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모든 생명들이 그러하듯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거북이의 여정은 신비롭기만 하다. 수십 마리의 조그만 생명체들이 모래 속에서 꿈틀거리며 위대한 생명의 여행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새끼 거북이들은 태어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아 벌써 바다를 향해간다. 그들은 저 멀리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태양에 반사된 빛의 파장에 따라 단호하고 힘차게 나아간다. 새끼 거북이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것일까.


새끼 거북이들의 여정은 어미 거북이로부터 시작된다. 어미 거북이가 바다를 횡단해 자신들의 고향인 해안까지 체험쳐 오는 과정은 매순간이 죽음과의 사투다. 바닷속에서는 상어와 고래가 어미 거북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인간이라는 동물 역시 막강한 무기로 그들을 포획하려 한다. 바다의 파도가 가장 높은 날, 그리고 여름 중 가장 뜨거운 날, 어미 거북이는 기나길 여정을 시작한다. 거칠고 드높은 파도를 가르며 2300킬로미터를 헤엄쳐 자신이 태어난 해안으로 돌아온다. 5주에서 6주 전 몸속에 품기 시작한 알을 낳기 위해서다.

해안에 도착한 이 순간이야말로 거북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어미 거북이는 미세한 기척도 없는 한밤중에 도착해 해안으로부터 수십 미터 떨어진 후미진 모래사장에 둥지를 튼다. 이곳은 바닷물이 닿지 않아 알들을 위한 둥지로 안성맞춤이다.


어미 거북이는 자신의 몸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도록 모래를 파내 30센티미터 정도 깊이의 구덩이를 만든다. 그런 뒤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머리만 모래사장 위로 삐죽 내놓고는 사방을 둘러본다. 칠흑같이 어둡고 고요한 해변의 모래사장 밑은 어미 거북이들의 발길질로 분주하다. 뒷지느러미로 더 깊은 구덩이를 파는 것이다. 알이 안주할 만큼의 공간이 마련되면 어미 거북이는 50에서 200개의 알을 낳는다. 알을 낳은 뒤엔 곧바로 모래로 둥지를 덮어놓는다. 맹금류로부터 알을 보호하는 동시에 알의 점액이 마르지 않도록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주기 위해서다. 세 시간여 동안 이 모든 과정을 마친 어미 거북이는 미련 없이 바다를 향해 떠나간다.


2개월쯤 지나면 모래 속에 있던 알들이 깨지기 시작한다. 알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깨고 나와야 할 경계다. 신비롭게도 새끼 거북이는 알 속에서도 생존을 위한 무기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카벙클(carbuncle)'이라고 불리는 임시 치아가 그것이다. 새끼는 무작정 알 안에 안주하고 있다가는 금방 썩어 죽게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새끼 거북이들은 '카벙클'로 알의 내벽을 깨기 시작한다. 내가 안주하고 있는 환경이 나의 멋진 미래와 자유를 억제한다면, 자신만의 카벙클을 만들어 그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 알의 내벽을 깨지 못한다면 새끼 거북이는 자신을 억누르고 규정하며 정의하는 환경을 세상의 전부라 여긴 채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그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알을 깨고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다. 진정한 시작은 이제부터다. 단단한 알을 깨느라 카벙클이 온통 부서지고 피가 난 새끼 거북이를 맞이하는 것은 아빠 거북이도 엄마 거북이도 아니다. 바로 어미 거북이가 알을 낳고 덮어 놓은 30센티미터 두께의 모래다. 이 모래 덮개는 얼마나 단단하게 다져져 있는지 웬만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새끼 거북들이 이 견고한 모래성을 뚫고 나오는 데는 자그마치 3일에서 7일의 시간이 걸린다. 이때 새끼 거북이의 몸무게는 알을 깨고 나왔을 때에 비해 약 30퍼센트 정도 줄어 있다.


견고한 모래성을 뚫은 뒤에도 새끼 거북이들은 섣불리 모래 표면으로 올라오지 않는다. 모래 위에는 바다 갈매기와 독수리 같은 포식자들이 호시탐탐 그들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괴물들 역시 이들의 연약한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간다. 새끼 거북이들은 숨을 죽인 채 때를 기다렸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운명의 질주를 시작한다. 한순간에 쏟아져 나온 새끼들은 '자석 컴퍼스' 라는 본능적인 감지 장치에 따라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향해 일제히 몸을 움직인다. 어쩌면 바다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새끼 거북이들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질주를 감행한다. 바다라는 새로운 생명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 순간 갈매기와 독수리들이 쏜살같이 하강을 시작한다. 아직 촉촉한 새끼 거북이들은 이들의 간식으로 제격이다. 이 무시무시한 돌진을 감지한 새끼 거북이들은 순간적으로 자신들의 딱딱한 껍질 속으로 사지를 집어넣는다. 갈매기와 독수리가 백사장에서 발견한 것은 딱딱한 껍데기뿐이다. 생존을 위한 이 자발적이고 순간적인 행동이 없다면 새끼 거북이들은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새끼 거북이들은 바다에 도착한다. 바다는 이들에게 천국인 동시에 지옥이다. 새끼 거북이들은 바다로 뛰어든 뒤 48시간 동안 미친 듯이 수영을 한다. 그들이 향해 가는 곳은 바다의 가장 밑바닥인 심연이다. 이곳은 그들이 가야 하는 본연의 장소다. 그곳에는 이들을 위협하는 큰 물고기들이 많지 않다. 뿐만 아니라 수압이 높아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등딱지와 배딱지를 단단하게 만드는 수련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새끼 거북이들은 자신들만의 인생 여정을 시작한다.


바다거북이의 생후 1년간의 바다 생활을 관찰한 이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 기간은 '실종의 기간' 으로 불린다. 이 1년을 홀로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비로소 '바다거북이'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 1년이 지나면 떠다니는 미역에 몸을 실어 영양을 보충한다. 그리고 20년이 지나면 짝짓기를 한다. 짝짓기에 성공한 암거북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알을 낳는다. 새끼 거북이가 어른 거북이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될 확률은 고작 0.1퍼센트에 불과하다.  1000마리 중 한 마리만 생존할 뿐, 대부분은 이 기나길 여정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지금 경계에 서 있다면, 새끼 거북이처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경직된 세계관을 깨야 한다. 나를 보호하고 감싸주었던 알이 나를 감금한 채 죽게 하는 무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알로 인식하는 순간, 입 안에서 카벙클이 돋아난다 .카벙클은 내가 갇혀 있는 이 세계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도구다. 이 카벙클로 우리는 편견과 상식, 전통과 관습, 흉내와 부러움이라는 알을 깨고 더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 <심연> 中, 배철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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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안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춤추는 별을 낳을 수 있습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무언가 갈피[각주:1]를 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가슴이 유난히 두근 거린다. 이럴 때는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가만히 차분해질 때 까지 숨을 고를 수 밖에 없다. 생각이 많아져서이다. 그런데 그럴 때 일수록 역효과가 난다. 무언가 할 것이 많이 있는데 반대로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이런 일은 때에 따라 몇 일이 지속되며 헤어나오기 힘들 때도 있다. 이런 걸 다른 사람들은 슬럼프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살면서 염두해 두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배웠다> 라는 시에 나온 한 대목인데, 마음에 간직해 둔 글귀다.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무슨 사건이 일어난 것 자체는 더 이상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가 중요하다. 이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우연의 사건을 필연의 사건으로 바꿀 수도 있다. 어떤 일이 나의 잘못에 의해서 벌어졌다면 충분하고 진심어린 사과가 필요하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반대로 나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면, 그만큼 그 기쁨을 누려야 하는 동시에 왜 나에게 그런 긍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는지 주변을 살펴야 한다. 나의 기쁨 뒤에는 분명히 다른 이의 그림자와 아픔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해두어야 한다.


이처럼, 유난히 두근 거리는 가슴을 달래기 힘든 슬럼프가 왔다면, 일단은 천천히 생각해볼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을까? 내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데 아직 확신이 생기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무언가 하고 싶은데 능력이 되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로 충돌되는 가치를 모두 지키고 싶은 것은 아닌지, 조용히 생각해볼 수 밖에 없다. 이럴 때는 다른 사람들의 훌륭한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에서 수 없이 부딪쳐서 나온 말 한 마디가 필요하다.


몰입이란

자신을 새로운 시점, 높은 경지로 들어올려

그곳에서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연습이며

군더더기를 버리는 행위다


몰입이란

알게 모르게 편견과 고집으로 굳어버린

자신을 응시하면서 그것을 과감히 유기하는 용기다. (발췌)


이렇게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내 자신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은 이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나의 강점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자각해야 한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응시의 목적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담단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시선이 아닌

새롭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진부한 사람은

자신 속에서 흘러나오는 침묵의 소리를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삶의 안무를 갖지 못한다. (발췌)


중요한 순간이 다가 온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분명히 자각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찾아가지만, 대부분이 여기까지이다. 나 역시 항상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다이어리에 새로운 목표를 적어내고,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보려고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실천이다. 여기서는 실천을 '용기'라고 부르겠다. '용기'로 말미암아 변화가 생기고 삶이 변하게 된다. 지금까지가 어떤 순간을 준비하는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의 수많은 노력이었다면 '용기'로 그 임계점을 넘어설 수 있다. 얼음이 물로 변하고,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그 시점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름다움은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깨달아 알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자신의 몸에 베어 들기 시작하는 아우라'를 말한다.

'아우라'는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진정성'의 표현이다.


"당신은 1년 동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닫고,

그 운명적인 삶을 자발적으로 실천했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는 

자신만의 삶의 문법을 가지고 있습니까?" (발췌)


'아우라'는 용기의 결과로 생겨난다.  우리는 '아우라'가 생겨나는 그 지점, 즉 임계점은 알지 못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때로는 지치고 지겨울 수도 있는 그 시간을 참아내는 인내의 시간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몇 발자국을 남겨두고 발 길을 돌린다. 아쉬운 순간이다. 그 시간을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는가? 그 때를 위해서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단련이 필요하다. 진리는 항상 복잡하지 않고 어렵지도 않다. 어쩌면 너무 쉬워 모두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욕심을 부리지 말자. 차분하고 묵묵하게 한 걸음씩 발을 내딛을 수 밖에 없다. 






  1. 겹치거나 포갠 물건의 하나하나의 사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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