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작성하는 글은 책을 읽고 나서 작성하는 리뷰가 아니라, 책을 읽기 전에 미리 블로그들을 통해 살펴 본 후, 정리한 것이다. 아직 구매를 망설이고 있고, 공공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아서 고민 중에 내린 방법이었다.
한 마디로 다른 사람들의 리뷰들을 짜집기해서 만든 리뷰라고 해두자.

전체적으로 <보도섀퍼의 돈>을 통해서 받은 느낌은 돈에 대한 투자에 대한 책이 아닌 돈에 대한 철학 및 재테크 초보자들에 대한 마음가짐을 정리한 책인 듯 하다.

현재 외벌이에 곧 태어날 둘째까지 4식구, 전세자금대출로 무엇인가 체계적인 돈 관리와 대출상환계획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졌다. 매달 계획하는 재테크 공부였는데 이제 정말 시작해야 안정적인 가계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 평생 돈 버는 기계로 살아갈지, 아니면 스스로 돈버는 기계를 소유한 사람이 될지 결정하라.
☞ 사람이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가능한 한 빨리 그 자유를 누려라.

책이 어떤 구성으로 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위의 두 구절에 대해서 생각하고 돈에 대한 나의 가치 정립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 생각하는 대로 살지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라는 말이 있다. 최근에 돈에 대한 생각을 하고 집안의 가계에 대한 뚜렷한 계획이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이 발생하는 대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집안의 금융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바로 돈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다. 우선 돈의 노예가 아닌 돈에 대해 자유롭게 대응하며 살겠다는 마음가짐을 항상 가져야 겠다는 생각한다.

이제는 여러 블로그에 등장하는 이 책의 내용을 일부 알아보고자 한다.

☞ 어제 내린 결정이 오늘을 만들고, 오늘 내린 결정이 미래를 만든다.

☞ 나이가 들면 당신은 오직 한가지 만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하지 않은 일들이다.

☞ 목표는 해결의 실마리를 함께 제공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에 대해 너무 오래 고심하느라 시간을 낭비한다 분명한 목표를 가진 사람은 그런 시간의 여유가 없다 그는 빨리 목표에 도달해야 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해결과 방법을 모색한다. 그는 오로지 목표에만 몰두한다. 오직 목표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한 두려움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 자신의 신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또 그것을 바꿀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바람을 마주보며 침을 뱉는 것이나 다름없다. 당신의 잠재의식은 당신에게 최선인 것을 추구한다.

항상 많은 책들이 그러하듯이 마무리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노력을 하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항상 이것이 답인데 쉽지가 않다.

################################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인생을 위해서, 몇 년간은 극기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하고, 또한 그 과정을 고통스럽게만 가져가면 너무 어려우니 긍정적으로 삶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성실하게 살고, 최종 목적을 절대로 잊지 말라.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그것으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시오.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질문을 매일매일 자신에게 던지고, 더 나은 대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기 위한 4종 경기
1) 책읽기
- 우리의 수입이 우리가 책을 읽는 양에 비례해서 늘어나기 때문
2) 자기만의 성공일지 쓰기
- 나의 모든 아읻3ㅣ어들이 기록된 아이디어 사전이자, 내가 만나서 반가웠던 모든 사람들을 기록한 인물사전이자, 실패를 통해 내가 몸소 배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지식사전이 되었다. 무슨 일을 끝냈고? 누구를 도와주었으며? 누구한테서 칭찬을 들었는가?
3) 세미나 참석하기
4) 모범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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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5일 을지로 페럼타워에서 진행하는 김두식 교수의 강연을 가게 되었다.

창비에서 온 문자 강연 초대 문자와  이전에 읽었던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기존에 읽었던 책들과는 새로운 느낌을 얻어서인지 과연 김두식 교수는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강연에 참석하기 이틀 전에 서둘러 교보문고에서 <욕망해도 괜찮아> 책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강연 참석하기 전에 마지막 장을 마치며 김두식 교수의 강연을 보게 되었다.

우선 아쉬웠던 부분은 강의가 책의 한 챕터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강의를 하면서 흥미롭기도 하고 짜증나는 부분이 있었다. 강연이 끝이 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첫 질문은 바로 기독교 집사이신 어떤 점잖게 보이는 한 남자 분이 왜 책에 기독교 비판적인 부분이 많느냐. 그런 것 이외에 많은 좋은 부분이 있다는 식의 논리로 김두식 교수와 언성이 있는 질의 응답을 하였다.

하지만 그 질의응답을 보고 들으면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우선 책을 읽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는 그 질문자와 질문자의 질문에 한 번 더 생각하지않은 '죄송합니다. 선생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이런 식으로 약간은 비꼬는 방식의 대답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에게는 무언가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 다른 청중 한 명은 계속되는 기독교 관련 질문에 열을 올리는 그 질문자에게 고함을 지르며 "이 기독교 근본자야." 이런 말을 하고..... 다시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린 놈의 XX' 등이 난무하는 정말 멋진(?)  강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오호!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들기 시작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어느정도 이성적 판단이 가능하고 아니 이런 강연에 참석할 정도면 아마도 김두식 교수가 얘기하는 바로 A 독자 일 것을 가정하면 다른 이들보다 책과 인쇄매체를 더 많이 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바로 어쩌면 좀 더 욕망을 감추고 자신의 환경에 매몰되어 자신의 생각 속에 머물러 버리는 그런 욕망을 참고 또 참는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게 되었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그리고 최근 들어 대하 소설과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수필류를 읽게 되는 이유는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관음증과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지니고 살아가는 타인들에 대해 조금 더 경험해보기 위해서 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나름 생각해볼 만한 것이 많았던 책이었고 강연이었던 것 같다.

얼마전 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직도 종교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에서 이성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것들을 접하다 보니 아직 고민이 많은 상태이다. 심장과 머리로 생각하고 느낀 후, 다시 한 번 쯤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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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다. 또 다시 대하소설에 손을 대고 말았다. 작년에 시작해 올해 완독한 태백산맥을 계기로 대하소설에 매력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대하소설은 역시 조정래 작가의 <한강>과 황석영의 <장길산> 이다. 이것만 해도 22권이다.
그런데 <소설 프랑스 혁명>의 발간 소식을 듣고 작가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관심이 자연스럽게 가기 시작했다.
망설이다가 결국 다시 12권짜리 대하소설에 다시 빠져들어가 버렸다.
올해 몇 권이 출간될 줄 모르겠으나 이미 시작해버렸다.

[프랑스 혁명]은 세계사적인 측면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봉건적인 질서가 붕괴되고 시민, 인민, 국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부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 사건은 바로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위의 다른 대하소설도 그렇고 많은 이야기의 주요 흐름은 바로 가진자와 갖지 못한 자의 대립과 갈등이다.
여기서 유산과 무산이라는 것은 과거의 신분 제도에서 부터, 남성에 의한 여성 차별, 인종 간의 우월성 논란 등과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태어나기 전에 정해져버린 사항을 근거로 그 사람들을 틀 속에 규정 속에 묶어버린다.
그 역사는 수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그 프레임을 과감히 깬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과거의 프레임을 벗어난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었다.
바로 모순되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 프레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서로 생각하는 이상은 개인의 행복한 삶을 위한 자유와 평등을 위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였으나 여전히 대립하고 있다.
아무리 얇게 잘라내도 앞, 뒤가 존재하듯이 어떠한 혁명적인 변화가 발생해도 앞, 뒤는 있을 것이고 명, 암이 존재할 것이다. 그래도 조금 더 나은 명(明)을 위해서 그 중심적인 사상과 근본 정신을 알려고 한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그래서 프랑스 혁명을 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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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이 집에 도착했을 때, 비교적 얇은 책에 겉표지도 위의 모습처럼 살짝 장난기가 있어 보였다. 제목 또한 그런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책머리글을 읽어내려가면서 오호! 이책 괜찮은데, 이번에 괜찮은 책 하나 건졌네.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탁 쳤다. 역시 읽어내려가면서 오~~ 하는 작은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첫번째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이다. 우선 현재 교육시스템과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학교등에 대한 일침으로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은 학교와 학년, 학번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비슷한 나이대가 아닌 같은 나이의 일정한 집단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나이가 다른 사람들과의 일종의 벽을 만든 다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주변의 사람들을 잠깐 살펴보면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 동기들, 회사 동기들 이렇게 같은 나이 대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지낸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제도가 만들어낸 획일화된 것 중의 하나인 것이다.

예전 18~19세기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 박지원, 이덕무 등 이들은 나이 차이는 비록 10살을 넘나들었지만 이들은 앎과 지식이라는 토대를 통해서 우정을 쌓고 진정한 벗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제도는 이런 것을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짧은 글을 통해서 나도 아~! 내가 이런 것에 얽매여 사는 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실은 나도 선배, 후배 이런 것들에 대해 나름 중시할 때도 많이 있는데, 이것은 결국 내가 보기좋게 이 사회의 정책에 순응하고 동화되어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들에게 조금 더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벽을 만들어 사전에 차단한다는 느낌을 받아서이다.

두번째는 예전의 배움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배우고 싶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명문대, 지방대, 전문대 할 것 없이 실제적으로 교수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학생들은 별로 없다. 이것은 학생은 학교를 단순히 취업을 위한 하나의 통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뿐이고, 교수 또한 학생들과 함께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 소통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연구와 대학내 시스템내에서의 역할만을 하기 때문이다.

대학, 말그대로 (大學) 큰 학문을 배우는 곳이다. 단지 일정한 나이가 되고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다음의 길을 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큰 학문이란 과연 무엇일까? 취업에 필요한 스텍을 만드는 그런 곳이 아니란 말이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사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관찰하고, 앎과 철학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자연과 우주에 대해서 한 번쯤 고민해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성찰과 사유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지금의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앎, 지식을 가지고 서로 가르치고 배움을 받는 과정에서 '질문'이 없다는 것은 바로 제대로 된 앎과 지식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져있는 소크라테스의 많은 일화와 말들은 바로 제자들과의 문답법을 통해서 사유되고 만들어진 것 들이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단지 암기식, 주입식 시험에 나오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시험에 나오는 것은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하고 답이 있어야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런 것은 질문의 여지가 많지 않다.

이게 어떻게 제대로된 교육이고 소통을 통한 지식의 향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떤 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거나 스승, 멘토로 삼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의 깊은 사유와 사색을 이끌어낼 질문을 하고 그곳에서 그의 앎과 생각을 내 몸 속으로 체화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호모쿵푸스]는 이렇게 총체적으로 내 몸과 마음을 모두 사용하여 공부를 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준다. 공부에는 시기도 없을 뿐더러, 무엇을 배우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알기를 원해서 배우는 것이고 그 시기는 죽기전까지 아니 어쩌면 그 후에도 계속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좋았다. 공부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접근하는 방식, 고전과 인적네트워크를 통한 소통을 중시하는 내용 마음에 들었다.
고미숙 작가의 다른 책을 한 번 읽어봐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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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어는 모천 회귀성 물고기다. 태어나자마자 모천을 떠난 치어들은 저 먼 알래스카까지 헤엄쳐 간다. 그리고 다시 떠났던 길을 거슬러와 모천으로 돌아와 알을 산란하고 죽는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명을 낳고 죽는다는 것, 누군들 이 연어의 일생에 마음이 사무치지 않겠는가. 나 또한 연어라는 말만 들어도 연민이 솟았다.  이 글은 은빛연어 한 마리가 동료들과 함께 머나먼 모천으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누나연어를 여의고 눈맑은연어와 사랑에 빠지고 폭포를 거슬러오르며 성장해가는 내용이다. 언어 이야기를 하는데 인간이 보인다. 은빛연어는 말한다. 연어에게는 연어의 길이 있다고 쉬운 길을 마다하고 폭포를 거슬러오르는 한 마리의 은빛연어를 따라 헤엄치다보니 나도 연어가 되고 싶었다.  -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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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에 우리는 왜 유성룡을 읽어야 하는가?"

위기돌파 능력 유성룡은 흔히 우유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인물로, 임진왜란 와중에 발생한 여러 위기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냈다.

비전제시 능력 유성룡은 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 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 경제에 해박한 학자다. 때문에 그는 전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과 정치, 경제, 민생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다.

탁월한 국정수행 능력 유성룡은 대동법, 진관체제, 중강개시, 기득권 타파, 노비 충군 등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해 백성들의 공역부담을 덜어 주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뛰어난 현안해결 능력 유성룡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명분보다는 시급한 현안해결에 매달렸다. 극단이 아닌 중용의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능수능란한 외교력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유성룡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의 전략과 계략을 한눈에 파악한 뒤 이를 역이용하는 등 뛰어난 외교 전략을 펼친다.

유연한 사고방식 유성룡은 표면적으로 성리학자를 자처했지만 교조적인 신봉자는 아니었다. 모든 학문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다.

날카로운 인재발탁 능력 유성룡은 하급 무관이라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했고, 두 장수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행주대첩과 한산도대첩을 승전으로 이끈다.

책의 내용을 이루는 큰 줄기가 있다면,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 받치고 사대부의 특권보다는 나라의 존립과 백성들의 안정을 꾀하는 유성룡의 모습과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을 떠나 난을 피하고 싶어하고 난이 끝난 후에는 진정한 공신들을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고 처단하는 선조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사대부라는 자신들의 특권을 버리지 않고 권력에서 멀어지지 않으려는 그 알량한 사대부들의 모습과 조선조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지금도 항상 볼 수 있는 당파싸움이 그 병풍을 만들어 주고 있다.

너무 안타까웠다. 중간 중간 징비록에 나와있는 그 당시의 처참한 상황속에서도 그저 세치 혀로 당파싸움이나 하려 했던 것들이 너무나 화가 나게 했다.

약 520년 전의 임진왜란(1592)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유성룡> 결코 5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래서 역사는 반복되고 과거로 부터 배워나가는 것이다.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후, 서로 상이한 의견을 내어 놓은 대신들, 명나라에 의존하려는 조선의 왕 선조, 외교력의 부재로 인한 국가적 손실, 서로 다른 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 등이 과연 500년 전만의 일인가? 라고 물어본다.

과연 2012년 대한민국을 사는 내가 접하는 현실의 모습은 과연 위의 상황과 어떻게 다른가? 나는 딱히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러한 리더 바로 유성룡이 다시 한 번 나타나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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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에 의하면,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합리의 욕망이 있는 까닭에 세계의 뜻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세계는 인간이 알아볼 만한 아무런 뜻도 없다. 인간이 가진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합리'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것, 이러한 이율배반으로부터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카뮈의 부조리이며, 인간이 피하지 못할 숙명,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졸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습관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상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문제삼지 않는다. 그처럼 졸고 있으면 존재자의 의식일 수 없으므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부조리와 직면하여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 그것이 '반항'이다.

책의 마지막 표지를 보고, 작품설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카뮈가 29세 때, 지금 나보다 젊은 시절에 발표한 <이방인> 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라 하고 실존주의 문학이라 평한다. 그런데 부조리라는 말도 실존주의라는 의미도 나에게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실존주의 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인 것일까?
존재의 이러한 불가사의를 끝까지 질문하는 철학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실존주의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지만 그 공통점은
인간의 존재, 그것도 단독적인 개체인 나 자신의 존재에 계속 관심을 갖는 방법적 태도이다.

이방인은 한 번 읽어보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방인이라기 보다는 카뮈를 한 번 접해보고 싶어서였다.
이방인을 읽는 내내, 나는 그냥 무표정인 듯 했다. 왠지 주인공 뫼르소는 작가 카뮈를 닮고 항상 무표정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고,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아랍인을 죽이고, 재판을 받고, 그리고 사형대에도 그 무표정으로 올라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내가 있는 그대로 <이방인> 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사건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다루어진 셈이었다.
나를 참여시키지도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나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문득 나는 귀를 기울였다. "제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하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는 그런 투로 이야기를 하며, 나에 관해서 말할 때마다 '나는'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놀랐다. 나는 간수에게로 몸을 굽혀 그 이유를 물었다 ......... 나로서는 그것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놓고, 나를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고, 이를테면 그가 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방인> 의 내용의 진행과정을 보면 어머니의 죽음에서 부터 뫼르소 자신의 사형 구형이 있기까지 철저하게 뫼르소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진행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에 자고 싶어하는 뫼르소, 장례식 다음날 여자와 관계를 갖고, 재판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들 속에서 철저히 뫼르소 자신에 대한 생각을 나타낸다.

이렇게 철저히 자신의 존재만을 집중하는 것이 실존주의인가? 그렇다고 이러한 것이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 카뮈는 무엇을 말하려 하고 있던 것일까? 아직도 내 머리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누가 설명해줄 수 있는 분 얘기해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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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세월은 기껏해야 몇십 년밖에 되지 않는다. 생명은 두 번의 기회가 없는 일회적인 것이다. 그 기회는 한 번 상실하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생명은 짧고 가역성이 없고 일회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소중하고 진귀하며 신기하고 아름답다. 생명을 의미 없이 보내고 생명에 빚을 진다면, 이것은 너무도 우둔한 짓이며 죄가 된다. 돈 백원을 잃어도 마음 아파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를 잃는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작가 왕멍, 어린 나이부터 중국 혁명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중국의 살아있는 현대사라고 일컬이지는 분이다.
그런 작가가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며 정의한 것이 '나는 학생이다' 이다. 바로 배움을 자신으로 규정한 것이다.
배움은 바로 삶이며 모든 것이다. 우리의 짧은 인생을 어떻게 상실하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작가는 지나온 생활을 돌이키며 한마디씩 우리에게 조언을 해준다.

읽는 내내 무엇인가를 계속 수련하고 정진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작가의 오랜 삶의 철학과 사유가 담겨있는 글들이었다. 때로는 아직 내 나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문맥을 잘 못 잡는 내용도 있었다.
그래서 아마 책의 내용을 절반을 내가 이해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읽은 책 중에 장회익의 [공부도둑]이라는 책이 있다. 작가의 출생을 보니 왕멍은 1934년 출생, 장회익은 1938년 출생이다. 장회익 선생도 자신을 표현하는 말로 '공부도둑'이라 했다. 그러면서 책의 내용은 [나는 학생이다]와는 다른 내용이지만, 어찌보면 70세 라는 나이에 오랜 철학과 사유를 통해 뿜어나오는 그들의 말과 글은 아마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몇 년 후에, 다시 읽어보려 한다. 내가 조금 성숙했다고 생각될 때, 지금보다 조금 더 인생을 알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 책을 다시 잡으면 아마 새롭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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