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나서 좀 지나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30년 가량을 무교로 지내오고 성향도 불교나 천주교에 가까우나 아내의 권유로 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혼란이 많다. 종교라는게 이성적으로 다가가면 안되지만 지금까지 내 사고는 그렇게 굳어져 있었다. 지금은 단순히 지난 일주일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 일주일의 안녕에 대해서 그냥 기도를 드리는 정도이다.

계속 고민중이다. 계속 다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지만 성경이라고 하면 한 번 쯤은 읽어 볼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되어졌다. 종교를 떠나서 인문학적으로 뛰어날 뿐 더러, 유럽의 문화뿐만 아니라 각종 분야에서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가끔 성경책을 펼쳐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단순히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글자 그대로 읽을 뿐이지 아무런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지나가 버렸다. 이 책은 그런 내용을 상세하게 그 배경과 내용을 풀어준다.

책을 읽다 보면 종교를 떠나서 너무나 다가오는 말이 많이 있을 뿐 더러, 나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기회를 주기도 하는 것 같다.

지난 번 [이슬람교]를 읽었을 때와 어쩌면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 든다. 만약 내가 어떠한 한 종교를 믿더라도 절대 편협하게 믿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어떠한 것은 시대와 역사를 거쳐오면서 그 근본 사상은 변함이 없지만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것들이 왜곡되어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조금 더 넓게 다가가고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알아가는 기쁨은 표현할 수 없을 듯 하다.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내 주변의 많은 것들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고 느껴야 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p57
자존감과 자만심은 다릅니다. 자만심은 자기를 스스로 높이면서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지만, 자존감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각성입니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되는대로 살지만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어떤 협박이나 유혹에도 자기를 값싸게 팔지 않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스스로 허물거나 남에게 짓밟히지 않습니다. 

p73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온 세상을 다 얻고도 너를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라는 존재,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을 때에 이 세상은 주어진 생명의 힘을 나누는 의미를 진정으로 얻게 됩니다. 그만큼 인간은 우주 생명체계의 핵심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p80
인간에게는 창조적인 상상력과 독자적이고도 개성적인 의지가 있습니다.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이 능력은 그 안에 본래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발견하고 깨우치고 발휘하는 것이 창조적 진화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단순히 환경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적응만 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치를 새롭게 길어 올리면서 발전된 모습을 만들어갑니다. 

p126
당사자가 분명하게 알아야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 내면이 진실한 눈과 정직한 생각으로 현실을 바라봤을 때 진정 자신과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혜의 힘이 나오지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일시적인 충격은 줄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진실한 자신가 마주해야 답이 나옵니다.

p130
자신과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세는 자기를 살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모든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책임져야 할 일이 있으면 당당히 책임져야 합니다. 피하려다가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주체적인 성찰과 선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택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능력은 온전하게 발휘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책임과 권리입니다. 우린 자신을 감추기 위해 걸쳤던 가면들을 모두 벗어야 합니다.

p159
참을 '인忍' 자는 칼 '도刀'자가 마음 '심心' 자 위에 턱 하니 있는 형상입니다. 그래서 참는다는 것은, 마음에 품고 있는 칼을 독하게 결심하고 뽑지 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p160
자기 성찰은 이토록 중대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찰이 깊어야 책임전가의 유혹을 이기고,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생명의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는 기회를 잃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를 경쟁적 적대감으로 대하는 존재는 생명을 파괴해도 무감각해지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경쟁과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생명의 가치를 최선의 자리에 올려놓고 살아가는 인간, 그런 공동체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원형입니다.

p269
인간의 성장사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아이가 아버지의 모순과 위선에 실망하고 그 실망이 점점 커져 아버지에 대해 내심 경멸하거나 자신과 아버지를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느꼈다고 가정해보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이 아이가 성인이 되어가면 그 자신도 아버지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인생의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모순과 위선에 빠지고,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을 것 같은 고독의 심연을 경험하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누구도 알지 못할 슬픔, 위로해 줄 수 없는 고뇌, 나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상처가 생긴다면 그때에 비로소 그는 부모 세대의 고통과 외로움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됩니다. 이건 단순한 연민과 배려의 문제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이런 인생의 시련을 지나오셨구나. 아버지가 아무리 대단하셨다고 해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뇌가 있으셨겠지. 회의하고 불안해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고, 혹시 그로 인해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괜한 걱정이라도 하게 될까봐, 그 모습을 숨기시면서 홀로 골방에서 지내신 적은 없으셨던 걸까? 그의 마음을 위로할 존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고, 그래서 때로는 혼자 술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는 시간이 아버지에게도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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