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중 화자인 겐타로는 일본에서 자라고 공부했다. 그가 열세 살 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세상에 변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후에 여러 사정으로 김경식이라는 한국 이름을 갖게 된다.
겐타로에게는 시케하루라는 절친한 친구가 있다. 어느날 시케하루는 도서관에서 간단히 자료만 찾아주는 보수가 좋은 일을 겐타로에게 같이 하자고 한다. '만주'라는 단어에 대한 검색한 책에 대해서 조사해서 U라는 누군가에게 메일로 보내주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시케하루가 사라진다. 그리고 겐타로는 사라진 시케하루를 찾아 나선다.
시케하루를 찾으러 가는 여정에서 그는 종이뭉치 속에서 다른 세대의 사람인 요코이자 이타츠 푸리카를 알게 되고, 동주라는 한국 시인을 알게 된다. 그 속에서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
윤동주를 만나게 되다.
구효서 작가의 <동주>라는 책을 만났다. 좋은 인연을 만났다. 책과의 좋은 인연 중에 하나는 책 속에서 장르가 확장되고 새로운 호기심과 궁금증을 일으키는 확장성이다. 소설 <동주>를 통해서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그의 시에 대해 관심이 생겼고, 그가 태어난 곳인 간도는 과연 어떤 역사가 있는지 궁금했다. 자연스럽게 시와 역사로 이어진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아까운 삶을 마쳤다. 겨우 29살이었다. 지금의 나보다도 어리다. 그는 1943년 일본 특고경찰에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1944년 3,4월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형의 징역에 처해졌다. 그런 그는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에는 생체실험이라는 짙은 의혹이 드리워져 있었다. 짧은 삶 속에서 그는 시 119편과 산문 4편을 남겼다. 이 시들 중에서 특히 <서시>와 <별 헤는 밤>이 우리에게 익숙하다.
간도의 상징성과 작중 인물
간도는 우리에게 아픈 곳이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흉년으로 사람들은 두만강을 넘어 간도 지방으로 이주를 시작했고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그래서 1926년 당시에는 중국인이 9,912호인 반면 우리나라 사람의 호수는 5만 2,881호에 달했다. 그리고 이곳은 우리민족의 항일투쟁의 근거지가 되었다. 동시에 중국, 러시아, 일본의 열강들의 경계 속에서 파란만장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간도는 마치 정체성에 고민에 빠진 섬과 같았다.
이런 간도와 작중 인물들의 삶이 마주친다.
동주는 일본에서 어쩔 수 없이 히라누마라는 이름으로 살게 된다. 동주이면서 히라누마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소설 속 인물인 요코는 요코인 동시에 이타츠 푸리카로 살아간다. 처음에 자신은 일본인이라 생각했지만 자신이 이누아족이라는 것을 알아가며 정체성을 회복해간다. 작중 화자인 겐타로 또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김경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들은 사이를 살아갔다. 하나가 아닌 여러 곳에 걸쳐져 있는 삶 속에 머물렀다. 하지만 결국은 자연스럽게 정체성에 이끌린다.
<동주>는 윤동주가 이야기의 흐름에 중심에 서 있지만, 요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요코는 어렸을 때 고등경찰이라는 신분을 속이고 동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도리우차 아저씨를 알게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팥빙수를 얻어 먹는다. 그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이유없이 팥빛수를 좋아하는지, 왜 그렇게 시원한 얼음이 좋은지 모른다. 책을 같이 읽은 한 친구가 말한다. 요코는 원래 아이누족인데 아이누족은 훗카이도에 터전을 잡고 있고 그곳은 눈이 많은 곳이란다. 그녀도 모르게 그녀가 이끌리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이유없이 빠져드는 무언가가 삶에 때로 중요하게 작용하는 법이다.
언어의 의미와 정체성
<동주>에서는 언어에 대한 표현이 자주 나오며 중요시 다루어진다. 언어는 곧, 영토이며 민족이다. 윤동주가 일본에서도 늦은 밤 한글로 써내려 온 시는 어쩌면 하나의 외로운 민족해방운동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언어란 무엇을 나타낼까?
p200
나는 만주와 조선에서 보았고, 관동대지진으로 들었어. 아버지가 직접 일본에서 그 지진을 겪으셨거든. 쥬고엥고짓센. 조선에는 없는 어두유성을 말하게 해서 발음이 정확치 않으면 바로 죽여버렸지. 말. 말로 조선인을 구별해냈던 거야. 말 한마디가 삶과 죽음을 갈랐지.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고향으로 편지를 하면서도 걱정 말라는 조선말을 못 쓰고 네바 마인도라는 일본식 영어 발음 딱 한 줄 적어 보냈겠는가.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과 배척은 실로 추악해. 동화라는 그럴싸한 말 속에는 그런 끔찍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거야. 말이 같아야 한다고? 같아지는 게 아니라 빼앗기는 거지. 말을 빼앗기면 다 빼앗기는 거고.
p339
시란...... 말이 있어야 하고 말은 말의 영토가 있어야 하지. 조선과 조선의 말이 있어야 시도 있는 거잖아. 지금 조선도 말도 다 빼앗기고 있어. 시를 지킨다는 게 말을 지키는 거라면, 말의 영토부터 지켜야겠지. 되찾아야겠지. 꼭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하면 지켜낼 수 있을까?
얼마전에 기사를 하나 보았다. 중국이 윤동주의 생가를 국가공인 관광지로 추진한다는 것이다.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으로 알리며 A에서 부터 AAAAA로 관리되는 국가공인관광지 중 AAA로 지정할 계획 및 지원할 예정이란다.
기사를 접하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였다. 우리나라의 정책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충분하며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 역사를 빼앗기는 것은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p50
여학생이 예뻣기 때문에 모모와레도 예뻐 보였을까. 나는 여학생을 연못에다 밀어 빠뜨리는 상상을 했다. 미웠다. 대학생인 게 미웠고, 성인답지 않는 모모와레가 미웠고, 동주와 웃으며 신사를 기웃거리는 사뿐사뿐한 걸음걸이가 미웠고, 나는 사람을 미워하는 인간이니까 그녀가 미웠다. 꼬마 신사 앞에서 나란히 기원하는 게 싫었고, 가지런히 모으는 두 손이 싫었고, 검은 교복 치마 아래로 드러난 가느다란 종아리가 싫었다.
p58
뭘 그토록 쓰는지 알 수 없었다. 동주는 말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입을 열어 말하는 대신 속으로 삼켰고, 삼키고 남더라도 종이에 적는 사람일 뿐이었다.
p60
동주가 준 종이쪽지를 버리지 않았다. 찐만두 끄트머리를 콩알만큼 떼어 종이 뒤에 으깼다. 내 방 벽에 꽝 붙여두었다. 볼 때마다 작게 소리 내어 읽었다. 만쥬 -. 만쥬 -.
처음으로 읽고 쓰게 된 글자가 만쥬였다.
내 방에 종이쪽지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종이에 글자를 써 주었던 건 동주가 아니었다. 그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가모 다리 밑에 사는 늙은 거지, 교진에게 써 달라고 졸랐다.
p75
꾸며낸 말일 수 없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망측한 손동작과, 몽롱해지고 부르르 살짝 떠는 모양을 이케다네는 끝까지 지켜봤으니까. 못된 아비와 사는 나로서는 그런 흉내 따위 누워서 떡 먹기였다.
p76
말은 말로만 말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고, 눈빛을 짓고, 말없이 웃을 때, 해일 같은 경멸이 나를 덮쳤다. 아니라고 살갑게 말한 들, 아닌 게 아닌 것이다. 나쁜 여편네들이라고 생각했다.
p79
학생들은 더 오래도록 밖에 남아 제가끔 잘난 척 떠들었다. 그저 배우는 게 일이니, 잘난 척마저 안 한다면 먹고 사는 재미도 없겠지. 고까웠다.
p88
말은 젖 같은 거야. 그게 육신이 되고 영혼이 됐을 테니까. 젖과 같은 어머니의 조선말을 나는 먹고 자랐어. 그래서 내가 조선인인 거라고 생각해.
p91
그에게 다가가 어쭙잖게 사과할 내가 아니었다. 정말 그건 내가 아니었다. 안 하던 짓을 하면 내가 젅혀 다른 계집아이로 확 바뀌어버릴 것 같았다. 바뀐 나는 감당하기가 무서웠다.
p92
지금 생각건대, 교토에 살면서도 동주는 간도를 떠나지 못했던 것 같다. 무언가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뜻으로서의 간도를. 고향과 나라와 이름과 말을 잃은 사람이었나 그는 그때껏 멍에처럼, 간도를 등에 지고 다녔던 건지도 모른다.
p95
동주와 내가 다른 점이 그거였다. 나는 고향을 버렸고, 동주는 잃었다. 버린 사람은 교만하고 버릇없고 사나워졌다. 잃은 사람은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부끄러워했다.
p107
새로운 책들을 처음 뒤적거리는 시간이 나는 가장 성가셨다. 아무 준비 없이, 섣불리 진입해 들어오는 인간에게 호락호락 제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게 책이었다.
책을 어루만지며, 표지 저자 출판사의 이름자 하나까지 천천히 보고, 뒤표지의 리드 문안을 읽고, 날개에 실린 저자의 약력까지 정성들여 읽어줘야 비로소 자신의 속살을 내미는 게 책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언제나 책읽기를 시작했다.
p118
엄연히 존재하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말들은 대개 비밀이나 중요한 사실들을 품고 있으면서, 그 비밀의 질량에 해당하는 인력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밝혀지는 것이라고.
p137
입지도 않은 옷을 꺼내 다시 빨고 널었다. 오징어를 사들이고 검은 밥을 지었다. 검은 밥은 아버지의 뱃속에 들어가 색정을 불러일으켰다. 긴 혀로 싹싹 핥고, 부글거리는 것을 바깥 여자들 몸속에다 쏟아부었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붙지 않았다. 남은 음식을 개처럼 퍼먹고 피둥피둥 살찌는 건 어머니였다. 내 몸은 좀체 여물지 않았다.
p138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맘의 반은, 역시 나 자신을 향한 거였다. 억눌린 저항을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하는 일이라면 나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비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찬란했으니까.
p139
나라는 전쟁 중이어서 엉망이었고, 가정은 달과 음식과 야비한 칭찬으로 너저분했다.
p140
그래서였을까. 어머니는 일찌감치 이승에 있지 않았다. 멍청하고 맛이 간 건 분명했으나, 세상 어디에도 없이 편안한, 말도 표정도 없는 적막의 땅 위에 가만히 영혼을 부려놓은 듯 했다.
p155
조선이 죽은 거네요.
내 말에 그가 다시 깜짝 놀랐다.
그래서 슬픈 거네요. 그쵸?
그가 지그시 이를 앙다물어, 떨리는 턱을 진정시켰다.
고향도 따라 죽었으니까, 맞죠?
그늘진 그의 눈자위가 흔들렸다. 내가 말을 잘못한 걸까.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게 내 장기이긴 했지만, 그럴 맘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조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내가 알 바 아니었다. 고향이 어찌 됐는지, 그의 표정이 뭔가를 애도하는 듯해서 그냥 해본 말이었다. 아니면 말고.
죽지 않는다.
그가 말했다.
결코.
이 두 마디를 기억했다. 그럴 일이 있었다. 죽지 않는다. 결코. 일본말이었으므로 내 방으로 내처 가 히라가나로 적어둘 필요는 없었다. 동생도 어머니도 죽지 않았어. 고향도 죽지 않는다. 생명이 다할 때 까지 어머니란 가슴에 살아 계시는 거다.
p157
나는 에비라에 갈 수 있었으나 가지 않았다. 그들은 간도로 돌아가길 원했으나 돌아가지 못했다. 이태 뒤 그 둘은 일본 땅 감옥 안에서 죽었다. 스물아홉 살이었다.
p158
동주도 어쩌면 오카미 상의 음식에서 어머니 맛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맛이 아니더라도 정성과 솜씨 혹은 사랑 같은 것에서, 어머니는 고향이고 고향은 어머니일 수 밖에 없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곳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곳을 아파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에비라와 말없는 어머니가 나에게 참람한 말이 되었다면, 간도와 어머니의 넘치는 사랑은 동주에게 시가 되었다.
동주는 유독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리워했다.
p196
일본인이 우수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유능한 학자들이 혈액을 연구하고 인류학과 유전학을 응용하고 민속학을 정리하는 걸 굳이 과학이라고 한다면, 그건 곡학이지 과학이 아니야. 진짜 과학이라면 그런 일본인 학자들을 단단히 병들었다고 진단하겠지.
p199
서구세력의 동점을 막자면서 일본은 서구세력이 하는 짓과 똑같이 조선을 침략한 거야. 그걸 어찌 동료국이며 하나랄 수 있겠는가. 일본도, 일본의 학자와 정객도, 너도, 스스로 미친 허울의 명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 너희들은 너희들이 말하는 적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어.
과학도 역사도 문화도 오로지 일본제국의 아시어 점령 도구일 뿐이지. 말도 그래. 인위적으로 급속히 국어라는 괴물을 만들어 그 말로 군주국체를 강화하더니, 이제는 조선의 말까지 빼앗아 머리도 가슴도 모두 일본제국의 사악한 본성에 부복하도록 만들자는 거 아닌가. 대포나 총칼보다 무서운 게 너희들의 국어라는 무기야.
p200
나는 만주와 조선에서 보았고, 관동대지진으로 들었어. 아버지가 직접 일본에서 그 지진을 겪으셨거든. 쥬고엥고짓센. 조선에는 없는 어두유성을 말하게 해서 발음이 정확치 않으면 바로 죽여버렸지. 말. 말로 조선인을 구별해냈던 거야. 말 한마디가 삶과 죽음을 갈랐지.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고향으로 편지를 하면서도 걱정 말라는 조선말을 못 쓰고 네바 마인도라는 일본식 영어 발음 딱 한 줄 적어 보냈겠는가.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과 배척은 실로 추악해. 동화라는 그럴싸한 말 속에는 그런 끔찍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거야. 말이 같아야 한다고? 같아지는 게 아니라 빼앗기는 거지. 말을 빼앗기면 다 빼앗기는 거고.
p265
어른들의 당초 뜻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한 만주 상황과 조선족의 불안이 내부적인 불신과 편 가르기를 초래했습니다. 어른들이 품으셨던 당초의 뜻, 그리고 신앙의 본령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에게는 흔들림 없이 문학에 매진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부디 제 앞길을 열어주세요. 가족과 교회와 간도와 조국을 결코 한 순간도 잊지 않겠습니다. 조선이 없으면 조선의 시인도 없습니다. 저는 조선의 시인이겠습니다.
p266
간도의 조선인들과 교회와 집안이 일제 말기에 점증하던 사회 불안으로 점차 근본주의적 성향으로 경화되면서 노정하기 시작한 권위와 신앙의 가부장화에 저항적이었을 뿐이다.
p269
내가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건, 이미 존재가 거의 상실된 아이누가 있었기 때문이고, 내가 그중 한 개체이기 때무이며, 상실의 원인과 과정을 연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누는 간도보다 훨씬 큰 북해도를 갖고 있었으나 내가 '장소'라고 말하는 것이 '땅'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누적인 것, 조선적인 것으로 차별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땅은 이미 그들의 영토도 뭣도 아니다. 그것이 없어지는 순간 존재는 상실된다. 차별되는 것. 그중 으뜸 되는 것을 동주는 말이라 여겼음에 틀림없다.뒤늦게 아이누어를 배운 나로서 단언하는 바가 그것이다. 동주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문과를 택한 것, 조선말로만 시를 쓰고 조선 시인으로 죽은 까닭이 그것이다.
조선민족이 거했으되 서로 소통하지 못했다면 간도는 존재할 수 없었다. 존재했으되 조선말이 아닌 일본말을 썼다면 역시 그것은 간도가 아니었다. 동주는 그 둘을 알았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모르지 않았다.
p295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시를 능지처참하는데 어찌 시인이 참멸을 멸하겠느냐. 감히 시인의 손으로 제 시를 훼손케 아다니, 극악하고 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육살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p296
나는 그걸 보고 오는 길이란다.
그가 말했다.
그렇게 죽어가는 시인을, 동주를......
p297
고향 간도와 조국 조선을 앗기고 마침내는 말과 이름까지 앗겼던 동주, 그러면서도 앗길 글로 밤새워 시를 쓰며 간도와 어머니를 그리워 하던 조선 청년.
p297
동주가 조선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것은 그것이 더 좋고 더 나아서가 아니라 고유성을 지키려 했던 거고, 그것을 잃으면 실상 모든 것을 잃는다는 신념 때문이었을 게야. 들판의 모든 꽃이 사쿠라가 돼버리면 세상에는 꽃이란 것 자체가 없어지는 거란다. 사쿠라는 다른 꽃이 있어야 사쿠라인 게지. 일본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문명을 사칭하여 남의 나라를 강압적으로 침략하고 지배하고 있어. 망하는 길이지. 동주는 동주의 꽃을 피우려 했을 뿐이야. 시인이라면 백화가 만발한 꽃동산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니까. 꽃은 서로 다르되 향기의 숨결로 생명을 나누며 함께 숲을 이루지. 다르면서 서로 의지하고 교통하는 생존의 이치를 아는 시인이라면 남을 치거나 미워하지 않는단다. 다만 자기를 지키다 꼬처럼 고요히 죽어갈 뿐이지. 이런 시인은 어쩌면 험악한 세상을 바꾸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험악한 세상도 이런 시인을 결코 바꾸진 못한단다. 앞으로 미친 세상은 마땅히 이래저래 바뀌겠지만 동주와 같은 시인은 시인으로 영원하다. 모두가 자기의 고유성을 죽음으로 지킬 때, 동화를 명분으로 앞세운 침략의 야욕은 필패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지.
p305
앗긴 말과 이름으로 밤새워 시를 썼던 그. 고향의 어머니와 말의 영토를 그리워하던 청춘. 그가 향하고 노래 부르던 곳 같도가, 나로 하여금 훗카이도로 거슬러 오르게 한 것이다.
p335
여기서 나에게 말해줘.
동주가 물가에 다다라 걸음을 멈췄다. 명준은 동주와 눈길을 마주쳤다. 동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가 한 말을 책임지겠다고.
내가 한 말?
명준이 물었다.
응. 지금까지 네가 한 말.
네가 내 말을 받아들인다며.
받아들이겠어.
정말 너는 누구보다 시를 잘 알고 잘 느끼고 잘 말하며 잘 쓸 거고,
고스란히 네 시를 잘 살아낼 거라는 내 판단을 받아들인다면,
받아들이겠어.
나와 시를 나누고 나를 외면하지 않고 나를 격려해달라는 부탁을 받아들인다면.
받아들이겠어.
그럼 말해봐. 어떻게 책임지면 되는 건지?
나와 시를 나누고 나를 외면하지 않고 나를 격려해줘. 고스란히 네 시를 살아내줘 기필코.
동주, 너는 정말 못 말리겠어. 너 없인 못 살 것 같아.
p339
시란...... 말이 있어야 하고 말은 말의 영토가 있어야 하지. 조선과 조선의 말이 있어야 시도 있는 거잖아. 지금 조선도 말도 다 빼앗기고 있어. 시를 지킨다는 게 말을 지키는 거라면, 말의 영토부터 지켜야겠지. 되찾아야겠지. 꼭
아직 우리는 우리의 말을 하고 잇어. 영원히 그럴 거야. 저들이 아무리 말을 압살하려 해도 우리가 쓰면 우리의 말인 게지. 명준이 네가 목숨을 걸고 유격구에 가려 하듯 목숨을 걸고 말을 지키면 조선은 없어지지 않아. 결코 없어지지 않아.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하고, 반드시, 모두가 그 일을 하도록 해야지. 너와 내가
동주 네 말마따나 조선인민 모두가 끝까지 조선말 투쟁을 한다면 아무리 악독한 일제라 해도 조선민중을 다 죽이진 못하겠지.
그렇다면 조선은 살아 있는 거네. 말이 총은 아니나 총보다 못한 무기는 아니지. 밀영에서 총을 닦듯 우리 밖에 남아 말을 닦으면 되지 않겠나.
p340
영토와 말 중 어느 쪽이 우선일 수 없기에, 둘 다 우선이기에,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틀리지 않다고 생각해. 다만 너는 공부하기로 했으니 부디 남아서 말을 지켜. 나는 이 땅에서 저들을 몰아내겠어. 그러면 우리는 결국 시를 지키는 거야.
약속도 지키는 거고?
물론.
총으로 시를 쓸 수 있을까? 시인이?
진정으로 네가 나를 시인으로 부른다면.
시인이야, 넌.
그렇다면 총 끝에서도 시가 나오겠지. 시란 ......
시란?
그곳이 어디든, 언제든, 무엇을 하든, 시인의 가슴에 거하는 거니까.
이렇게 너는......
동주는 얼른 말을 잇지 못했다. 천천히 숨을 고른 뒤 입을 뗐다.
이렇게 너는 또 ...... 나에게 시를 나누어주는구나. 네 시는 귀하다. 눈물겹다.
언제 어디서든 나는 동주 너와 함께할 거다. 너는 시인이니까.
p393
죽음의 시점이 달랐을 뿐이다. 자연이로서의 죽음보다 시인으로서의 죽음이 앞섰다. 자연인 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반복된 바닷물 주사로 사망했으나 시인 동주는 이미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숨이 다한 거였다.
시인의 죽음을 몰고 온 그 번역이라는 것은, 일반적 의미의 번역이 아니었다. 시인의 생명을 빼앗는 선고였고 무자비한 집행이었다. 말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시를 자신의 손으로 훼손케 하는 능욕이었다. 뭘 썼는지 봐야겠다, 그러니 허튼 수작 말고 똑바로 옮겨 적어라. 정신과 사상을 감정하겠다.....
을러대고 특고 앞에서 적바림된 것들이 어찌 글일 수 있으며 동주의 시라 할 수 있을까.
p395
동주의 심장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박동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의 언어가 멈춘 것은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서였다. 그의 심장박동이 멈출 때 숨도 따라 끊어진 거였으나 시인으로서 품었던 그의 정서가 끊어졌던 것은 언어가 멈췄을 때였다. 육신이 멸하면서 그의 가족과 고향이 영훤히 상실된 거라면, '소통 공간'또는 '차이로서의 장소'를 상실했던 건 언어와 정서가 끊겼던 지점, 시모가모 경찰서에서였ㄷ. 육신의 동주는 후쿠오카에서 죽었고 시인 동주는 교토에서 죽었다는 말이다. 그가 간신히 박 딛고 섰던 사이의 섬 '간도'또한, 시인의 죽음과 때를 같이하여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p397
나 이타츠 푸리 카가 보기에 동주의 죽음은 저항인의 저항적 죽음이 아니라, 시인의 시적 죽음이었다. 그의 망설임과 부끄러움은 연약한 이의 성정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가차 없는 것들에 대한 반성이었으며 고요한 자기 응시였다. 굳이 저항이었다고 한대도 그것은 국가나 민족 차원의 것이었다기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모든 여지없는 것들에 대한 의도적 머뭇거림이었으며 성찰적 저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