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고가에 팔리는 미술작품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비싼 가격으로 팔릴까? 하고 의아해하기도 하고 추상화같은 것을 보면 도대체 뭐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누군가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오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하나 놓치는 것일 수도 있다. 놓치고 싶지 않다. 조금씩 알아가면서 배워가면서 그 감동을 하나씩 찾아가려 한다.
처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폴 고갱의 삶을 다룬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고 나서 부터이다. 문학을 통해서 미술을 접하는 귀하고 묘한 경험이었다. <달과 6펜스>를 읽고 폴 고갱의 작품들을 찾아봤다. 그냥 작품만 보아서는 잘 몰랐는데 그의 삶을 알고 난 후에 다시 보니 느낌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 이 사람이 이런 것을 추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폴 고갱을 만나고 나서 그와 인연이 깊은 반 고흐에 관심이 생겨서 반 고흐가 미술상인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게 되었다. 반 고흐가 살아서는 부와 명예를 이루지 못하고 작품도 제대로 팔린 적이 없지만 지금 이렇게 이름과 작품을 남긴 큰 고은 어쩌면 그의 후원자인 동생 테오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고흐와는 단지 악연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이 함께 살았던 짧은 기간 속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위대한 두 화가의 인연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단지 아쉬울뿐이다.
반 고흐(1853.3.30~1890.7.29)와 폴 고갱(1848.6.7~1903.5.8)은 고갱이 고흐보다 다섯 살이 더 많았다. 고흐는 한 때 화가 공동체를 꿈꿨다. 화가 공동체는 "화가들이 협동하여 자기들 그림을 조합에 넘겨주고, 조합에서는 회원들의 생활을 보장해 계속 그림을 제작하게 하는 방식으로 판매 대금을 배분하는 것" 이라는 제안이었다. 당시에 이런 화가공동체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갱에 대한 고흐의 끊임없는 제안과 관심은 둘이 잠깐 동안 같이 생활을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누군가는 당시 고갱이 생계 해결과 미술상인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 라고도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당사자들만 알 뿐이다. 그렇게 둘은 같이 생활을 하게 된다.
폴 고갱은 고흐와 1888년 10월에 같이 살기 시작해서 두 달 정도 고흐가 그린 노란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 당시 고흐는 자신이 구상한 공동체가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으면서 희망이 가득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낭만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고갱과 다소 합리주의적인 고흐는 갈등도 적지 않았다.
<반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에서는 재미있는 것도 나온다. 둘이 살았으면 요리는 누가 했을까? 정답은 아마도 고갱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고갱은 "요리는 고결한 영혼과 재빠른 손, 그리고 대담한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다"라는 지론이 있을 정도로 요리에 능숙했다. 아마 미술사에서 고갱만큼 요리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고 한다.
▲ 빈센트 반 고흐, <노란집> 1888, 72 x 91.5 cm, 반 고흐 미술관
▲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의 의자> 1888, 72.5 Ⅹ 90.5 cm, 반 고흐 미술관
▲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의 의자> 1888, 73 Ⅹ 91.8 cm, 반 고흐 미술관
그들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결국 서로의 관계는 파탄에 빠져버린다. 반 고흐가 자연에 있는 대상을 중요하게 생각한 반면에 고갱은 현실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그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들로 비슷했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사이가 벌어진다.
고갱의 잘린 귀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고갱이 고흐와의 갈등이 깊어지고 고흐가 고갱을 떠나려하자 고갱의 뒤를 밟기도 하고, 결국은 자신의 귀를 짤랐다는 이야기다. 그 외에 남다른 동생 테오가 결혼을 한다고 하자 우울증에 빠지면서 그렇게 했다는 설도 있고 다양하다. 분명 사실은 하나일 텐데 궁금하다. 고흐는 귀를 자른 후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을 몇 점 그리기도 했다. 이후 고흐와 고갱은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 빈센트 반 고흐,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 1889, 51 Ⅹ 45 cm, 개인소장
둘 사이는 결국 파탄으로 끝났지만 둘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만약 고흐가 없었다면 노란 집이 있는 아를에서 고흐는 그의 훌륭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를에서 부터 자신의 원시성을 깨닫기 시작한 고갱은 아를을 떠난 후 자신의 길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의 걸작들을 내놓기 시작한다. 그들의 역사적인 만남은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그쳤지만, 그 의미는 미술사에 깊게 베었다.
▲ 폴 고갱, <설교 뒤의 환상>, 1888, 72.2 x 91cm, 국립 스코틀랜드 미술관
▲ 폴 고갱, <황색의 그리스도>, 1889, 73.3 x 92.1cm,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두 화가를 통해서 이렇게 조금씩 미술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 나에게는 미술작품만으로는 흥미가 생기기는 쉽지않을 것 같다. 작품 속에 숨어있는 이런 이야기를 알아갈수록 작품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듯 하다.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미술작가가 고갱, 고흐와 세잔이라고 하는데 세잔에 관련된 것도 조금씩 찾아가야 겠다. 그리고 후기 인상주의를 전 후로한 미술사조도 조금씩 알아볼까 한다.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고흐와 고갱의 작품을 하나씩 소개한다.
▲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1889, 73.7 x 92.1cm, 뉴욕 현대미술관
▲ 폴 고갱,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1897, 141 x 376cm, 미국 보스턴미술관
p21
반 고흐가 제안한 화가 공동체에 고갱이 솔깃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생계만 해결된다면, 프랑스에 계속 머물면서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고갱에게도 있었던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 고흐와 고갱의 만남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목사가 되려했던 화가와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에서 잘나가는 주식중개인의 경력을 버리고 그림을 시작한 화가가 서로 만날 수 있었다는 것, 이 조우의 순간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반 고흐와 고갱. 결국 파탄날 수 밖에 없었던 두 화가들의 관계를 이들이 남겨놓은 그림들을 통해 돌아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p27
반 고흐는 어떻게든 고갱과 함께 있고 싶어했다. 고갱이 동료와 다투고 파리를 떠나자 반 고흐도 아를로 거처를 옮겼다. 아를은 반 고흐에게 약인 동시에 독이었다. 파리 생활이 반 고흐에게 남긴 것은 피폐해진 건강 상태뿐이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요양이 필요했다. 그래서 반 고흐는 풍광 좋은 아를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를에 도착한 그는 고갱에게 편지를 보내서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당분간 둘이 함께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런 반 고흐의 호의는 후일 엄청난 재앙으로 바뀌어 그에게 돌아오고 만다. 그러나 처음 아를에 도착해서 방을 구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무렵, 반 고흐는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의 일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고갱 역시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p32
이런 반 고흐의 모습은 화가이면서 동시에 사회개혁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화가들의 협동조합에 대해 말하면서 "화가들이 협동하여 자기들 그림을 조합에 넘겨주고, 조합에서는 회원들의 생활을 보장해 계속 그림을 제작하게 하는 방식으로 판매 대금을 배분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반 고흐의 생각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반 고흐가 협동조합 구성에 솔선수범해주면 좋겠다고 지목한 인상파 화가들조차도 각자 그림을 팔아서 먹고살 일에 고심했을 뿐, 반 고흐 같은 '사회주의적 대안'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35
아를로 떠나기 전부터 반 고흐는 일본 그림에 심취해 있었는데, 아를에서 제작한 그림은 이런 관심을 여실히 보여준다. 기존의 화풍과 이론을 완전히 무시한 그의 그림은 지금까지 볼 수 없던 기법과 스타일의 실험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그만큼 이 당시의 반 고흐는 화가들의 협동조합 같은 제도적 개혁뿐만 아니라 새로운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88년 봄에 반 고흐는 과수원 연작을 열네 점이나 그린다. 이 그림에서 파리를 떠날 무렵에 그려진 그의 자화상과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상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분명히 다른 징조들이 이 연작에 꿈틀거리고 있다. 이 징조들은 다분히 일본 그림의 영향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p36인상주의를 통해 일본 그림의 의미를 알았지만,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그림으로 인해 반 고흐는 인상주의의 그늘을 벗어난다. 반 고흐에 이르면 인상주의의 원칙이기도 했던 자연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의미를 상실한다. 반 고흐의 그림은 인상주의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격렬한 색조의 대비와 충돌을 보여주는 것에서 전혀 다른 특징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에게 그림은 더 이상 자연의 묘사라고 볼 수 없었다. 아를에 처음 정착했을 때, 반 고흐의 그림에서 고통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p41주식중개인으로서 경력을 더 쌓기 위해 고갱은 가족과 함께 덴마크로 갔지만,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는 가족을 버리고 전업 화가가 되기 위해 1885년에 파리로 돌아온다. 부인과 다섯 아이들을 덴마크에 남겨둔 채 말이다. 고갱이 주식중개인의 길을 포기하고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은 서머싯 몸의 장편소설 <달과 6펜스>에 잘 그려져 있다.
p43인상주의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고갱은 상징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반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은 일본 그림에 감화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림에 가득한 상징적 깊이 때문이었다. 고갱의 불만은 자연의 모방에 치중한 당대의 화풍이었고, 이런 까닭에 인상주의와 그 화가들을 벗어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1888년에 고갱이 그린 [설교를 들은 뒤에 본 환상 -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은 그의 예술관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1887년 고갱은 몇 달 동안 남미의 파나마를 방문했는데, 거기에서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서 몇 달 머물렀다. 이 그림은 마르티니크 섬에서의 체류 경험이 고갱에게 어떠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이 그림은 교회에서 설교를 들은 여인들에게 나타난 환상을 보여주는데, 고갱은 이 작업을 통해 마침내 자신만의 생채와 화풍을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그린 [브르타뉴의 돼지치기]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p48반 고흐가 가난하게 살았다는 믿음도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의 정도로 치자면 피사로 같은 인상파 화가들도 순위권에 들 만 하다. 당시에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줄 마음씨 좋은 후원자들은 파리에 없었다. 말하자면 가난은 당시 파리에 모여 있던 예술가들의 만성 질병이었지, 딱히 반 고흐만을 위해 준비된 천형은 아니었던 셈이다. 반 고흐의 불행은 세잔처럼 불안한 마음에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반 고흐는 세잔과 달리 피사로 같은 인생의 조언자가 없었다는 것. 어쩌면 이 사실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었을지도 모른다.
p56반 고흐의 문제는 마음에 있었는데, 고갱처럼 그도 문명의 압박을 참지 못하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고갱이 파리를 떠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반 고흐는 어떻게든 현실에 남아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같은 차이점이 고갱과 반 고흐에게 잇었다. 게다가 고갱이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했다면, 반 고흐는 이타적이면서 헌신적이었다. 반 고흐가 일본 그림에 빠져 있었던 것과 달리 고갱에게 일본은 출발점이었지 종착점이 아니었다. 고갱은 일본 그림처럼 섬세한 표현을 선호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그는 '원시성'을 찾아서 타이티로 떠날 수 밖에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이렇게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있었지만, 둘을 묶어주는 공통점도 없지 않았다. 둘은 모두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아틀리에에 들어가 정식으로 그림을 배워본 적도 없었다. 오직 독학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던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고갱과 반 고흐이다. 이들의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인상파 화가들의 초창기처럼 미술제도로부터 떨어져서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다는 것이 이들을 다른 화가들과 구분시켜주는 결정적인 특징인 것이다.
p59고갱이나 반 고흐, 그리고 이들보다 앞선 세잔 모두 요동치는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점묘파 화가들이 인간성의 소멸을 도모하기 위해 화가의 눈을 '카메라 렌즈'로 간주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인간의 내면을 색채와 형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들은 예술이야말로 '마음의 문제'를 표현한다는 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보여주었다.
p113반 고흐의 [붉은 포도밭]은 [씨 뿌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실제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성서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적인 세계관이 물씬 풍기는 이 상징을 반 고흐는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고갱은 비슷한 주제를 '인간성 자체의 비극'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치환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반 고흐의 유토피아주의가 고갱에게 오면 실존적인 비극성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고갱은 [인간 비극]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여성을 일컬어 "공허한 존재"라고 언급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지는 않다. 반 고흐는 이 그림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종교적 주제를 전혀 종교적이지 않게 표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두 화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상파의 리얼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마음을 그리는 것이었다.
p135고갱은 오만했고, 자만심에 들떠 이썽ㅆ다. 필요 이상으로 으스대기도 해서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생각도 그렇게 진취적이었다고 할 수 없다.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런 고갱의 존재가 없었다면 아를에서 반 고흐가 그린 걸작들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확실히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아를에서 고갱과 반 고흐는 한동안 미술사에 남을 만한 우정을 과시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반 고흐 역시 중요한 미학적 도약을 이룩할 수 있었다.
p139이런 고갱의 노력이 왜 중요한 것일까. 바로 그림을 자연에 대한 묘사라는 측면에 머물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자연에 대한 묘사로 생각한다면, 예술은 자연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갱처럼 그림이 자연을 묘사하지 않고 마음의 풍경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림은 자연과 경쟁하는 '또 다른 자연'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고갱은 반 고흐보다 위대한 화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반 고흐를 존재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은 이렇게 관계의 사슬로 얽혀 있는 것이다.
p150여하튼 아를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제자리를 찾기 힘들었던 '고귀한 야만인' 고갱에게 언젠가는 떠나야 할 장소였던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고갱과 함께 살기를 희망했던 반 고흐의 소망은 항상 위태위태했다고 할 수 있다. 고갱의 그림은 원시적인 여성에게 마법적인 분위기를 부여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서인도제도를 방문했을 때 그린 그림들에서 이런 특징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p159고갱은 품위 없는 여성은 결코 요리를 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요리는 고결한 영혼과 재빠른 손, 그리고 대담한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다"라는 것이 고갱의 지론이었다. 시인 못지않게 멋진 말이다. 요리에 대해 이렇게 능숙한 남성화가가 과연 미술사에 얼마나 될까. 고갱 말고도 요리를 잘했던 화가가 바로 툴루즈 로트레크였다. 로트레크는 아마추어급이었지만, 최고의 요리사로 각광을 받았다. 로트레크에 비하면 좀 떨어지지만 고갱은 요리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가진 화가로 정평을 얻었다.
p176고갱은 구획주의를 정립함으로써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이 오히려 그를 번잡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째 퐁타방을 방문했을 때, 거처를 옮겨서 르푸르뒤에 일 년 정도 머물기도 했다. 고갱이 주도한 퐁타방파의 미학은 인상파의 감각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인상파의 감각주의를 대체한 퐁타방파의 화제는 바로 사상적 내용이었다. 사상적 내용이라는 추상성을 회화라는 이차원성에 담아내려고 했던 것이 바로 고갱의 구획주의에 담겨 있는 미학적 원리였다. 이차원적 표현으로 조형하는 회화의 이미지들은 이후 현대 회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모티프들을 선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181물론 반 고흐가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에서 아를의 밤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이 그림의 비밀은 바로 음악에 있다. 반 고흐는 음악과 미술을 동일하게 생각했던 화가이기도 했다. 특히 바그너에 심취한 반 고흐는 고갱과 함께 음악과 미술의 상관관계에 대해 자주 토론을 벌였다.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반 고흐의 논의는 스테판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말라르메는 음악을 꿈에 비유하면서 색체, 주제, 인물 성격 같은 복잡한 법칙을 동시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예술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런 그림을 작곡과 동일시했던 드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색채의 조합과 음조의 화합을 같은 성질의 예술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나중에 등장할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미리 예견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p181음색을 색조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칸딘스키의 예술관은 서로 다른 예술의 기호가 절대적인 차원에서 통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모더니즘의 이상을 구현한 것이다. 절대적인 소통에 대한 갈구야말로 오직 화폐가치로 교환 가능한 것만을 소통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자본주의 근대 사회에 대한 모더니즘 예술의 저항이었다고 하겠다. 자본주의 사회는 화폐가치를 중심으로 모든 가치는 똑같아진다. 예술가의 퍼포먼스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나 화폐가치를 통해 '동일한 노동'으로 간주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근대 예술가의 불만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자본주의와 화해할 수 없는 예술의 절대성을 인정해야 예술가의 존재 가치가 증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더니즘 예술은 평준화되고 교환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을 주장했다. 이 절대성을 구성하는 것은 감각이었다.
p183사실 모더니즘의 핵심은 '공감각'이라는 용어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사례를 들자면,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는 표현이 바로 공감각적인 느낌을 담아낸 것이다. 공감각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의 감각을 통해 다른 감각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경험은 결코 하나의 통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별 감각이 모두 살아 있으면서 공존하는 것이다. 반 고흐가 그린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은 이런 예술관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그림에서 사이프러스는 나무라는 형태적 측면을 벗어난다. 마치 추상화처럼 나무라는 개체성은 무의미해지고 색채와 선이 음조처럼 화음을 맞추어서 너울 거린다.
p193반 고흐가 귓불을 자르기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증언자는 고갱뿐이다. 그러나 고갱의 진술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의견은 분분하다. 심지어 어떤 미술사학자는 반 고흐의 귀를 다치게 한 장본인이 고갱이라는 주장까지 내놓아서 파란을 일으켰다. 서로 싸우던 중에 위협을 느낀 고갱이 펜싱용 칼을 던져서 반 고흐의 귀에 맞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서 확신할 수는 없다. 그만큼 이 사건은 증인도 없고 진술도 허술한 상태로 미술사에서 해명되기 어려운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아를의 지역 신문에 실릴 정도로 이 사건은 당시 주민들 사이에서도 충격적인 일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p192반 고흐가 자연에 있는 대상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고갱은 현실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그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날씨 때문에 부득이하게 실내에서 작업을 해야 했기에 고갱의 설득이 반 고흐에게 먹혀 들어갔다. 물론 마지못해 동의는 했지만 반 고흐가 행복했을 리는 없었다.
p215비록 반 고흐와 비극적으로 결별하긴 했지만, 아를을 떠나서 다시 퐁타방으로 가면서 고갱은 자신의 길을 발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를에 그가 갈망했던 원시의 상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찾을 수 없는 대상을 찾아서 그가 타이티로 떠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상징의 세계에서 그가 찾아 헤매었던 예술의 광경이 비로소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p217생 레미에서 일 년을 머문 뒤에 반 고흐는 오베르로 거처를 옮겼다. 생 레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피사로에게 가고 싶었다. 세잔과 고갱을 키워낸 '아버지'가 피사로였으니, 아마 반 고흐도 피사로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동생 테오는 빈센트의 의향을 피사로에게 전했고, 피사로는 가셰를 만나서 상의해보라고 제의했다.피사로는 반 고흐 못지않게 마음이 불안했던 세잔에게도 의사 가셰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는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당시의 아방가르드 예술인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셰의 모습에서 반 고흐는 "형제와 같은 완벽한 우정"을 발견한 것 같다고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밝혔다. 심지어 가셰와 자신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유사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아를의 여인들]을 보고 흥미를 느낀 가셰의 요청으로 반 고흐는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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