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의 책표지를 열고 보면 작가 소개 아래에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다.
"옛 그림 속에는 역사가 있다. 다치지 않은 옛 그대로의 자연이 있고, 그것을 보는 옛사람들의 눈길과 그들의 어진마음자리가 담겨 있다. 한마디로 옛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이다. 또한 옛 그림은 아련한 지난 세월의 향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아꼈던 많은 이들의 고상한 입김과 정성스런 손때가 묻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작품을 그린 화가라는 한 인격체의 독특한 빛깔로 물들여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그림에서 한 분의 그리운 옛 조상과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직접 발품을 팔지 않으면 우리의 옛 그림을 볼 기회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많은 것들이 그렇지만 우리가 모르기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어떻게 인연이 되고 기회가 되어서 접하게 되는 것들에서 발화되어 개인과 연결이 되어야 관심사가 이어지는 법이다. 최근에 우리 문화 관련 책들에 관심이 생기면서 이런 저런 책을 읽다가 이 책을 만났다.
책에 소개되는 김홍도의 <주상관매도>를 보고 한 동안 넋 없이 바라보았다. 작품의 실제 크기를 보니 직접 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쉬울 따름이다. 넓은 공간에 한 벽면에 아무런 장식 없이 이 그림 하나만 있는 모습을 홀로 상상해보았다.
그림에서 조금 떨어져서 그것을 바라보는 모습을 떠올린다. 왠지 그 때 내 모습도 무엇인가에 얽매이지 않은 모습일 것 같다. 그림 위의 매화와 아래 배 사이에 펼쳐진 여백은 내 가슴 속에는 무언가를 가득 메우는 듯 했다. 너무 좋았다.
저자인 오주석은 작품에 대한 감동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그것을 자신이 직접 따라서 그려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실망을 금치 못할 것 같으니 차선책도 가르쳐 준다. 바로 그림을 읽으면서 기술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어떤 작품의 인물을 보거나 실제 사람을 보았을 때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사람들마다 천차만별이다. 누군가는 그저 단순하게 예쁜 여자라고 표현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목구비의 각각의 특색을 잘 설명하고 어우러지는 느낌과 향내까지 표현해낼 것이다.
그림을 따라 그리면 그만큼 자세히 작가가 표현해내는 것을 하나하나 다 찾아가 보는 것이다. 그만큼의 감동을 느끼기 위한 기술을 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하나하나를 찾아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보고 전체적인 느낌까지 아울러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겠다. 언어는 때로는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는 것에는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마치 향기가 나듯이 시냇물 소리가 들리듯이 표현할 수 있다. 그런 세심한 관찰과 관심과 그리고 언어적인 훈련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직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가진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알수록 매력있고, 다가오는 감정이 남다르다.
화려한 색채와 원근감을 살린 서양화들이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여백이 주는 아름다움과 김명국의 <달마도>처럼 순식간에 그어낼 것 같은 붓터치가 나에게는 더 다가온다. 혼자 잠깐 생각해본다. 강희안이 고사관수도에 등장하는 인물의 눈에 붓으로 툭툭 던지는 듯 그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 <고사관수도> 강희안(1417~1464), 종이에 수묵, 23.4 x 15.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상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기다란 덩굴 몇 가닥을 흔들흔들 그네 태운다. 그러자 잔잔하던 물 위에도 결이 고운 파문이 인다. 바위에 기대 편안히 엎드린 선비는 볼에 와 닿는 바람결이 흐뭇했는가, 아니면 마음속을 스쳐가는 상념 속에서 혼자만의 뿌듯함을 느꼈는가,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앞머리가 벗어진 넓적한 얼굴의 선비는 이제 세상살이를 꽤 이해할 만한 지긋한 연배의 노인이다. 눈과 눈썹은 짙은 먹선으로 대충 쳐서 그렸으되 만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넉넉한 빛을 띠었으며, 사람 좋아 보이는 납작한 코와 인자해 보이는 입가와 수염, 그리고 넓은 소맷자락에는 인간사를 초탈한 듯한 여유로움이 번져 있다.
선비를 둘러싼 주위 배경은 간촐하다. 뒤편으로 절벽이 있고 그 위에 뿌리박고 자라난 나무를 휘감아 내려온 덩굴 몇 가닥과 큰 이파리 몇 개가 보일 뿐이다. 앞편으로는 잔잔하게 흐르는 물과, 물가에 자라난 갈대 같은 거친 물풀, 그리고 물 위로 솟아난 작은 바윗돌 셋이 전부다. 선비가 기댄 듬직한 바위는 툭툭 끊어지는 호쾌하고 대범한 먹선으로 윤곽선을 둘렀으며, 아래쪽으로는 시커멓게 거친 바림을 베풀었다. 그 선의 성질은 선비 옷의 윤곽선과 아주 닮았다. 즉 굵었다 가늘었다 변화가 많고 꺾여 나가는가 싶다가는 곧 끊어진다. 특히 선비의 다리 오른편의 바위 모양은 다리 모양과 거의 같아 보여, 화가는 마치 선비가 바위이고, 바위가 곧 선비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의자처럼 편편한 작은 바위가 하나 더 있다. 누구든지 와서 함께해도 좋을 공간이다.
▲ <주상관매도>, 김홍도 164 x 76cm, 개인소장
<주상관매도>에는 느긋하고 한가로운 기운이 감돈다. 마치 여유롭고 유장한 평시조 가락이 허공 중에 여운을 날리며 떠도는 듯하다. 화폭은 어른의 키만큼이나 커다란데 거기에 그려진 경물은 화면의 오분의 일도 되지가 않는다. 뿌옇게 떠오르는 끝없는 빈 공간, 그 한중간에 가파른 절벽 위로 몇 그루 꽃나무가 안개 속에 슬쩍 얼비친다. 화면 왼쪽 아래 구석에는 이편 산자락의 끄트머리가 꼬리를 드리웠는데 그 뒤로 잠시 멈춘 조각배 안에는 조촐한 주안상을 앞에 하고 비스듬히 몸을 젖혀 꽃을 치켜다보는 노인과 다소곳이 옹송그린 뱃사공이 보인다.
여백이 하도 넓다 보니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가늠을 할 수 없다. 그렇다. 김홍도가 시조에서 읊었듯이 "물 아래가 하늘이고 하늘 위가 물인가" 보다. 또 "봄 물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잎새 같은 조각배는 둥실둥실 흔들리며 기운 없는 노인에게 가벼운 어지럼증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늙은 눈에 보이는 저 꽃나무는 아슴푸레하니 안개 속에 잠겨 있는 듯 하다" 그림은 시조 그대로이고 시조는 그림을 꼭 빼닮았다. <주상관매도>에서는 그려진 경물보다 에워싼 여백이 전면에 부각된다. 그 보일 듯 말 듯한 느낌은 마치 지금은 들리지 않는 노년의 단원 김홍도, 그 분이 소리하는 가녀린 시조창인 듯 하다.
▲ <자화상> 윤두서(1668~1715), 종이에 수묵담 담채, 38.5 x 20.5cm, 국보204호, 개인 소장
이 사람은 누구인가? 무인인가? 그는 어려서부터 용력이 남달랐으며 일찍이 출중한 무예를 갖추었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떠한 극한상황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았던 냉엄한 성품의 장군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는 너무나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첫인상은 이렇게 보는 이의 기억 속에 강렬한 에너지의 낙인을 찍어 오래도록 지속되면서 천만 가지 상념의 뿌리가 된다. 그러나 첫인상은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경우도 많다.
인상이 반드시 그 인물로부터 나오고 또 그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입은 옷이며 그를 둘러싼 주위 배경이라든가 그 장소에 독특했던 빛의 흐름 등등 여러 가지 외적 요소가 거기에 더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찬찬히 <자화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무런 선입관이나 편견을 갖지 않고서 말이다. 인물은 정면상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좌우 대칭을 이룬다. 얼굴은 단순한 타원형이며 이목구비가 매우 단정하다. 좌우대칭의 정면상은 입체감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서 바깥으로 뻗어난 수염이 표정을 화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더하여 새까만 탕건 끝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위어져 있어 머리 전체의 볼륨을 요령 있게 시사한다. 그런데 극사실로 그려진 이 작품속의 인물은 놀랍게도 귀가 없다. 목과 상체도 없다. 마치 두 줄기 긴 수염만이 기둥인 양 양쪽에서 머리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옥에 갇혀 칼을 쓴 인물처럼 머리만 따로 허공에 들려 있는 듯하다. 머리는 화면의 상반부로 치켜 올라갔다. 덩달아 탕건의 윗부분이 잘려져나갔다. 눈에 가득 보이는 것이라고는 귀가 없는 사실적인 얼굴 표현뿐인데 그 시선은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초성이 무섭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 <진단타려도> 윤두서, 비단에 채색, 111.0 x 68.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물 뿌리고 비질한 마당처럼 그지없이 깨끗한 길, 맑고 투명한 대기 속에 나뭇잎 하나 풀잎 하나까지 정갈해 보이는 아침, 뒤편 숨에는 상서로운 안개마저 서려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복건을 쓴 점잖은 선비가 갑자기 나귀 위에서 미끄러져 그만 고꾸라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자 옆에서 따르던 동자 아이가 기겁을 하여 책 봇짐을 내던진 채 주인을 붙들려고 내닫고, 반대편 길을 행해 가던 젊은 나그네는 몸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동자만 혼자 허겁지겁할 뿐 정작 낙상을 코앞에 둔 당사자 얼굴에는 상황에 걸맞지 않게 함박웃음이 만발해 있고, 또 이네들을 바라보는 나그네의 표정에도 아직 얼굴 가득 흐뭇함이 어려 있다는 점이다.
우리 문화재와 미학에 대해 한 발자국 더~
■ 우리 문화재 그리고 미학 - http://zorbanoverman.tistory.com/531
p34
<고사관수도>는 고요한 그림이다.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니 고요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바라보는 선비의 시선이 물의 흐름처럼 잔잔하지 않은가? 시선이 고요하고 그윽하므로 그림의 공간은 화면 바깥으로 안온하게 확장된다. 정작 화폭 속에 보이는 공간 자체는 아주 작은데도 느껴지는 것은 제한된 그 무엇이 아니다. 그렇게 보이는 화면의 대부분은 돌이다. 세상에 돌만큼 천성적으로 침묵을 좋아하는 것은 없다. 돌은 태초에 놓여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거센 비바람과 매서운 눈서리에도 꿈쩍이지 않고 소리치지도 않는다. 저 바위를 닮은 노인의 시선을 보면 그 역시 성품이 바위처럼 듬직한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돌은 흙의 정기가 뭉친 것이라 한다. 그러니 선비 또한 오랜 공부와 수양을 통해서 사람의 정기인 올바른 도를 한 몸에 모두고 있음 직하다.
p35
조지훈 선생은 [돌의 미학]이라는 아름다운 글에서 "동양미의 가치 기준은 언제나 '살아 있다'는 말 한마디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뜻밖에도 " 그 생명력의 무한한 파동은 바위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시인은 또 돌에서 형태가 아니라 그 마음을 보며, 그 마음은 추상이라고 보태었다. 이제 우리가 확인한 바위에 보이는 저 힘찬 붓질은 바로 조지훈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바위의 생명, 바위의 마음, 바위의 추상이 아닐까. 시인은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돌에서 생명을 발견한다. 돌들이 맹령하게 살아서 들끓어오르는 것을 느낀 것이다. "태초에 꿈틀거리던 지심의 불길 속에서 맹렬한 폭음과 함께 퉁겨져나온 이 바위는 결코 겉은 식고 굳었지만, 그 속엔 아직도 변함없이 사나운 의욕을 꿈틀되고 있다. " 바위가 그토록 오랜 세월 꼭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 내면에 숨겨진 크나큰 의욕 때문이라는 것이다.
p39
관념은 [관자]의 <수지>에 잘 정리되어 있다. "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만물의 본원이며,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며, 아름다움과 추함, 어짊과 못남, 우둔함과 현명함을 낳는 장본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세상을 다스려 교화시킬 때 그 해답은 물에 있다. 물이 한결같으면 사람들 마음이 바르게 되고, 물이 맑으면 민심이 편안해진다. 한결같으니 더러운 욕심을 내지 않고, 민심이 편안하니 행실이 삿됨이 없다." [관자]는 이어서 물이 가지는 주된 미덕과 갖가지 물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인 인간의 삶을 길게 설명하고 있다.
물은 얼핏 겉으로 보면 여러 색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손으로 떠서 보면 한결같이 투명하다. 그 투명한 무색은 온갖 빛깔의 바탕이다. 그 깨끗함은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린다. 물질적인 때를 씻어낼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더러움까지 씻어내린다. 그래서 옛 여인네들은 장독가에 정한수 한 사발을 떠놓고 일월성신께 각자 마음에 품은 간절한 소망을 빌었다. 물은 큰 절과 대성당에서 그대로 성수가 되고 지극히 고귀한 종교적 정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수가 되는 이치는 어염집 아낙네의 정한수와 똑같다. 물은 또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고 흐르지만 일단 수평을 이루면 멈춘다. 지극한 의로움이다. 그리고 물의 맛은 담담하니, 그것은 온갖 맛의 중용을 얻은 것이며 그 담담함은 바로 군자의 마음이다.
p40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고루 이롭게 하고서도 다투지 않는다. 그리고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기꺼이 처하나니, 그런 까닭에 거의 도에 가깝다."
p40
맹자도 말했다. "흐르는 물이라는 것은 앞에 놓인 구덩이를 하나하나 모두 채우지 않고는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이 이렇게 큰 바다까지 이르는 과정은 마치 "군자가 도에 뜻을 두고서 덕을 하나씩 이루어나가 결국 원대한 목표에 이르는 것과 같다.
p44
다음은 강희안이 연꽃을 설명한 말미에 덧붙인 글이다.
사람이 한세상 태어나 명예와 이들에 골몰해서 분주히 힘쓰다 지쳤어도 늙어 죽도록 그치지 않는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함인가? 비록 벼슬을 떠나 속세의 때를 벗어버리고 아주 자연 속에서 지낼 수는 없다고 해도, 공무를 마친 겨를에나마 맑은 바람 밝은 달 아래 그윽한 연꽃향 속에서 ...... 옷깃을 열어 오가면서 시를 읊고 배회할 것이니, 몸은 비록 명리의 굴레 매였어도 정신만은 족히 물질의 바깥에 노닐어 마음의 회포를 펼 수 있으리라.
p48
공자는 또 일찍이 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그래서 "슬기로운 사람은 움직이면서 즐거워하며, 어진 사람은 고요하게 지내어 장수하는 것이다." [논어]의 <용야편>의 이 말씀은 물론 물과 산의 성정을 사람의 성품에 비유한 상징일 뿐 본래 물과 산이 서로 대치된다는 뜻이 아니다. <고사관수도> 속의 선비만 보아도 지금 이렇게 인적 없는 산속에 들어앉아 잔잔하게 흐르는 물을 벗 삼아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지 아니한가? 일반적으로 옛 선인들은 오늘날과는 달리 움직임을 줄이고 고요하게 지내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생각을 지녔다.p176작품을 '읽는' 동서양의 방식 차이는 아주 작은 듯하나,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는 이처럼 에상 밖으로 엄청나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 옛 그림은 애초 가로쓰기식으로 보면 그림이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옛 화가들에게는 세로로 읽고 쓰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으므로, 보는 이도 당연히 우상에서 좌하 쪽으로 감상해나갈 것이라 생각하면서 구도를 잡고 세부를 조정하고 또 필획의 강약까지도 조절했기 때문이다.
p211
옛 그림 감상 요령의 첫째는 좋은 작품을 무조건 많이, 자주 보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살아 있는 생명체다. 그러므로 이성으로 접근해서 지식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감상자 개개인의 체험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서로 많이 다른데, 그것은 대체로 우리가 경험한 삶의 내용이 서로 다른 데서 온다. 아무리 클래식 음악이 훌륭하고 고상하다고 학교에서 배웠어도, 또는 애국심의 발로로 우리 전통 음악을 사랑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해보아도,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을 들을 기회가 적으면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기란 힘들어진다.반면에 유명한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인 음악은 실제로 감사하기 어려운 난곡인 경우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한다. 매일매일 일정한 시간대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시그널 음악도 마찬가지의 경우다. 사람은 익숙한 것에 대하여 경계심을 풀고 친근함을 느끼며 결국은 좋아하게 된다. 누구라도 그리워하게 마련인 고향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친근하게 느끼니까 그 내용까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오랜 진리이다.
p214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은 눈만 감으면 그 모습이 절로 선하게 떠오를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즉 떠오르는 것은 대상을 향한 넘쳐나는 마음일 뿐이고, 그 모습 자체를 재현하는 능력이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고서 "계란형 얼굴에 이마가 시원하고 결 고운 가는 눈썹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을 고르게 덮었다. 쪽 곧은 콧등은 단정하고 콧방울도 반듯하다. " 고 했을 때, 또 거기에 "인중은 약간 긴 편이고 입은 코보다도 작은데 입술가가 약간 들려 보일 듯 말듯한 표정이 살포시 담겨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좀더 구체적으로 <미인도>를 떠올릴 수 있다.
조형을 언어로 바꿀 때 그것은 마음속에 간직하기 쉬운 그 무엇으로 바뀐다. 그림을 공부하는 학자들은 그런 작업을 기술이라고 부른다. 기술은 비단 회화뿐만 아니라 모든 조형물을 파악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기술을 통해서 확보된 기억은 한참 뒤에까지 살아 남아 이와 유사한 작품을 보았을 때 즉각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산 지식으로 활용된다. 처음 발견된 김홍도의 작품을 보고 "아, 김홍도로군"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훈련의 덕택이다. 물론 이런 기억은 역시 작품을 손수 베껴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조형에 관한 한 언어는 손보다 성능이 더 열등한 '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기술은 모사에 버금가게 '작품 내용을 의식하면서 자세히 뜯어보는' 행위이다.
p264바위는 예 분들이 가장 즐겨 그렸던 소재로 괴석도처럼 따로 그려진 예가 많다. 돌은 너무나도 흔히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특별하고 강력한 존재감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돌은 억겁의 긴 세월 동안 형성된 것이고 영원히 변치 않는 그 무엇이다. 돌은 겉보기에 거칠고 추할지 모르나 그 외양 안쪽 깊은 곳에 사람들조차 본받기 어렵다고 탄복해 마지 않는 굳센 정신을 간직한다. 사실 인간은 아득한 석기 시대 아래로 거대한 바위 속에서 지고한 가치를 발견해왔다.
'■ 책과 영화 > □ 인문, 역사, 미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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