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67
사료 그 자체는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자격을 구비한 사료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사건과 관련하여 그 사건이 일어난 동시대의 사료여야 하며, 또 그것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의 기록이어야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반적으로 문헌 사료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과거의 사실과 사료의 관련 정도에 따라 1등 사료니, 2등 사료니 하는 차등이 주어지게 된다.
- 호리고메 요조 지음, 박시종 옮김, [역사를 보는 눈] 개마고원, 2003년 48쪽
p68
사료 비판 작업에는 단순히 사료 그 자체의 원형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 말고도 그 안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이 진실인지를 따지는 작업도 표함된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하여 사료 비판이라고 하는데, 아주 번거로운 작업이긴 하지만 역사가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이다. 그것이 번거로운 작업이라고 하는 주된 이유는 어떤 사료를 기록으로 남겨준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좋고 나쁨과 사랑과 미움과 이상과 이해를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고, 또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기록을 남긴 사람이 아무리 양심적이고 객관적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또 설사 기록상의 잘못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 양심적이고 객관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경우는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사료 비판 작업에 있어서는 언제나 성악설의 입장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료 제작자 역시 살아 있는 인간이라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종다양한 이상이나 이해, 좋고 나쁨이나 사랑과 증오 따위의 감정에 따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허위의 사료나 혹은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사료를 쓰게 마련이다.
- 호리고메 요조 지음, 박시종 옮김, [역사를 보는 눈] 개마고원, 2003년 49~74쪽 발췌
p80
영조는 재위 3년(1727년, 정미년) 이른바 정미환국으로 소론 온건파에 힘을 실어주고, 이인좌의 난 이후인 재위 5년 기유대처분으로 사실상 탕평책을 실시한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노론은 모두 등용하지만 소론은 온건파만 등용하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노론은 탕평책에 불만이 많았다. 결국 나주벽서사건으로 탕평책은 완전히 붕괴되고 노론 일당독재가 시작된다.
p82
숙종 43년(1717년) 정유독대, 숙종이 노론 대신 이이명과 단둘이 만났다. 조선에서는 원래 왕과 신하가 단둘이 만날 수 없었다. 입직 승지와 사관이 입회해 기록을 남기는 것이 원칙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독대 내용은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는 숙종의 말이었다.
세자 윤을 부탁한다는 말은 없었다. 그는 부왕과 노론이 자신을 밀쳐내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입을 다물고 빌미를 잡히지 않으려 애썼다.
신중한 처신으로 노론에 책잡히지 않은 세자 윤은 왕위에 올랐지만 고립무원 상태에서 노론에 휘둘리다 독살설을 남기고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임인옥사 때 노론에서 청나라에서 구입한 독약을 경종의 수라에 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경종은 누런 황수를 한 되나 토했으나 죽지 않았다. 토하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이다. 누가 독을 탔는가? 물론 노론이다. 이때 노론은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는 더 강한 약을 사와야겠다." [경종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임인옥사를 통해 노론이 국왕으로 추대하려 한 인물이 연잉군, 즉 영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래서 영조가 즉위하자 강력한 반발이 인 것이다.
p83
정병설의 말마따나 사도세자는 신중했다. 그러나 외부로 드러내길 꺼리던 가치관이 드러나는 순간이 온다. 바로 나주벽서사건이다.
영조 31년(1755년)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가 급히 올린 장계 한 장으로 나주벽서사건의 막이 오른다. "조정에 간신이 가득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흉서가 나주 객사에 내걸린다. 일부일 만에 체포된 범인은 윤지, 그는 이인좌의 난 때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나주로 옮겨 30년 가까이 풀려나지 못한 소론 강경파였다.
수많은 관련자의 목이 잘려나가는 공포의 살육이 시작된다. 영조는 분노가 극에 달해 직접 능치처참을 주관하고 그 현장에 세자를 대동하기도 한다. 그렇게 탕평책은 무너지고 노론 일당이 독주하는 정국으로 변했다.
p90
그러면 시파와 벽파는 어떤 세력인가? 이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신임의리, 임오의리에 대한 인식 문제와 정조의 정국 운영에 대한 동조 여부가 미묘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체로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면서 정조의 정국 운영에 동조한 세력을 말하며,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면서 정조의 정국 운영에 동조하지 않은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즉 시파는 친정조 세력이며, 벽파는 반정조 세력이었다. 시파의 연원은 영조 후반의 후홍파, 북당이며 벽파의 연원은 공홍파, 남당이었다.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2] 아름다운 날, 2007년, 214~215쪽
p94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직접적 사건, 나경언의 고변에 대해 살필 차례다. 영조 31년(1755년) 발생한 나주벽서사건으로 소론은 초토화된다. 설상가상으로 영조는 재위 35년(1759년) 예순여섯의 나이로 열다섯의 어린 신부를 맞아들인다. 정조 사후 수많은 남인과 천주교도에게 살육을 자행한 정순왕후 김씨다. 김씨의 부친 오흥부원군 김한구는 과거시험에 번번이 낙방한 낙방거사지만 충실한 노론 당인이었다. 딸이 왕비가 되면서 조정에 나와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다.
왕비 김씨와 후궁 문씨, 영조의 장인 김한구와 처남 문성국 등의 외척들 그리고 김상로 같은 노론 중진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어 영조와 세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세자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소론이 몰락해버린 조정은 노론의 차지가 되었고, 내전은 정순왕후 김씨와 숙의 문씨의 차지가 되었다. 세자는 공, 사 모두에서 고립된 것이다.
이런 경우 세자가 의지할 곳은 처가, 즉 홍봉한가밖에 없었다. 하지만 홍봉한은 물론이고 세자빈 홍씨마저도 이미 소론으로 기운 세자 편은 아니었다.
-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2007년, 220쪽
세자가 죽은 해에 영조의 나이 예순아홉, 병을 달고 산 영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 대리청정하는 세자의 즉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비의 아버지 김한구, 숙의의 오라비 문성국, 세자의 장인 홍봉한 같은 척신과 김상로, 홍계희, 윤급 같은 노론 중진이 배후에서 움직인 사건이 나경언 고변이다. 김한구와 홍봉한은 권력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지만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p107
홍봉한이 습염제구를 다 준비했다고 친정아버지를 두둔하고 있으나, 실은 이때까지만 해도 사도세자의 명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었다. 명이 살아 있는 사도세자를 위해 홍봉한이 미리 습염제구를 서둘러 준비한 것은 사도세자는 곧 죽을 운명, 아니 꼭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분위기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세손이 영조 승하 후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을 보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을 족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오화변의 책임을 노론에 돌리고 노론의 영수였던 홍봉한 및 혜경궁 홍씨의 형제마저 치죄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임오화변 당시 검열 윤숙은 사도세자의 처형을 극력 반대한 사람인데, 당시 소극적인 태도로 방관하던 영의정 신만과 좌의정 홍봉한 등응ㄹ 꾸짖으며 "이렇듯 위급한 때를 당하여 대신들이 천계에 머리를 부수면서 죽음을 다해 간하지 못하고 있으니 장차 어디에다 쓰려는 대신들인가" 라고 성토하여 유배되었다가 정조가 즉위하자 다시 기용된 일도 재삼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전에 둔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은 적극적으로 사도세자의 참화를 막았다기보다 세손의 안위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혜경궁 홍씨의 이러한 태도는 이미 기울어버린 남편의 형세보다 기존의 틀 속에서 키워나가야 하는 아들의 안위를 더 중하게 여긴 모정의 발로일 것이다.
- 이금희 [한중록(상)], 국학자료원, 2001년 53~54쪽
p121
풍족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지나치게 많은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하거나 행운 덕분에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특권은 그들의 맹점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그들은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으로 정당화한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우리는 누구나 인생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특권에는 맹몽적이다.
- 엘리엇 애런슨, 캐럴 태브리스 지음, <거짓말의 진화> 추수밭, 2007년 70쪽
p133
[청년] 민주화 이후 학생운동이 답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신영복 선생] 최근 민주 변혁 진영의 대응이 성공적이지 못한 이유는 세력 자체가 약해진 탓도 있지만, 우리나라가 기본적으로 막강한 보수 구조 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1623년 광해군이 폐위되고 난 뒤로 우리나라의 '정치적 지배 블록'은 바뀐 적이 없습니다. 광해군 폐위 뒤 조선은 노론 세력이 거의 지배했고,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권력의 상층부를 차지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일제강점기의 상층부 권력은 해방 뒤 청산이 안 됐습니다. 경찰은 일본 경찰, 군은 일본군 중심이었죠.4.19 이후에도 한민당 출신이 사실상 권력을 잡았고, 5.16 뒤엔 군부를 끌어들였습니다. 민주공화당, 신한국당, 한나라당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 한겨레신문, 2011년 7월 15일
p156
지식인은 공동체가 처한 삶의 고통과 질곡을 이해하고 개선하기 위해 대중과 더불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지. 우매한 대중을 탓하고 자신을 전문가로 내세워 자화자찬하며 바로잡아야 한다고 위세를 떠는 사람이 아니다.
p168
E.H. 카는 "역사를 연구하기 전에 먼저 역사가를 연구하라"고 했다.
p175
한국사의 연구는 좁은 범위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그러나 그 연구자의 자세는 우리 역사를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연구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하면 세계사의 보편성 속에서 우리 역사의 개별성을 찾는 것이 될 수 있도록 평소 그 시야를 넓게 설정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략)
나는 전공이 서양사가 아니면서도, 서양사, 세계사에 관한 저술을 부지런히 구입하고 참고하였다. 관심의 초점은 서양 문명 속에서 서양학자들이 세운 역사학, 역사 발전의 논리와 법칙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양 문명의 유산도 실제로 답사하고 참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지식산업사, 2011년, 104~112쪽
p182
대학은 바르고 의미 있게 사는 법이 아니라 돈 벌고 출세하는 시장주의 기술을 가르치고 패거리를 만드는 곳으로 전락했다. 이른바 명문대는 그런 것 잘하는 대학이다. 계급 증명서가 돼버린 명품 브랜드에 홀리듯 사람들은 명문대 브랜드에 줄을 선다. 대학은 계급과 브랜드를 분석하고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수호자가 돼 수익과 특권의 관리에 매달린다.
- 한겨레신문, 2011년 6월 28일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든 조선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
- 강영주, <벽초 홍명희 평전>, 사계절, 2004년 96쪽
p183
전태일 선생은 차비로 어린 여공에게 빵을 사주고 몇 시간을 걸어 다니면서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라는 고뇌를 남겼다. 지식인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말이다.
p193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의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 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더사거나 혹은 고치라는 것이 아니다. - 신채호, <조선상고사>
p221
조선에서 주자학은 과연 진선진미한 학문의 극치이며 성역인가? 남송에서 주희가 위대한 사상가라면, 조선에서 주희는 공자에 버금가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감히 '주희'라 부를 수 없었고, '주자'라는 극존칭이 붙여지는 한편, 심지어 피휘의 관행까지 생겨났다.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갈망하는 최고의 경지는 주자를 철저히 모방하는 것이었고,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는 훈장은 주자학의 수호자라는 호칭이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독선과 맹신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념과 학문을 향한 순수한 마음의 발로이며, 사상계 전반의 합일된 견해였다. 적어도 퇴계, 율곡의 문인들까지는 주자학 자체에 대한 열정과 순수성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권력투쟁은 이념과 학문의 순수성을 철저히 파괴하며 독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단죄하는 방법은 법도 아니요, 왕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이념의 칼날'인 주자의 권위와 명망이었다. 결국 주자는 본의 아니게 사상을 탄압하는 데 동원되고 있었다.
송시열이 주자의 화신처럼 행세할 때, 조선에는 이른바 '사문난적'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문난적은 '주자학을 문란하게 만든 도적'이라는 말로서 학문적인 매장이요. 인간적인 폐기를 의미했다.
주자학은 노론의 전유물인가? 송시열의 입김이 조선의 정치, 사상계를 격동시킬 때, 주자의 위상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 여파로 두 사람의 이단이 탄생해 세상에서 철저히 버림받았다. 남인 윤휴와 소론 박세당이 바로 그들이다.
당시 송시열에 대적할 만한 간담을 지닌 사람은 전무했다. 대부분 송시열과 대립을 회피하거나 적절히 타협하는 선에서 자신의 안위를 도모했다. 이것이야말로 당시대인들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처세술이었는지도 모른다.
송시열의 호적수로는 윤휴가 유일했지만, 그 역시 비명에 갔다. 박세당은 윤휴가 왜 죽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윤휴의 죽음은 박세당에게 교훈이 될 수 있었지만 ,수용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는 윤휴가 가던 바로 그 길을 가고 있었다. 윤휴가 [주자집주]를 무시한 반주자학자였다면, 박세당은 반주자학자인 동시에 반유학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주자의 [사서집주]를 개변함은 물론 노장사상에도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변록], [신주도덕경],[남화경주해산보]는 바로 그가 남긴 이단의 흔적들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노론의 독단이요, 한 시대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도 박세당을 윤휴와 더불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사문난적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분명 '노론사관'의 맹목적인 추종자일 것이다.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2> 아름다운날
p258
과거가 불우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불우했다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
- 전태일, 1969년 12월 31일 일기
p269
조선 후기 200년간의 당쟁을 한국사 전체에 적용해서는 안된다. 실상 나라가 망할 때는 당쟁이 아니라 몇몇 노론 척신 가문의 일당독재가 시행되고 있었다. 오히려 당쟁의 배경이 되는 사림 정치의 틀이 살아 있어서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졌더라면 난국 타개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망국의 직접적인 책임은 세도정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도정치가 곧 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정치 형태인 양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왕조는 벌써 망했어야 했다. 조선왕조가 500년 이나 지속된 까닭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1>
p274
해방 후 역사의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일본인 학자, 즉 식민사학자에게 역사학을 배운 이른바 실증주의 학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통사를 편찬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해방과 동시에 해체됐지만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는 그대로 살았다는 이야기와 같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와 현재 주류 사학계의 뿌리 깊은 역사 전쟁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p274
해방이 되었을 때, 서울에는 전통적 역사학에 기초하여 우리 역사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신채호 계열의 정인보, 안재홍 등 민족주의 역사학 또는 신민족주의 역사학의 학자가 아직 건재하고 있었다. 신학문으로서의 근대 역사학을 전공하고 신민족주의 역사학을 표방하였던 손진태, 이인영 등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6.25전쟁 이후에는 이들 모두가 북상을 하였고, 따라서 그 학문적 전통이 대대적으로 계승 발전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역사학계의 원로로서 주요 대학의 교수직을 독접하였으며, 그 저술은 역사학계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지도하는 자산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중심이 되었던 것은 이병도의 [조선사대관]과 그가 이끄는 진단학회의 <한국사>(전7권)이었다.
-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 책과 영화 > □ 인문, 역사, 미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대한 패배자 (0) | 2014.09.16 |
---|---|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2 (0) | 2014.08.25 |
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1 (0) | 2014.08.15 |
술꾼의 품격 (0) | 2014.08.09 |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 (0) | 2014.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