그럼요?" "혼자라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연어 무리는 특히 그렇지. 연어가 아름다운 것은 떼를 지어 거슬러 오를 줄 알기 때문이야." "왜 거슬러오르는 거지요?" "거슬러오른다는 것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간다는 뜻이지. 꿈이랄까, 희망같은 거 말이야. 힘겹지만 아름다운 일이란다."
p62 "연어들이 편한 길로 가는 것을 좋아할수록 연어들은 해가 갈수록 차츰 도태되고 만다는 거야. 인간들에게 서서히, 조금씩 길들여지다 보면 먼 훗날 폭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연어는 한 마리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게 네 아버지의 생각이었지"
p65 자신의 외모 때문에 고민하던 시절이 생각날 때마다 은빛연어는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숨어들고 싶었다. 그는 동무들에게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음을 볼 줄 모르는 동무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마음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 세상은 위선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은 오만으로 가득 찬 생각이었음을 은빛연어는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남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는가?' 라고 은빛연어는 자신에게 물어본다. 마음 속의 또다른 연어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위기돌파 능력 유성룡은 흔히 우유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인물로, 임진왜란 와중에 발생한 여러 위기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냈다.
비전제시 능력 유성룡은 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 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 경제에 해박한 학자다. 때문에 그는 전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과 정치, 경제, 민생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다.
탁월한 국정수행 능력 유성룡은 대동법, 진관체제, 중강개시, 기득권 타파, 노비 충군 등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해 백성들의 공역부담을 덜어 주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뛰어난 현안해결 능력 유성룡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명분보다는 시급한 현안해결에 매달렸다. 극단이 아닌 중용의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능수능란한 외교력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유성룡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의 전략과 계략을 한눈에 파악한 뒤 이를 역이용하는 등 뛰어난 외교 전략을 펼친다.
유연한 사고방식유성룡은 표면적으로 성리학자를 자처했지만 교조적인 신봉자는 아니었다. 모든 학문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다.
날카로운 인재발탁 능력 유성룡은 하급 무관이라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했고, 두 장수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행주대첩과 한산도대첩을 승전으로 이끈다.
책의 내용을 이루는 큰 줄기가 있다면,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 받치고 사대부의 특권보다는 나라의 존립과 백성들의 안정을 꾀하는 유성룡의 모습과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을 떠나 난을 피하고 싶어하고 난이 끝난 후에는 진정한 공신들을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고 처단하는 선조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사대부라는 자신들의 특권을 버리지 않고 권력에서 멀어지지 않으려는 그 알량한 사대부들의 모습과 조선조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지금도 항상 볼 수 있는 당파싸움이 그 병풍을 만들어 주고 있다.
너무 안타까웠다. 중간 중간 징비록에 나와있는 그 당시의 처참한 상황속에서도 그저 세치 혀로 당파싸움이나 하려 했던 것들이 너무나 화가 나게 했다.
약 520년 전의 임진왜란(1592)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유성룡> 결코 5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래서 역사는 반복되고 과거로 부터 배워나가는 것이다.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후, 서로 상이한 의견을 내어 놓은 대신들, 명나라에 의존하려는 조선의 왕 선조, 외교력의 부재로 인한 국가적 손실, 서로 다른 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 등이 과연 500년 전만의 일인가? 라고 물어본다.
과연 2012년 대한민국을 사는 내가 접하는 현실의 모습은 과연 위의 상황과 어떻게 다른가? 나는 딱히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러한 리더 바로 유성룡이 다시 한 번 나타나주길 바랄 뿐이다.
p131 개국 이래 최초의 파천은 이처럼 무질서했다. 선조 일행이 도성을 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궁에 난입해 불을 질렀다. 평소에 백성들 위에 군림하다가 막상 왜적이 침입하니까 도성을 버리고 도주한 작태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불태운 기관이 형조와 장예원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장예원은 노비 문서를 관할하는 곳이고, 형조는 백성들을 형벌로 다스리는 곳이다.
p135 선조의 요동내부책은 유성룡이 강력하게 만류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이로 인해 더욱 선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파천을 반대하고, 세자 책봉을 계청한 데다가, 요동내부책까지 반대한 유성룡을 선조는 제거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p159 "당초에 일찍이 요동으로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항상 왜적이 앞에서 나타난 뒤에는 피해 가기 어렵다고 말하곤 하였다." - 선조실록 25년 6월 13일
p267 유성룡의 천인 충군론은 당연히 사대부들의 격심한 반발을 샀다. 유성룡이 임란을 극복한 가장 큰 공신인데도 훗날 반대 당파의 집요한 공격으로 쫓겨난 배경에는 바로 노비 충군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유성룡이 노비 충군론으로 사대부들의 계급적 이익에 정면도전했기 때문이다.
p303 대동법이 유성룡 실각과 함께 폐지되지 않고 계속 시행되었다면 조선 후기사는 여러 면에서 달라졌을 것이다. 대동법은 비단 세제개혁에 머문 것이 아니라 공업과 상업의 발전도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유성룡이 대동법 시행을 강력하게 주장한 배경에는 상업에 대한 남다른 견해가 있었다.
p337 신영은 <제조번방지>에서, "당시 서인은 원균 편을 들고 동인은 이순신 편을 들어 서로 공격하느라 다른 국사는 치외도지했으니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p341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무군지죄(역적죄)이며,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부국지죄(국가 반역죄)이며, 남의 공을 가로챈 것은 함인지죄(남을 함정에 빠트린 죄)이며,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지죄(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용서할 수 없는 법이어서 마땅히 율에 따라 죽여야 할 것이다. 신하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선조실록 30년 3월 13일>
p359 9월15일 "맑다. 수가 적은 수군으로 명량해협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 그래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면서,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하고, 또 한 사내가 오솔길의 길목을 지키면 천 사내를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라고 말했다. (......) 이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말해주었다"
카뮈에 의하면,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합리의 욕망이 있는 까닭에 세계의 뜻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세계는 인간이 알아볼 만한 아무런 뜻도 없다. 인간이 가진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합리'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것, 이러한 이율배반으로부터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카뮈의 부조리이며, 인간이 피하지 못할 숙명,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졸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습관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상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문제삼지 않는다. 그처럼 졸고 있으면 존재자의 의식일 수 없으므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부조리와 직면하여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 그것이 '반항'이다.
책의 마지막 표지를 보고, 작품설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카뮈가 29세 때, 지금 나보다 젊은 시절에 발표한 <이방인> 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라 하고 실존주의 문학이라 평한다. 그런데 부조리라는 말도 실존주의라는 의미도 나에게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실존주의 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인 것일까? 존재의 이러한 불가사의를 끝까지 질문하는 철학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실존주의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지만 그 공통점은 인간의 존재, 그것도 단독적인 개체인 나 자신의 존재에 계속 관심을 갖는 방법적 태도이다.
이방인은 한 번 읽어보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방인이라기 보다는 카뮈를 한 번 접해보고 싶어서였다. 이방인을 읽는 내내, 나는 그냥 무표정인 듯 했다. 왠지 주인공 뫼르소는 작가 카뮈를 닮고 항상 무표정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고,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아랍인을 죽이고, 재판을 받고, 그리고 사형대에도 그 무표정으로 올라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내가 있는 그대로 <이방인> 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사건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다루어진 셈이었다. 나를 참여시키지도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나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문득 나는 귀를 기울였다. "제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하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는 그런 투로 이야기를 하며, 나에 관해서 말할 때마다 '나는'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놀랐다. 나는 간수에게로 몸을 굽혀 그 이유를 물었다 ......... 나로서는 그것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놓고, 나를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고, 이를테면 그가 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방인> 의 내용의 진행과정을 보면 어머니의 죽음에서 부터 뫼르소 자신의 사형 구형이 있기까지 철저하게 뫼르소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진행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에 자고 싶어하는 뫼르소, 장례식 다음날 여자와 관계를 갖고, 재판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들 속에서 철저히 뫼르소 자신에 대한 생각을 나타낸다.
이렇게 철저히 자신의 존재만을 집중하는 것이 실존주의인가? 그렇다고 이러한 것이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 카뮈는 무엇을 말하려 하고 있던 것일까? 아직도 내 머리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세월은 기껏해야 몇십 년밖에 되지 않는다. 생명은 두 번의 기회가 없는 일회적인 것이다. 그 기회는 한 번 상실하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생명은 짧고 가역성이 없고 일회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소중하고 진귀하며 신기하고 아름답다. 생명을 의미 없이 보내고 생명에 빚을 진다면, 이것은 너무도 우둔한 짓이며 죄가 된다. 돈 백원을 잃어도 마음 아파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를 잃는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작가 왕멍, 어린 나이부터 중국 혁명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중국의 살아있는 현대사라고 일컬이지는 분이다. 그런 작가가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며 정의한 것이 '나는 학생이다' 이다. 바로 배움을 자신으로 규정한 것이다. 배움은 바로 삶이며 모든 것이다. 우리의 짧은 인생을 어떻게 상실하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작가는 지나온 생활을 돌이키며 한마디씩 우리에게 조언을 해준다.
읽는 내내 무엇인가를 계속 수련하고 정진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작가의 오랜 삶의 철학과 사유가 담겨있는 글들이었다. 때로는 아직 내 나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문맥을 잘 못 잡는 내용도 있었다. 그래서 아마 책의 내용을 절반을 내가 이해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읽은 책 중에 장회익의 [공부도둑]이라는 책이 있다. 작가의 출생을 보니 왕멍은 1934년 출생, 장회익은 1938년 출생이다. 장회익 선생도 자신을 표현하는 말로 '공부도둑'이라 했다. 그러면서 책의 내용은 [나는 학생이다]와는 다른 내용이지만, 어찌보면 70세 라는 나이에 오랜 철학과 사유를 통해 뿜어나오는 그들의 말과 글은 아마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몇 년 후에, 다시 읽어보려 한다. 내가 조금 성숙했다고 생각될 때, 지금보다 조금 더 인생을 알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 책을 다시 잡으면 아마 새롭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P 113 작은 집단을 묶지 말아야 함을 명심하라. 즉, 동맹을 맺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차례의 경험으로 어느 한 사람에게 자기를 의탁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지도자를 존중하지만,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는 않는다. 나는 벗들을 잘 대해주지만, 그들과 나를 묶지는 않는다.
P131 무위(無爲), 소극적인 뜻으로 이 두 글자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무위라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위는 무효하고 무익하고 무의미하고 무료하며, 해롭고 상처를 손해를 주거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P134 사람이 한 평생 가장 쉽게 범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착오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표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표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이다. 앞의 경우는 자기를 너무 높이 평가하고 남을 너무 낮게 평가한다. 뒤의 경우는 자기가 선호하는 것을 남들도 선호한다고 오판하여 자기의 표준이 바로 우리 모두의 표준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P136 현실 속에서 처음 누구를 만났을 때는 인상이 아주 좋았는데, 사귀고 보니 그저 그렇고, 지내고 보니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요구와 기대를 높이 둘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그만큼 요구하고 희망하는 것이 더 낫다. 타인에 대하여 실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우리 모두는 다 평범한 사람이다. 때문에 너무 높이 평가할 것도 없고, 또 어떤 부족한 점을 발견했다고 해서 너무 상심할 것도 없다.
P138 많은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귓등으로 흘린다고 하지만, 이런 현상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를 평상심으로 대하는 수밖에 없다. 곁눈을 팔지 말고,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기가 추진하던 '일'을 진행하면 된다. 당신이 나를 질투한다고?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 일만 할 것이다. 당신이 뒤에서 나를 비방한다고?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일만 밀고 나갈 것이다. 당신이 갑자기 나를 하늘처럼 떠받든다고? 나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내 일에 정진할 것이다. 당신이 사람들을 끌고 와서 나를 공격한다고? 그래도 나는 내 일을 진행시킬 것이다. 나는 내가 이룬 것으로 모든 공격에 대답할 것이다. 바른 마음으로 모든 중상에 회답할 것이다. 나는 무료하고 쓸데없는 분쟁에 눈길을 돌리지 않으며, 자기에 대한 반성을 앞세워 부단히 나를 갈고 닦아 새롭게 완성할 것이다.
P150 무위의 목적은 적당하게 무엇을 하는 것이지, 마냥 잠을 자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펴볼 때 망신을 당하는 사람은 소극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라, 경거망동하는 사람이다. 망신을 당하는 것은 무지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는 데서 비롯된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조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헛소리를 치면서 이 세상을 속이려는 사람이다. 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일이 없다. 그들은 적어도 잘난 체하거나 제멋대로 날뛰지는 않는다.
P153 온갖 정성을 들여 꽃씨를 뿌렸는데 꽃은 피지 않고, 무심히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버드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물질이 발전해가는 우연성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어떤 일을 성사하려고 너무 애를 쓰면 오히려 그 노력이 적당하지 않을 수 있어 구해도 구하지 못한다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P155 일에서 성취를 이루고, 도덕적인 이미지를 확립하고, 능력을 기르고, 늘 배우려고 하는 사람의 인간관계는 양호하다. 그러나 산봉우리 하나를 세우려고, 사욕을 채우려고, 공명과 출세만을 위해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사람은 그 인간관계는 양호하다. 그러나 산봉우리 하나를 세우려고, 사욕을 채우려고, 공명과 출세만을 위해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사람은 그 인간관계가 엉망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절대 일방적인 이익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일방적인 지출도 거의 없다. 남들과 사귈 때 한 가지 도움이라도 받았다면, 자기는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P157 이렇게 어느 한 방면에 큰 업적을 이루어낸 사람은 다른 어느 방면에서는 전혀 재능이 없을 수도 있다. 즉, 어느 한 방면에서는 대가이지만 다른 한 방면에서는 백지 상태일 수가 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단점이 있기에 장점은 더욱 뚜렷하게 도드라진다. 누구든 정력과 시간을 집중해 한두 가지 일에 정진한다면 반드시 선인의 재능과 지혜를 실현할 수 있고, 천재의 대문을 노크할 수 있다.
P160 사람은 일생동안 정정당당하게 일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것과 옳지 않은 것의 한계를 분명히 정해, 해서는 안 되는 일과 반드시 벗어나야 할 일을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더욱 명랑하게 될 것이며, 명석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더 많은 광명과 지혜를 얻게 될 것이며, 암흑과 어리석음의 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P165 사람의 일생에는 무언가를 추구하고, 희망하고, 아끼고 그리워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려고 하는 그 '어떤 것'이 있다. 나는 이것을 '가치'라고 한다.
P187 얼음이 석 자 깊이로 얼게 되는 것은 하루아침의 추위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처음 출발선에 있을 때는 사람들의 차이가 아주 근소하거나 거의 없으며, 때로는 강한 것이 약하게 보이고 약한 것이 강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20미터를 달린 다음에는 이미 빠르고 늦은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다시 100미터를 달렸을 때는 이미 결과가 보인다. 이 모든 것은 한 발자국 달리는데서 나타난 차이이다. 근본은 그 한 발자국 한 발자국에 있다. 의의는 바로 여기에 위치한다.
P197 동물을 도살하는 순간, 동물의 심정이 아주 나빠지는데, 그때 내뿜은 기체를 수집하여 만든 액체는 아주 독기가 있는 물질이란다. 그렇다면 한없는 적의로 세계를 보는 사람과 모든 것을 적대시하는 사람의 몸에서 생성되는 독즙과 독성분을 띤 분자는 얼마나 나쁠까! 타인을 선하게 대하면 그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잘 대하는 것이다. 타인의 장점을 많이 생각하고, 자기의 단점을 많이 생각하며 자기를 돌아보면 흐뭇하고 유쾌하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이를 마다하겠는가?
P204 우리는 제한된 인생의 그 한 시간 한 시간을 아껴야 한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걸핏하면 소송을 걸고, 걸핏하면 당신에게 200만원을 빚진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눈살을 찌푸려야 하는가?
사는 데 아무런 취미가 없으면, 교류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다. 나는 "악인이 될지언정 아무런 취미도 없는 남자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을 가져 본 적도 있다. 아무런 취미도 없는 배우자와 산다면, 한평생 이런 사람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상상만 해도 온몸이 오싹해진다.
P209 어느 사람이 방벽을 쌓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를 솔직하고 진실하고 성실하며 신임할 마나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기 약점을 보여주더라도 방벽을 쌓지 않은 사람과 사귀면 사귀었지, 자기 약점을 꽁꽁 숨기고 언제나 남을 경계하며 폼이나 잡는 사람과는 사귀려 들지 않는다. 자기의 진실한 감정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심은 신임을 얻을 수 없다. 방벽을 쌓지 않는 것은 자기의 품성과 기본적인 관점, 그리고 뜻과 태도에 자신감이 있으며, 경계, 심계, 학문과 품격, 장기적인 효과 등이 그 어떤 타격이나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군자의 흉금은 넓고 또 넓으며 소인의 속은 언제나 근심하고 두려워 한다" 라는 말이 정말 하나도 틀린 데가 없다.
P211 영문도 모를 재난이 다가왔을 때 당신을 명곡을 감상하고, 꽃과 나무를 가꾸고, 애완견을 기르고, 시 한두 수를 쓰는 것이 좋다. 자기의 특기가 쓸모 없을 때, 당신은 다른 특기를 개발하는 것이 좋다. 내가 신장에서 살 때 나는 창작을 금지당했다. 그러나 나는 위구르어와 한어를 번역하는 일을 했다.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아가는 지역에서 번역은 아주 중요하다. 나는 또 관직에서 물러난 사람이 자신의 특기를 살려 심취하는 것을 보았다. 관직에서는 무러났지만 특기가 자신의 본업이 된 경우이다. 얼마나 멋있는가! 이는 마치 물고기가 바다로 돌아온 것과 같으며, 새가 하늘을 다시 나는 것과 같다. 새로운 생활은 이렇게 시작된다. 회의나 소집하고 공문서나 전달하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직장에서 물러나면 정말 말 그대로 공허하고 적막해진다.
P212 정말 아무런 특기도 없다면, 하다못해 한두 가지 취미라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꽃을 키우고, 개나 고양이를 기르고, 우표 앨범을 만들고, 마작이나 트럼프를 하거나 요리를 하라. 이 모든 것은 다 자기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한느 것이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취미다. 이러한 자기의 세계가 몇 개쯤 있게 되면, 당신은 영원히 즐거운 왕자가 될 것이며, 불패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와 반대라면 당신은 편협한 사람, 자신만 위한 사람, 식견이 좁은 사람이 될 것이며, 갈길이 없어 한숨을 내쉬며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가련하고 가소롭고 한심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