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바로 삶인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어떤 이유에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진심으로 진정으로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삶의 조언을 얻기 위해 아낌없이 주고 열렬히 읽는 자에게는 무한한 것을 주는 것이 바로 책인 것이다.
책에는 많은 것이 숨겨져 있다. 애써서 사람들에게 그 숨겨져있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기꺼이 찾으려고 하는 자에게는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깊이 숨겨놓지는 않는다. 나는 과연 이런 책에서 어떤 것들을 찾아내고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책 속에 나오는 질문 "왜 책을 읽는가?" 라는 질문을 책을 읽는 내내 혼자 머리속에 되뇌었고,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계속 생각하고 있다. 책에 관련된 책을 읽다보면 책을 읽는 이들은 아마도 무언가 공통적인 것을 책에서 찾아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바로 "왜 책을 읽는가?"라는 질문의 해답이 될 듯하다.
내 대답은 바로 "삶을 풍부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책" 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세상에 대한 관심이 더 생겨나는 듯하다.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에서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만나고, 그 속에서 자연을 대하는 작가 김훈을 마주하게 되었다. 다음 날 출근 길에 평소와 다르게 붉게 해가 뜨는 모습이 보이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여러 사건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는 모습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라는 인간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를 읽고 이스라엘과 중동의 소식을 듣고, 아직도 십자군 전쟁은 끝나지 않았구나? 종교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도 만들었다.
책을 읽는 것이 나에게 금전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거나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지 글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이 책 속에는 한 작가의 삶이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으며, 깊은 고뇌가 들어가 있음은 읽는 자들이 미리 알고 있으리라 생각이 든다. 이런 삶들이 나에게 말해 준다. 나는 단지 겸허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겸손하게 나와는 다르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함께 공감하고 서로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p34 코미디에 관해선 악명 높은 이야기가 한 가지 있습니다. 어떤 노동자가 있는데 그 노동자의 일은 2~3초에 한 번씩 레버를 잡아당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레버는 사실 수년간 헛돌고 있었던 거죠. 이 사실을 알게 된 노동자는 그만 신경쇠약에 걸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 노동자에겐 미안하지만 듣는 사람 힘 빠지게 하면서 허탈하게 웃깁니다.
p44 배워서 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삶 속에서 내뿜는 에너지는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 에너지들이 시간을 채웁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데 쓴 시간들은 다시 자기 자신을 만듭니다. 성공이나 명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요. 결국 나를 키우는 시간에는 내가 '한 성공한 인간으로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사는 데 성공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걸려 있는 것입니다.
p51 "바로 내가 그것을 원해서 했어." 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복종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복종하는 자는 결코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해야만 했다."라는 말 아래 외부의 명령에 따라서만 행동하면 우리는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잊어버리고 살게 되기도 합니다. 그건 자긍심을 갖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 한 인간으로 기쁘게 사는 것과 가장 멀어지는 길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살다 보면 자신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져 버립니다.
p59 어떤 분야에 정말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제일 먼저 알게 된느 것은 자신에게 뭐가 부족한가 하는 점입니다. 넘쳐 나는 재능 때문에 계속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기 때문에 계속합니다. 들라크루아라느 화가는 천재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놓지 않는 생각, 즉 지금까지 말해진 것이 아직 충분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말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p107 쓸모가 없어도 절대로 없어지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일단 우리 삶이 그렇습니다. 우선 삶 자체가 쓸모 만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태어난 이유를 모릅니다. 뭐가 되려고, 뭐에 쓰이려고 태어났는지 알면 좋을 텐데요. 사르트르는 재주를 갈고닦아 봤자 그걸 어디다 쓸지 알아야 말이지요. 라고 했지요. 그런데 혹시 자코메티란 조각가를 아세요? 그는 자기 직업을 다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사랑했습니다. 진짜 멋진 일이죠.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때 그가 한 말이 "아, 그러니까 난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니구나. 심지어 조각가가 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구나!" 였답니다. 자코메티는 삶이 허무하다거나 철저히 우연이란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삶은 이유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p112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존재의 가벼움, 무거움만큼이나 중요한 키워드로 삼은 것은 '키치'였습니다. 우리는 키치란 시시한 예술 작품을 가리키는 말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쿤데라가 관심 있었던 것은 키치를 필요로 하는 키치적 인간, 키치적 태도였습니다. 거짓으로 예쁘게 보여 주는 거울에 자기를 비춰 보고 이를 통해 흡족한 마음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인간, 그것이 바로 키치적 인간입니다. 어떻게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살 수 있길 바라는 태도, 그것이 바로 키치적 태도입니다. 쿤데라에 따르면 키치는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에서 자양분을 끌어냅니다. 키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으로 공감할 수 있는 손쉽고 분명한 것들에 기댑니다.
p117 용기를 내라. 그게 어쨌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일이 아직도 가능한가! (중략) 그대들이 실패했고 반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무엇이 이상한가. 그대를 반쯤 파멸한 자들이여! 그대들 속에서 거세게 밀치며 다가오지 않는가. 인간의 '미래'가?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117 그의 고뇌에 한계가 있는 한, 나는 그의 뜻을 수락했으며 나 또한 그 고뇌속에 빠져 들었노라고 나는 그에게 말한다. 그러난 나는 그가 절망에 몸을 맡겨 버리거나 이성을 잃는다면 더 이상 그를 동정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 말의 어조에는 뛰어난 데가 있다. 어떤 종류의 영혼의 힘은 영혼의 표현을 통제함으로써 불행에 한계를 그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어조는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영혼은 자신의 운명에 항거하여 투쟁하는 인간에게 언어의 여러가지 위력을 제공함으로써 예술이 삶 속으로 파고들게 한다. - 알베르 카뮈-
p118 좋은 책은 우리의 영혼에 형태를 부여하고 고통에 한계를 주고 자롯된 생각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는 마술 피리입니다. 책은 이 시대에 모든 인류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 살을 파먹는 벌레들, 즉 우리 모두 다 같이 앓고 있는 그 온갖 불안과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합니다. 책은 불안과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리를 통과하는 공기의 선율과 리듬과 언어로 말함으로써, 불안과 고통을 극복하게 합니다. 책이 불안과 고통을 말하는 이유는 바로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p125 파스칼 키냐르는 [떠도는 그림자들]에서 독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독서는 참으로 이상한 경험입니다. 사람들이 독서를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요. 독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책 속에 다른 정체성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무모한 경험이니까요. 우리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않지 못하는 채로 그 세계에 뛰어듭니다. 독서란 한 사람이 다른 정체성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그 안에 자리를 잡는 행위라고 정리해 둘까요. 고대인들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 태아의 자세로 주검을 매장했던 것과 마찬가지지요.
p125 저는 책이 '마치 남의 일처럼 보는 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책은 마치 타인의 모습인 양 나타나서는 어느 순간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게 합니다. 책은 무엇보다도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해 줍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해 줍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무슨 뜻일까요? 그건 그가 그랬듯 너와의 대화를 통해 나를 알고 싶다는 말일 겁니다. 너를 통해 나를 알고 싶다는 마음일 겁니다. 그건 가볍지 않은 사랑과 같습니다. 사랑 역시 너를 통해 나를 알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너를 통해 나의 이상향을 꿈꿔 본다. 더 나은 나를 꿈꿔본다. 입니다. 그 이상향은 이런 겁니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들, 발견한 것들, 새로 알게 된 것들 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살아가고 싶다. 저는 바로 이런 의미의 자기 계발이야말로 책이 쓸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p139 책을 읽는 동안 멈추면서 자꾸자꾸 덧붙이면서 우리는 최선의 생각을 하고 책을 읽는 최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삶은 계란이나 짜장면 한 그릇이란 말만 나와도 우리가 덧붙일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것이나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이나 모두 당장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것에 마음을 열어 보다가 자기를 마나는 경험입니다.
p142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디지털 세계에 살면서도 우리에겐 뭔가를 남과 진정으로 공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 있습니다. 우린 공감이 중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건 상대방이 달라도 그냥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이 달라 보여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공감과 관련해서 제가 제일 즐겨 인용하는 것은 남아공의 '우분투'란 말입니다. 우분투란 말은 다른 언어로는 옮기기 어려운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간단히 풀어 보자면,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정신을 말합니다. 우분투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인간성이 다른 사람에 의해 담보되고 그 관계가 불가해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어딘가에 속하고 나누기 때문에 인간이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우분투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지하며, 다른 사람들이 능력있고 훌륭하다는 사실에 위협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분투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굴욕이나 억압을 당할 때 자신 또한 같은 일을 당할 것을 알기 때문이죠. 다른 이를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도 가차없이 그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관계와 자비, 우정과 존중에 대한 이야기지만 공감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공통성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p144 능력에 대해서 다시 말해 본다면, 자신이 시작한 일을 끝까지 해 보는 경험은 무능력한 사람에서 능력이 잇는 사람 쪽으로 우릴 옮겨 놓습니다. 무능력은 재능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일을 지속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행스럽게도 우린 이미 어느 정도는 능력자입니다. 우연히 태어난 이 삶을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려고 하니까요.
p155 어쨌든 저는 작가들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것을 쪼개서 불쏘시개를 만들어 제 몸을 덥히는 중입니다. 책을 읽는 것은 저자를 숭배하기 위해서도, 저자를 판단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장 그르니에가 말했듯이 저자의 지혜까 끝나는 데서 새로움이 시작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p163 데카르트도 고매함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고매함은 타인을 신뢰하며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거두고 실망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섣불리 비난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선택과 자유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아니라 고귀한 일이란 것을 아는 사람이 고매한 사람입니다. 고매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고매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매합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최고의 독자가 아니라, 고매한 태도를 가진 독자라면 누구나 책에서 최고의 것을 가져가는 최고의 독자가 될 수 있습니다.
p178 그런데 우린 왜 책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할까요? 저는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좋았던 것, 한때 중요하게 느껴졌던 것, 이런 것들은 왜 잊히면 아쉬운 걸까요? 우린 왜 끄집어내고 싶어 할까요? 지혜로워지고 싶어서이기도 하겠죠. 배움에 의지하고 지식에 도움을 받고 싶어서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책 속에 담긴 지혜는 무언가를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 다시 만나면 너무나 반가운 오랜 친구이기도 합니다.
p197 카프카가 누구입니까? 글을 쓰고 싶어 하면서도 평생 직장을 다녔고 시간이 없다고 발을 구르며 새벽까지 글을 쓰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충분히 사랑할 수는 없었던 사람, 그렇지만 그 또한 인긴이기에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 그렇지만 타협할 수는 없었던 사람, 그래서 죄의식을 가졌던 사람, 그는 결국 추방과 심판에 관한 소설을 씁니다. 카프카에게 세계는 버릴 수도 없고 떼어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사랑할 수도 없는 징글징글한 가족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그래서 벌레로 변신해 가족들 틈에서 가족의 손에 의해, 그리고 반은 자발적으로 죽는 소설을 씁니다.
p232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잇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된느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