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알쓸신잡' 에서 김영하 작가가 故박완서 선생님의 말씀이라며 소개한 한 문장이 있다.
"작가란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
글이라는 것은 누구나 쓸 수 있고, 누구나 문장을 말할 수 있는 법인데.
저렇게 사람의 가슴 속까지 파고 들어가며, 생각하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김영하 작가는 프로그램 속 작은 수목원에서 꽃을 보며, 다음 포털의 꽃이름 검색 서비스로 이름을 확인한다.
하나 하나 궁금해 한다. 작가는 단순히 '꽃이 예쁘다' 라고 쓰는 이가 아니기에 그는 사물의 이름을 찾아 간다.
그의 소설은 예전에 『살인자의 기억법』을 한 번 읽었고, 『보다』 라는 산문집을 접해본 적이 있다.
국내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해서 보통 한 작가에 빠지면, 그 작가가 발표한 책을 모두 찾아서 읽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책은 흥미롭게 읽었지만, 이후 다른 작품은 찾아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하나씩 다시 찾아볼 생각이다.
김영하 작가는 최근에 지난 7년 동안 발표했던 중단편을 모은 『오직 두 사람』 을 출간했다.
몇 일에 걸쳐서 단편을 하나씩 읽어가는데,
읽을 때 마다 수없이 감탄하며,
'김영하 작가가 이 정도 였구나!' 느끼며 그동안의 무지에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란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 라고 했던가.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에 수록된 모든 단편을 읽은 후에는 알게 된다.
"작가는 사람의 어두움을 아는 자" , "작가는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는 자"
이번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특히 <아이를 찾습니다>, <옥수수와 나>는 인상적이었다.
그 중에서 <아이를 찾습니다> 를 읽을 때는 수 없이 그 상황에 나를 대입해 보았다.
모든 게 수없이 끔찍했다.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되어 본다.
아이를 잃어버린 아버지가 되어 보고, 아이를 잃고 정신마저 온전치 못하게 된 엄마가 되어본다.
아들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한다. 더 복잡해진다. 엄마라고 생각했던 이의 죽음, 엄마가 자신을 납치한 납치범이었다.
다시 찾게 된 진짜 엄마와 아빠. 하지만 더 낯설다. 마치 새롭게 납치당한 듯이.
<옥수수와 나> 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배경 설정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 설정부터 남녀 간의 치정, 소설가의 창작,
자신은 옥수수며 닭들이 자기에게 달려든다는 정신 질환의 요소들까지 나에게는 신선한 요소들이었다.
이전에도 그의 작품을 읽었었지만, 이번에 정말 나는 새롭게 김영하 작가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 번 작품을 쓸 때 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살아갈 세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만들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간의 관계를 이어준다.
그러기에 세상을 알아야 하고, 사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기쁨을 나눌 수 있어야 하며, 슬픔과 어두움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 중에서도 이번 작품들에서는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 어두움을 건들여 주었다.
사람들이 숨기고 싶지만, 말하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작품으로라도 이해해준다는 손짓을 내민다는 것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어두움을 말하려 하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아물지도 모르겠다.
■ 책갈피
언니, 제가 좋아하는 농담이 하나 있어요. 전에 어떤 일간신문 만화에서 본 건데요. 어떤 남자가 교통방송에서 뉴스를 들어요. 고속도로 어느어느 구간에 역주행을 하는 승용차가 있으니 일대를 운행하는 차량들은 모두 주의하라는 거예요. 그는 문득 그 방면으로 출장을 간 친구가 떠올라서 전화를 걸어요. 야, 그 부근에 역주행을 하는 미친놈이 하나 있대. 조심해. 그 친구가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한둘이 아니야. 얼른 전화 끊어.
- '오직 두 사람' 中
그 순간에도 나의 손은 그녀의 몸 곳곳을 애무하면서 해독 불가능한 문장들을 무수히 그녀의 몸에 입력해 넣었다.
- '옥수수와 나' 中
나는 쥐가 돌아다니는 집에서 아랫배가 뻐근해질 때까지 글만 썼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미친듯이 써나가는 가운데 내 영혼과 육체에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꿈꿔왔던 , 모든 창작자들이 애타게 찾아 헤맨다는 에피파니의 순간일지도 몰랐다. 뮤즈가 강림한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작가가 됐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 '옥수수와 나' 中
"완벽한 알리바이? 그거야말로 허상입니다. 반드시 허점이 있게 마련이죠. 작가들도 말이죠. 구상 완벽하게 하고 작품 시작하는 사람들치고 별 볼일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겁니다. 실패한다는 거죠. 써나가보면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돼버리거든요. 내가 볼 때 당신을 강박증이에요. 계획한 대로 다 돼야 한다고 믿는 어린애란 말입니다. 자, 총 내려놓으세요. 살인이라는 건 말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거예요. 그런 짓을 함부로 저지르면 안 돼요. 인생이 무슨 게임입니까?"
- '옥수수와 나' 中
그가 처음으로 킬킬 웃었다. 농담은 죽음의 공포를 처리하는 방식이라고 말한 것이 커트 보니것이었던가
- '슈트' 中
태준씨, 그 분노와 좌절은 곧 체념과 우울로 바뀌어요. 정은은 그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라는 세계에 짙은 먹구름과 안개가 끼는 거예요. 그리고 그 먹구름과 안개는 영원히 걷히지 않을 것만 같죠. 그런데 정은은 태준의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새로운 힘이 밀고 올라오는 기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혼자 떠안고 있던 우울과 무기력의 부채가 남자들이 당한 끔찍한 일로 인해 모두 탕감된 것 만 같았다.
- '신의 장난' 中
"불안은 영혼을 먹어치운다. 는 아랍 속담이 있더라고요. 몇 년 전 엄마가 수술을 받게 됐어요. 우리 가족은 엄마와 나뿐이거든요. 병원 대기실에서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어요. 다섯 시간이면 끝난다는 수술이 열 시간이 돼도 안 끝나는 거예요. 혹시 읽을까 싶어 책을 가져갔는데 펴보지도 못했어요. 보니까 대기실 사람들이 다 그래요. 모두 YTN 뉴스만 보고 있는 거예요. 본 걸 또 보고, 또 보고. 그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어요."
- '신의 장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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