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음식, 술에 관련된 책에 관심이 생겨서 찾던 중에 발견한 책이다. 게다가 내가 좋아라하는 세계사도 들어있으니 이거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그에 덤으로 창비 회원이기에 40%할인 혜택도 얻게 되어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용이 중요하지 않은가~
목차 부분을 살펴보면 10개의 주제(감자,소금,후추,돼지고기,빵,닭고기,옥수수,바나나,포도,차)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 각 음식에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나 관련 음식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위의 주제에서 보다시피 너무나 흔하게 접하는 음식의 종류인데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재미나 역사적 사실과 유래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칠레산 포도가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예전에는 비싸서 하나씩 팔던 바나나를 이제는 한 다발로 몇 천원에 살 수 있다는 사실등 우리의 일상에 관해 우리가 그냥 지나쳤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창비의 청소년문고시리즈이어서 내용의 전개방식도 심플하고 역사적 사실도 어렵지 않게 설명되어 책을 읽는데 있어서 불편함이 없어서 오랜만에 쉽고 재미있게 읽게 내려간 것 같다. 때때로 음식 하나만 던져놓고 너무나 역사적 사건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내용의 흥미로움때문에 애교로 넘어가면서 읽어내려갔다.
200페이지가 안되는 얇은 책이어서 조금은 아쉬웠고, 아마 작가가 2편을 준비하지 않나 하는 의심과 함께 기대도 해본다. 이 책, 짧지만 글의 소재, 전개방식, 주제 등을 보면서 창의적인 무언가를 얻은 듯하다. 재미있는 책이다 ~!!
아래는 책에 나오는 음식에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
▶ 감자 - 아일랜드 사람들이 영국에 품은 원한
감자는 최근에는 간식의 대명사이다. 특히 프렌치프라이는 햄버거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프렌치(french)'는 '프랑스의'라는 뜻이다. 하지만 원래 '프렌치프라이'는 프랑스가 아니라 플랑드르 지방의 음식이다. 플랑드르는 바로 벨기에의 지역에 해당한다. 플랑드르를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동화 [플랜더스의 개]의 바로 그 플랜더스라는 지역이다. 1차 세계대전 때 벨기에에 주둔했던 미국 병사들이 자국에 돌아가 프랑스 요리로 착각하고 퍼뜨렸다는 설이 있다.
포테토칩의 유래도 재미있다. 미국 뉴욕 근처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어떤 손님이 감자튀김을 시켜 먹었는데, 너무 두껍고 설익어서 불평을 했다. 그 말에 괴짜 레스토랑 주인이 주방장한테 아예 감자를 포크로 찍을 수 없게 얇게 만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계속 만들어졌다고 한다.
감자가 처음 유럽에 소개됐을 때 유럽인들은 감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땅속에서 자라서 음침하고 게다가 껍질도 벗기지 않고 날것으로 먹다가 탈이 나기도 했다. 이는 감자 싹의 솔라닌 이라는 독소 때문인 것이다. 이것만 도려내면 되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1630년 프랑스의 브장송 의회에서는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리므로 재배를 금한다."라는 결정도 내려졌다.
18세기 이후부터 감자는 아일랜드에서는 주식이 되었다. 그러던 중 감자에 심각한 병충해가 생기면서 먹을 것이 없어진 사람들이 굶어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고 신대륙으로 떠나갔다. 하지만 영국은 이 당시에도 아일랜드를 수탈하면서 더욱더 아일랜드 인들을 고통스럽게 하였다. 그래서 아일랜드의 대기근은 아일랜드 교과서에도 실리고 지금도 아일랜드 인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역사가 되었다.
▶ 소금 - 간디의 비폭력 저항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 '소금세'라는 세금을 매겼다. 인도사람들은 영국이 생산한 소금만 먹을 수 있고, 소금을 사 먹을 때마다 영국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법을 만든 것이다. 인도사람들은 소금과 같은 생필품에 세금을 매기는 것에 대해서 분노를 했다.
하지만 간디는 폭력적인 저항운동이 아닌 비폭력 저항 운동의 철학인 '사티아그라하'를 선택했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의 한 방법으로 소금 행진을 택했다. 1930년 3월 12일 사바르마티 아쉬람이라는 곳에서 시작하여 4월 6일 염전이 있던 구자라트 주의 단디 해변까지, 장장 370킬로미터를 26일간 걸었다. 그당시 간디는 이미 예순살이 넘었을 때였다.
▶ 후추 - 대항해 시대를 연 원동력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기 위해 항해를 시작한 이유는 황금과 향신료를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왜 요새는 흔한 그 향신료를 찾으로 그런 위험을 무릎썼는가?
당시 유럽은 자극적인 맛이 나는 먹을 거리가 거의 없었다. 커피, 담배, 홍차, 초콜릿, 홍차, 고추 도 없었다. 이때 인도에서 온 향신료의 맛이란 정말 짜릿한 맛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후추와 같은 향신료를 찾는 것은 일확천금을 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인도에는 가지 못하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황금과 향료를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감자, 옥수수, 토마토와 같은 새로운 작물과 담배, 코코아와 같은 식물을 발견하면서 이것들이 모두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 돼지고기 - 대장정에서 문화대혁명까지
▶ 빵 -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오해들
바게트(baguette), 프랑스 말로 '막대기'라는 뜻이다. 유래1) 프랑스 혁명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때는 무게는 300그램, 길이는 80센티미터라고 아예 빵의 형태를 법으로 정해 놓았다고 한다, 너나 없이 똑같은 빵을 먹기 위한 조치였다. 그래서 '평등 빵'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유래2) 보관하기 쉬운 군대용 빵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전쟁 중에 오븐이나 화덕을 가지고 다니면서 빵을 구울 수도 없고, 말랑말랑한 보통 빵은 상하기 쉬워서 일종의 전투 식량으로 개발했다는 것이다.
크루아상(croissant), 프랑스 말로 '초승달'을 뜻한다. 이 빵은 원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지역에서 먹던 평범한 모양의 빵이었는데, 오스트리아가 1636년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을 막아 낸 뒤에 승리를 기념하려고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왜 하필 초승달 모양이었느냐? 오스만 튀르크는 오늘날의 터키로 이슬람 국가였는데, 이슬람의 상징이 초승달이기 때문이다.
▶ 닭고기 - 프랑스의 선량한 왕 앙리4세와 때를 잘못 만난 후버 대통령
▶ 옥수수 - 미국을 방문한 흐루쇼프
▶ 바나나 - 유나이티드 푸루트 사와 바나나 공화국의 수난
▶ 포도 - 칠레산 포도가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
유럽에 있던 포도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493년부터였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두 번째 방문할 때 유럽 대륙에서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포도나무를 가져간 것이다. 포도는 곧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빠르게 퍼져서 페루를 거쳐 1548년 칠레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칠레가 세계 제일의 포도 수출국이 되었다.
우리나라와 최초로 자유무역협정(FTA)를 체결한 나라는 바로 칠레다. 그런데 우리가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아닌 칠레에서 포도를 수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포도 재배국으로는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중국등 여러나라가 있는데 이들은 전부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나라와 계절이 같으니 포도 수확시기도 비슷하다. 그럼데 칠레는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으니까 우리와 계절이 반대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포도 수확을 하지 않는 시기에 수입을 하게 되는 거야.
▶ 차 - 아편 전쟁이라는 큰 일을 낸 작은 잎
영국사람들은 차를 아주 좋아한다. 하지만 영국은 기후 조건이 찻잎을 재배하기에는 좋지 않다. 그래서 주로 중국을 통해 수입을 했다. 이 때 찻잎 뿐만 아니라 찻잔 같은 도자기 제품들도 함께 사곤 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영국 입장에서는 중국에 수출은 조금, 수입은 많아지니 무역적자가 심각해졌다.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영국이 생각한 것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한 다음 그것을 중국에 파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국, 인도, 중국> 간의 삼각무역이 형성되었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아편 중독자가 증가하면서 수요도 늘고 아편의 가격이 상승하면서 다량의 은이 영국으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아편이 국가적인 문제가 되면서 여러 조치를 취하게 되고, 1839년 영국에서는 '무역전쟁'이라 불리는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결국, 1842년 중국 정부는 영국에 불복해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을 맺게 된다.
1차 아편전쟁 -> 난징조약(1842) - 중국은 홍콩을 영국으로 양도, 광저우와 상하이 등 다섯 항구를 영국에 개방, 2100만 달러의 배상금
2차 아편전쟁 -> 톈진조약(1856) - 외교사절이 베이징에 주재, 10개의 항구를 개항, 외국인의 자유로운 내륙 여행 보장, 600만 량의 배상금
아편전쟁 패배로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된 청나라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1851년 <태평천국운동> 같은 반란이 터져나옴.
1842년 난징조약으로 영국으로 양도된 홍콩은 1997년 7월 1일 중국으로 다시 반환되었다. 1997년 6월 30일 밤11시59분에 영국 악대가 영국 국가 [신이여 여왕을 지키소서]를 연주했고, 바로 몇 초 뒤인 1997년 7월 1일 0시 정각에 중국 인민 해방군의 군악대가 중국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을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