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업, 『 송시열 초상 』, 17세기, 비단에 채색, 91x62cm, 제천 황강영당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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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 책 재미있을 것 같네. 관심있는 역사 관련 책을 집어서 조금 읽다보면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이름을 살펴본다. 이런 또 이덕일 작가가 쓴 글이다.
이제는 그의 책 목록을 살펴보고 하나씩 하나씩 모두 읽어내려 갈 예정이다.
그러면 아마 조선의 중, 후기에 대한 나름의 맥은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최선의 역사 공부는 이덕일의 책 속에 빠져드는 것이라 혼자 생각 되었다. 하지만 편협하지 않은 시각으로 항상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려 한다. 작가 이덕일이 새롭게 접근했던 것처럼 말이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과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등이 궁금했다.
과연 왜 그들이 그런 것에 집착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300~400년 전의 조선의 정치 현실이 지금의 정치 현실과 너무나 흡사하게 진행되는 것 같은 아쉬움이 무엇보다도 크게 남았다.
잠깐 역사적인 시점과 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 인조반정
- 1623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과 이모제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폐륜을 자행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실정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은 반정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 조금 다른 관점
: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 힘들어지고, 대외적으로는 조선이 상국으로 받들던 명의 국운이 다해가고 새롭게 청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해군으로서는 조선의 운명을 쇠퇴해가는 명나라 만을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명과 청 사이에서의 중립외교를 하면서 조선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러한 현실적인 대응 방식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정치적, 논리적 뿌리인 명나라 만을 붙잡고 있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제1차 예송논쟁
- 1659년 효종이 죽자 효종의 어머니 조대비의 복상을 서인의 뜻에 따라 기년(만1년)으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남인 허목, 윤휴 등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일어난 사건. 이들은 효종은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나 다름 없으므로 3년(만2년)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는데 비해,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은 인조의 둘째 왕자이므로 장자의 예로 할 수 없다고 반박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받아 들여졌다.
◆ 제2차 예송논쟁
- 현종 15년(1674) 효종의 비가 죽자, 다시 조대비 복상을 몇 년으로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이에 대해 서인은 대공(8개원) 설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현종은 예조에서 대공복제를 채택한 것은 결국 효종을 차자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 잘못 적용된 예제라 판단, 이 후 송시열 계의 서인 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한다.
◆ 예송논쟁의 의미는 무엇일까?
- 예송논쟁은 단순히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왕과 사대부들간의 힘싸움이다.
서인들의 주장은 왕도 사대부와 마찬가지의 기중이 적용되어야 하는 입장이고 남인들은 왕은 사대부와는 다른 절대권자로서 그 기준을 뛰어넘는다. 라고 맞서고 있다. 당시, 서인은 그 정치적 세력이 이미 왕권을 능가할 정도라고 여겨질 정도로 그 힘이 대단했다. 그리고 왕권과 남인의 대응 방식이 바로 이 예송논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 예송 논쟁의 두번째 의미는 청에 인질로 살다가 돌아온 장자 소현세자(인조가 사사했다고 의심이되어짐..)가 죽자 그 다음 왕위 계승을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종을 왕권으로 세운 것에 대한 정통성 문제가 달려있다. 바로 효종의 정통성을 인정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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