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사교과서 채택과 관련된 뉴스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보통 정규교육을 받은 이후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 나라의 역사를 찾아보거나 배우지 않는다면, 일반 대중이 가지게 되는 역사 인식과 지식은 중고등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국사교과서가 밑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일반 대중의 인식은 그대로 그 사회에 반영되며 그 기간이 비판없이 지속된다면 그것이 다시 역사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국사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우리 나라에서 발생한 비극적이고 끔찍한 집단학살이 일어난 '제주4.3사건'에 대해서 얼마 전에 읽게 되었습니다.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해야할 사건이라고, 그런데 그 이름만 들어보았지 실제 어떤 일이었는지는 알지 못했고,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쉽게 다가오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한겨레출판의 <대한민국 잔혹사>에 요약된 글귀를 먼저 소개합니다.
1947년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행사에서 경찰이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4.3 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 발포에 항의해 총파업을 벌이는데, 미군정은 이를 조사하면서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열두 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된다.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이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사건 발생 후 50여 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2003년 10월 말 노무현 대통령이 이 사건과 관련해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 한겨레출판, <대한민국잔혹사>
1910년에 국권을 빼앗긴 후 35년 만에 맞은 해방은 모두가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안타까운 점은 자체적인 힘이 아닌 타의에 의한 해방이기에 우리 스스로 하나된 나라를 만들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1948년 4.3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도 우리의 이 역사적 모순이 하나의 큰 원인이었습니다.
p 64
미국과 소련이 개입한 가운데 통일국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분단국가로 갈 것인가를 두고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남한만이 단독선거인 5.10 선거 강행을 결정했고, 정국은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김구, 김규식 등 민족 지도자들도 단독선거 반대에 나섰다. 그러나 미군정 수뇌부는 당시 이 격동하는 냉전의 흐름 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들고 나온 이승만을 선택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단독 선거를 치러내는 것이었다.
결국 남쪽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북쪽 역시 9월 9일에 정부가 수립됩니다.
남한은 미군정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고, 미군정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일제시대의 경찰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역사의 뼈 아픈 장면입니다.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몸 담았던 이들을 신분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철저하게 숙청하고 무엇보다도 과거청산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철저하게 청산되어야 할 일제시대의 경찰이 오히려 다시 기득권 세력으로 등장하고, 수십년 간 그 권력은 공고히 다져져 맥을 이어갔습니다.
다시 총칼은 좌우대립, 색깔논쟁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민중을 향하게 됩니다.
<제주4.3을 묻는 너에게>를 읽으면서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고, 분노가 일어나고, 속이 메스껍고, 한숨이 나왔습니다. 2003년 10월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서 내놓은 <제주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를 근거로 작성한 이 책에서 당시 사람들의 증언은 글로 표현하기에도 너무나 끔찍하고 힘든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당시의 무차별한 학살과 끔찍한 고문에 대해서 책의 내용을 잠시 전합니다.
그 전에 그들이 이렇게 학살되고 끔찍한 고문이 자행된 이유는 그들을 좌익사상에 물든 빨갱이라고 단정지은 당시의 미군정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고한 민중들 당시 제주도민의 1/10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한 많은 죽음이었습니다.
p118
네 남편이 산에 갔다. 동생이 갔다. 형이 갔다. 심지어는 사위가 산으로 갔다 해서 희생당했다. 도피자 가족 수용소가 있던 세화리에서는 젖먹이도 빨갱이라며 젖을 주지 못하도록 한 경우도 생겼으며, 도피자 형이 있다고 해서 한 초등학생을 수업 도중 데려다가 총을 쏘았다. 순간 담임선생은 모두 일어서게 해 묵념을 했다고 살아남은 자는 증언했다.
p166
그러한 토벌대의 잔혹한 학살 현장에 있었던 당시 서른 살의 엄마 양복천, 초등학교 2학년 열 살 아들이 그녀의 눈앞에서 속엣것 다 토해내며 죽어가는 것을 봐야만 했다. 총상 입어 우는 딸에게 울면 발각된다고 울지도 못하게 했다던 그녀. 양복천 할머니의 이야기다.
p175
토산리 창고 부근에서도 총살이 있었는데 사람들을 모아놓고 구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총살할 때 박수를 치라고 했습니다. 총살 때 아기가 폴폴 기어서 위로 올라가니까 아기에게도 총을 쏘았습니다.
p192
"올레 마당에 있는 큰 나무에 묶어서 엄마는 죽여버리고, 두 살 난 아기는 감나무 기둥에 묶어가지고 막 이렇게 죽여버리는 것을 똑똑히 봤다."고 했다.
이런 증언들은 바로 조사 당시에 증언자들이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그래도 밝혀야 한다고 기억해야 한다고 뱉어낸 쓰라린 기억들이었습니다.
위의 증언들을 보면서 당시 상황이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부녀자, 어린 아이들, 임산부들에게 행했던 끔찍한 일들은 차마 글로도 표현하기 어려워서 이 글에는 제외시켰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어떻게 이런 사건을 지금껏 알지 못하고 있었을까? 하는 부끄러움과 함께 기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주4.3은 2003년 위원회의 조사에 따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있었으며, 4.3평화공원조성사업이 진행되어 2008년 3월 28일에 개관하였습니다. 또한 2014년부터 4월 3일을 '4.3 희생자 추념일'로 하여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였습니다.
올해가 제주4.3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첫해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픈 기억을 온전히 기억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조사들을 끊임없이 진행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아픈 것을 기억해야하는 것의 중요성을.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반성하고 또 기억해야 함을 기억합니다.
p239
두 아들을 가슴에 묻고 평생 가습병을 앓다 간 할머니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지. "오직 양심 하나 믿고 살았수다. 우리야 시대를 잘못 만나 이렇게 살았수다. 우리 자식들 세대는 절대 이런 일이 있어서 안됩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당신 자신이 그해 그날의 비극을, 상처를, 죄없는 모든 죄를 다 쓸어안고 가겠다는양, 살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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