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여덟 단어> 를 읽었다. 예전에 <책은 도끼다>를 인상깊게 읽어서 작가 박웅현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 <여덟 단어>가 출간된지 어느 정도 시간이 되었지만 손에 쉽게 잡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서 한 번 읽어보라는 권유도 많았고, 독서할 목록을 만들때 찾는 여러 다른 블로그나 북관련 매체에서도 <여덟 단어>를 거듭 추천하고 있었다. 안 읽을 수가 없었다. 궁금하다. 그 여덟 단어가.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목차를 펼쳐보고 지금껏 읽은 내용들은 음미해본다.

 

<목차>

1강 - 자존(自尊) : 당신 안의 별을 찾으셨나요?

2강 - 본질(本質) :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

3강 - 고전(古典)  : 그 견고한 영혼의 성

4강 - 견(見) : 이 단어의 대단함에 관하여

5강 - 현재(現在) : 개처럼 살자

6강 - 권위(權威) : 동의되지 않는 권위에 굴복하지 말고 불합리한 권위에 복종하지 말자

7강 - 소통(疏通) : 마음을 움직이는 말의 힘

8강 - 인생(人生) :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 닿은 곳에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처럼

 

작가는 인생을 대하는 우리 자세로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권위, 소통, 인생을 손꼽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내면적으로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기본적으로 충실한 자아로서 모든 것이 변화하는 것 속에서의 본질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섰다면, 그때부터는 지금 당장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충실히 경험한다. 그렇게 자신을 세운다. 자아가 성숙하고 현재의 진리를 깨달으면서 타자를 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한다.

 

'전, 견, 현재' 가 내 가슴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드는 듯 했다.

 

책을 읽으면 어느 순간 머리를 탁 치는 경우가 있다. 입에서 살짝 탄성을 자아내고, 고개를 혼자 절레절레 흔들고, 다시 한 번 글귀를 읽는다. 여러번 그런 경험을 했다. 특히 '고전' 부분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작가 박웅현은 죽기 직전에 차이코프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절정 부분을 듣고 싶다고 했다. 순간 반가웠다. 클래식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몇 달 전부터 그 곡을 습관처럼 듣고 절정 부분에서 혼자 눈을 감고 그 웅장함을 느껴본 적이 많았다. 아무것도 알지 모르는데 좋다. 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그가 소개하는 음악들을 하나하나 내 클래식 어플의 My 앨범에 추가시켜가면서 들어보면서 글을 읽었다.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가야금 캐논,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를 위한 소나타>을 들었다. 특히 그중에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은 잔잔하면서도 차분하면서도 웅장한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아직은 클래식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들으면 좋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알고 싶다. 본질을 알기위해서 조금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p81

이처럼 지금 현재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시대 사람과의 본질적인 교감이 있다면 우리 인생은 더 풍요롭지 않을까요?

 

그렇다. 지금이 물질적으로는 과거보다는 분명 발전했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과연 그럴까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남긴 책과 그림과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같이 살 수 있을 기회는 못 가졌지만 그 시대를 느끼지 못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고전' 편에서는 작품을 그대로 느끼고 감동할 수 있는 기쁨과 그 기쁨을 알고 난 후에 더 깊이 알려는 의지가 생겨나는 것을 배웠다면 '견(見)' 에서는 부족한 감수성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일상을 일상적이지 않게 바라보는 모습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은 그 자체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작가 박웅현을 이 시를 읽고 난 후 부터 좋아하던 간장 게장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안도현,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이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읽고 나서 많이 아프다. 사람들이 자주 먹는 게장을 시인은 그렇게 바라본다. 그냥 보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본다. 감정을 파고드는 범위가 단지 주변사람에 그치는 보통사람과는 다르게 다른 생명체와 사물에 까지 확장되어있다. 그냥 보지 않는다.

과연 어떻게 보는 것이 제대로 보는 것일까?  영화 <시>에서 김용탁 시인 역을 맡은 실제 김용택 시인은 작중 어머니들에게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p116

"여러분, 사과를 몇 번이나 봤어요? 백 번? 천 번? 백만 번? 여러분들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예요. 오래오래 바라보면서, 사과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뒤집어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보고, 사과의 스민 햇볕도 상상해보고, 그렇게 보는 게 진짜로 보는 거예요.

 

앞으로는 무엇인가를 볼 때, 좀 자세히 그리고 깊이 봐야겠다. 그래야 온전히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느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어린 아이들이 단어를 배울 때, 그림을 보고 '사과' 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리라. 사과를 보면서 군침을 흘리기도 하고,  색과 향을 느끼고 달려있는 나무도 알아보면서 깊이 알아야 겠다.

 

'견(見)'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주제가 바로 '현재'다. '견(見)'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집중적으로 보는 것이라면 '현재'는 지금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다. 그 온전히 살아냄은 박웅현의 개에 대한 철학이 무엇보다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p134

개들은 잘 때 죽은 듯 잡니다. 눈을 뜨면 해가 떠 있는 사실에 놀라요. 밥을 먹을 때에는 '세상에 나! 나에게 밥이 있다니!'하고 먹습니다. 산책을 나가면 온 세상을 가진 듯 뛰어다녀요.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자요. 그리고 다시 눈을 뜨죠. '우와, 해가 떠 있어!' 다시 놀라는 겁니다. 그 원형의 시간 속에서 행복을 보는 겁니다. 순간에 집중하면서 사는 개, 개처럼 살자. 'Seize the Moment, Carpe diem (순간을 잡아라, 현재를 즐겨라)' 의 박웅현 식 표현이자, 제 삶의 목표입니다.

 

길지 않은 책에 작가 박웅현은 많은 걸 담아주었다. 다 읽고 나서 존경하는 선생님, 선배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편안하면서도 묵직함이 다가왔다. 나는 작가 박웅현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책은 도끼다>는 나의 독서에 큰 변화를 준 선생님이었다면, <여덟 단어>는 인생에 있어서 생각하고 있었으나 어떤 것일까 명확히 잡히지 않았던 것들을 차근히 설명해주셨다. 이 한마디로 글을 마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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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뭐가 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직업의 선택은 삶을 살면서 결정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하루의 절 반 이상을 일터에서 보낸다.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도 직업에 따라서 변화되어 가기도 한다. 한 번 선택한 직업은 쉽게 바꾸지도 못한다. 감당해야 할 위험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선택인 직업을 과연 나는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앉게 되었는가? 잠시 뒤돌아 본다.

 

5살 아들에게 가끔 물어본다. "나중에 크면 뭐가 되고 싶어?" 대답은 다양하게 나온다. '공룡, 선생님, 또봇, 풍선 ...'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고등학교 1학년인 나에게 물어본다. "너는 뭐가 되고 싶니?"  대답이 없다. 되고 싶은 게 뭔지를 모른다.


고등학교 1학년 말에 문과, 이과를 선택해야 한다. 당연히 이과에 가야된다고 생각했다. 수능시험을 보았다. 이제 대학에 가야 한다. 내가 어떤 것을 하고 싶을까 하면서 관련된 과를 찾아보았을까? 특별히 하고 싶은게 없으니 가고 싶은 과도 정해진 게 없었다. 고3 담임선생님과의 상담도 학과 위주가 아닌 그 점수로 갈 수 있는 더 나은 학교를 찾는 것이었고, 그렇게 이과를 나온 나는 당연히 공대에 들어갔다.

대학교에 오니 고등학교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수업은 의미가 없었다. 그저 친구들이랑 만나서 술먹고 노는게 전부였다. 마치 고등학교에서 저녁내내 공부했던 거에 대한 보상인 듯이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건설적인 대학생활 같은 건 없었다. 동아리방에서 친구들이랑 이야기하고 술먹고 운동하는게 전부였다. 지금은 이런 생활도 그립지만...

 

군대에 갔다오고, 3학년 2학기, 4학년이 되니 이제는 걱정이다. 취업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남들처럼 취업준비를 했다. 취뽀에 가입하고 이력서를 쓰고 채용 공고가 뜬 이른바 대기업에 원서를 쓰고 기다렸다. 회사에 취직해서 어떤 일을 해야 겠다는 목표는 없다. 그저 일단 대기업 취업이 목표였다.
그리고 입사를 하고 6년째를 보내고 있다.

 

아마 위의 글을 읽은 누군가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 이거 내 얘기 아니야."
뒤돌아보면 나는 분명히 열심히한거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그저 주위에 휩쓸려서 갈 뿐이지 나의 주체적인 선택은 배제된 것이다.
지금은 이런게 너무 아쉬워 이제부터라도 무엇인가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게 없을까 하고 찾아보려고 조금의 노력은 기울인다. 다시는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가 않다.

다시 한 번 물어본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아직까지도 막연하다. 하지만 지금 대답할 수 있는 정도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싶다." 라는 정도의 대답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누군가와 무엇인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한게 나름 장하다.

 

# 엄기호의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학교와 교사들의 생활을 엿보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만난 책이 있다. 엄기호의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이다. 가르치는 직업의 대표격인 교사는 모두들 학생의 입장에서 경험했고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고등학교 때로 뒤돌아보니 지금의 시선과 그때의 시선으로 본 학교, 교사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는 알게 되었다. 책 속에서 등장하는 선생님들의 입장에 내가 직접 서보니 당황스럽고 화가 나기도 하고 가르치는 입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생겼다.


엄기호의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를 읽고 난 후의 생각을 표현하자면 '답답하다' 이다. 내가 몰랐던 문제들에 대해 가득 풀어버리고 떠나버린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단지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생, 교사, 학부모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상황과 그 속에서 발생되는 교육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시련이 드러난다.

[학생과 교사]
고등학교에서는 학생과 교사와의 관계는 철저하게 입시위주로 재편되어간다. 입시를 포기한 학생들은 교사와 관계를 유지하려 하지 않는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도 입시에 필요한 과목에 대한 교사와 관계를 유지할 뿐 기타 과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를 바란다. 학생과 교사는 암묵적으로 No Touch 를 원한다. 입시만이 아닌 학생들의 교육을 위하는 교사들은 이런 환경에 대해 극복하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교사와 학생들과의 관계 설정의 범위 또한 교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는 경우도 많이 있다. 특히 가정폭력, 성폭력 등과 같이 교사 역시 경험하지 못한 사항에 대해서 상담하는 경우에는 교사 역시 참담함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사가 어느 정도 개입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관련 분야에 대한 전문가를 통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된다, 아직까지는 교사에게 어느 정도 책임을 돌리는 듯 하다.


[교사와 교사]
학생과 교사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날 경우 교사 개인이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상당하다. 그런 정신적 스트레스는 동료교사들과의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교무실에는 그런 소통이 단절되어 있다. 매 년 학년이 바뀔 때가 되면 일부 교사들은 담임을 맡지 않으려고 한다. 담임을 맡는다는 것은 학생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인데 관계를 맺게 되면 일로 이어진다는 생각때문이다. 퇴근시간이 되면 일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이 있는 교사들은 때로는 자기가 기획한 수업방식을 도입하거나 현장학습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동료교사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받는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해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전적으로 그 교사가 책임을 지어야 한다. 결국 몇 년이 지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교사들이 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교사들은 과도한 업무와 책임이 누적되어 버리고, 정신적 스트레스 또한 학교 내 동료교사가 아닌 정신과병원이라던가 전문상담기관에 방문해서 풀어야 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교사와 학부모]
교사들이 하는 일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에 관한 것과 학생들의 생황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돌봄'으로 나뉘어진다. 둘 중 우선순위를 두기는 의미가 없겠지만 교사는 분명 가르치는 사람이기에 '교육' 이 우선일 것이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점점 '교육'에 대한 것은 자기네가 알아서 할테니 '돌봄'에 대해서만 신경써달라는 암묵적인 요구를 해온다. '교육'은 학원, 과외 등 공교육이 아닌 사교육으로 알아서 할테니 애들 사고나 치지 않게 잘 돌보라는 뜻이다. 학부모과의 관계 형성이 이렇게 되면 어떻게 가르치는지에 대해서는 무신경하더라도 자녀가 학교내 사건에 휘말릴 경우에는 교사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으려고 한다.

'돌봄'이 주된 업무가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직장에 다니다보면 퇴근을 하게 되면 직장생활과 다른 나만의 생활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교사가 '돌봄'을 주된 업무로 하게 되면 하루 종일 학생들에게 신경써야 하고, 문제가 생기면 저녁 늦게라도 학교로 뛰쳐 들어가야 한다. 내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 부분은 정말 힘든 부분이라 생각한다. 교사들도 가정이 있는데 이런 생활은 교육에 대한 부담감 이상이 될 것이다.


[교사와 교육시스템]
교사의 주된 업무는 '교육'이어야 한다. 하지만 교사가 자신의 과목에 대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교육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교과 개발이 필요한데, 그럴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그들이 교과 개발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방학이라고 한다. 평소에는 할당된 과목을 가르치고, 남는 시간에는 상급기관에서 내려오는 여러 업무는 처리하는데도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고 한다. 학생들과의 상담도 퇴근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루어질 수 있는게 현실이라고 한다.

 

상급기관, 학부모, 학생들은 이런 일들의 중심에 모두 교사를 두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교사를 추궁한다.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사가 현명한 판단을 한 것이 된다.. 이럴 때 필요한게 시스템이다. 교사들이 모든 것을 처리하게 하는게 아니고 일부 업무는 시스템에 의해 처리되게 해야 한다. 앞서 학생과의 관계에서 이야기 했던 가정폭력, 성폭력 같은 경우에 교사들이 아닌 전문 상담 기관과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과 입시는 항상 풀지 못한 숙제이지만, 교사가 어떤 창의적인 안건을 내어서 실행하다가 실패하거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 그런 구조와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 교사, 학생, 학부모가 두렵지 않은 학교를 위해서

 

두렵지 않은 학교를 위해서는 교사를 중심으로 한 학생, 교사, 학부모, 교육관계자들과의 관계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 바우만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는 세 가지 수준에서 신뢰가 붕괴하였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신뢰, 타자에 대한 신뢰, 제도에 대한 신뢰'


이 책에서는 작가가 생각하는 남다른 해결책 같은 것은 없다. 단지 지금 현재 이런 현실이니 함께 공유하고 알고 있자라는 의도인 듯 하다. 모든 문제의 해결의 시작은 끊임없는 사실의 공유와 문제제기다. 그 끊임없음이 시작입니다. 관계의 회복은 신뢰의 회복이다. 신뢰의 회복을 위해서는 자기 자리에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한 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거 같다. 나 역시 할 말은 딱히 없다. 지금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고 관심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말만 덧붙일 뿐이다.

단지 원하는 것은 지금 학생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으니?' 라고 물었을 때 아이들이 그것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
15년 전에 꿈도 없이 원하는 것도 없이 대학을 선택하고, 6년 전에 꿈이 아닌 남들이 하기 때문에 하는 취직을 했던 내 자신이 아쉬워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스스로 꿈을 찾을 수 있는 그런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

p292
바우만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세 가지 수준에서 신뢰가 다 붕괴하였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두 번째는 타자에 대한 신뢰, 세 번째는 제도에 대한 신뢰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기 자신조차 믿지 않으며, 자신이 속한 제도가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도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만 자기 주변에 배치하려고 하며 모르는 세상과의 접촉을 될 수 있는 한 끊으려고 한다. 제도와 타자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불신할 때, 안전을 위해서 자기가 자신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자기 단속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개인들은 침묵함으로써 스스로를 세계와 단절하여 고립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취향만 남게 된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감시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강도가 강해질수록 사람들은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집착한다. 취향이 같거나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상받으려는 것이다. 이른바 '사교'만 남게 되었다. 이 시대가 가진 취향과 사교에 대한 강박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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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사교과서 채택과 관련된 뉴스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보통 정규교육을 받은 이후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 나라의 역사를 찾아보거나 배우지 않는다면, 일반 대중이 가지게 되는 역사 인식과 지식은 중고등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국사교과서가 밑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일반 대중의 인식은 그대로 그 사회에 반영되며 그 기간이 비판없이 지속된다면 그것이 다시 역사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국사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우리 나라에서 발생한 비극적이고 끔찍한 집단학살이 일어난 '제주4.3사건'에 대해서 얼마 전에 읽게 되었습니다.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해야할 사건이라고, 그런데 그 이름만 들어보았지 실제 어떤 일이었는지는 알지 못했고,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쉽게 다가오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한겨레출판의 <대한민국 잔혹사>에 요약된 글귀를 먼저 소개합니다.

 

1947년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행사에서 경찰이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4.3 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 발포에 항의해 총파업을 벌이는데, 미군정은 이를 조사하면서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열두 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된다.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이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사건 발생 후 50여 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2003년 10월 말 노무현 대통령이 이 사건과 관련해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 한겨레출판, <대한민국잔혹사>

 

1910년에 국권을 빼앗긴 후 35년 만에 맞은 해방은 모두가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안타까운 점은 자체적인 힘이 아닌 타의에 의한 해방이기에 우리 스스로 하나된 나라를 만들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1948년 4.3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도 우리의 이 역사적 모순이 하나의 큰 원인이었습니다.

 

p 64

미국과 소련이 개입한 가운데 통일국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분단국가로 갈 것인가를 두고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남한만이 단독선거인 5.10 선거 강행을 결정했고, 정국은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김구, 김규식 등 민족 지도자들도 단독선거 반대에 나섰다. 그러나 미군정 수뇌부는 당시 이 격동하는 냉전의 흐름 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들고 나온 이승만을 선택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단독 선거를 치러내는 것이었다.

 

결국 남쪽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북쪽 역시 9월 9일에 정부가 수립됩니다.

남한은 미군정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고, 미군정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일제시대의 경찰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역사의 뼈 아픈 장면입니다.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몸 담았던 이들을 신분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철저하게 숙청하고 무엇보다도 과거청산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철저하게 청산되어야 할 일제시대의 경찰이 오히려 다시 기득권 세력으로 등장하고, 수십년 간 그 권력은 공고히 다져져 맥을 이어갔습니다.

 

다시 총칼은 좌우대립, 색깔논쟁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민중을 향하게 됩니다.

<제주4.3을 묻는 너에게>를 읽으면서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고, 분노가 일어나고, 속이 메스껍고, 한숨이 나왔습니다. 2003년 10월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서 내놓은 <제주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를 근거로 작성한 이 책에서 당시 사람들의 증언은 글로 표현하기에도 너무나 끔찍하고 힘든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당시의 무차별한 학살과 끔찍한 고문에 대해서 책의 내용을 잠시 전합니다.

 

그 전에 그들이 이렇게 학살되고 끔찍한 고문이 자행된 이유는 그들을 좌익사상에 물든 빨갱이라고 단정지은 당시의 미군정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고한 민중들 당시 제주도민의 1/10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한 많은 죽음이었습니다.

 

p118

네 남편이 산에 갔다. 동생이 갔다. 형이 갔다. 심지어는 사위가 산으로 갔다 해서 희생당했다. 도피자 가족 수용소가 있던 세화리에서는 젖먹이도 빨갱이라며 젖을 주지 못하도록 한 경우도 생겼으며, 도피자 형이 있다고 해서 한 초등학생을 수업 도중 데려다가 총을 쏘았다. 순간 담임선생은 모두 일어서게 해 묵념을 했다고 살아남은 자는 증언했다.

 

p166

그러한 토벌대의 잔혹한 학살 현장에 있었던 당시 서른 살의 엄마 양복천, 초등학교 2학년 열 살 아들이 그녀의 눈앞에서 속엣것 다 토해내며 죽어가는 것을 봐야만 했다. 총상 입어 우는 딸에게 울면 발각된다고 울지도 못하게 했다던 그녀. 양복천 할머니의 이야기다.

 

p175

토산리 창고 부근에서도 총살이 있었는데 사람들을 모아놓고 구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총살할 때 박수를 치라고 했습니다. 총살 때 아기가 폴폴 기어서 위로 올라가니까 아기에게도 총을 쏘았습니다.

 

p192

"올레 마당에 있는 큰 나무에 묶어서 엄마는 죽여버리고, 두 살 난 아기는 감나무 기둥에 묶어가지고 막 이렇게 죽여버리는 것을 똑똑히 봤다."고 했다.

 

이런 증언들은 바로 조사 당시에 증언자들이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그래도 밝혀야 한다고 기억해야 한다고 뱉어낸 쓰라린 기억들이었습니다.

위의 증언들을 보면서 당시 상황이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부녀자, 어린 아이들, 임산부들에게 행했던 끔찍한 일들은 차마 글로도 표현하기 어려워서 이 글에는 제외시켰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어떻게 이런 사건을 지금껏 알지 못하고 있었을까? 하는 부끄러움과 함께 기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주4.3은 2003년 위원회의 조사에 따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있었으며, 4.3평화공원조성사업이 진행되어 2008년 3월 28일에 개관하였습니다. 또한 2014년부터 4월 3일을 '4.3 희생자 추념일'로 하여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였습니다.

 

올해가 제주4.3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첫해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픈 기억을 온전히 기억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조사들을 끊임없이 진행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아픈 것을 기억해야하는 것의 중요성을.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반성하고 또 기억해야 함을 기억합니다.

 

p239

 

두 아들을 가슴에 묻고 평생 가습병을 앓다 간 할머니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지. "오직 양심 하나 믿고 살았수다. 우리야 시대를 잘못 만나 이렇게 살았수다. 우리 자식들 세대는 절대 이런 일이 있어서 안됩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당신 자신이 그해 그날의 비극을, 상처를, 죄없는 모든 죄를 다 쓸어안고 가겠다는양, 살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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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 그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모자를 삼킨 보아뱀' 인가요.

<어린왕자>에서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으로 이 역시 쉽사리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합니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저 그림을 보면 자연스레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어린왕자> 속에서 나오셔야 합니다. 각자 만의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어떤 질문에는 분명히 답이 존재하고 그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일치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갈등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획일적인 사고가 굳어집니다.


하나의 답만 있는 경우, 만약 그 답이 틀리면 그 답을 섬기고 따라가던 사람들이 모두 오류의 낭떠러지에 설 수도 있습니다. 이때 단 한 사람이라도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면 함께 망하는 길은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림에 대한 각자 만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의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이 그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듯이 우리는 질문을 이어가야 합니다.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탈레스는 새로운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철학의 개척자'로 평가받습니다.

그때까지는 "이 세계를 '누가' 만들었을까?" 하고 물었죠. 그런데 탈레스는 "이 세계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하고 묻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세계를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답을 제우스나 하느님이라고 했죠. 그런데 '누가'가 아니라 '무엇'이라고 물으면 답이 달라지죠. 답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는 생각하는 방향과 대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의 발걸음들이 모여서 결국 '원자론'을 제안하는 것에 이릅니다. 현대물리학의 중요한 가설이기도 한 원자론이 바로 탈레스로부터 시작된 질문에서 나왔다는 점이 신기하지 않나요?


플라톤은 이러저러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를 물었고, 근대 철학을 정초한 데카르트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라고 물었죠. 칸트는 '우리는 어떤 조건에서 알 수 있는가?'를 물었고, 니체는 '선과 악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누가 만들었는가?'를 물었죠. 이런 질문들이 철학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꿔 놓은 질문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철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까?


철학에 대해서 관심이 조금 생겼는데,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대학 때 교양으로 <서양사상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었었는데, 그 당시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계몽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배운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수업을 잘 못 신청했구나.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여전히 어떤 사상가로 시작해보려는 시도는 하지만 앞에 몇 장 읽다 보면 '아직 힘들구나!' 하는 자괴감에 빠집니다. 


아직은 철학책이 저에게는 히말라야 같은 높은 산입니다. 연습이 필요합니다. 근처의 낮은 산을 한 번 올라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철학에 입문하기 좋은 책은 어떤 것이 있을까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찾은 것이 피노키오의 철학 <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 입니다. 전체 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철학자 위주로 설명하기 보다는 특정한 주제를 설명하면서 여러 철학자들의 이론을 등장시키면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살짝 개괄하면서 다리 근육이 보이지 않지만 조금씩 생기듯이 그렇게 책력이 조금씩 쌓이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지 한 번 해보자. '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쉽게 어떤 분야로 관심을 쏟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동시켜주는 책을 만나면 정말 행운입니다. 저는 그런 책을 'Trigger Book' 이라고 부릅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달과 6펜스>는 화가 고갱에 대한 소설인데, 책에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고갱에 대해서 관심이 생기고 그의 그림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는 <달과 6펜스> 처럼 다른 분야로의 Trigger는 아니지만 질문 속에서 철학으로 확장시켜주는 그런 책입니다. 


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하고, 프로이트의 의식, 무의식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이 됩니다. 과학적 명제로서 귀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플라톤의 이데아에 의문점을 남깁니다.


아직은 철학에 대해서는 감이 제대로 잡히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접근하고 알아갈지는 그저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렵게 얻은 것일 수록 더 오래 남고 소중하게 간직된다는 점을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했으니 저 역시 그 방법으로 시작해야 겠네요.
'어떻게 하면 철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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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다. 임금 문


역사에는 만약은 없다고 한다. 만약은 없지만 그래도 너무 아쉽다. 문종의 이른 죽음이...

우리는 흔히 문종하면 특별한 업적이 없고 병약한 조선의 임금으로 기억하기 쉽다. 사실 문종은 준비된 임금이었다. 세자 시절부터 이미 성군으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길렀으며 세종 대 후반에는 실질적으로 임금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여러 치적들을 쌓아올렸다. 


안타깝게도 세종과 소헌왕후의 잇따른  국상으로 세자는 몸이 쇠약해졌다. 하지만 39살의 나이에 돌연 병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종의 급작스러운 죽음에는 의문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당시 어의였던 '전순의'의 처방은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으며, 처방에 대한 의견은 당시 대신이었던 김종서 등과 의논하지 않고 수양대군과 의논하였다.

과연, 문종은 병에 의한 병사였는가? 아니면 동생 수양에 의한 타살인가? 의문이 남는다.


결국, 39살의 이른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문종의 뒤를 이은 단종은 당시 12살이었다. 단종은 그저 어리고 힘없는 왕이었다. 그에게는 수렴청정을 할 대비조차 없었다. 그리고 권력의 야심을 가지고 있는 수양이 있었다. 믿을 수 있는 건 김종서 뿐이었다. 하지만, 김종서 또한 난을 막지는 못한다.


p178

세종이 사망하기 전 7년 간은 사실상 세자 향이 임금 역할을 대행한 셈이었다. 세종 대 후반의 여러 치적들, 즉 세종 26년의 전분6등, 연분 9등의 전세법 제정이나 27년의 <용비어천가>완성, 28년의 훈민정음 반포 등의 치적은 사실상 세종과 문종의 공동 작품이다. 세자는 신병이 있는 세종을 대신하여 건원릉에 행차해 별제를 거행하는 등 사실상 국왕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역사의 후퇴, 계유정난


조선의 2대왕인 태종과 계유정난의 주역인 수양대군은 많은 면에서 유사하지만 다르다

둘은 모두 적장자가 아니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야심은 있었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왕권에는 오를 수 없는 인물들이었습니다. 태종이 1차, 2차 왕자의 난을 통해서 형제들을 숙청하고 당시 조정의 주역인 정도전마저 제거한다. 수양 역시 왕위에 오르면서 동복형제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죽인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은 부모도, 형제도, 자식조차 없나 보다.


태종은 즉위하고 나서 철저하게 왕권강화에 나서고 당시 주요세력이었던 공신들과 외척들을 철저하게 배쳑한다. 이는 개국 초기의 기반을 다졌고, 공신들의 나라에서 훗날 세종의 부흥기를 위한 초석을 마련합니다. 이렇게 다져놓은 기반은 불과 얼마만에 세조에 의해 공신들의 나라로 변모한다.


당시 상황을 보면 1만 명이 넘는 공신과 그 가족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심지어 공신들은 살인을 저질렀어도 사면되어지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관직은 공신과 관련된 자가 아니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쉽지 않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정난으로 옛 동료들의 부인과, 딸, 심지어 어머니까지 공신들이 차지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P315

한명회는 이들 역사, 즉 무뢰배들과 함께 문을 지켜 섰다. <종각잡기>에는 이때 한명회가 <생살부>를 들고 있었다고 전한다. <살생부>라고도 불리는데 <살조>에 이름이 올랐으면 죽고, <생조>에 이름이 올랐으면 살아서 이 문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대신들의 목숨이 일개 궁지기에 달려 있는 상황이 되었다.


P321

수양 측은 이날 밤의 쿠데타를 단종1년(1453) 계유년에 발생했다는 이유로 계유정난이라고 불렀다. '정난'은 국가의 위태로운 난리를 평정했다는 뜻이다. 어차피 이긴 자가 붙이는 이름이었다.


p362

옛 동료들의 부인과 딸, 심지어 어머니까지 차지한 공신들의 행위에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는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학을 정면에서 부인한 행위였다. 성인을 추구하는 유학을 거론할 것도 없었다. 최소한의 인간적 양식만 있어도 할 수 없는 행위였다. 체제를 거부하는 유학자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공신들은 이미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조선 중기 윤근수는 <월정만필?에서 "신숙주가 노산군(단종)의 왕비 송씨를 받으려 했다"고까지 적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때 국모로 모셨던 여인을 달라고 요청했다는 뜻이 된다.



사육신과 생육신


계유정난은 명분이 없는 왕위찬탈이다. 수양대군이 왕권을 차지하면서도 끊임없이 단종의 복권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명분이 없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관직에 나서지 않는다. 역사와 관련된 드라마나 책을 읽다보면 항상 나오는 부분이 바로 명분쌓기다.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꾸며서라도 명분을 만들어야 하는게 정치다. 세조가 수양대군이 왕권을 차지하고 나서 집권하는 과정이 모순될지라도 올바른 정치를 해나갔다면 아마도 사육신과 생육신이 이렇게 까지 알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아쉬움에 더욱 사육신과 생육신을 기억하려고 애쓰는지 모른다.


사육신의 닩종 복위 운동 당시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목숨을 끊은 사람은 70여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6명을 특별히 '사육신'이라고 기리게 된 것은 이른바 '생육신'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지는 남효온이 <추강집>에 수록된 '육신전'에서 이들 여섯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긴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사육신은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배되었고, 사대부들은 그들의 신원을 조정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성종 때에는 그들의 후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금고된 것을 풀어주었으며, 숙종 때인 1691년에는 사육신 6명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민절서원을 지어 이들의 위패를 안치하였다.


생육신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에 대비하여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았지만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사람들로,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이다. 사육신이 절개로 생명을 바친 데 대하여 이들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또는 방성통곡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하였다.

                                                                                                     - 두산 백과 -



동강은 단종을 기억하며 잔잔히 흐른다.



▲ 단종의 유배지 영월


어린 단종에 대해서는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단종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속에서 고작 12살의 나이로 등극하였다. 12살이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린 나이다. 심지어 그에게는 수렴첨정해 줄 대비조차 없었다. 피붙이라 할 수 있는 숙부들은 권력투쟁의 한 가운데 서있었고,  백종조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역시 단종 곁에는 없었다.


어쩌면 왕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을 맞이했다. 
단종의 죽음을 기억할지 모르는 동강은 오늘도 천천히 흐른다. 동강에는 아프고 잔잔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흐른다.


p370

신숙주는 "이유(금성대군)가 또 노산군을 끼고 난역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노산군도 편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단종의 사형을 선창했다. 정인지도 "노산군은 반역을 주도했으니 편안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가세했다. 임금으로 섬겼던 인물을 죽이라고 주창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양녕, 효령대군이 가세했다. 세종가의 골육상쟁을 즐기던 두 대군은 "속히 법대로 처치하소서"라고 단종의 사형 주청에 가담했다. 세조3년(1457) 10월 21일 단종은 결국 천명을 보존하지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나이 열일곱, 재위에 있은지 3년 2개월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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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의 사모뿔을 빌립시다."


수양대군이 해가 저물어 김종서의 집에 들려서 사모뿔을 빌리자 한다. 그리고 잠시 틈을 타 가동 임어을운이 감추었던 철퇴로 김종서의 머리를 내리쳤다. 


p319

향년 70세, 태종 5년 식년과에 합격해 진사로 벼슬에 나온지 48년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고 태종, 세종, 문종, 단종 네 임금을 섬긴 '훈로'가 비참한 생을 마친 것이었다.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며 북방을 개척한 대호, 아내의 장사도 다 치르지 못하고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 평안도로 떠났던 인생이 이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김종서의 죽음은 그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종의 죽음이자 그가 섬겼던 세 임금, 즉 태종과 세종, 문종이 만들어놓은 정상적인 헌정질서의 죽음이었다. 


김종서는 문관이었지만 '대호'라고 불리워졌으며 아직도 논란이 있지만 조선의 북방강역을 넓힌 인물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에게 주어지는 역사편찬을 맡기도 한다. 그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마치지 못했으나 <세종실록>의 편찬에 앞장선다. 김종서는 향년 70세까지 관직에는 48년동안 있으면서 그야말로 조선의 숨겨진 기둥이었다. 몽골군 침입이 예상되어 북방으로 출전할때 그의 나이는 67세이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다.



김종서, 북방강역을 넓히다. 4군 6진의 개척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4군 6진은 위의 지도에서 표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4군 6진의 개척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지도 모양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세종 때 북방 개척의 영웅은 국왕 세종과 문신 김종서, 무신 최윤덕과 이징옥 이 네 사람이었다. 

이 당시 북방 개척의 범위는 공형진이라는 부분까지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공험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공험진은 고려시대 윤관이 여진족을 무찌르고 개척한 9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다. 윤관은 공험진의 선춘령에 '고려지경' 이라는 비를 세웠다. 고려의 땅이라는 경계비를 세운 것이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우리의 땅이 공험진과 선춘령에 미친다고 생각해왔다. 문제는 공험진이 현재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공험진이 두만강 이북 700리에 위치해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조선 후기 일부 학자들과 일제 식민사학자, 그리고 중국은 동북공정의 근거로 길주 이남 함흥평야까지 축소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은 하륜에게, 세종은 김종서에게 이 비석을 찾아볼 것을 명했다. 이 비석이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면 공험진의 위치를 갖고 논쟁할필요도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비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인식의 시초는 조선 중·후기 한백겸(1552~1615)이 <동국지리지> 동계조에서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00리가 아니라 길주 남쪽에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 시초였다. 하지만 한백겸 이전으로 돌아가면 조선의 강역은 두만강 북쪽 700리의 공험진까지가 된다.


동쪽은 큰 바다에 임하고, 남쪽 경계는 철령이며,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했는데, 높은 봉오리가 백두산에서부터 기복하여 남쪽으로 철령까지 뻗쳐 1,000여 리에 걸쳐 있다. 북쪽은 야인(여진족)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 철령으로부터 북쪽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1,700여 리이다.            -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이 문제는 현재도 대단히 예민한 문제이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간도는 지금 사람들에게 점차 잊혀져가고 있다. 당연히 우리의 인식에서 배제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일제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민초들의 삶의 장이었다. 간도에 대해서는 한 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북방개척, 김종서 개인에게는... 


북방개척은 분명 조선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김종서의 삶의 태도로 보아서는 그에게 조선의 일은 아마 그의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는 잃은 게 너무 많지 않나 생각해본다.


 당시 북방으로 나가는 장수들에게는 가족이 동행할 수 없었다. 만약 난이 일어날 경우 가족을 먼저 챙길 우려가 있어서 동행 자체를 금지한 것이었다. 김종서는 병약한 노모와 아내 그리고 어린 아이들을 두고 오랜 시간 동안 조선의 북방을 위해서 살아갔다.


김종서가 북방에 있을때 그의 노모가 죽게된다. 당시 사대부의 장례법은 3년 동안 부모의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100일 후에 다시 임소로 돌아가라는 영을 내린다. 북방을 맡길 사람은 김종서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웠으나 조선을 위해서는 한시라도 북방을 김종서 없이 비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4년 후, 김종서는 아내가 위독하여 그의 나이도 쉰여섯 살이 되어 세종20년(1438)에 사직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세종은 윤허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아내를 잠깐 위로하고 떠날 뿐이었다. 조선의 북방이 튼튼해질수록 아마 김종서의 마음은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문인으로서의 김종서


아마 어떤 이는 김종서를 무인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보통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때 김종서하면 4군 6진, 북방개척이다. 하지만 김종서는 본래부터 문관출신이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영성균관사로서 성균관을 총괄했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마치지 못한 <세종실록> 편찬을 주도했다.


p139

김종서가 유학자라는 김돈의 평가는 김종서의 인격에 대한 것이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세종 또한 김종서를 유신으로 불렀다. 조선시대 유신이란 표현은 학문과 수양이 갖추어진 문신들에게만 사용하는 칭호였다.


p186

성균관은 지방 향시에 급제한 진사, 생원들이 대과를 보기 위해 숙식하며 공부하는 곳이었다. 정3품 대사성이 관할했으나 정1품 대신 중에서 영성균관사가 총괄했는데, 김종서를 영성균관사로 임명해달라는 청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모인 집단은 예나 지금이나 현실 비판적인 법이다. 특히 선비를 자처하는 조선의 젊은 선비들이 공동 상언에서 김종서를 '태산북두'로 표현하며 영성균관사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한 사실은 김종서가 당시 젊은 선비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p198

세종은 김종서에게 <고려사>를 편찬토록 명한 것이다. <고려사> 편찬을 명령받은 김종서는 기존에 사용되어 왔던 날짜별 기술인 편년체는 고려시대 전체를 조망하고 평가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서 <사기>와 같이 기전체로 <고려사>를 편찬했다. 


또한 고려사의 중요 사항만 연대별로 정리하는 편년체 사서인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여 뜻을 강조하는 기전체<고려사>와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를 보면서 많이 놀랐다. 첫번째는 문신이었지만 문무에서 모두 아주 탁월함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세종은 김종서 이후의 북방관리자들에게 '북방에 관련된 일은 먼저 김종서와 논하라.' 고 할 정도로 북방의 전문가이자 대호라고 불리우는 무신이었다. 반면에 문신으로서도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에게 주어지는 역사편찬을 맡고 흔들리지 않는 소신으로 국정을 주도했다. 그래서 훗날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수양대군에게는 첫번째 제거대상이었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은 예전에 한 번 읽고 다시 읽고 있는 중이다. 올해 한 번 조선시대에 대해서 알아보겠다고 하나씩 살펴보고 있다. 한 번 읽은 책이지만 정리를 해두지 않으니 다시 읽는데도 마치 처음 읽는 듯 했다. 

지금까지는 김종서가 편찬한 기전체인 <고려사>처럼 사건 중심 역사를 알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인 시야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일단은 개별적인 사건 중심으로 한 번쯤 개괄하고 나중에 이들을 편년체 형식인 <고려사절요>처럼 하나씩 이어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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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KBS의 개그콘서트에는 '감수성'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감수성'의 나래이션을 보면 '동쪽의 오랑캐가 쳐들어와 평양성, 북한산성,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이제 남은 성은 감~수성' 이렇게 나온다. 노래가 마치면 신하들의 어처구니 없는 말들이 나온다. 그리고 청나라 병사가 등장한다.

그때는 그저 생각없이 들었던 나래이션이었다.  그런데 이제와보니 그저 웃고 넘길게 아니었다.


◆ 병자호란(1636)


병자호란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광해군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해군 때, 후금이 세워진다. 후금의 세력은 점점 더 강성해지고 조선과 명나라는 임진왜란(1592)으로 너무 지쳐서 쉽게 견제할 수 없었다. 그 사이 후금은 세력이 커지고 비옥한 땅을 위해 명에 진출을 한다. 이에 명나라는 후금과 전쟁을 시작하고 조선에게 도움을 청한다.

당시 조선의 국왕인 광해군은 명에 대한 적극적 지원이 아닌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정책을 취합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강대국 사이에서의 중립을 지키려는 정책이었으나, 재조지은이라 하여 '명이 임진왜란 당시 망해가던 조선을 다시 세워주었다'를 강조하며 명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은 광해구네 대해 반기를 드는 세력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왕위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리고 명나라에 군을 지원해준다. 이를 계기로 청은 정묘호란(1627)을 일으킨다.


청은 조선에게 형제의 나라로 지내겠다는 약조를 받고 물러난다. 하지만 세력이 커진 청은 형제가 아닌 신하의 예를 지키라고 했고 조선은 평소 야만족이라고 여기던 청이 신하의 예를 지키라는 요구를 해오자 그 요구를 무시한다. 그리고 병자호란(1636)이 발생하게 된다.

◆ 병자호란(1636)은 질 수 밖에 없었다.


병자호란은 당시 청나라의 강성한 힘과는 별도로 하더라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당시 조정은 청군이 언젠가는 침략할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북부 지역에 산성을 정비한다던가 병사를 늘린다는가 하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반면에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왕이 피해갔던 강화도에는 군사를 늘리고 산성 정비를 하였다. 당시 국왕인 인조는 전쟁이 일어나자 두려운 나머지 그저 강화도로 피하기만을 생각한다. 


인조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세력에 의해 집권한 왕으로 척화파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척화파는 변화하는 청에 대한 정보 수집은 하지 않고 단순히 배척하기 바빴다. 

전쟁과 동시에 그리고 그 후에 겪은 역사적 치욕과 백성들의 끔찍한 삶을 생각하면 전쟁 초기 대응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P85

조선군 지휘부는 청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의주 건너편 용골산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청군이 침략을 개시하면 봉화 두 개를 올리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12월 6일부터 봉화가 올랐으나 당시 황주의 정방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그것을 무시했다. 김자점은 청군이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 봉화가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서울에서 소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9일 적군이 이미 순안을 통과하여 안주를 향해 내달리고 있던 상황에서야 김자점은 서울로 장계를 올렸다. 무사안일과 무책임의 극치였다.


◆ 잊지말아야 할 치욕의 역사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후 소현세자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 후, 강화도에서 끌려온 강빈을 비롯한 왕실과 신료들의 처자들이 홍타이지에게 삼배고두례를 행하였다. 곧이어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선물이라며 짐승가죽으로 만든 방한복을 가지고 와 인조 이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인조는 그것을 입고 홍타이 앞에 나가 다시 두 번 무릎을 꿇고 여섯 번 머리를 조아렸다. 병자호란 후 인질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조정의 고위관료의 아들 혹은 조카들이 청나라로 향하게 된다.


국왕은 머리를 조아리지만 결국 무고한 백성만 죽고 또 죽는다.

항상 조정의 큰 실책은 그것을 결정한 관리들보다는 무고한 백성들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전쟁이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백성들에게는 그때부터가 다시 시작인 셈이었다.


P236

청이 물러난 도성의 관아와 인가들은 불타고 여기저기서 참혹한 형상의 시신들이 나뒹굴었다. 널려있는 시신들을 모다 못한 한성부가 인조에게 건의했다. '백골을 묻어주는 것이아말로 오아정의 급선무입니다. 길가에 버려진 시신들을 차마 볼 수 없으니 남정들을 징발하여 매장토록 하소서.'

도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0살 미만의 어린애들과 70살이 넘은 노인들 뿐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나마 그들도 굶어 죽거나 얼어죽기 직전의 상황으로 내몰려 있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1637년 1월, 항복을 받을 당시 조선 조정에 다음과 같은 피로인(전쟁포로) 관련 조건을 제시했었다.


P283

'우리가 끌고 가는 피로인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밝은 다음에 조선으로 도망쳐오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당시 자료를 보면 청군이 철수할 때 끌고간 피로인의 수는 50만 명정도 된다고 한다.  피로인들은 결국 조선에 발을 밟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으로 도망쳐온 사람들의 경우는 발뒷꿈치를 자르는 끔찍한 짓이 자행되었다. 수많은 여자들은 능욕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결을 하였다.  청은 조선의 백성을 그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포로들을 조선에 돌려줄 때는 시장이 형성되어서 어느 금액 이상일 경우에만 조선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목숨을 걸고 탈출에 성공해서 조선으로 왔을지라도 항목 관련 조건에 의해 조선에 의해 다시 청에 돌려보내지게 되었다. 결국 조선을 향해 걸어왔는데 조선의 의해 다시 청에 돌려보내지게 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여자들의 경우는 조선에 정상적으로 조선에 왔다고 하더라고 이중의 고통을 당한다. 청군에서 돌아온 여자들에게는 

'오랑캐에게 실절한 여자'라는 띠가 붙는다. 결국 고향에 돌아와서 쫓겨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고, 사대부의 경우에는 조정에 이혼을 요청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다고 한다.


◆ 답답하고 알고 싶은 것들


1. 조선의 많은 관리들은 재조지은 ('명이 임진왜란 당시 망해가던 조선을 다시 세워주었다') 이라 하여 명을 '어버이의 나라'로 받들었다. 당시 청나라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의 존망보다는 명분만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자결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2. 강대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중립외교가 인정받을 때는 평화로운 시절이다. 결국 위기의 순간에는 한 쪽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병자호란 당시가 청, 명, 왜로 사이에서의 조선의 위치라면, 지금은 미국, 중국, 일본, 북한 사이에서의 한국이다. 시간은 흘렀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더 복잡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 몇 명 사이에서도 중재하는 게 어려운데 무수한 변수가 존재하는 외교에서 과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3.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 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렸다.' 라는 말이 있다. 삶을 국가로 바꾼다면 조선은 과연 전쟁 후 포로들에 대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 왕실사람들과 산성을 지키던 병사의 가족을 우선으로 하여 데리고 왔다. 그리고 특별한 노력이 있었는가 알고 싶다. 심지어 20~30년 만에 돌아온 백성들도 다시 내쳐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약자가 충분히 보호받고 있는가?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김훈의 <남한산성>


예전에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고 블로그에 남긴 글을 조금 적어본다.


'김훈, 그의 책은 내용 하나하나가 너무 사실적이다. 마치 스크린에 그 배경이 펼쳐지듯이 책을 읽어내려가면 내 머리속에 이미 그 배경이 자리를 잡고 시간이 흘러간다.

책을 읽을 때는 나 역시 남한산성에 있게 된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방책이 없는 것에 안타까워 하며 나 역시 초조해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 이유는 이미 내가 이 책의 끝을 역사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읽을수록 아프지만 그래도 읽으서 그 아픔을 아로 새기고 기억해야 함을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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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프랑스의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는 "과거에 대한 무지가 현재의 이해 부족을 초래한다"고 설파한 바 있다. 과거 공권력의 잘못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했기에 오늘날 이 잘못이 되풀이 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P17

한 나라의 문명 수준은 불법 행위와 부정의가 발생했을 때 이를 교정할 수 있는 제도적, 법적 장치의 완비 여부, 그리고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공감의 정도와 수준에 달려 있다.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는 사회적 고통에 공감하는 정도는 대중의 집단 기억, 역사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역사의식과 공감은 시민사회의 문화적, 정신적 기반이다.


1. E.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이없는 대화라고 했다. 우리는 대화를 할 때 내가 해야할 이야기를 알아야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해서 들어야 한다. 과연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진 몇 백년 전이 아닌 불과 몇 십년 전인 부모님, 조부모님의 시대에 벌어졌던 이야기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에 자문을 해본다.


2. 우리는 보통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생활을 한다. 이는 다른 말로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를 보호해야 할 국가가 어느 순간 나를 위협하는 존재로 다가온다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대항할 것 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대항한다면 이길 수 있는가.


3. 나는 그저 지시를 받았고 공식적으로 업무를 처리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이에게는 큰 상처를 받고 때로는 삶을 좌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해야할 일이다.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특수한 조직형태인 군에 소속되어 있다면 과연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경우, 상관의 명령에 반하는 행동이 얼마나 가능할까?



피고(아이히만)가 존재하던 때 나치 법률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범죄가 아니라 국가의 공식 행위이므로 (......) 복종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습니다.                           

-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의 변호인


스스로 가슴에 못 박는 소리지만 난 철저히 '상명하복'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         

- 고문기술자 이근안


대대장은 총살 집행할 권한이 없고, 연대장도 군법 권한으로는 총살 집행을 지휘할 권한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 상부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뿐이고 본인은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 한국전쟁 때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가해 부대 대대장 한동석


◆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1951년 육군 11사단 9연대가 '견벽청야(방비를 철저히 하고 곡식을 모조리 거두어들인다)작전'에 따라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경남 거창군 신원면 지역의 민간인 700여 명을 모두 모아 마을 뒤 산골짜기에서 학살했다. 같은 해에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조사 자체를 무산시키려 했다. 이후 들끓는 여론에 밀려 관계자 세 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사법처리르 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몇 개월 후 이들은 모두 사면받고 복권되었다. 유족들은 다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주민들이 나서서 유골을 모아 위령비를 세우고 묻었으나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을 금하고, 묘지도 개장령에 따라 다시 파헤쳤다. 또 박정희 정권은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의 주민 성분 조사에 참여했던 신원면장 박영복을 타살하고 유족들과 유족회 간부 열여덟 명을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유족들은 1988년이 되어서야 희생자 위령 궐기대회를 열고 위령비를 다시 세울 수 있었고, 1996년에 비로소 명예 회복에 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되었다.


◆ 국민보도연맹

1945년 6월 5일 이승만 정권이 대국민 사상 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반공단체, 좌익 세력 색출 및 통제와 회유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지역적 할당제를 비롯해 지나친 실적주의가 횡행하여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단체에 등록되는 폐해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부와 경찰은 국민보도연행원과 형무소 재소자들을 무차별 검속, 즉결 처분했고, 이는 한국 전쟁 중 최초의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 여순 반란 사건

1948년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에 반대하는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14연대를 급파했다. 이에 10월 10일 14연대 소속 지창수, 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곧 여수 시내를 장악하고, 여수, 순천을 순식간에 휩쓴 뒤 곧바로 광양, 곡성, 구례, 벌교, 고흥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해나갔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2500여 명의 군인 및 민간인이 숨졌다. 잔류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본격적인 유격전을 전개했지만 1950년 2월 대부분 소탕되었으며 호남지구에 내려졌던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좌익계와 광복군계를 포함한 모든 반이승만 성향의 군인들이 제거되었다.


◆ 제주 4.3 사건

1947년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행사에서 경찰이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4.3 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 발포에 항의해 총파업을 벌이는데, 미군정은 이를 조사하면서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열두 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된다.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이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사건 발생 후 50여 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2003년 10월 말 노무현 대통령이 이 사건과 관련해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으로 유신반대 성향이 있는 도예종 등이 기소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구속 기소된 23명 중 8명에게는 사형을, 나머지 15명에게는 무기징역 및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되었다. 2005년 12월 27일 재판부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소를 받아들였으며 2007년 1월 23일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 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서울지방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배척하면서 시국 사건 사상 최대의 배상액인 637억여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사건은 국가가 무고한 국민을 죽인 사법살인 사건이자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인권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 대구 10.1 사건

해방 이후 미군정은 한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친일파 출신들을 경찰로 임용하며 일제시대 방식 그대로 농민들의 쌀을 공출해갔다. 특히 대구, 경북 지역에서는 해방 이후 30만 명의 귀환동포가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하면서 쌀 수요가 늘고 모리배들의 사재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쌀값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6년 5월 콜레라가 유행하여 굶주림은 더 심했고, 미군정은 전염을 막는다며 차량은 물론 사람도 시 경계를 넘지 못하게 교통을 차단했다. 결국 9월부터 대구 시민들은 미군정의 식량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노동자들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벌인 9월 총파업에 맞추어 파업에 돌입했다. 10월 1일 항의하던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총격을 가한 것이 직접적 발단이 되어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정치 영역에서 좌파 정치 세력이 크게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 노근리 사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충북 영동군 노근리의 경부선 철로 주변에 피신하고 있던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미군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300여명이 살해된 사건이다. 당시 미군은 노근리 부근의 미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 명령에 따라 무차별 사격을 했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60년 민주단 정권 때 유족들이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하면서 이 사건은 외부에 드러났다. 미군은 소청을 기각했지만, 1994년 4월 대책위원회 정은용이 유족들의 비극을 담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소설을 출간하면서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1999년 말 유족들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2000년 1월 9일 미군은 전문가 등을 파견하여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유족들에 대한 보상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이후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 사업이 추진되었다.


◆ 실미도 사건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무장 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는 이른바 1.21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정부의 강경 대응 방침에 따라 대북 특수공작을 목적으로 실미도 부대가 창설되었다. 이들은 3년 4개월 동안 혹독한 훈련과 열악한 보급, 보수 미지급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견뎌내며 북파공작원으로 훈련받았다. 그러던 중 국제적인 긴장 완화와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더 이상 이들의 존재가 불필요해지자 정부는 이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공작원 스물네 명이 1971년 8월 23일 기간병 열여덟 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여 서울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군경과 교전이 벌어져 경찰, 민간인, 공작원 등 스물여덟 명이 사망하고, 이후 생존 공작원 네 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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