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누군가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 고 물어봤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 라고 답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출간된 그의 작품을 완독하고 책꽂이 한 켠을 바라보니 그의 책이 10권이나 되었다. 특히 그의 장편이 발표되었을 때 서점가 들썩이듯이 나 역시 항상 그 작품들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어쩌면 그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힘이 아닐까. 작품을 통해 먼저 좋아하게 되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수필집이라던가,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을 찾아서 그들을 조금 더 알고 싶어지는데, 이제는 '무라카미 하루키' 에 대해서 찾아볼 시간이 다가온 듯 하다.
『기사단장 죽이기』 는 1권 '현현하는 이데아' 는 거의 열흘에 걸쳐서 짜투리 시간이 생길 때 마다 한 장 한 장 읽어갔고, 2권 '전이하는 메타포'는 주말 하루동안 깊숙이 빠져들어서 읽어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특히 그의 장편소설은 '이야기의 힘' 이다. 초반 부터 인물을 차곡 차곡 쌓아가고, 풀어야 할 미스테리를 다시 얽히고 설키게 만든다. 그리고 궁금하게 만든다. 내가 읽는 이야기가 의문을 풀어주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다시 한 단계 더 깊이 어둠 속으로 나를 데려가는 것인지 긴장된다. 어쩌면 '쫄깃쫄깃하다' 라는 표현이 이런 때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소설 속의 주인공인 나는 어느 날 아내인 유즈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다. 유즈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겼다고 한다. 나는 차를 몰고 여기저기를 떠돈다. 그러던 중 한 레스토랑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게 되고, 거기서 그녀는 자신을 아는 척 해달라 한다. 그리고 레스토랑에 들어온 인물이 누구인지 알려달라 한다.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를 타고 온 남자를 그려서 그녀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녀와 하룻밤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녀는 마조히스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게 이런 저런 요구를 한다.
그리고 친구인 '아마다 마사히코'가 아버지인 일본의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 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머물게 되면서 아버지가 살던 산 속의 집을 관리할 겸 나에게 그곳에서 살아도 된다는 권유를 한다. 일본의 대 화가의 집과 그의 작업실을 사용하면서 나의 하루하루의 삶은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 집의 천장 쪽으로 이어진 조그만 방에는 한 작품이 고이 포장되어 있었다. 제목은 '기사단장 죽이기' 였다. 이 작품을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사건들이 하나씩 일어난다.
잘 모르던 어떤 이에게 제안이 들어온다. 고액의 사례가 있을 테니 자신을 직접 모델로 세우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것이다. 그는 '와타루 멘시키'라는 인물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작품이 '와타루 멘시키'라는 인물을 불러들인 것일까? 그리고 어느 날 새벽 평소 울던 풀벌레 소리는 들리지 않고 종소리가 들려온다. 그 종소리는 정원의 뒤 편에서 시작되는데 멘시키와 그가 그 종소리의 위치를 찾으면서 3미터 가량의 깊이의 구멍에 사면이 촘촘한 돌로 메꾸어진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번 작품을 끌어가는 주요 매개는 '그림' 이다. 주인공인 내가 친구의 집에서 발견한 그림과 그곳에서 그리기 시작한 새로운 나의 작품들 속에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고, 그 이야기가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만들어 낸다.
그렇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내가 친구인 '아마다 마사히코'와 '아마다 도모히코'의 요양원에 가서 '지하세계?' 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부분이다. 무언가 갑자기 맥락에 맞지 않은 이야기가 나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에 맥락을 생각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부분을 읽으면서는 살짝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밝혀지지 않았던 '멘시키'라는 인물이다. 그가 소설 속에서 분명히 마지막에는 어떤 역할을 할 줄 알았다. 사건의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그를 등장시키면서 이야기가 이어졌고, 갈등과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듯 하다. 그래서 무언가 풀리지 않은 응어리를 남겨둔 느낌이 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에는 재미있는 요소들이 있다. 바로 소설 속의 음악 찾기다. 한때 그의 아내와 재즈 카페를 운영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던 그이기에 언제나 작품 속에 음악에 등장하는 것이다. 한 번씩 찾아서 들어보려고 하나씩 적어두었다. 이런 것도 책 읽는 쏠쏠한 재미다. 최근에 클래식을 하나씩 찾아서 듣고 있는데, 클래식을 들어야지 하면서 찾는 것 보다 이렇게 우연하게 만나는 인연들이 결국은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으로 이끌어 준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라 보엠>
베토벤 <현악 4중주>
슈베르트 <현악 4중주>
모차르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베르디 <에르나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이번에는 음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차(Car) 도 등장한다. 나는 차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많은 남자들이 자동차에 대한 나름의 로망이 있지 않은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소설 속에 다양한 차들을 등장시키면서 그런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주인공인 내가 처음에 몰던 '도요타 코롤라 왜건'
나중에 새로 바꾸게 된 '빨간색 푸조 205해치백'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나게 된 남자의 차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
내가 나중에 초상화를 그리게 될 아키가와 마리에의 고모 아키가와 쇼코에의 '파란색 도요타 프리우스'
멘시키가 그의 집에 초대할 때 보내준 '닛산 인피니티'
나의 유부녀 여자친구가 타고 오는 'BMW 미니'
아키가와 쇼코에의 아버지의 추억 '재규어 XJ6 (시리즈 Ⅲ)'
멘시키가 가지고 있는 차들 '은색 재규어 쿠페, 재규어 E타입 (시리즈 Ⅰ 로드스타), 레인지로버, 미니쿠퍼'
마지막은 소설 속의 마지막으로 대신한다.
"기사단장은 정말로 있었어."
나는 옆에서 곤히 잠든 무로를 향해 말했다.
"너는 그걸 믿는 게 좋아."
P61
전화를 끊고 세면대로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나 자신의 얼굴을 정면에서 똑바로 쳐다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거울에 비친 나는 그저 물리적인 반사일 뿐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곳에 비친 내 얼굴은 어디선가 둘로 갈라져 떨어져나간 내 가상의 분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기 있는 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였다. 물리적인 반사조차 아니었다.
P79
클로드 드뷔시는 일찍이 오페라 작곡이 정체에 빠졌던 시기를 '나는 매일 같이 무를 만들기만 했다' 고 표현했다.
P271
"즉신불(卽身佛)이 되기 위해서죠. 그로써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생사를 초월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또 중생 구제로도 연결되고요. 이른바 열반입니다. 땅에서 파낸 즉신불, 즉 미라는 절에 안치되고, 사람들은 그것에 배례하며 구제를 받습니다."
P136
하구에서 부딪치며 밀고 밀리는 바닷물과 강물처럼
P220
어쨌든 나는 거의 막힘없이 캔버스에 아키가와 마리에의 초상을 그려나갔다. 그림은 한 발 한 발 착실하게 완성을 향해 나아갔다. 강물이 지형 때문에 가로막혀 때로는 에두르고 때로는 정체해 고여 있다가도 결국 수량을 늘려 하구로 향하고, 마침내 착실히 바다에 가닿는 것처럼, 나는 그 움직임을 마치 혈액의 흐름처럼 몸안에서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P262
한숨 돌린 후 멘시키가 말했다. "실제로 내려가보면 벽의 높이가 굉장히 위압적입니다. 일종의 무력감이 생기죠. 예전에 팔레스타인에서 비슷한 벽을 본 적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쌓은 8미터가 넘는 콘크리트 벽입니다. 꼭대기에는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선이 감겨 있지요. 그런 벽이 500킬로미터 가까이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3미터 높이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실은 3미터 정도면 벽으로 기능하기에 충분합니다."
P305
"나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인간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스콧 피츠제럴드가 무슨 소설에 섰지?"
P450
멘시키가 말했다.
"우리 인생에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고, 또 설명해서는 안 되는 일도 많습니다. 특히 설명함으로써 그 안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경에는요."
P565
우리는 저마다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P581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인데." 유즈가 말했다.
"나는 물론 내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은 나와 상관없는 데서 멋대로 결정되고 진행된느 건지도 모르겠다 싶어. 다시 말해 나는 언뜻 자유의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정말로 중요한 일은 무엇 하나 직접 선택하지 못하는지도 몰라. 임신해버린 것도 그런 현상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
P588
"너는 안 보는 게 좋아, 아직 너무 일러."
"그치만 진짜잖아."
"그래, 멀리서 정말로 일어나는 일이야. 하지만 정말로 일어나는 일을 네가 전부 봐야 하는 건 아니야."
P598
"기사단장은 정말로 있었어." 나는 옆에서 곤히 잠든 무로를 향해 말했다. "너는 그걸 믿는 게 좋아."
뒤늦게 하루키가 좋아졌다. 책을 읽은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아 비교적 최근의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는데, 읽을 수록 묘한 매력이 생겨났다. 그리고 한 권씩 그의 책을 찾아서 읽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만난 책은 두 개의 달이 떠오르는 《1Q84》, 자신만의 색채가 없다는 것을 아쉬워 하던《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독립기관>이라는 단편이 인상적이었던《여자 없는 남자들》이다. 모두 하루키의 2010년 이후의 작품들이다. 하루키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인 1979년에 데뷔한 이래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해왔기에 그의 예전 작품들에도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선택한 책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이 책의 부제 격인 '세계적 작가 하루키의 달리기를 축으로 한 문학과 인생의 회고록' 이라는 말이 작품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말인 듯 하다. 글을 읽고 하루키라는 작가가 어떤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솔직히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읽은 작품들이 성격이 다소 몽환적인 느낌 때문이었는지 작가의 성향도 무언가 독특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하루하루 철저하게 일정 거리, 시간을 달리기를 하고, 그의 본업인 글쓰기도 이른 시간에 규칙적으로 꾸준히 해오는 것을 보면 우리가 가끔 생각하는 밤낮이 바뀌고, 무언가 규칙적이지 않을 거 같고 조금은 특이할 것 같다는 작가들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그런 하루키의 삶을 엿볼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달리기라는 것에 흠뻑 빠져들었다. 물론 글로 빠져들었을 뿐이다. 아마 이 책을 읽어본 분들은 읽고 나서 밖에 나와서 조금이라도 뛰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 기분으로 주말 아침에 아파트 단지 주변을 뛰어보기도 했다. 역시 글과는 다르더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p18
강한 인내심으로 거리를 쌓아가고 있는 시기인 까닭에, 지금 당장은 시간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거리를 뛰어간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아마 비슷한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계속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러너가 어느 날 컨디션이 좋다고 평소 이상으로 스피드와 거리를 올려서 달리고, 작가가 어느 날 하루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끄집어 내어 글을 쓴다면, 다음 날은 평소와 같지 않을 것이다. 하루키가 러너와 작가로서 언급하는 점은 확실히 탄력을 받을 때 까지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즉, 일정량을 꾸준히 지속한다는 개념이다. 분명 이건 진리이다. 진리라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실제 이것을 몸으로 직접 체화해본 사람만이 그 진가를 알아차리고 그 진리를 향해 계속 나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책 속에서 실제 마라톤 코스(역방향이긴 했지만)를 뛰는 이야기 그리고 100킬로나 되는 울트라 마라톤 대회,트라이애슬론에 대한 것도 흥미로웠다. 내가 하지 못한 것이기에, 또 아마 평생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들이기에 주의 깊게 들여다 보았다. 사실 간단히 생각해보면 그저 달리기인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 한계에 도전하는 것에 다시금 고개를 숙이곤 한다.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들은 러너이자 작가인 하루키가 자신의 달리면서 느끼는 부분들, 근육의 움직임에 대한 표현들이었다. 운동을 많이 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등산을 하거나 가끔 달리기를 할 때는 정말 어떤 특별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평소에 하지 운동을 하다 보면 느껴지는 근육의 움직임들, 거친 숨소리, 그저 앞을 보고 달리고 오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그 이유일 것이다. 아마 그러면서 여기저기 뒤죽박죽 뒤섞여 있던 생각들이 버릴 것은 버려지고 다시 정리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P114
근육은 잘 길들여진 소나 말 같은 사역 동물과 비슷하다. 주의깊게 단계적으로 부담을 늘려 나가면, 근육은 그 훈련에 견딜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적응해 나간다. "이만큼 일을 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단다" 하고 실례를 보여가며 반복해서 설득하면, 그 상대도 "아, 좋지요" 하고 그 요구에 맞춰서 서서히 힘을 들여 나간다. 물론 시간은 걸린다. 무리하게 혹사를 하면 고장나 버린다. 그러나 시간만 충분히 들여 실행하면, 그리고 단계적으로 일을 진행해 나간다면 군소리도 안 하고(때때로 얼굴을 찌푸리기는 하지만) 강한 인내심을 발휘해서 그 나름의 고분고분한 자세로 강도를 높여 나간다. '이만큼의 작업을 잘 소화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기억이, 반복에 의해서 근육이 입력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의 근육은 무척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이쪽이 순서만 올바르게 밟아 나가면 불평하지 않는다.
아직은 그렇게 어떤 하나의 운동에 크게 매료되고 자주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는 경우가 매우 드물지만, 늦기 전에 하나라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 건강을 유지한다는 목적도 있겠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숨가뿐 기쁨을 찾아서 느껴보고 싶다.
다음에 읽을 하루키의 책은 몇 번을 읽다가 접어둔 《상실의 시대》이다. 기대된다. 하루키
p18
강한 인내심으로 거리를 쌓아가고 있는 시기인 까닭에, 지금 당장은 시간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거리를 뛰어간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아마 비슷한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계속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p22
끝까지 달리고 나면, 몸의 중심에서 모든 걸 깡그리 쥐어짜내 버린 것 같은, 어쩌면 모든 걸 다 털어내 버린 듯한 상쾌함이 거기에 우러난다.
p25
대부분의 일반적인 러너는 "이번에는 이 정도 시간으로 달리자"라고, 미리 개인적 목표를 정해 레이스에 임한다. 그 시간 안에 달릴 수 있다면, 그 또는 그녀는 '뭔가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으며, 만약 그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뭔가를 달성하지 못했다'라는 것이 된다. 만약 시간 내 달리지 못했다 해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실력을 발휘했다는 만족감이라든가, 다음 레이스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면, 또 뭔가 큰 발견 같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하나의 달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혹은 프라이드와 비슷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이 장거리 러너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p35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이 항상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적어도 달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p36
달리고 있을 때 어떤 일을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대체로 오랜 시간을 달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깊이 생각에 잠기곤 한다. 글쎄, 도대체 나는 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이제까지 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해왔는지,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확실히 추운 날에는 어느 정도 추위에 대해 생각한다. 더운 날에는 어느 정도 더위에 대해 생각한다. 슬플 때는 어느 정도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즐거울 때는 어느 정도 즐거움에 대해 생각한다. 앞에서도 썼듯이,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두서없이 떠올릴 때도 있다. 때때로 소설의 괜찮은 아이디어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를 때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제대로 된 것은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p38
현재, 나는 그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계 속에 몸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쩐지 우습기도 하다. 거기에 있는 나라는 인간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나 스스로도 잘 판단할 수 없지만, 그것은 각별히 문제 삼지 않아도 되는 일처럼 생각된다. 나에게 있어 - 혹은 다른 누구에게 있어서도 아마 그렇겠지만 -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 역시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 이전에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일이라면, 좀 더 분명하게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볼 수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치부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지금 나로서는 자질구레한 판단 같은 것은 뒤로 미루고, 거기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우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마치 하늘이나 구름이나 강을 대하는 것처럼,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우스갯거리가 예외 없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쓸모없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p40
나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생각에 따라 인생을 살아왔다.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결과적이긴 하지만, 자진해서 고립과 단절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정도의 차는 있을지 언정 피할 수 없는 여정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타인으로부터 고립과 단절은 병에서 새어 나온 산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녹여버린다. 그것은 예리한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 내벽을 끊임없이 자잘하게 상처 내기도 한다. 그와 같은 위험성을 나 나름대로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말인데, 나는 신체를 끊임없이 물리적으로 움직여 나감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직감적으로
p41
화가 나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분풀이를 하면 된다. 분한 일을 당하면 그만큼 자기 자신을 단련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말없이 수긍할 수 있는 일은 몽땅 그대로 자신의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되도록이면 그 모습이나 형태를 크게 변화시켜)소설이라고 하는 그릇 속에 이야기의 일부로 쏟아 붓기 위해 노력해왔다.
p53
배트가 강속구를 정확히 맞추어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구장에 울려 퍼졌다. 힐튼은 재빠르게 1루 베이스를 돌아서 여유 있게 2루를 밟았다. 내가 '그렇지, 소설을 써보자' 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다. 맑게 갠 하늘과 이제 막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새 잔디의 감촉과 배트의 경쾌한 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조용히 춤추듯 내려왔는데,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p58
그래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게의 권리를 모두 양도하고, 약간 겸연쩍기는 했지만 '소설가'라는 간판을 걸고 살아가기로 했다. "어쨌든 2년간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줘. 그래서 안 된다면 또 다른 데서 작은 가게를 열면 되지 않겠어? 아직 젊으니까 다시 시작할 수도 있잖아"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좋아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당시에는 빚도 꽤 남아 있었지만, 뭐 어떻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것이 1981년의 일이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자.
p63
내가 공부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은, 소정의 교육 시스템을 어떻게든 마친 다음, 소위 '사회인'이 되고 나서부터다. 자신이 흥미를 지닌 분야의 일을 자신에게 맞는 페이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추구해가면 지식이나 기술을 지극히 효율적으로 몸에 익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령 번역 기술도 그렇게 해서 나만의 스타일로, 내 돈을 들여가면서 하나씩 익혀 나갔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시간도 걸렸고 시행착오도 거듭했지만, 그런 만큼 배운 것은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었다.
p68
계속해서 달리는 사이에 달리는 것을 몸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에 따라 거리도 조금씩 늘어갔다. 폼 같은 것도 갖춰지고 호흡의 리듬도 안정되고 맥박도 차분해져 갔다. 스피드나 거리는 개의치 않고 되도록 쉬지 않고 매일 달리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게 달린다는 행위가 하루 세끼 식사나 수면이나 집안일이나 쓰는 일과같이 생활 사이클 속에 흡수되어 갔다. 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습관이 되고, 쑥스러움 같은 것도 엷어져 갔다. 스포츠 전문점에 가서 목적에 맞는 제대로 된 신발과 달리기 편한 옷도 사왔다. 스톱워치도 구입하고, 달리기 초보자를 위한 책도 사서 읽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러너가 되어간다.
p69
마라톤 풀코스의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은 35킬로를 지나면서부터 다가온다, 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알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다.
p70
생각해보면 그런 살찌기 쉬운 체질로 태어났다는 것은 도리어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즉 내 경우 체중이 불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매일 열심히 운동하고 식사에 유의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골치 아픈 인생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계속해 나가면 신진대사가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결과적으로 몸은 건강해진다. 노화도 어느 정도는 경감시킬 것이다. 그런데 거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의 사람은 운동과 식사에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필요도 없는데 그런 귀찮은 짓을 일부러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체력이 점점 쇠퇴해가는 경우가 많다. 의식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자연히 근육이 약해지고 뼈가 약해져 가는 것이다. 무엇이 공평한가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법이다.
p73
매일 계속해서 달린다고 하면 감탄하는 사람이 있다. "무척 의지가 강하시군요" 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칭찬을 받으면 물론 기쁘다. 욕을 먹는 것보다 훨씬 좋다. 그런데 의지가 강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세상은 그처럼 단순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라고 해도 무방하다. 솔직히 말하면 매일 계속해서 달린다는 것과 의지의 강약과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내가 이렇게 해서 20년 이상 계속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아흔 것은 자연히 계속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거기에는 의지와 같은 것도 조금은 관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 할 수는 없다. 설령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오히려 몸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p76
개인적인 얘기를 한다면, 나는 '오늘은 달리고 싶지 않은데" 하고 생각했을 때는 항상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너는 일단 소설가로서 생활하고 있고, 네가 하고 싶은 시간에 집에서 혼자서 일을 할 수 있으니, 만원 전철에 흔들리면서 아침저녁으로 통근할 필요도 없고 따분한 회의에 참석할 필요도 없다. 그건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 일에 비하면 근처를 1시간 달리는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지 않는가? 만원 전철과 회의의 광경을 떠올리면 나는 다시 한 번 스스로의 의지를 북돋아 러닝슈즈의 끈을 고쳐 매고 비교적 매끈하게 달려 나갈 수 있다. '그렇고말고.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거야' 하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하루 평균 1시간 달리는 것보다 혼잡한 전철을 타고 회의에 참석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할 사람이 많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 것 뿐이다.
p84
몸이라는 것은 지극히 실무적인 시스템인 것이다. 시간을 들여 단속적, 구체적으로 고통을 주면 몸은 비로소 그 메시지를 인식하고 이해한다. 그 결과 주어진 운동량을 자진해서(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수용하게 된다. 그 뒤에 우리는 운동량의 상한선을 조금씩 높여간다. 조금씩 조금씩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p87
건전한 자신감과 불건전한 교만을 가르는 벽은 아주 얇다.
p88
지불해야 할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것 밖에는 손에 넣을 수 없는 나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p102
"이제 2킬로 남았어요. 힘내세요!" 하고 차에서 편집자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말로 하는 건 쉽지'라고 대꾸하고 싶지만 생각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벌거벗은 태양이 너무나 강렬하다. 아직 오전 9시를 조금 지났을 뿐인데 대단한 더위다. 땀이 눈으로 들어온다. 소금기 때문에 눈이 따끔거려서 잠시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으로 닦고 싶지만, 손도 얼굴도 소금투성이기 때문에 눈을 닦으면 눈만 더 따가워질 것이다.
p103
제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는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p113
설사 절대적인 연습량은 줄이더라도, 휴식은 이틀 이상 계속하지 않는 것이 트레이닝 기간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규칙이다.
근육은 잘 길들여진 소나 말 같은 사역 동물과 비슷하다. 주의깊게 단계적으로 부담을 늘려 나가면, 근육은 그 훈련에 견딜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적응해 나간다. "이만큼 일을 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단다" 하고 실례를 보여가며 반복해서 설득하면, 그 상대도 "아, 좋지요" 하고 그 요구에 맞춰서 서서히 힘을 들여 나간다. 물론 시간은 걸린다. 무리하게 혹사를 하면 고장나 버린다. 그러나 시간만 충분히 들여 실행하면, 그리고 단계적으로 일을 진행해 나간다면 군소리도 안 하고(때때로 얼굴을 찌푸리기는 하지만) 강한 인내심을 발휘해서 그 나름의 고분고분한 자세로 강도를 높여 나간다. '이만큼의 작업을 잘 소화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기억이, 반복에 의해서 근육이 입력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의 근육은 무척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이쪽이 순서만 올바르게 밟아 나가면 불평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습을 며칠 쉬어버리면, "어렵소, 이제 그렇게까지 힘쓸 필요가 없어졌구나. 아, 잘 됐다" 하고 자동적으로 판단하여 한계치를 떨어뜨려 나간다. 근육이라는 것도 살아 있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가능하면 힘 안 들이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심하고 기억을 지워 나간다. 그리고 일단 해제된 기억을 다시 입력할 경우에는, 또 한 번 같은 과정을 처음부터 되풀이해야 한다. 물론 한숨 돌리 수 있는 여유는 필요하다. 그러나 레이스를 눈앞에 둔 이 중요한 시기에는 , 근육에게 착실히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다. "이건 말이야, 애들 장난이 아니야"라고 하는 명확한 메세지를 상대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펑크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흔들림 없는 긴장 관계를 유지해두어야 한다. 이때의 전략은 경험을 많이 쌓은 러너라면 모두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있다.
p116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 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p128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 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의견에는 아마도 많은 러너가 찬성해줄 것으로 믿는다.
신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계를 넘어서면 본전도 못 건지게 된다.
p130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는 천성적으로 '종합적 경향' 같은 것이 있어서, 본인이 그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정도이다. 경향은 어느 정도까지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천성이라고 부른다.
p131
미국의 병원에 가면, 우선 간호사에 의한 예비 진단과 같은 절차가 있어서 맥박을 재는데 언제나 "아, 당신은 러너군요"라는 말을 듣는다. 장거리 주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모두 비슷한 맥박 수로 되어가는 모양이다. 거리를 달리고 있는 사람이 아마추어냐 프로냐 하는 것은 바로 구별할 수 있다. 헉헉, 하면서 짧은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것은 초보자이고, 조용히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것은 베테랑이다. 그들의 심장은 천천히, 생각에 잠기면서 시간을 새겨 나간다. 우리는 거리에서 서로 스치면서 서로의 호흡의 리듬을 들으며, 서로의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마치 작가들이 서로 상대의 어법을 교감하는 것처럼.
p138
할로윈이 끝나면 마치 유능한 세금 징수원처럼 민첩하고 말없이, 그리고 확실하게 겨울이 찾아온다.
p146
그녀들에게 뒤에서부터 추월을 당해도 별로 분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에게는 나에게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p148
소설을 쓴다는 것이 불건전한 작업이라는 주장에 나는 기본적으로 찬성하고 싶다. 우리가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 나가려고 할 때는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좋든 싫든 추출되어 표면으로 나온다. 작가는 다소간 그런 독소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위험을 인지해서 솜씨 좋게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독소가 개재되지 않고 참된 의미의 창조 행위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50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직업적인 소설가가 된 이래 지금까지, 내가 몸소 절실하게 느껴온 것이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은 결코 대극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립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다. 때때로 건전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건전한 것만을 생각하고, 불건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불건전한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편향은 인생을 진정으로 내실 있는 것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p152
나는 되도록 그와 같은 위축 현상을 피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이라는 것은 훨씬 자발적이고 구심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활력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 소설을 쓰는 것은 험준한 산의 암벽을 기어오르고, 길고 격렬한 격투 끝에 정상에 오르는 작업이다. 자신에게 이기든지, 아니면 지든지 둘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그 같은 내적인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나는 언제나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p161
내일이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그것은 내일이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p163
사로마 호수를 달리는 100킬로 울트라 마라톤은 매년 6월에 장맛비가 오지 않는 훗카이도에서 열린다.
p169
달리고 있는 동안 몸의 여러 부분이 차례차례 아프기 시작했다. 오른쪽 허벅지에 한동안 통증이 오고, 그것이 오른쪽 무릎으로 옮겨가고, 왼쪽 허벅지로 다시 옮겨가고.... 하는 식으로, 몸의 각 부분이 번갈아가며 들고 일어나서 자신들의 통증을 소리 높여 호소했다. 비명을 올리고, 불평을 늘어놓고, 사정을 호소하고, 경고를 해댔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100킬로를 달린다는 것은 미지의 체험이었고, 모두 각기 할 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잘 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은 인내하며 묵묵히 달려 나갈 수 밖에 없다. 강한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려고 하는 급진적인 혁명의회를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 같은 이들이 변론을 구사해서 설득하는 것처럼, 나는 신체의 각 부위를 열심히 설복한다. 격려하고 매달리고 치켜세우기도 하고 질책도 하며 고무도 한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될 일이 아닌가, 지금은 어떻게든 참고 힘내다오, 라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 하고 나는 생각한다 - 결국은 두 사람 다 목이 뎅강 날아가 버렸잖아.
p172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p175
자동조종 같은 상태로 몰입해버렸기 때문에 그대로 더 달리고 있으라는 말을 듣는다면, 100킬로 이상이라도 아마 달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상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는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그 이상함을 이상함으로 느낄 수 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달린다는 행위가 거의 형이상학적인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행위가 먼저 거기에 있고, 그 행위에 딸린 것 같은 존재로서 내가 있다.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p180
자랑스럽다고 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 나름의 성취감 같은 것이 이제야 생각난 듯이 가슴속에 북받쳐 오른다. 그것은 '위험스러운 일을 자진해서 맡아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해 나갈 만한 힘이 내 안에도 아직 있었구나' 하는 개인적인 기쁨이며 안도감이었다. 기쁨 보다는 안도감 쪽이 오히려 강했는지도 모른다. 몸속에 견고하게 묶여 있던 매듭 같은 것이 점점 느슨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것이 내 안에 존재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었지만
p185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다수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렇듯이 나는 쓰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간다. 다시 고쳐 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문장을 늘어놓아도 결론이 나오지 않고, 아무리 고쳐 써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물론 있다. 가령 지금이 그렇다. 그럴 때에는 그저 가설을 몇 가지 제시할 수 밖에 없다. 혹은 의문 그 자체를 차례차례 부연해갈 수 밖에 없다. 혹은 그 의문이 지닌 구조를 뭔가 다른 것과 구조적으로 맞대어 비교하든지
p186
기록은 문제가 아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노력을 해본들, 아마도 젊은 날과 똑같이 달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별로 유쾌한 일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일인 것이 분명하다. 나에게 역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에도 역할이 있다.그리고 시간은 나같은 사람보다는 훨씬 충실하게, 훨씬 정직하게 그 직무를 다하고 있다. 아무튼 시간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났을 때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전진해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요절을 면한 사람에게는 그 특전으로서 확실하게 늙어간다고 하는 고마운 권리가 주어진다. 육체의 감퇴라고 하는 여예가 기다리고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p191
태도를 언제까지나 정하지 못한 사람처럼 비는 구질구질 계속 내리고, 마지막에는 마침내 작심한 듯 호우가 되었다.
p194
문제는 그처럼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무릎에 통증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인생에 있어서 문제의 태반이 그렇듯이 이 통증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돌연히 찾아왔다.
p195
매일매일의 힘든 연습을 벗으로 삼는 장거리 주자에게 있어서 무릎은 항상 부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부위다. 달리고 있으면 착지할 때마다 체중의 세 배가 되는 충격이 발에 가해진다고 한다. 그것이 하루에 1만 번 가깝게 되풀이되는 것이다. 딱딱한 콘크리트 노면과 가공할 만한 하중의 증가 사이에서 무릎은 침묵을 지키며 참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 보통은 거의 그런 일을 생각도 하지 않지만 - 문제가 생기지 않는 편이 오히려 문제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무릎이라는 것도 때로는 불평을 하고 싶을 것이다. "거칠게 콧김을 내뿜으며 뛰는 것도 좋지만 조금쯤은 내 생각도 해주세요. 한 번 못 쓰게 되면 대신할 것이 없잖아요." 라고
p200
아무튼 레이스에 출장해서 완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골인하는 것, 걷지 않는 것, 그리고 레이스를 즐기는 것. 이 세가지가 순서대로 내 목표다.
무라카미 하루키, 항상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에 오르는 작가이다. 노벨문학상을 타고 안 타고는 중요하지 않지만, 그만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작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작품은 출간 전부터 이미 예약이 이루어지고, 출간됨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출판사들이 경쟁하며 판권을 얻으려는 몇 안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접한 때는 오래되었던 것 같다. 여섯 살 차이가 나는 누나의 방 책꽂이에 있던 《상실의 시대》를 한 참 동안이나 보아왔다. 물론 겉표지의 제목만 보아왔을 뿐이다. 언젠가는 한 번 읽어 볼까 잠시 들춰보기도 했지만 20쪽도 채 못 넘기고 다시 닫기를 여러번 반복했던 것 같다. 그 때 이미 질려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은 책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상실의 시대》는 읽어야 하지만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책이다.
실제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1Q84》가 처음이었고, 제목이 유난히 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다음이었고, 이번에 글을 쓰게 된 《여자 없는 남자들》이 내가 만난 세번째 책이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 불과 세 편을 접해서 인지 몰라도 나는 아직 하루키를 잘 모르겠다. 어떤 스타일의 글을 쓰는 작가이며, 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글을 써내려가는지 짐작도 잘 가지 않는다.
워낙 두터운 독자와 하루키 매니아라고 할 정도의 이들도 많이 있고, 그에 대한 작품 해설 및 작품관에 대해 표현한 책도 눈에 많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책들은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인터넷에 나오는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만을 읽었을 뿐 다른 정보는 일부러 피했다. 조금씩 그의 책들을 읽어가면서 그만의 독특한 문체와 사상과 세계관을 알아보고 싶은 궁금점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접한 세 권의 책을 통해 느낀 점이라면, '신비함'과 약간의 '영롱함(?), 몽롱함(?)' 이라고 해야 하는 표현들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면 사람들의 깊이 숨어있는 욕망을 끄집어 내어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 역시 그의 이름을 믿고 처음 책을 읽었지만 그의 작품들을 찾아 읽으려 하는 이유는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이다. 그가 이야기를 풀어내면 궁금하고 수수께끼 같고, 책에 손을 떼기가 쉽지 않다. 이게 가장 큰 무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최근작인 《여자 없는 남자들》은 그의 단편집이다. 총7편이 소개되었다. 그동안 장편만을 읽어오다가 얼마 전부터 단편의 매력을 알아가고, 여러 작가들의 단편들을 찾아 보기도 하는 중에 만났다. 7편의 작품은 모두 어떻게 보면 남자들이 바라보는 여자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그리고 성적인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편 중 특히 <드라이브 마이 카>와 <독립기관> 이라는 작품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처음에 수록되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처음부터 이 책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가져다주기에 충분한 궁금함을 유발했으며, 발을 더 깊이 들어가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독립기관>은 사랑없이 그저 여자들만을 만나오던 한 남자가 결국 상사병으로 죽게되는 이야기인데 짧은 단편이지만 영화를 한 편 보는 것 같은 짙은 인상을 남겼다. 처음에 제목을 보았을 때 독립기관이 어떤 한 단체를 말하는 것인지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에게 어쩌면 있을 수 있는 장기와 같은 하나의 독립기관이라는 말이었다. 우리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이 동작하는 그런 기관이라는 소재가 흥미로웠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바로 하루키의 다른 작품을 주문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다음에 읽을 작품이다. 그의 최신작들을 먼저 보고 다시 그의 예전 작품으로 돌아가서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키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