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 감독의 『명량』 은 2014년 여름, 관객 수 1760만 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대한민국 영화계의 한 획을 그었다.

2014년은 유난히도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던 해였다. 무엇보다 너무나 끔찍한 참사인 세월호 침몰이 4월 16일 발생했으며, 그 사고의 현장에서 국가는 철저히 무능력했고 무책임했다. 그 이후로도 5월 전남 장성 요양병원 화재 사고, 고양터미널 화재 사고가 발생했으며, 8월 청도 오토캠핑장 사고, 10월 판교 환풍구 붕괴사고 등이 잇따라 발생했다. 국민들은 그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고, 정부에 대한 분노로 치달았으며, 정부는 언제나 처럼 열심히 정치(?)를 했다.

 

국민은 정부를 믿고 싶었는데, 믿을 수 없었다. 그 때 『명량』이라는 영화가 개봉한 것이다. 명량은 우리 역사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의미는 누구나 어떤 일이 있었는지, 결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와 김명민 주연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으로 이미 문학계와 드라마를 통해서 접해온 소재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기댈 곳이 많지 않았다. 무언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을 현실에서 찾을 수 없었다. 역사 속의 영웅이 영화로 재현되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댄다.

 

'지금 신에게 아직 열 두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가 있을까? 혼자 조용히 상상 속에 빠져 본다. 내가 만약 그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과연 나는 그런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 해전 이전에 이미 19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경험에서 분명히 열악한 상황에서도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생각해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황은 너무나 심각했다. 원균 장군이 칠천량 해전에 대패하면서 조선군의 전선과 수병들은 전멸하다시피 하고 12척의 배 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적들의 배는 20배에 달했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있었을까? 이 글을 쓰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어쩌면 붓을 잡는 그 순간까지 수없이 심장이 뛰었을 것이고, 포기하고 싶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도 사람인데 어찌 강인함 만을 갖추고 있었겠는가.



이순신 장군은 진중에서 일기를 썼다. 『난중일기』에서는 전쟁을 이끄는 장수로서의 모습과 그 뒤에 드러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강하고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일기를 써내려가면서 스스로를 다 잡았다. 『난중일기』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 76호로 지정되고,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에 보관되었다. 2013년 6월에는 전쟁 중에 지휘관이 기록한 매우 힘든 사례라는 참고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한다.


『명량』의 흥행 요소 중 하나는 훌륭한 해상 전투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 영화의 대규모의 전투신 같은 경우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대규모 전투신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데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극중 긴장감을 올려주며 영화의 절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조선의 주력 전투함인 <판옥선> 이었다. 지금까지는 이순신 장군 하면 <거북선>이 가장 먼저 떠올랐었는데, 사실 조선의 주력선은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전투를 위해서 만들어진 전투함으로 선체의 길이가 20~30m 에 이를 정도로 컸으며 최대 200명이 승선할 수 있었던 대형 전투함이었다. 영화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판옥선은 갑판을 2층 구조로 만들었다. 아래층의 격군은 적군의 공격과 상관없이 노를 저을 수 있었고, 2층에서는 전투에 전념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판옥선의 다른 특징은 선체가 상당히 높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위의 장면처럼 갑판에 나무를 걸치고 들어와 백병전을 벌이는 데 사실 판옥선은 적군보다 배의 높이가 상당히 높아서 오르기 힘든 구조였다. 당시 조선군은 활과 화약과 같은 원거리 공격은 능했으나, 백병전에서는 일본군이 우세했다. 이런 점까지 고려된 것이 바로 판옥선이었다. 거북선은 2층의 전투병도 실내에 위치하게 만든 구조지만, 전체적인 구조와 모양은 판옥선과 동일하다. 실제 거북선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왜란 중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주력은 판옥선이었다.



『명량』은 최민식이 충무공 이순신 役 을 맡았다. 이름 석자 만으로 신뢰가 가는 배우다. 그리고 왜적으로는 류승룡이 구루지마 役, 조진웅이 와키자카 役을 맡으면서 최민식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류승룡의 연기는 흥미로웠다. 그는 이미 2011년 김한민 감독과 『최종병기 활』을 통해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그때는 청나라의 명장인 쥬신타 役을 맡았었는데, 이번에 일본의 적장 役을 맡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작품의 성격상 『최종병기 활』 만큼의 인물 중심의 내용 전개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그의 긴장감 높이는 압박을 경험하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평소 소설을 많이 보다가 영화를 읽게 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개성있는 조연들의 짧지만 강한 인상을 주는 연기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는 이런 조연들이 빛나기 힘든데, 영화 속에서는 이들도 빛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에 눈에 띄는 이는 배우 이정현이었다. 정탐꾼인 임준영 役을 맡은 진구의 아내 役으로 말을 할 수 없는 역할을 맡았다. 영화에서는 남편이 떠날 때 걱정해주는 장면, 시체들이 쏟아져들어올 때 남편이 있는지 확인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배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소리지르며 치마를 흔드는 모습이 등장했는데 그 절규와 표정에서 드러나는 간절함은 관객들의 심장을 파고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중심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이 동상은 1968년 4월 27일 정부 산하 단체였던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의 공동주관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 위치의 인물 선정을 놓고 고민을 했는데, 세종로와 태평로가 뚫려 있어서 남쪽 일본의 기운이 강하게 들어오게 되어 이를 막을 필요가 있다던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인 이순신 장군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기 위해 충무공 이순신 장군 자료를 조사할수록 어떻게 한 사람의 개인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라며 수없이 질문해보았다. 우선 전세계 해전 역사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23차례의 전투 승리, 그리고 그 속에서는 명량해전과 같은 엄청난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은 수많은 병사들과 지휘관 그리고 그 뒤에는 백성들이 있다. 즉, 수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생각과 서로 다른 사정을 어떻게 하나로 모으고 집중하느냐가 중요하다. 바로 지휘관의 리더십이 가장 큰 성패를 이끈다. 


여전히 이 사회는 믿을 수 있는, 따르고 싶은 리더십을 원한다. 누군가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충분히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 부재가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아쉬움 속에 우리는 다시 그의 리더십을 찾는다. 


이번에는 정말 충무공 이순신이 내 마음에 깊이 각인 된 것 같다. 그가 남긴 말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내 삶을 다잡아 본다. 


#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첫 시험에 낙방하고 서른 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를 돌았다.

#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느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올 전쟁터에서 열 두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들을 막았다.

#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말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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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에 우리는 왜 유성룡을 읽어야 하는가?"

위기돌파 능력 유성룡은 흔히 우유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인물로, 임진왜란 와중에 발생한 여러 위기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냈다.

비전제시 능력 유성룡은 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 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 경제에 해박한 학자다. 때문에 그는 전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과 정치, 경제, 민생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다.

탁월한 국정수행 능력 유성룡은 대동법, 진관체제, 중강개시, 기득권 타파, 노비 충군 등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해 백성들의 공역부담을 덜어 주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뛰어난 현안해결 능력 유성룡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명분보다는 시급한 현안해결에 매달렸다. 극단이 아닌 중용의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능수능란한 외교력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유성룡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의 전략과 계략을 한눈에 파악한 뒤 이를 역이용하는 등 뛰어난 외교 전략을 펼친다.

유연한 사고방식 유성룡은 표면적으로 성리학자를 자처했지만 교조적인 신봉자는 아니었다. 모든 학문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다.

날카로운 인재발탁 능력 유성룡은 하급 무관이라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했고, 두 장수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행주대첩과 한산도대첩을 승전으로 이끈다.

책의 내용을 이루는 큰 줄기가 있다면,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 받치고 사대부의 특권보다는 나라의 존립과 백성들의 안정을 꾀하는 유성룡의 모습과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을 떠나 난을 피하고 싶어하고 난이 끝난 후에는 진정한 공신들을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고 처단하는 선조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사대부라는 자신들의 특권을 버리지 않고 권력에서 멀어지지 않으려는 그 알량한 사대부들의 모습과 조선조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지금도 항상 볼 수 있는 당파싸움이 그 병풍을 만들어 주고 있다.

너무 안타까웠다. 중간 중간 징비록에 나와있는 그 당시의 처참한 상황속에서도 그저 세치 혀로 당파싸움이나 하려 했던 것들이 너무나 화가 나게 했다.

약 520년 전의 임진왜란(1592)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유성룡> 결코 5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래서 역사는 반복되고 과거로 부터 배워나가는 것이다.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후, 서로 상이한 의견을 내어 놓은 대신들, 명나라에 의존하려는 조선의 왕 선조, 외교력의 부재로 인한 국가적 손실, 서로 다른 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 등이 과연 500년 전만의 일인가? 라고 물어본다.

과연 2012년 대한민국을 사는 내가 접하는 현실의 모습은 과연 위의 상황과 어떻게 다른가? 나는 딱히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러한 리더 바로 유성룡이 다시 한 번 나타나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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