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KBS의 개그콘서트에는 '감수성'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감수성'의 나래이션을 보면 '동쪽의 오랑캐가 쳐들어와 평양성, 북한산성,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이제 남은 성은 감~수성' 이렇게 나온다. 노래가 마치면 신하들의 어처구니 없는 말들이 나온다. 그리고 청나라 병사가 등장한다.
그때는 그저 생각없이 들었던 나래이션이었다. 그런데 이제와보니 그저 웃고 넘길게 아니었다.
◆ 병자호란(1636)
병자호란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광해군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해군 때, 후금이 세워진다. 후금의 세력은 점점 더 강성해지고 조선과 명나라는 임진왜란(1592)으로 너무 지쳐서 쉽게 견제할 수 없었다. 그 사이 후금은 세력이 커지고 비옥한 땅을 위해 명에 진출을 한다. 이에 명나라는 후금과 전쟁을 시작하고 조선에게 도움을 청한다.
당시 조선의 국왕인 광해군은 명에 대한 적극적 지원이 아닌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정책을 취합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강대국 사이에서의 중립을 지키려는 정책이었으나, 재조지은이라 하여 '명이 임진왜란 당시 망해가던 조선을 다시 세워주었다'를 강조하며 명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은 광해구네 대해 반기를 드는 세력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왕위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리고 명나라에 군을 지원해준다. 이를 계기로 청은 정묘호란(1627)을 일으킨다.
청은 조선에게 형제의 나라로 지내겠다는 약조를 받고 물러난다. 하지만 세력이 커진 청은 형제가 아닌 신하의 예를 지키라고 했고 조선은 평소 야만족이라고 여기던 청이 신하의 예를 지키라는 요구를 해오자 그 요구를 무시한다. 그리고 병자호란(1636)이 발생하게 된다.
◆ 병자호란(1636)은 질 수 밖에 없었다.
병자호란은 당시 청나라의 강성한 힘과는 별도로 하더라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당시 조정은 청군이 언젠가는 침략할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북부 지역에 산성을 정비한다던가 병사를 늘린다는가 하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반면에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왕이 피해갔던 강화도에는 군사를 늘리고 산성 정비를 하였다. 당시 국왕인 인조는 전쟁이 일어나자 두려운 나머지 그저 강화도로 피하기만을 생각한다.
인조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세력에 의해 집권한 왕으로 척화파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척화파는 변화하는 청에 대한 정보 수집은 하지 않고 단순히 배척하기 바빴다.
전쟁과 동시에 그리고 그 후에 겪은 역사적 치욕과 백성들의 끔찍한 삶을 생각하면 전쟁 초기 대응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P85
조선군 지휘부는 청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의주 건너편 용골산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청군이 침략을 개시하면 봉화 두 개를 올리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12월 6일부터 봉화가 올랐으나 당시 황주의 정방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그것을 무시했다. 김자점은 청군이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 봉화가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서울에서 소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9일 적군이 이미 순안을 통과하여 안주를 향해 내달리고 있던 상황에서야 김자점은 서울로 장계를 올렸다. 무사안일과 무책임의 극치였다.
◆ 잊지말아야 할 치욕의 역사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후 소현세자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 후, 강화도에서 끌려온 강빈을 비롯한 왕실과 신료들의 처자들이 홍타이지에게 삼배고두례를 행하였다. 곧이어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선물이라며 짐승가죽으로 만든 방한복을 가지고 와 인조 이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인조는 그것을 입고 홍타이 앞에 나가 다시 두 번 무릎을 꿇고 여섯 번 머리를 조아렸다. 병자호란 후 인질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조정의 고위관료의 아들 혹은 조카들이 청나라로 향하게 된다.
국왕은 머리를 조아리지만 결국 무고한 백성만 죽고 또 죽는다.
항상 조정의 큰 실책은 그것을 결정한 관리들보다는 무고한 백성들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전쟁이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백성들에게는 그때부터가 다시 시작인 셈이었다.
P236
청이 물러난 도성의 관아와 인가들은 불타고 여기저기서 참혹한 형상의 시신들이 나뒹굴었다. 널려있는 시신들을 모다 못한 한성부가 인조에게 건의했다. '백골을 묻어주는 것이아말로 오아정의 급선무입니다. 길가에 버려진 시신들을 차마 볼 수 없으니 남정들을 징발하여 매장토록 하소서.'
도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0살 미만의 어린애들과 70살이 넘은 노인들 뿐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나마 그들도 굶어 죽거나 얼어죽기 직전의 상황으로 내몰려 있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1637년 1월, 항복을 받을 당시 조선 조정에 다음과 같은 피로인(전쟁포로) 관련 조건을 제시했었다.
P283
'우리가 끌고 가는 피로인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밝은 다음에 조선으로 도망쳐오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당시 자료를 보면 청군이 철수할 때 끌고간 피로인의 수는 50만 명정도 된다고 한다. 피로인들은 결국 조선에 발을 밟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으로 도망쳐온 사람들의 경우는 발뒷꿈치를 자르는 끔찍한 짓이 자행되었다. 수많은 여자들은 능욕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결을 하였다. 청은 조선의 백성을 그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포로들을 조선에 돌려줄 때는 시장이 형성되어서 어느 금액 이상일 경우에만 조선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목숨을 걸고 탈출에 성공해서 조선으로 왔을지라도 항목 관련 조건에 의해 조선에 의해 다시 청에 돌려보내지게 되었다. 결국 조선을 향해 걸어왔는데 조선의 의해 다시 청에 돌려보내지게 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여자들의 경우는 조선에 정상적으로 조선에 왔다고 하더라고 이중의 고통을 당한다. 청군에서 돌아온 여자들에게는
'오랑캐에게 실절한 여자'라는 띠가 붙는다. 결국 고향에 돌아와서 쫓겨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고, 사대부의 경우에는 조정에 이혼을 요청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다고 한다.
◆ 답답하고 알고 싶은 것들
1. 조선의 많은 관리들은 재조지은 ('명이 임진왜란 당시 망해가던 조선을 다시 세워주었다') 이라 하여 명을 '어버이의 나라'로 받들었다. 당시 청나라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의 존망보다는 명분만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자결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2. 강대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중립외교가 인정받을 때는 평화로운 시절이다. 결국 위기의 순간에는 한 쪽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병자호란 당시가 청, 명, 왜로 사이에서의 조선의 위치라면, 지금은 미국, 중국, 일본, 북한 사이에서의 한국이다. 시간은 흘렀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더 복잡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 몇 명 사이에서도 중재하는 게 어려운데 무수한 변수가 존재하는 외교에서 과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3.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 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렸다.' 라는 말이 있다. 삶을 국가로 바꾼다면 조선은 과연 전쟁 후 포로들에 대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 왕실사람들과 산성을 지키던 병사의 가족을 우선으로 하여 데리고 왔다. 그리고 특별한 노력이 있었는가 알고 싶다. 심지어 20~30년 만에 돌아온 백성들도 다시 내쳐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약자가 충분히 보호받고 있는가?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김훈의 <남한산성>
예전에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고 블로그에 남긴 글을 조금 적어본다.
'김훈, 그의 책은 내용 하나하나가 너무 사실적이다. 마치 스크린에 그 배경이 펼쳐지듯이 책을 읽어내려가면 내 머리속에 이미 그 배경이 자리를 잡고 시간이 흘러간다.
책을 읽을 때는 나 역시 남한산성에 있게 된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방책이 없는 것에 안타까워 하며 나 역시 초조해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 이유는 이미 내가 이 책의 끝을 역사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읽을수록 아프지만 그래도 읽으서 그 아픔을 아로 새기고 기억해야 함을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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