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도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는 듯 합니다. 최근에 이런 저런 사정으로 책을 읽을 시간을 많이 갖지 못했는데, 다시 읽으려 하니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잘 보지 않는 TV 프로그램을 보기도 하고 그저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내 취향의 책이 아닌지, 제 상태가 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지 몰라도 몇 권의 책을 앞 부분만 잠깐 읽고 미루어두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부서에서 하는 봉사활동으로 수원 영통도서관에서 책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도서관의 지하 보존서고에 있는 책을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
도서관의 지하 보존서고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 였습니다. 아마 이런 기회가 아니면 들어가보지 못했을 장소지요. 도서관 직원과 함께 보존서고에
들어 갔습니다. 문이 열리면서 가장 먼저 저를 자극한 것은 '정말 진한 책 냄새' 였습니다. 아마도 당분간 잊지 못할 기억을 주는 냄새일 거라
생각합니다. 수많은 책들의 종이냄새와 살짝 곰팡이 냄새도 섞인 듯 하고 먼지 냄새도 한 스푼 정도 포함되지 않았나 하는 냄새였습니다. 싫지
않았습니다. 아니 진한 책 냄새로 감동받았습니다. 아마 한 동안 잊지 못할 거 같습니다.
5시간 정도 책 정리를 하고 나니, 이런 내 서재도 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나서 많지 않은 책들을 정리하고 새로 산 책들에 책 도장도 하나씩 꾸~욱 눌러주었습니다. 이제 무언가 정리가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잊혀진 관성의 법칙을 되살리는 것이 남았네요. 어제는 퇴근 후, 아내와 두 아들과 치킨을 시켜서 맥주와 함께 먹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1마리로 가능했지만, 이제는 한마리 반을 시켜서 먹습니다. 조만간 두 마리가 되겠네요. 술도 좀 먹고 저녁에는 집중도 잘
안되어 아이들을 재우면서 식구들이 모두 저녁 9시라는 이른 시간에 잠이 들었습니다. 알람을 새벽 3시에 맞춰두었습니다. 저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
새벽 3시 알람 소리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기 전까지인
6시 30분까지 책을 읽었습니다. 그 동안 잃어버린 관성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오랜만에 긴 시간을 가지면서 읽는 시간이 기분이 좋았습니다. 잠깐
졸릴 때는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방과 거실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읽었습니다. 역시 저에게 힐링은 이런 것인 듯
합니다.
읽은 책은 조지 오웰의 <1984> 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이지만, 저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조지 오웰의 책은 이전에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동물농장>은 읽었는데 이 책은 예전에 사두고 책장에 오랫동안 꽂혀있었습니다.. 내용은 워낙 유명해서 대충은 알고 있었습니다. <1984>의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빅브라더(Big Brother) 일 겁니다. 문예출판사의 책을 읽었는데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빅브라더가 아니고 대형(大兄)이라고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민음사의 번역은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하네요. 다음에는 민음사 책을 한 번 접해봐야 겠습니다.
1949년 작이기에 아직은 고전의 반열에 들기에 이르지만,
전후 시대에 쓰여진 이 책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분명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두고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많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작품의 주인공인 윈스턴이 하는 일은 과거의
모든 기록을 현재를 기준으로 모두 바꾸는 작업입니다. 과거의 역사는 중요치 않습니다. 불과 얼마되지 않은 일들도 당이 추진하는 것과 다르다면
철저히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 사람들도 자연스레 자신의 기억은 외면해버리고 당이 바꾸어 놓은 기록만을 볼 뿐입니다.
작중에 과거(역사)에 대한 당의 슬로건이 등장합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당은 현재를 지배하고 있으면서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철저하게 왜곡하고 그렇게 현재와 미래를
지배합니다. 과거를 통한 반성이라던가 뒤돌아보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당으로 대표되는 지배계급이 바라 보는 현재 뿐입니다.
이중사고라는 개념도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중사고는 두 개의 상반된 내용을 모두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입니다. 2 더하기 2는 분명 4입니다. 하지만 당에서는 2더하기 2가 5라고 합니다.
빅브라더가 대표되는 당은 절대적입니다. 그러기에 2 더하기 2는 5가 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답은 4입니다. 윈스턴은 4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5도 받아들입니다. 과연 제 자신은 4라고 대답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의미의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중국의 진나라때 환관 조고가 사슴을 황제에게 받치며 "말입니다." 라고 하자 황제 호해는 "어찌 사슴을 말이라
하는가?"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이미 조고의 권력에 겁을 먹은 신하들은 모두 나서서 말이라고 했습니다. 황제 호해는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하면서
정사에서 물러났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중사고를 어쩌면 이렇게 권력의 힘이 두려워 스스로 하고
있는게 아닌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런 적이 없는지 생각해봅니다. 분명 제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권위에 밀려서 그저 순응하지는 않았을까,
빅브라더에 의해 내 생각과는 다르게 살아가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제 생각과 의지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짜 놓은 판에
그들이 정해놓은 룰을 그저 아무생각 없이 따라야할까요? 작품의 마지막은 쓸쓸하고 아쉽습니다. 국가 또는 이데올로기라는 큰
무엇인가에 대항하는 개인의 마지막은 항상 이래야만 할까요? 너무 현실적이라 씁쓸하게 책을 덮습니다. 현실의 빅브라더가 누구일까 궁금해집니다.
윈스턴이 제가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p331 마지막
그러나 모든 것은 잘되었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얻은 것이다. 그는 대형(Big Brother)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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