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2012년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나라는 과연 어느 나라일까?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나라이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나라이다. 궁금하다. 이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 (신대륙 이주와 독립전쟁)은 그동안 막연히 알고 있던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조금의 이해를 도와주는 책이었다. 이를 통해 미국의 탄생은 나는 몇 가지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콜럼버스, 영국, 청교도, 노예무역, 흑인, 인디언 이런 단어로 미국의 시작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럽인들의 인도를 찾기 위한 신대륙 탐험을 시작으로 서인도제도가 발견이 되고, 아메리카가 유럽인들에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은 당시 삼각무역 즉, 아프리카의 노예들을 아메리카로 데려간다.
당시, 영국에서는 종교개혁의 바람으로 카톨릭과는 다른 교리로 개신교가 등장한다. 그리고 카톨릭의 탄압으로 그들은 아메리카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메리카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곳은 이미 토착민인 인디언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리고 인도에 도착한 줄 알고 그들을 Indian이라고 부른 것도 우스운 일이다.
 유럽인들은 장티푸스, 홍역등의 전염병과 잔인한 학살로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같은 방식으로 점령한 아프리카의 노예들을 아메리카로 데려와 개척을 시작한다.
 그리고 여러가지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본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통해 미국이라는 신생국이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개별적인 책들을 통해 역사에 관해 이해하게 되면, 그 많은 책들이 서로 연결되어 진다. 바로 미국의 역사를 통해서 아프리카의 역사를 들여다보게 되고 이를 통해 당시의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포괄적인 세계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하게 된다. 미국사 산책은 10권으로 이루어져있다.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유럽에 대한 역사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듯이, 유럽의 연장선상에 있는 미국의 역사 역시 미국사 산책을 통해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 17세기 말 경 존 바봇은 황금해안 (Gold Coast)에서의 노예우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노예들이 내륙 지방에서 피다(Fida)로 끌려오면 해변 근처의 칸막이방이나 감옥 같은 곳에 수용된다. 유럽인들이 그들을 인수하려고 하면 그들은 넓은 평지로 끌려나와 노예선 의사들에 의해 남자든 여자든 모두 발가벗겨져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몸을 샅샅이 검사당한다.  우량하고 건장하다고 인정되면 한쪽으로 분리되어 빨갛게 달구어진 인두로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회사 마크를 가슴에 찍힌다. 그런 다음 낙인찍힌 노예들이 다시 칸막이 방에 수용되어 배에 실려갈 때까지 대개 10일 내지 15일 정도 기다리게 된다."

노예선의 공간은 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노예들은 캄캄한 곳에서 서로 사슬로 엮이고, 배 밑바닥의 습기에 젖고, 배설물의 악취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당시의 문서들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높이가 어깨보다도 낮았기 때문에 그 불행한 인간들은 주위를 돌수도 없고 돌아누울 수 조차 없었다. 더구나 목과 다리가 갑판에 사슬로 묶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절망감과 질식해 죽을 것 같은 공포감 때문에 흑인들은 광포해진다."

 

▶ 1760년 식민지의 흑인 인구는 약 25만 명이었느데, 노예무역이 성행함에 따라 급증하기 시작했다. 1795년까지 영국 리버풀 항구에는 노예를 운반하는 배가 100척이 넘었고 그것은 전 유럽 노예무역의 절반에 달하는 것이었다. 1800년까지 1000만명 내지 1500만명의 흑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노예로 붙잡혀 왔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잡힌 노예들의 3분의 1에 해당된다. 근대 서구문명이 시작된 시기에 아프리카는 5000만명을 죽음과 노예매매로 잃었으며, 이게 바로 아프리카의 저발전의 이유가 되었다.

 

▶ 아메리카 대륙에서 독립전쟁이 터졌을 때 조선에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이렇다 할 큰 사건은 없었는데, 1776년 9월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립해 '혁신정치의 중추'로 삼았다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규장은 '군주가 지은 글'을 뜻하는 바, 규장각은 본래 왕들의 친필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왕실 도서관이다. 그러나 정조의 혁신의지에 따라 서얼 출신의 실학자 박제가, 유득공을 비롯해 신분과 당파를 초월해 선발된 규장각관료들은 탕평책을 추진하는 주요세력이 되었다. 이런 혁신이 좀더 오래 추진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새삼스럽게 든다.

 

 

반응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