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의 책을 한 권 한 권 찾으면서 제목과 간단한 소개글을 읽어보았다. 《고산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을 '대동여지도'를 남긴 김정호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와 소설을 좋아하기에 망설임없이 손에 잡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글을 남기면서 알게 되었다. '고산자'는 바로 김정호의 호였다.
김정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잠시 찾아보았는데, 그의 생애와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으며, 생몰년도 또한 알 수 없었다. 다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의 지도 판각을 도왔다고 한다.
어쩌면 그의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삶이 작가 박범신의 눈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기록되지 않은 그의 삶은 이렇게 역으로 이야기를 통해서 찾아가게 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는 1864년(고종1)인 것으로 보아 그는 순조, 헌종, 철종 대에 거친 사람으로 추정된다.
작가는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로 만들어 냈을까. 소설 속으로 들어가본다.
고산자의 아버지는 홍경래의 난 때 지원대에 들어오면 전정, 군정, 환곡과 같은 세금을 면해준다는 현감의 거짓약속에 산속으로 들어간다. 후에 아버지와 함께 떠난 사람들은 추위와 식량이 없고, 산을 빠져나오는 길을 찾지 못해서 산속에서 죽게 된다. 그 때 그의 아버지의 손에는 관에서 준 잘못된 지도 한 장이 있었다. 당시 지도는 관에서만 소유하고 있었는데 고산자는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지도가 아닌 자기네와 같은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지도를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지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구니가 된 묘허와의 인연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준다.
이야기는 역시 <대동여지도>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지면서, 그 배경은 홍경래의 난, 조선후기의 세도정치, 천주교와 서학의 배척과 같은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사건들이 서로 이어져 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도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는 영토문제를 빼놓지 않는다.
우선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보통 지도를 만들 때는 지지를 함께 만든다는 것이다.
p14
지지는 지도에 다 토달 수 없는, 이를테면 각 고을의 연혁 관원 고읍 풍속 호구 봉산 진보 영진 등 수많은 정보들을 편목별로 구분해 기록한 책이다. 지도가 있으면 그에 따른 지지가 있어야 산하와 사람살이가 입체성을 갖추는 것이니, 지도와 지지는 언제나 한통속으로 맺어져야만 피차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이번 대동여지도의 판각이 끝나고 나면 당연지사 대동지지 편찬에 곧 착수할 터이다.
책 속에서 소개되는 영토문제는 독도, 대마도, 간도 지역이다.
특히, 독도에 관련된 이야기가 길게 나오는데 그 이유는 대동여지도에는 독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독도에 관한 소식을 듣다 보면, 일본의 고지도에서 독도가 조선의 땅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말을 듣곤 한다. 반대로 일본은 조선의 대표적인 지도인 대동여지도에는 독도(우산도)가 없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p202
대동여지도는 아래위와 좌우로 접는 분첩절첩식이다.
전 국토를 남북으로 백이십 리 간격, 스물두 첩으로 나누고 한첩을 다시 동서 팔십 리 간격으로 나누어, 접으면 하나의 서책이 되도록 고안하고, 때에 따라선 그 서책에서도 필요한 첩과 절을 빼내어 간편히 휴대할 수 있게 한 것은, 지도의 효용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기 때문이다. 울릉도는 열다서번째 첩의 가장 오른쪽 절로 배치된바, 만약 우산도를 새기려면 울릉도에서 우산도가 이백 리는 안 된다고 쳐도 최소한 팔십리 간격의 절이 두 세 개가 더 필요해진다. 그중에서도 두 절은 바다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축척을 무시하고 다른 지도들이 그렇듯 울릉도에 바짝붙여서 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새기는 것도 불편하거니와, 아무것도 없는 빈 목판을 끼워맞춰 지도를 찍어내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더구나 우산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다. 대동여지도를 그릴 때 그의 뜻은 지도로써 사람살이를 이롭게 하자는 것에 두었으니 목판본으로 제작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모든 작은 섬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새겨놓을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럴 필요성도 없다. 필사본과는 사정이 이렇게 다르다. 대동여지도도는 펼쳐놓으면 동서로 대략 스물두 척이 넘는다. 판각 자체의 어려움 때문에 , 그가 스스로 그렸던 동여도에 수록된 지명을 대동여지도에서 오히려 오천여 곳이나 뺀 것도 그렇거니와, 그러저러한 제작과정의 어려움이나 효용성 때문에 우산도를 뺀 것이다.
고지도를 보면 정말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정도로 정확하지 않고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되어 자기들이 사는 곳이 비대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대동여지도>를 보면 지금처럼 위성이나 하늘에서 바라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렇게 유사하게 그려낼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실제 김정호는 벗들을 통해서 관의 지도를 볼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지도가 나올 수 있었음은 아마도 평생을 오로지 우리 강토와 산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그의 구도적인 삶 때문일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에 마포나루에서 고산자가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가 떠난 후,
"어떤 이는 그가 일찍이 남몰래 보아둔 옛산에 들어가 푸른 정기에 기대 살아 백 살이 넘고도 젊은이처럼 먹고, 일하고, 자주 환하게 웃었다 한다."
그의 마지막 삶이 정말 이랬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그의 혼이 망가져가는 산하, 강토를 지켜주기를 바랄뿐이다.
지지는 지도에 다 토달 수 없는, 이를테면 각 고을의 연혁 관원 고읍 풍속 호구 봉산 진보 영진 등 수많은 정보들을 편목별로 구분해 기록한 책이다. 지도가 있으면 그에 따른 지지가 있어야 산하와 사람살이가 입체성을 갖추는 것이니, 지도와 지지는 언제나 한통속으로 맺어져야만 피차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이번 대동여지도의 판각이 끝나고 나면 당연지사 대동지지 편찬에 곧 착수할 터이다.
p50
지원대에 들어오면 면제해주겠다고 약속한 전정과 군정과 환곡도 본래대로 거두어 제 배를 불리겠다는 수작이었다. 전정이란 토지세로서, 본래 지주가 물어야 하도록 돼 있는 걸 소작인들에게 물렸는데, 1결당 4두나 6두로 정해져 있는 전세에다 근거 없는 부가세를 보태어 매겨서 배가 넘게 거둬들이는 게 다반사였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무렵 토산현이 유독 가렴주구가 심해서 부가세 종류만 해도 무려 마흔 가지가 넘었다고 했다. 군대에 가는 대신 내야 하는 군역도 근거대로 거두어들여서는 양이 안 차니까 어린아이나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나 황구첨정이 다반사였으며, 무이자로 빌려주게 돼 있는 환곡 또한 고리를 붙여 거둬들이는 게 상례였다.
p61
지도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양면성으로 작용한다. 지도가 없으면 사람의 오감이 부풀어오를 대로 올라 스스로 지도가 되지만, 지도가 있으면 지도를 믿기 때문에 오감은 만삭의 돼지처럼 그 운행이 느려진다. 엉터리 지도가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아 넣기 쉬운 것은 그 때문이다.
p63
개구리가 물을 건너가는데, 다 건너간 뒤에도 파문으로 물 위에 개구리의 길이 남아 있는 걸 보고 감동한 적도 있고, 다람쥐가 오르내리는 나무에도 다람쥐의 길이 따로 있다는 걸 알고 놀란 적도 있었다. 산과 물과 바람이 모두 이어져 서로서로 등대고 어깨 기대어 있는데, 그 자신만이 오로지 혼자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길이 시작되고 물이 시작되고 산이 시작되는 곳에 가면 부용꽃같이 이뻤다는 어머니를 만날 것도 같았다. 놀이 비낀 길이라는 뜻을 가진 석양사로라는 글귀에서는 눈물이 났고, 훈장댁 대청에 걸린 편액에서 붕정만리의 뜻을 알았을 때는 가슴속이 불을 지핀 것처럼 뜨거웠다.
p84
임금과 재상이 강토의 형세를 알아 치국의 저울로 삼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백성이 땅을 알아 이롭게 가꾸고 넉넉히 거두며, 물과 바람을 알아 살림과 식솔을 보호하고, 험난한 곳과 평탄한 곳, 급한 곳과 완만한 곳을 알아 풍속을 바르게 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마땅히 지도는 나라의 것이기에 앞서 백성의 것이라야 한다.
그가 굳이 대동여지도를 목판본으로 새기고 절첩식으로 고안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도는 당연히 나라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편협한 생각때문에 결국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니던가. 목판본 대동여지도로써, 온 백성이 이를 지녀 더이상, 아버지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자는 게 그의 오랜 꿈이다.
p123
도성에서 갖고 내려온 것은 대동여지도에서 토산과 곡산이 나타나 있는 두 장의 목판본 지도였다. 곡산이 들어 있는 것은 대동여지도 22첩 중에서 열번째 첩의 네번째 판이고, 토산이 자리잡은 것은 열한번째 첩의 세번째 판이었다. 전 국토를 남북으로 백이십 리 간격 22첩이 되게 분할하고 동서는 팔십 리 간격에 따라 여러 절로 쪼갠 것은, 이처럼 온 백성이 필요한 판만 분리해 가볍게 소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를테면 도성에서 강릉을 가려면 제 13첩의 네 절만 지니면 될 테니까, 구태여 번거롭게 전도를 품고 다닐 필요가 없는 셈이다. 여지껏 모든 지도가 이렇게 고안되지 않은 것은, 지도는 오로지 나라의 것일 뿐이라는 관리와 사대부들의 유아독존적인 생각때문이었다.
어찌하여 지도가 나라의 것이어야 한단 말인가
온 백성이 무릇 서로 통하고 뜻을 나누면서, 내가 가진 걸 네게 팔고 네가 가진 걸 내가 얻어 더불어 잘살고, 땅과 물의 근원을 알면, 밖으로 방비를 든든히 할 뿐 아니라 안으로 실용을 통한 유익함이 많을 것은 정한 이치였다. 무릇 지도란, 나라에서 감춰둘 것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나눠, 쓰임을 널리 구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p171
길은 끝나는 법이 없다. 앞서 걷는 자가 지도를 만든다. 그는 새삼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먼 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p178
나라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도를 비변사 비밀곳간에 한사코 감춰두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스스로 지도를 그려 동행자와 기꺼이 나눠 갖는다.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고 방대한 지지를 편찬하는 데 있어 제일의 조력자는 그러므로 그들이다. 그들은 심지어 일찍이 그 어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비옥한 땅을 찾아내기도 하고, 잡초에 묻혀 유실된 의미 깊은 성지나 진보를 드러내어 끊어질 뻔한 역사를 올곧게 되살리기도 하며, 그곳으로 가는 길과 다리를 만들어 기꺼이 국토를 시간과 공간사이로 넓혀놓기도 한다. 상단의 유명한 접주나, 패랭이 쓰고 물미장 짚고 다니는 늙은 행상들 사이에서, 그가 지도에 미친 사람으로 소문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게다가 관아에서 돈을 주고 그에 따라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백성의 안위와 생업을 위해 지도에 미쳤다고 알려진바, 골수 보부상이나 상단 행수들과 그가 호형호제할 수 있는 것은, 떠도는 그로선 크게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p192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엔 ........ 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대마도는 예부터 경상도 계림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언제부터 왜인이 와서 살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아니 그보다 먼저 [고려사]에서부터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고 기술돼 있는 것은 위당이나 혜강도 알고 있을 터이다.
실록의 기록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건국 초기엔 태조가 우정승 김사형을 시켜 대마도를 징벌한 바 있고, 세종 때 역시 징벌군을 대마도 두지포에 상륙시켜 도주의 항복을 받아냈을 뿐 아니라 대마도가 확실히 조선 영토로 귀속된 것을 세상에 천명했으며, 더 나아가 대마도 도주의 정무보고를 경상도 관찰사가 받도록 문서로써 예시하기에 이른다. 대마도 도주에게 종일품 판중추부사 겸 대마도 주도절제라는 벼슬을 내리고 이에 합당한 녹을 책정해 신하의 도리를 다하도록 한 것은 세조 때의 일이다. 역사적 근거가 그처럼 깊을진대, 웬만한 지도에서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그려넣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국팔도여지도나 흔한 조선 전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조선팔도총람도 그러하고, 체계적인 축척지도로 칭송받는 농포자의 동국지도도 그러하다. 농포자의 동국지도엔 대마도 표식과 함께 대마도 경계에 ... 라고 씌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일본과의 경계를 대마도 끝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p196
"저는 ...... 감히 말씀드리지만,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기 위한 지도를 그리고자 합니다. 이용후생입지요. 제 선친께서 일찍이 실제와 다른 지도로 억울하게 작고하셨습니다. 관에서 내준 지도였어요. 지도란 사람살이의 흥망은 물론이고 목숨줄이 달려있는 겁니다. 대마도가 역사적으로 우리 강토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정적으로는 나도 대마도, 우리 땅이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적 이상이나 정치적인 목적, 판단은 제 소임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시 말해 대마도를 우리 강토로 그려내도록 하는 일은, 여기 계신 대감 같은 분의 소임이지요."
"더구나 고산자로 말할 것 같으면,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아닙니다. 비변사나 규장각 관리라면 당대의 정치적 이념이나 전략에 따라 국토를 달리 정해 그릴 수도 있겠으나, 그에 비해 고산자는 객관성을 엄격히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겠지요. 고산자는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거나 그 근본이 유동적이거나 한 곳은 일단 뒷일로 미루어둔 것이고, 그것은 실학에 바탕을 둔 과학자로서 금도를 지킨 것이라 봅니다. 어떤 당대의 위정자가 여기저기를 그리라고 해서 그린다면, 다음에 다른 권세자가 빼라고 하면 또 빼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사구시의 과학이란 차가운 머리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고산자가 정치적 판단이 뚜렷하지 않은 곳을 지도에서 우선 제외한 것은 올바른 처사라 봅니다."
p202
대동여지도는 아래위와 좌우로 접는 분첩절첩식이다.
전 국토를 남북으로 백이십 리 간격, 스물두 첩으로 나누고 한첩을 다시 동서 팔십 리 간격으로 나누어, 접으면 하나의 서책이 되도록 고안하고, 때에 따라선 그 서책에서도 필요한 첩과 절을 빼내어 간편히 휴대할 수 있게 한 것은, 지도의 효용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기 때문이다. 울릉도는 열다서번째 첩의 가장 오른쪽 절로 배치된바, 만약 우산도를 새기려면 울릉도에서 우산도가 이백 리는 안 된다고 쳐도 최소한 팔십리 간격의 절이 두 세 개가 더 필요해진다. 그중에서도 두 절은 바다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축척을 무시하고 다른 지도들이 그렇듯 울릉도에 바짝붙여서 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새기는 것도 불편하거니와, 아무것도 없는 빈 목판을 끼워맞춰 지도를 찍어내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더구나 우산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다. 대동여지도를 그릴 때 그의 뜻은 지도로써 사람살이를 이롭게 하자는 것에 두었으니 목판본으로 제작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모든 작은 섬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새겨놓을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럴 필요성도 없다. 필사본과는 사정이 이렇게 다르다. 대동여지도도는 펼쳐놓으면 동서로 대략 스물두 척이 넘는다. 판각 자체의 어려움 때문에 , 그가 스스로 그렸던 동여도에 수록된 지명을 대동여지도에서 오히려 오천여 곳이나 뺀 것도 그렇거니와, 그러저러한 제작과정의 어려움이나 효용성 때문에 우산도를 뺀 것이다.
p229
압록강 건너편을 서간도라고 부르고 두만강 건너, 송화강 상류와 백두산 동쪽 지역을 북간도라고 이르기도 한다. 간도는 두만강, 압록강과 천산산맥 흑산산맥 등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땅으로, 함경도나 평안도 북부에 비해 비옥한 토질을 갖고 있다. 처음엔 강을 건너가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차츰 탐관오리들의 압제와 가렴주구에 못 이겨 식솔을 이끌고 아예 간도 깊숙이 들어가 터를 잡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땅이 비옷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이 일대가 주인 없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금에 시달릴 일도 없었고 관아의 노역에 시달릴 일도 없었던 것이다. 청나라가 일어나고 백두산과 간도 일대에 크게 관심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던 것이 틀림없다. 우리의 조상이 세웄던 고구려나 발해의 터전이었다는 것도 심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법하다.
그러나 최근엔 사뭇 분위기가 다른 모양이다.
청이 제 민족의 발생지라 하여 간도 내륙은 물론 백두산 일대와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서 걸핏하면 국경 문제를 들고 나왔고, 그 경비를 강화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자칫하면 백두산이 통째로 저희 땅이라고 우기면서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우리 조정에서도 얼마 전 간도에 살고 있는 백성에게도 세금을 물리고, 그 경계를 당당히 청나라에 선포해야 한다는 공론이 한 차례 있었다고 한다. 무릇 나라와 나라를 가르는 경계가 두만강입네 압록강입네 하는 명코ㅔ한 실선으로만 나뉠 수는 없다.
p230
숙종조에 이르러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서쪽은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고 동쪽은 토문강으로 경계를 삼는다 했으나, 그 토문이 과연 어떤 물줄기를 말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p233
그는 여름에야 오래 전 홍경래의 반란군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던 정주성에 닿는다. 관군이 열여드레 동안 땅굴을 파고 들어가 성 밑에 화약을 쟁여놓고 폭발한 다음에야 비로소 무너뜨릴 수 있던 단단한 정주성이다. 성을 폭발하기 위해 관군이 쟁여넣은 화약이 무려 천팔백 근이나 됐다고 한다. 그 최후의 전투에서 죽은 반란군이 홍경래를 비롯해 수백이요 체포돼 참수된 백성이 수천여 명이나 된다고 들은 일이 있다.
p240
청이 들어서면서 백두산을 자기들 조상의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성역화하면서 한동안 사람의 접근을 막아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p260
흥선대원군은 무서운 사람이다.
주색에 빠져 지내면서 안동 김씨 일문에게 권력을 맡기다시피 했던 철종 임금이 승하한 것은 삼 년여 전인 계해년(1863) 겨울의 일이고, 뒤이어 흥선대원군의 어린 둘째아들 명복이 고종 임금으로 등극했다. 말인즉, 궁중의 제일 웃어른인 풍양 조씨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하나, 모든 권세가 임금님의 아버지인 흥성대원군 수중에 떨어진 건 자명하다. 때맞추어 동학 교주였던 최제우와 그 일당이 처형됐고, 개혁이 앞세워 서원 철폐를 단행한 것도 그해 겨울의 일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철종 임금의 장인인 김문근이 죽은 뒤로 안동 김씨 일문의 권세도 반 이상 흥선대원군 품 안에 들어가 있다. 더구나 흥선대원군의 아들을 고종 임금으로 낙점한 신정왕후가 누구인가. 기해년(1839) 천주교 박해를 일으켜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처단한 장본인이라 해도 좋은 돈령부영사 조만영의 딸이다. 기해년 박해 때 죽은 이가 수백이라 들은 일이 있거니와, 이번엔 아마 그 열 배, 백 배를 넘을 터이다. 살얼음판 같은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