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이 많이 있는데, 지금까지 원작만큼의 감동을 받은 경우는 많지 않았다.
사람들이 책을 왜 읽느냐? 는 질문에 사람들이 의례하는 대답은 '간접경험'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문제에 대한 답을 툭 뱉어내듯이 하는 말이다. 그 대답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대충 대답하는 '간접경험' 이라고 나 역시 말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때로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대해서 소설 속 등장인물과 같이 호흡하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눈가에 엷게 빛나는 막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감정을 그저 한 마디 '간접경험'이라고 말해버리기가 싫다.
최근에 깊이 빠져든 작가가 있다. 그 분의 책들을 읽을 때는 정말 무언가 찌릿찌릿하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의 감정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고, 때로는 헛웃음으로 그리고 깊은 한숨으로 나오기도 한다. 바로 박범신 작가이다.
그의 작품 중에서《소금》, 《은교》을 먼저 접하고 나서 이번에 《촐라체》를 만났다. 그리고 나서 앞으로의 그의 전작을 읽기로 마음 먹었다. 특히, 히말라야 촐라체 등정 후 조난 사고를 당한 주인공들의 삶을 향한 지독한 여정을 그린《촐라체》를 읽으면서는 나도 읽는 내내 등장인물들 개개인 모두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p216
히말라야에 도전하는 클라이머에겐 적어도 세 가지 용기가 구비되어야 한다는 김선배의 말도 이제 떠오른다. 가정과 사회를 과감히 던져버릴 수 있는 용기가 그 첫 번째이고, 죽음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만한 배짱이 그 두 번째이고, 산에서 돌아오고 나서 세상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의지와 열망이 그 세 번째 용기다.
비록 가정과 사회생활과 제 목숨까지 걸고 산을 오르지만, 산을 오를 때조차, 돌아와 세상과 사랑하는 사람에게로의 복귀를 꿈꾸는 것이 진정한 알피니즘의 정신이라는 뜻이다.
《촐라체》는 산악인 박정헌과 최강식이 악명 높은 히말라야 촐라체에 오르고 나서 하강하던 중 최강식이 박정헌과 안자일렌(함께 등반하는 사람끼리 줄로 몸과 몸을 연결하여 안전을 확보하는 것) 상태에서 크레바스에 빠지고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실화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그럼 작품 속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같은 어머니에 아버지가 서로 다른 두 형제 박상민과 하영교는 히말라야 촐라체에 등반을 하려 한다. 이들이 촐라체에 함께 오르게 되기까지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서로의 사정을 알지 못한채 마음 속 깊이 쌓여 있는 오해가 둘 간의 사랑과 증오로 쌓이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각자의 삶에 대한 깊은 회의가 그들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작중 화자인 나는 아들 현우가 '외로워서요'라는 말을 남긴채 절로 떠나면서 히말라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두 형제의 캠프지기가 되었다.
상민과 영교는 우여곡절 끝에 촐라체 정상에 오르고 나서 내려오던 중 동생 영교가 상민과 안자일렌 상태에서 크레바스에 빠지게 되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 상민은 연결되어 있는 줄을 끊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한다. 결국 함께 하기를 마음 먹지만 줄은 바위에 오랫동안 쓸려 잘리고 영교는 크레바스 속에 빠진다. 영교는 크레바스 속에서 이전에 이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된 한 산악인을 보게 되고, 그의 피켈을 얻어서 나가게 된다. 상민 또한 후에 크레바스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 그 산악인의 머리카락을 수습하고 나온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둘은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발목이 돌아가며 동상이 걸리면서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리고 작중 화자인 나는 베이스캠프로 복귀할 날이 지난 그들을 찾아나선다.
그 속에서 둘 사이의 맺혀진 한이 풀리고, 나는 아들 현우를 이해하게 되고 그동안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소설을 읽는 것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보다 좋은 가장 큰 이유는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상상력을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한다는 점이다. 영교와 상민이 얼음 위에 피켈로 내리 칠 때, 나 역시 얼굴에 튀는 그 얼음 조각을 생각해보기도 하고 아이스스크루에 매달려 자는 대목에서는 나 역시 히말라야의 바람을 가슴 속으로 맞아보기도 했다. 안자일렌 상태에서 영교가 크레바스에 빠졌을 때 상민의 몸이 줄에 감겨버리고, 갈비뼈가 부러질 때도 내가 그가 되어 그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입김을 호~ 불어가면서 추위도 상상해본다. 영상으로 본다면 그저 시각적으로 어떤 생각과 필터없이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촐라체》에서는 산악등반 관련된 장비 이름이라던가 전문 용어가 그대로 설명없이 나온다. 일부 용어는 읽으면서 그 모양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문맥 상으로 어떤 것일거라는 짐작은 간다. 그 만큼 알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점이 무엇보다 좋았으며, 이야기 속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준다.
생사를 오가는 극한 속에서 심적 갈등과 꺼져가는 의지를 잡아가며 결국은 돌아오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히말라야라는 상징을 바탕으로 같이 떠나는 여정이지만 아마도 개개인의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아가면서......
"농담이 아니라 망상이겠지. 산소가 부족한 곳에선 그런다더라. 머리가 혼란을 일으켜 오히려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고. 권투 선수도 머리를 많이 맞으면 황홀감을 느낀다는 거야. 유도 선수나 레슬링 선수가 목을 졸릴 때도 그렇대. 어떤 권투 선수는 자신도 모르게 더 때려달라고 머리를 들이밀기도 한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 다 뽕 맞은 것처럼 되는 거지. 미친 짓이야. 너도 그렇지. 왜 하필 겨울에, 왜 하필 북벽이냐."
p33
라이홀트 메스너는 '죽음의 지대'를 뚫고 나가려면 어떤 '모럴'이 필요하다고 썼다. '무덤과 정상 사이'는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뚫고 나갈 때 '오히려 지각이 맑아지고 민감해지며' 마침내는 '전혀 새로운 생의 비전을 연다' 는 것이다.
p48
나의 대답이 그랬었지.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그처럼 고요한 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암벽 등반을 다녀봤지만 우리나라에선 어디에 있든 소리가 쫓아온다. 사람소리 찻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라도 들린다. 완전한 정적이란 없다. 그러나 촐라체 베이스캠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가 맞닥뜨린 것은 숨 막힐 듯한 정적. 정적이 무섭진 않냐. 형이 또 묻고, 뭐 별로...... 내가 대답했다. 형은 그러자 으흐흐흐, 하고 기분 나쁘게 웃고, 혼잣말하듯 덧붙였다. 이 정적이...... 말하자면 고독의 맨얼굴이야. 이제부터 베이스캠프에서 너도 이놈 맨얼굴을 질릴 정도로 보게 될걸
p100
들쥐
해발 5천여 미터의 눈밭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p101
가만히 있으면 말을 모조리 잊어버릴 것 같았다. 진공 지대의 적막이 아마 그럴 터였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다가, 혹은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나는 와락 정적이 무서워 짐짓 서성거리면서, 소리 내어, 대답 엇는 그 무엇엔가 말을 걸곤 했다. 내 말을 듣는 것이 들쥐든, 새든, 아니면 히말라야의 죽음의 지대에 산다는 비행거미든, 상관없었다. 평생 동안 이런 정적을, 그것도 하루 종일 만나본 일은 처음이었다. 밤이 되면 그 정적의 공포감은 배가 되었다. 뼛골 사이로 흐르는 바람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정적이었다.
p103
떨어져 있을지라도 로프로 연결한 안자일렌 상태일 테니 한 줄에 두 목숨을 매달고 있는 셈이다. 망원경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하나의 판타지로 보였다.
p105
"오늘은 정월 초하루, 설날이야."
그들에게 들으라는 듯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헤드랜턴은 여러 개 남아 있었다. 나는 후룩후룩 일부러 소리 내며 라면을 먹고 나서, 텐트 지붕 위에 세 개의 헤드랜턴을 건 다음 불을 켰다. 이제 산 위의 저들은 '특급호텔'을 만난 행복감과 더불어 상민의 불빛과 영교의 불빛과 나의 불빛을 보게 될 터였다. 내가 그들과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세레머니가 아닐 수 없었다.
p111
모든 정상은 허공을 이길 수 없다던 형의 말이 머릿속을 가로지른다. 무엇이 있든 상관없다
p114
임종까지, 생애의 마지막 구간에서 소주병을 달고 살았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멍청한, 이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밉거나 원망스럽진 않다. 한번 기울어지고 나자 아버지 인생은 내리닫이 가파른 하강길로 이어졌다. 자살한 건 아니지만 점진적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소주는 맑아서 좋아, 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아버지 영혼은 소주와 달랐다. 소주는 독을 품고 맑은데, 아버지는 물처럼 맑은 사람이었다. 그것은 약하다는 뜻이었고, 약한 것은 명백히 유죄였다. 나 같았으면 소주에 의지한 굴욕적인 자살보다 차라리 의지적인 확고한 자살을 선택했을 것이다.
p120
가파른 빙벽에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해서 밤을 보낸 지난 며칠 동안의 일들이 휙휙 눈앞을 스친다. 버너를 떨어뜨린 것은 75도 가까운 경사의 빙벽을 깎아 겨우 엉덩이만 걸친 채 아이스스크루에 매달려 잠들어야 했던 두 번째 밤이고, 마지막 식량으로 남은 파워바와 파워젤이 너무 단단히 얼어서 먹지 못하고 버린 것은 정상의 턱밑에서 비박한 세 번째 밤이다.
p121
온몸에 전율이 지나간다. 로프가 빠져나간다는 것은 함께 이어 묶여 있는 그가 나로부터 멀어진다는 뜻이다. 바람을 거슬러 그가 뒷걸음질할 이유는 전혀 없다. 로프가 당겨지는 건 오직 하나의 이유, 그의 추락뿐이다.
p126
나는 여러 번 피켈 샤프트로 표면을 찔러본다. 시멘트 다리처럼 단단한 바닥층이 샤프트 끝에 찍힌다. 이 정도면 안심하고 건너도 될 듯하다. 나는 뒤를 돌아다보며 영교에게 눈짓을 보낸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내가 추락해도 제동을 걸 수 있게 확보 준비를 해달라는 눈짓이다. 영교가 피켈을 깊이 박고 엎드려 확보 자세를 취하는 걸 확인하고서야 걸음 너비를 최대한 벌려 아이젠의 앞발톱을 사면에 박아 넣는다.
p127
죽음의 아가리를 넘나드는 그 고통을 왜 모르겠는가, 그런데 녀석은 한사코 내게 고통을 감추고 제 힘을 과시하려 한다. 고통을 감추려니 고통은 당연히 배가된다. 녀석의 힘은 지금 단 하나, 내게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 또는 맹목적인 증오심으로부터 나온다.
p132
그러난 나는 곧 숨을 흐흡, 하고 멈춘다.
형광등의 스타트 전구처럼 깜박이다가 한순간 불이 확 켜지고 만 어떤 결론에 내 자신이 먼저 놀랐기 때문이다. 나는 진저리를 치듯 전신을 부르르 떤다. 자기 파멸의 달콤한 이끌림을 제치고, 돌연 강렬하게 솟구쳐 나와 몸속에서 터져 나오는 또 다른 비명 소리를 나는 그 순간 듣는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라는, 목소리가 내 속에서 우주적인 빅뱅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살려면...... 로프를 끊어야 한다......
p137
살려줘. 형. 제발...... 로프를 끊지 마. 그런 말이 입속에서 미끄럼을 탄다. 그러나 소리는 터져 나오지 않는다. 조금만 기다려봐. 어떻게든 올라갈 거고, 어떻게든 내려갈 거야. 여기서 올라갈 땎까지만 기다려주면...... 형이 혼자 먼저 떠나도 원망하지 않을게. 울음 밑이 터지려고 한다. 나는 공포에 질려서 등강기 손잡이를 잡은 손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고 몸을 흔든다. 형을 믿을 수 없다. 일단 벽에 붙어줘야 한다.
p155
그의 무릎 위에 올려진 피켈이 비로소 눈에 띈다.
목젖이 일시적으로 다시 뜨거워진다. 피켈이다. 살길을 찾은 느낌이다. 습기의 막이 드리워 눈앞이 뽀얐다. 나는 죽은 자의 피켈을 잡는다. 보고에 따르면 추락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떨어지면서 암벽에 부딪혀 다리가 부러지거나 머리통이 깨질 때에도 육체적인 고통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추락자는 추락하면서 고통은커녕 오히려 황홀감을 느꼈다는 보고도 있다. 내가 추락할 때도 그랬었다고, 나는 회상한다. 지나온 기억의 편린들이 한순간 수없이 스쳐 지났을 뿐이다. 마치 내 평생을 기록한 필름을 고속으로 리와인드해 보는 것처럼
p174
프랑스 원정팀에 의해 히말라야 14좌 중 최초로 정복된 안나푸르나는 신의 땅에 감히 발을 들여놓은 원정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징벌을 내린다. 정상을 밟고 내려온 에르조그와 라슈날은 심한 동상에 걸리고, ㅅ=테리이와 레뷔파는 설맹에 걸린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된 테레이와 레뷔파는, 동상에 걸려 나중에 손발을 잘라내야 했던 에르조그, 라슈날에 의지해 간신히 산을 내려오지만 영원히 실명자가 된다. 초월적인 안나푸르나가 그들이 눈으로 본 마지막 풍경이 된 셈이다.
p182
"정신 차렷!"
나는 영교의 헬멧을 피켈로 친다.
"환상이야. 거긴...... 우리가 함께 내려온 곳이란 말이야!"
잠시 거칠게 밀고 닫고 하다 말고, 영교가 이윽고 털썩 다시 주저앉는다. 눈바람에 밀려 내 무릎에 쓰러져 엎드려 있다가 환상으로 마을을 보았던 모양이다. 따뜻한 집의 아랫목, 굴뚝에서 솟아나는 연기, 데운 우유에 녹차를 듬뿍 탄 밀크티, 평화롭게 건초들을 핥고 있는 야크들을 보았을까. 나마스테, 하고 두 손 합장하여 인사를 건네오고 있는 마을 사람들도 만났을지 모른다. 어디 환각뿐인가. 설산의 협곡에선 환각을 만나지 않더라도 한번 눈바람이 휩쓸고 가면 지형지물의 인상 자체가 전혀 달라 보인다. 골짜기는 솟아나고 길없는 길은 가라앉아 숨기 마련이다. 게다가 환각까지 보태지면 지척에 목표 지점이 있더라도 길을 찾을 수가 없다.
p216
히말라야에 도전하는 클라이머에겐 적어도 세 가지 용기가 구비되어야 한다는 김선배의 말도 이제 떠오른다. 가정과 사회를 과감히 던져버릴 수 있는 용기가 그 첫 번째이고, 죽음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만한 배짱이 그 두 번째이고, 산에서 돌아오고 나서 세상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의지와 열망이 그 세 번째 용기다.
비록 가정과 사회생활과 제 목숨까지 걸고 산을 오르지만, 산을 오를 때조차, 돌아와 세상과 사랑하는 사람에게로의 복귀를 꿈꾸는 것이 진정한 알피니즘의 정신이라는 뜻이다.
p234
5천 미터가 넘는 곳에까지 방목하는 야크들은 주인이 찾기 쉽도록 커다란 방울을 목에 달고 있다. 큰 덩치와 달리 야크들은 여름철에도 풀을 뿌리째 뽑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양들이 풀을 뿌리까지 뽑아 먹어 대지를 황폐화시키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p247
모든 것이 우연해 보여도 고산에서 겪는 모든 인연은 하나도 우연한 게 없다고 탄식하던 김형주 선배의 말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p250
살고 싶은 욕망 이상으로 죽음의 욕망도 강렬할 수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두 개의 욕망은 같은 숙주로부터 갈라져 나온 쌍생아일까
p292
나는 죽은 다음에 보는 것처럼, 그 초월적인 풍경들을 보았다. 히말라야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죽음과 탄생 사이의 과도기적 시간을 '다르마타(Dharmata)' 라고 불렀다. 그것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잠과 꿈 사이의 밝은 틈새라고 했다. 목숨 값에 억눌려 온갖 욕망으로 이지러져 있던 이른바 불멸의 본성이, 하나가 통째로 끝나고 다른 하나가 통째로 시작되는 그 틈새에서, 금강석보다 견고한 제 본체를 보이고, 보여주는,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 바로 다르마타였다. 나는 자고 깨고 자고 깨고 하면서, 이를테면 그때 다르마타의 빛 사이를 날렵하게 통과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사랑에의 목 타는 갈망이었고, 또한 정수의 기다림이었다.
p299
태어난 것은 죽게 되고
모인 것은 흩어지고
축적한 것은 소모되고
쌓아 올린 것은 무너지고
높이 올라간 것은 아래로 떨어진다
p308
과연,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우면서 지구의 중심까지 꿰뚫는 듯, 오래 울리는 소리였다. 나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 소리의 잔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촐라체를 보았고. 한 점 놀빛까지 이미 사라져서 촐라체 북벽은, 검은 전사의 눈빛처럼 여전히 가파르고 캄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