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천명관이 단편집을 발표했다. 그는 벌써 이 문단에 들어온지 10년이 넘어가지만 아직도 이 분야는 자신에게 어색하다고 표현한다. 소위 충무로에서 영화 업(業)에 종사하다 불혹의 나이가 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의 작품은 하나하나 읽을 때 마다 마치 영화를 한 편 보는 듯 하다.
처음에 그의 작품 <고래>를 처음 접하고 지금 껏 읽어오던 소설과는 다른 느낌과 장대한 서사에 빠져들었고 항상 다음이 기다려졌다. 이후 출간된 <고령화 가족>, <나의 삼촌 브루스리> 도 단연 천명관의 진가를 드러내며 이야기의 향연을 펼친다. 그는 분명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내가 생각하는 천명관 작가의 매력은 짧지 않은 책 속에서도 서사의 흐름이 끊이지 않으면서 글을 읽는 이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편집이란다. 나는 아직 단편을 읽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장편소설, 대하소설 처럼 서사를 이루는 것을 주로 읽어오다 보니 이상하게 단편은 잘 손에 잡지 못했다. 그러다 얼마 전에 민음사의 《한국문학단편선1》에서 김유정의 <동백꽃>을 읽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된 이 단편을 읽으면서 짧지만 큰 감동을 받았다. 짧지만 아이만의 순수함과 내면의 묘사도 훌륭할 뿐 더러 당시 시대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해준다. 그 때 '아, 이게 단편을 읽는 재미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천명관의 단편집을 만났다. 8편이 수록된 단편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이다. 책을 읽고 나서 책의 겉표지 뒷면에 영화감독 장항준이 이 단편집에 대해 남긴 글을 보았다. 8편을 꿰뚫는 표현을 아주 훌륭하게 해준다.
어느 순간 인생이 꼬였다고 느낄 때가 있다. 어디에서부터 꼬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한번 꼬이기 시작하니까 계속 꼬이는 것도 같은데, 그게 또 어떻게 더 꼬일지 모르니까 불안하지만 궁금하고 재미있고 기대도 하게 된다. 천명관 작가의 소설을 통해서 나는 풀리지 않는 인생의 아이러니와 따뜻한 유머를 배웠다. "인생 뭐 있나? 이렇게 한 판 살다 가는 거지." 삶에 지치고 사는 게 막막해도 웃음을 지키려는 그대여, 천명관이 건네는 통쾌한 술 한 잔 받으시라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우리 사회에서 직업적 혹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섬에 사는 사람,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 일용직 노동자, 대리운전기사, 불치병에 걸렸지만 치료비가 없는 이들과 같이 실제 우리 주변에 우리가 만나는 이들이 작품 속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아픔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아픔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들을 가만 놓아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꼬여만 간다. 어쩌면 작가 천명관은 이 단편들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들을 한 번쯤 돌아보게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작품들이 하나 하나 매력이 있지만, 책을 덮고 나서 기억에 남는 단편은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와 <핑크>였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는 제목 그대로 일용직 노동자 경구와 칠면조가 등장한다. 경구는 일용직 노동자로 냉동창고 일을 배정받아 일을 하고 집을 돌아오면서 같이 차에 탄 동생이 집에 가서 먹으라며 칠면조를 건낸다. 꽝꽝 얼은 무거운 칠면조를 들고 식당에 가서 소주 한잔을 먹고, 다시 들고 와서 집으로 향하던 중 빚을 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칠면조는 아이들을 주어야 겠다는 사랑의 표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서운 무기가 되기도 한다. 칠면조가 등장하는 게 다소 생뚱맞아 보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게 더 매력인지 모른다.
고기는 질기고 소주는 쓰지만, 인생은 그마저도 달달하게 느껴질 만큼 쓰디쓰다.
<핑크>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자의 옷의 색깔이다. 대리운전 전화를 받고 운전을 하러 간다. 차에는 나이대를 알지 못하는 뚱뚱한 어떤 여자가 핑크색 옷을 입고 눈만 나올 정도로 머플러를 하고 있다. 목적지는 어느 저수지였다. 운전을 하면서 그 여자가 점점 궁금해진다. 그러던 중 차 안의 가방에서 갑자기 고양이가 튀어나오기도 하면서 깜짝 놀란다. 트렁크에서는 어떤 이의 시체도 보인다. 이 단편은 이 말로 끝난다.
오래 전 그의 아내가 그렇듯이
왜 고기보다 질기고 소주보다 쓴 인생일까?, 오래 전 그의 아내는 어떠했기에?
천명관을 짧은 단편들 속에서도 많은 걸 담아놓았다. 특히 이번 단편집은 스릴러의 냄새가 나기도 하며, 우울한 느낌도 나며, 때로는 풋! 하며 웃게 만드는 요소들이 다양하게 섞여 있어 200 쪽의 짧은 분량이지만 두터운 향내가 베어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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