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1859년에 출간되었다. 처음부터 출간연도를 언급하는 이유는 약160년 전에 출간된 책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적이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초반에 언급된 '토론'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p50

인간은 토론과 경험에 힘입어 자신의 과오를 고칠 수 있다.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 과거의 경험을 올바르게 해석하자면 토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잘못된 생각과 관행은 사실과 논쟁 앞에서 점차 그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사실과 논쟁이 인간 정신에 어떤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그 정신 앞으로 불려 나와야 한다. 사실 스스로가 진실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실에 관한 사람들의 논평이 있어야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이 내리는 판단의 힘과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잘못된 판단을 시정할 수단을 언제나 손쉽게 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판단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어떤 사람의 판단이 진실로 믿음직하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비판에 늘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된다.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까지 폭넓게 수용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의견이 왜 잘못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줌으로써, 옳은 의견 못지않게 그릇된 의견을 통해서도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다.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상이한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나아가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이모저모 따져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현명한 사람 치고 이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없다.


인간 지성의 본질에 비추어볼 때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지혜를 얻을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의심쩍어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습관화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튼튼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기 생각에 명확하게 맞설 수 있는 모든 의견들에 대해 소상하게 잘 파악하고 이런저런 반박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수 있는 사람 - 즉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이나 듣기 싫은 소리를 피하기보다 그것을 자청해 나서고,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될 수 있는 수많은 비판을 봉쇄하지 않는 사람- 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자신의 판단에 대해 더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


'토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본다. 토론이라는 것은 이렇게 글로 쓰기에는 쉽다. 

직접 사람들이 어떤 논제에 대해서 토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논제에 따라서 의견이 확연히 대립될 경우에는 자칫하면 감정적인 측면이 짙게 배어들면서 갈등을 조장할 수도 있다. 또한 준비되지 않은 토론의 경우에는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해서 상대를 설득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의견에 충분한 근거를 통해 반박하기 보다는 '그냥 그거에 대해 반대한다. 하지만 이유는 잘 모르겠다' 라는 방식이 취해지기도 한다. 때로는 서열의 우열에 따라서 어떤 이의 의견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서로를 배려한다는 생각으로 토론다운 토론을 하지 못한 채 질적으로 좋지 않은 의견만을 도출한 채 끝나버리기도 쉽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토론을 해야 할까?

우선 토론에 참석하는 사람들 간에는 사전에 어느 정도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어야 한다. 토론에서 서로 다른 의견과 부딪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틀림이 아닌 다름에 대해서 서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의견을 이야기할 때는 어느 정도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주장을 호소할 필요가 있을 때는 과감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동시에 상대방의 의견에 대해서 경청하는 자세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항상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감정적인 부분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는 평소에 사람들과 서로 대화를 하면서 살아가지만, 어떤 문제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을 심도있게 교환하거나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다름을 인정하면서 토론을 하기가 쉽지 않다. 비유가 궁색하지만, '입에 쓰면 몸에 좋다'고 토론에서 자신의 의견을 선뜻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우며, 다른 사람을 언어라는 매개로 설득하기가 쉽지않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의견과 생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볼 기회를 얻게 되며, 제한된 생각의 틀을 과감히 걷어내게 해준다.


『자유론 』의 토론에 대한 언급 부분에서 카프카가 언급한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를 느껴서 자유론의 일부만을 정리해보았다. 이외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로 재정리를 해야겠다.






반응형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한 문장을 처음 발견했을 때 홀로 탄성을 질렀다. 그 이후로 머리 속에 각인되어 항상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어떤 행동을 하기 앞서 다시 한 번 되뇌이는 말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머리 속에 각인된 문장 속을 채워주는 새로운 물음을 만났다.

바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 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생각하는 대로 살려고 하는데, 그 때 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인가? 

혹시나 믿고 있던 내 생각이 주체적인 내 생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오기도 한다.


홍세화의 『생각의 좌표』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하나씩 찾아가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똘레랑스에 대해서 인상깊게 읽은 다음에 만난 그의 두번째 책이도 하다. 


과연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


p24

네 경로(독서, 토론, 직접견문, 성찰)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은 주체적인 반면, 제도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은 주체적이지 않다. 독서와 토론, 직접견문과 성찰은 내가 주체적으로 행하는 것이지만, 제도교육과 미디어에서 나는 주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객체이며 대상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 중 책을 읽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소수다. 문제는 과거에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날엔 책을 읽지 않아도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엔 제도교육이 보편화되었고 미디어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사람들의 의식세계는 빈 채로 남아 있지 않고 채워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법의 차이가 아니고 주체적이냐의 잣대가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혹여나 제도교육과 미디어를 통해서 바람직하고 주체적인 자의식을 만들어 낸다면 그 역시 좋다고 생각된다. 매체와 방법은 분명 위에 제시한 것 외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위에 언급된 구분은 어느 정도 개인적으로 공감이 된다.


제도교육과 미디어를 접했을 때를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생각해본다면 한 마디로 '노력없이 그저 받아들인다' 라고 설명하고 싶다.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분명 미디어와 제도교육도 긍정적인 효과는 있겠지만 노력없이 무비판적으로 정보를 수용하고 뇌리에 박히게 만들어버린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익숙해진 우리는 스스로 질문을 할 줄 모른다.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는 것에 서툴기에 누군가 문제를 만들고 거기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해답만을 쫓는다. 


P192

20대에 반나치 투쟁에 참여했다고 붙잡혀 수용소에서 죽을 운명이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일흔 살을 앞두고 끝내 자살을 선택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이 말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내가 어쩌면 가장 위험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지금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어떠한지, 내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모른채 세상에 무심함을 가지고 산다는 게 얼마나 나를 위험한 존재로 만드는지 모른다. 의문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을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세상에 어떤 것도 우리가 그대로 수용해야 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다른 누군가의 생각의 결과물이다. 그 생각의 결과물에 우리도 과감히 우리의 생각을, 의문을, 질문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처음에 언급된 주체적으로 얻게 된 생각의 경로인 독서, 토론, 직접 견문, 성찰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

이중 독서는 어느 정도 실천에 옮기고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조금 더 신경써야 할 부분이다. 

토론은 최근에 기회가 되어서 몇 번 할 수 있었는데 내 생각이 얼마나 고정되어 있었고,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람들마다 의견이 얼마나 다른지 이렇게 글로는 쉽게 표현할 수 있지만 실제 경험에서 오는 자극과 충격은 상당하다. 나머지는 직접 견문과 성찰인데 예전부터 고민해오던 부분이다. 하지만 시간의 부족이라는 핑계로 모면해버린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겠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 라는 물음에 대한 고민의 생각을 가지게 하는 이 책을 읽고 나니, 다시 한 번 읊게 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반응형


▲ <아테네 학당> 중 일부, 플라톤(左)과 아리스토텔레스(右)


플라톤(BC424~BC347)에 이어 등장하는 철학자는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 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정치철학의 고전기를 장식하는 철학자로,

한 때는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드로스(BC356~BC323)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그의 업적을 하나 들자면 도덕, 미학, 과학, 논리학, 정치학, 형이상학 등 다양한 학문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서양학문의 길이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라는 책에서 보면 수도원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가는데

그 배경에 숨어있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미학을 공부하다가도, 소설을 보다가도 적지 않게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 번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정리해볼 만하다.

중세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서는,

후에 중세편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그럼, 자연철학자 - 소피스트 -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로 그리스의 고대 철학을 다시 밟아가보자.               

 

■ 이전 글
1. 철학의 시작 ~ 소크라테스 (http://zorbanoverman.tistory.com/568)
2. 플라톤 편                      (
http://zorbanoverman.tistory.com/569)


 ■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과 감각

플라톤이 이성에 의지해 살았다면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에도 의지했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모든 것의 질서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말(馬)의 형상을 생각해볼 때 말의 '이데아'는 우리가 몇몇 말을 눈으로 본 뒤에 만들어낸 개념 뿐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말의 '이데아'는 말을 경험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플라톤과는 반대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자면, 플라톤은 우리 주변의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이데아 세계 및 사람이 영혼 속에 존재하는 원형적 존재의 반영이라고 간주하였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정반대로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것은 자연적 대상의 반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우리에겐 선천적 이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든 감각적 표현을 서로 다른 무리와 종류로 정리 정돈 할 수 있는 천부적 능력을 타고난 것인데, 그 능력을 통해 '돌'과 '식물', '동물'과 '사람'등과 같은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성이 사람이 갖는 가장 중요한 특색이며 우리가 아무것도 지각하지 않으면 이성은 완전히 빈 채로 있으므로 우리에겐 어떤 본유 관념도 없다고 생각했다.

 

■ 삼라만상의 존재와 변화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서 생기는 모든 변화는 질료의 가능성의 상태에서 현실성의 상태로 변형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닭과 달걀을 생각해볼 때, 달걀은 닭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달걀은 닭이 되기 전에 오믈렛이나 후라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달걀이 거위가 되지는 않는다. 달걀이 거위가 될 가능성은 달걀 안에 없는 것이다. 즉, 사물의 형상은 사물의 가능성과 아울러서 사물의 한계도 표현해준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에는 합목적성이 있다고 믿었고, 가능성의 상태에서 현실성의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만족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목적원인', '질료원인', '작용원인', '형상원인'이다. 
'비가 왜 내릴까?' 라는 의문을 통해서 위에 언급된 원인들을 살펴본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리는 목적은 식물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다. 라고 정의한다면 식물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가 '목적원인'이 된다. 하지만 목적원인만으로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비의 재료인 수증기가 대기가 차가워졌을 때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인 '질료원인' 그리고 질료에 무언가 작용되어 지는 것 즉 수증기를 냉각하는 일이 '작용원인'이 되고 땅에 떨어지는 것이 물의 본성이라는 '형상원인' 합쳐져서 비가 내린다고 생각했다.


■ 학문적 업적과 신에 대한 생각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럽문화에서 갖는 의미 중 하나는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수많은 학술어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여러 학문을 기초했고, 계통을 세운 위대한 체계조직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나치리만큼 정확한 질서를 추구했다. 그는 우리가 쓰는 개념 또한 체계적으로 하려 했고 이런식으로 논리학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현상을 여러 다른 무리로 구분했을 때 구분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사물의 특성(할 수 있는 일과 능력)이었다.
그런 기준으로 보았을 때 사람은 자연의 온전한 삶을 사는 존재였다. 인간은 식물적 특성과 동물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특별한 성질인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때 이성은 '신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저서의 여러 대목을 보다 보면 그는 자연활동을 주관하는 유일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의 사다리 맨 위에는 신이 있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중세시대 기독교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지기도 한다.




반응형




현대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구사상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그만큼 플라톤이 서양철학에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직 철학의 개론을 살펴보는 입장이기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이 실제로 지금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운 사상에 대해서도 '아~! 그런게 있구나. 그래서 뭐?' 정도로 끝나 버린다.

더 이상의 사고(思考)는 아직까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조바심 내지 않고 일단은 잘 모르더라도 한 번 훑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자.

얼마 전에 팟캐스트 '지대넓얕' 을 들었다. 한동안 베스트셀러 상위를 차지했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저자와 그 주변인이 나와서 하는 프로그램인데, 거기에서 교육에 대한 부분이 있었다.

우리가 교육에서 말하는 보수와 진보가 무엇이냐? 그것에 대한 답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올라간다.

아직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정리하지 않았지만,

'보수'란 교육을 할 때 이것만은 꼭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세상에는 불변하는 진리(이데아)가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학생들에게 교육을 할 때 학생들을 위해 가르쳐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 변화지 않는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진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한다. 추후 살펴보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보다는 감각을 우선시 했던 철학자이다. 그래서 진보에서는 학생들에게 경험과 감각을 중요시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대안학교들도 그 뿌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닿는다.

이것은 아주 작은 한 부분이다. 서양철학과 역사, 미학 등의 역사를 살펴보면 상당 부분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수렴하게 된다.

그만큼 이 두 철학자에 대해서는 추후에도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본래는 <소피의 세계> 1권을 읽고 짧게 하나의 글을 쓰려했는데, 개인적으로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길게 되어버렸다.

일단은 입문자의 자세로, 학생의 마음으로 조금씩 정리해본다.




지금까지를 아주 간단히 정리해보면


1) 만물은 하늘(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 

2)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최초의 자연 철학자 탈레스 등장, 더 이상 하늘만을 쳐다보지는 않는다. 

3) 만물에 대한 관심이 개인과 사회로 확장하기 시작함 - 소피스트 (사설철학강사) 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4) 소피스트들은 모든 것은 흐르며 절대적인 무엇은 없다고 생각했다.

5) 이때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데 그는 인간, 도덕, 사회에서도 절대 변하지 않는 무엇(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6) 하지만 안타깝게도 독배를 마시고 죽게된다.

7) 그리고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등장하는데...



■ 이전 글 보기

1. 철학의 시작 ~ 소크라테스 (http://zorbanoverman.tistory.com/568)




# 플라톤의 등장


플라톤(BC427~347)이 29살이 되던 해에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신다. 스승의 죽음 뒤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변명]이라는 책을 내놓았고, 그것은 당시 소크라테스의 법정 진술을 기록했다. 플라톤은 이외에도 각종 편지 모음들과 35편 이상의 철학 대화편을 남겼다. 그리고 그가 만든 철학학교인 아카데미아(Academia)를 통해서 보전되었다. 플라톤이 Academia를 만든 이후 세계적으로 수천 개의 Academia가 만들어졌고, 오늘날 대학교육을 받은 이들을 Academics, 대학 학과를 Academic subjects라고 하는 것이 모두 여기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 플라톤의 이데아론


플라톤은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과 흘러가고 변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자연 뿐만 아니라 도덕과 사회로 확장되었다. 그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이며 추상적인 것이라 여겼다. 그는 어떻게 자연 현상들이 비슷할 수 있는지 경이롭게 여겼다. 그리고 만물의 이면에는 한정된 몇몇 형상들이 있으며 그 형상을 바로 '이데아'라고 했다. 즉, '이데아'는 감각세계 뒤편의 참된 현실이며 원형이라 생각했다.


플라톤은 영혼이 자리잡은 곳이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영혼이 우리의 육체 안에 자리 잡기 이전에 이미 이데아 세계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영혼이 육체 안에서 깨어나는 동시에 모든 이데아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여러 형상들을 체험해나가면서 이데아의 세계에 있었을 때의 희미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면서 자연과 사회, 도덕에 대해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 동굴의 비유


플라톤의 [국가]를 보면 '동굴의 비유'가 등장한다. 동굴 안에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아무도 동굴 밖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들은 동굴 밖에서 들리는 소리들과 동굴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면서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두려워 한다. 하지만 한 사람이 동굴 밖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동굴 속에 비친 것이 단지 실재 형상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허상이고 진실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밖으로 나가 허상이 아닌 진실, 진리를 보자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감각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집착한다. 보통은 '그림자' 라는 존재 자체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본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플라톤은 이렇게 본질적인 이데아를 놓치고 현상과 감각으로 드러나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동굴 밖으로 나가서 그림자의 본질을 보는 것을 철학자가 불명료한 상상에서 출발하여 자연 현상 배후에 있는 실제 이데아에 이르는 철학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굴 안에서 그림자가 본질인 줄 아는 자들이 아테네의 일반 시민들이라면, 동굴 밖으로 나간 사람을 철학으로 통찰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 소크라테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굴의 비유'는 철학자의 용기와 교육적 책임을 상징하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 이상적인 국가란?


플라톤의 [국가]에서 그가 '유토피아'라고 표현하는 이상 국가를 소개한다. 바로 '철학자가 다스리는 국가' 이다.

그리고 통치자, 수호자 ,상인계급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고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철학자가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는 좋은 국가를 이루려면 국가를 이성적으로 다스려야 하는데,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 바로 철학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플라톤적 국가 철학의 합리주의다.


그리고 그는 통치자와 수호자는 가족과 개인재산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어린이 교육은 각 개인이 맡기기엔 너무 큰 중대사라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그가 공공유치원, 전일제 학교를 처음 주창한 것이다. 그 외에도 당시 살고 있던 시대에 비해 여성을 무척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반응형

 



철학이란 무엇인가? 우선 정의부터 찾아보자.

여기저기 뒤적이다가 형설출판사의 《서양철학 일반》에 나온 글귀가 마음에 들었다.

1) 철학은 자기 자신의 앎의 문제를 탐구하는 사유의 학(學)

2) 철학은 난해한 학문이나 우주의 근원을 탐구하는 종합적인 학문

위에서 말한 그대로 철학은 사람인 나 자산과 나를 둘러싼 세계 바로 우주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살다보면 혼자 생각으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나에게 벌어질 지 궁금하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관을 찾는다. 그곳에서는 "그 남자 만나면 안돼", "올 해 조심해야 겠어.", "그 문서 잡아." 등등 믿어야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얘기를 하고 5만원, 10만원을 뚝딱 챙긴다.

이것도 철학이긴 하다.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궁금해서 타인을 통해 배우는 것이기에.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면 거짓이든) 그런데 철학관에서 말하는 것을 곧이 곧대로 "네" 하고 듣기에는 궁금증이 더 많고 알고 싶은 게 많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철학을 공부하나 보다.


 '철학' 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숨이 탁 막힌다. 이건 딴 세계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가까이 두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다. 궁금한 점을 찾고 찾다 보면 결국은 과거의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을 들여다볼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이제는 옛날 사람들이 생각해서 잘 정리한 글들을 읽으면 된다. 그런데 읽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읽는 연습을 차근 차근 해보려 한다. 


처음에는 맹목적으로 '그들이 이런 말을 했구나.',  '그런 생각을 했구나.' 하고 넘어가겠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다보면 나도 언젠가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태어날때 부터 사방이 벽으로 되어있는 곳에서 태어나 그것이 세계의 전부인 양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벽을 넘어서면 분명 새롭고 분명한 세상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지는 않을까? 거인의 어깨에 올라가면 그 벽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된다.


어쩌면 지루한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차근 차근 정리해본다. 현암사에 출간된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 라는 책을 바탕으로 서양철학의 기초부터 밟아갈 예정이다.


우선 오늘은 철학의 시작과 자연철학가들 그리고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까지 살펴보려고 한다.

철학 여행이 순항이 되길 바라며 돛을 올린다.

 


□ 들어가며

탈레스(BC624?~BC546?)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 하며 기존에 신이 만물을 만들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철학이 시작된다. 그리고 탈레스의 제자들과 그 당시의 철학자들을 바탕으로 만물의 생성원리에 대해서 논하는 자연철학이 생겨난다. 

BC400년경 그리스 아테네는 민주주의가 움트고 있었으며, 당시 시민들에 대한 계몽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등장한 일군의 무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소피스트들이었다. 그들 중 하나였던 프로타고라스(BC487~BC420)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 했다. 이는 바로 소피스트들이 기존의 자연을 중심으로 생각을 해왔던 것에서 인간과 사회로 그 관심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피스트들은 모든 것은 변한다며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고 하였다. 당시에 이들의 생각에 반대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소크라테스(BC470~BC399)였다. 그는 몇몇 규범은 절대적이고 보편 타당한 것이 있다는 의견을 펼친다.

 

□ 철학의 시작과 자연철학가들


탈레스(BC624?~BC546?)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하면서 철학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기존에 만물은 당연히 전능하신 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탈레스는 생각의 방식이 달랐다. 이를 시작으로 초기 철학이 싹 트기 시작한다. 그리스 식민지이던 밀레토스, 엘레아, 그리고 소아시아에서 각각 밀레토스학파, 엘레아학파, 에페소스학파가 생겨났고 그 외에도 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밀레토스 학파의 대표적 인물은 탈레스(BC624?~BC546?), 아낙시만드로스(BC610~BC546), 아낙시메데스(BC570~BC526)이 있었다. 탈레스는 당시 이집트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했고, 기원전 585년의 일식을 계산했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에 말했던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만들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은 '무한한 어떤 것'에서 생겨나 다시 그것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으며, 아낙시메데스는 대기(공기)가 만물의 근원이라 하였다.

엘레아 학파의 대표적 인물은 파르메니데스(BC540~BC480)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미 늘 존재하던 것으로 감각은 이성적 설명과 부합하지 않는 그릇된 세계상을 전해준다고 생각했다.

에페소스 학파의 헤라클레이토스(BC540~BC480)는 "모든 것은 흐른다."며 자연의 기본 특성을 지속적인 변화로 생각했다. 그는 세계는 지속적인 여러 대립쌍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 하지만 그 속에서 통일성과 전체성을 보고 만물의 바탕에 어떤 것 '신' 또는 '로고스'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주요 철학자로는 엠페도클레스(BC494~BC434), 아낙사고라스(BC500~BC428), 데모크리토스(BC460~BC370)을 들 수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은 모두 네 가지 원소(흙, 공기, 불, 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연에는 서로 다른 두 힘 (사랑과 미움)이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힘은 사물을 겹합시키고, 미움의 힘이 사물을 분리시킨다고 생각했다. 아낙사고라스는 자연이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작은 소립자로 조립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물을 더 작은 소립자로 분리할 수 있지만 가장 작은 소립자도 그 속에 전체의 모습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데모크리토스는 자연은 원자들과 빈 공간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로지 물질적인 것만을 믿는 유물론자였다. 는 자연 속의 모든 것은 흐른다는 헤라이클레이토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흘러가는 모든 것 뒷면에는 절대 흘러가지 않고 영원 불변하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원자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적인 힘들의 현존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영혼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우리의 관심사는 초기 철학자들이 어떤 해답을 발견했느냐보다는 어떤 문제를 제기했고, 어떤 해답 방식을 추구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즉, What이 아니라 How 를 통해 초기 철학에 접근해야 한다.

 

□ 아테네 철학 -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앞서 소개한 자연철학자들은 신화적 세계로부터 참된 절연을 시도함으로써 철학에 관한 한 단락을 마련했다. 이제는 관심의 대상이 자연에서 인간과 사회로 바뀌었다. BC400년대는 아테네에서 갓 피어난 민주주의에 대한 민중 계몽이 필요했다. 당시 직접민주정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을 상대로 말을 하고 설득하는 수사학을 잘 구사하는 게 중요했다.


이때 등장하는 이들이 소피스트 들이다. 일종의 사설철학강사 정도로 생각하면 될 거 같다. 소피스트였던 프로타고라스(BC487~BC420)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으며 이 말은 옳고 그름, 선과 악은 늘 인간의 필요와 관련해서 평가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유랑하던 이 소피스트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인 규범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아테네 도시 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의 생각에 반대해서, 실제로 몇몇 규범은 절대적이며 보편 타당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한 철학자가 등장하니 바로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BC470~BC399)는 전체 철학사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는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지만 유럽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의 생애는 그의 제자인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의 저작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문답법'이다. 그는 맨 먼저 문제만을 제기하고선,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대화를 진행하면서 상대방이 스스로 자기 생각의 허점을 깨닫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상대를 궁지로 몰고가 결국 무엇이 옳고 그른지 깨닫도록 했다고 하니 정말 이런 고수가 어디있겠는가.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연 철학의 문제가 아닌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철학적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후대 철학자인 키케로는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불러 내려, 각 도시와 집집마다 보금자리를 틀게 하고, 사람들이 인생과 윤리, 선과 악에 대해 깊이 생각도록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는 달랐다. 그는 소피스트들 처럼 가르치고 돈을 받지 않았으며 자신을 참된 철학자라고 칭하고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했다.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있는데 바로, 우리 인식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인간의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간의 이성을 강하게 믿었던 명백한 합리주의자였다. 그는 올바른 인식은 올바른 행동을 유도하고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만이 올바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은 우리가 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므로 우리가 지식의 폭을 넓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아주 분명하고 보편 타당한 개념 정의를 내리는 것을 무척 중요시 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그의 사상 활동이 아테네 법을 위반한다는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그는 사면을 청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죽음을 맞이 했고, 죽은 뒤에는 숭배와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




반응형

 

 

 

■ 18 ~ 19세기의 대표적인 서화 컬렉터

 

상고당 김광수 (1699~1770)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1686~1761), 현재 심사정(1707~1769)등 당대의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작품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의 이같은 활동은 모두 18세기 미술 창작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김광수는 정선이 하양현감으로 있을 때 영남사군의 모습을 「구학첩」으로 그리게 했고 1728년에는 유명한 「사직반송도」(고려대박물관 소장)를 그려 받았다. 김광수는 또 관아재 조영석에게 「현기도」(간송미술관 소장), 심사정에게 「와룡암소집도」(1744, 간송미술관 소장)를 그리게 하는 등 적극적인 주문으로 활발한 창작을 불러 일으켰다. 김광수는 또한 석농 김광국과 교유하면서 어린 김광국을 18세기 최고의 컬렉터로 키웠다. 이들의 교유는 심사정의 그림 「와룡암소집도」에 잘 나타난다.

 

김광수는 모든 것을 다 바쳐 컬렉션을 하다보니 말년이 궁핍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의 컬렉션을 헐값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흔히 보아온 근대적 예술인의 자화상을 보는 듯 하기도 하다. 안타까운 얘기이지만 뒤집어보면 예술과 문화에 대한 열정, 컬렉션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주는 역설적인 이야기이다.

 

 

사천 이병연 (1671~1751)

 

사천 이병연은 조선 영조 때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다. 그는 시인이면서 그림을 좋아했고 그림을 수집했던 컬렉터였다. 이병연은 또 진경산수화가 겸재 정선과 절친한 60년 지기였다. 이병연이 시를 쓰면 정선은 거기에 그림을 그렸다. 이병연은 정선의 그림인 「해악전신첩」(1712), 「금강도첩」을 비롯해 중국 송대와 원, 명대 화가들의 작품을 모은 「송원명적」등을 소장했다. 이병연은 정선의 검증을 거쳐 작품을 소장함으로써 수준 높은 컬렉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정선을 각종 시회나 아회에 소개해 이를 화폭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모임에 나간다는 것은 곧 모임의 구성원과 교유하는 것이다. 이병연은 자신이 긴밀히 교유했던 안동 김씨 가문 6창과 이하곤, 신정하, 김광수 등 한양의 상층 문인사대부들에게 정선을 소개했다.

 

정선은 1751년 병중의 이병연이 완쾌하기를 기원하면서 「인왕제색도」를 그렸다. 비 개고 있는 인왕산, 그 인왕제색의 풍경이 묵직하면서도 장엄하다. 빗물을 머금은 소나무들, 그 사이로 서서히 번져가는 물안개, 화면을 압도하는 짙은 화강암 봉우리가 범상치 않은 인왕산의 풍경은 60년 지기에 대한 우정이자 자신의 열렬한 후원자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석농 김광국 (1727~1797)

 

김광국이 대컬렉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상고당 김광수와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광국은 18세 때부터 당대 유명 수집가였던 김광수를 만났다. 김광수는 김광국보다 28년이나 나이가 위였다. 김광수의 집에 드나들며 김광수의 소장품을 보고 각종 서화를 감상하며 안목을 키워 나갔다. 또한 김광수의 집에서 정선, 조영석, 심사정, 이인상, 강세황 등 김광수와 교유하는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김광국은 자신의 소장품을 묶어 화첨으로 정리했는데 화첩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석농화원>이다. 이는 1780년 전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수록됐던 작품은 현재 73점까지 확인되어 있다. 김광국의 컬렉션은 현재까지도 다수가 전래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역매 오경석(1831~1879)

 

중서인계층의 가장 대표적인 수장가로 19세기 역관으로 활약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1807~1877), 친구인 유홍기(1831~1884)와 함께 개화사상을 전파하고 동시에 김옥균, 박영효 등을 지도함으로써 개화파의 선구가 됐다.

 

오경석은 중국을 열세 차례나 드나들며 무역을 해서 큰 돈을 쥐었다. 그의 컬렉션은 당대의 서화가나 지성인들의 안목과 교양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또한 서구의 문명서적들도 함께 들여옴으로써 이 땅에 개화사상이 형성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오경석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서화에 대한 안목이 그의 아들 오세창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는 점도 오경석 컬렉션의 또 다른 의의로 꼽을 수 있다.

 

 

고람 전기(1825~1854)

 

그는 재주가 많아 약포를 경영했던 의원이었고 문인화에 빼어난 서화가였으며 그림을 수집하는 컬렉터인 동시에 그림을 파는 중개상(화상)이기도 했다. 그의 수집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19세기 그 누구보다도 컬렉션의 토대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건 그가 미술 거래에 적극 나섬으로써 다른 이들로 하여금 컬렉션을 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컬렉터

 

위창 오세창(1864~1953)

 

위창 오세창은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언론인이자 서화가, 전각가이며, 서화이론비평가이자 컬렉터였다. 그는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와 연구와 창작, 그리고 고서화 수집에 혼신을 다 했는데 이는 모두 민족정신의 발로였다. 그가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이끌었다는 것은 이러한 그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19세기 역관으로 활약하면서 개화사상을 전파했던 역매 오경석의 아들이다.

 

오세창의 컬렉션은 「근역서휘」, 「근역화휘」에 압축되어 있다. 근역은 무궁화 동산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일컫는다. 「근역서휘」, 「근역화휘」는 곧 우리나라의 글씨 모음집, 그림 모음집이라는 뜻이다. 

「근역서휘」는 신라 때부터 당시까지 1,107의 명필을 총 37책으로 집대성해놓았다., 「근역화휘」는 191명의 명화 251점을 모은 책이다.

 

또한 오세창은 간송 전형필이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고 북단장(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세우도록 도와줌으로써 우리 문화재를 지켜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간송 전형필(1906~1962)

 

일제에 의한 문화재 약탈이 극성을 부리던 일제강점기, 간송 전형필은 막대한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재를 수집함으로써 민종 정신을 앞장서 지켜낸 인물이었다. 간송은 휘문고보 미술교사였던 춘곡 고희동(국내 최초의 서양화가)을 따라 오세창에 집에 드나들었다. 전형필은 특히 우리 것에 파묻혀 이를 연구하는 오세창의 모습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후 오세창과의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우리 문화재를 보존하는 길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오세창과의 만남이 전형필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간송의 노력으로 수많은 문화재의 국외 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청자상감 구름학무늬 매병」, 「백자 청화철화진사 국화난초무늬 병」, 「훈민정음 해례본」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1938년 일제의 강력한 물자 통제령에도 불구하고 북단장 내에 보화각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하였다. 지금의 간송미술관이다.뿐만 아니라 인재 양성이 또 하나의 절실한 문제임을 통감하고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 사업을 진행했다.

 

 

소전 손재형(1903~1981)

 

「세한도」는 작품 자체에도 깊고 절절한 사연이 담겨 있지만 이후 소장 과정에도 곡절이 있었다. 자칫하면 이 불후의 명작을 우리는 보지 못할 뻔했기 때문이다.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을 위해 그려 보낸 그림인데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이는 이상적의 제자였던 매은 김병선에게 넘어갔고 이어 그의 아들 소매 김준학이 물려받았다. 그후 휘문고등학교를 설립한 민영휘의 집안으로 넘겨졌는데 그의 아들 민규식이 이 작품을 일본인 추사연구가 후지쓰카 지카시에게 팔았다고 알려졌다.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1944년 거금을 들고 일본에 건너갔다. 당시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시기였다. 당시 병석에 누워있던 후즈쓰카의 집을 매일 찾아가 병문안을 하고 수십일 동안 「세한도」를 돌려줄 것을 간청했다. 그래서 결국 조국으로 돌아오게되었다. 그 후 후지쓰카의 집에는 포탄이 떨어져 불이났다고 한다. 만약 그때 돌아오지 못했다면 「세한도」는 영영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박영철(1879~1939)

 

재력을 바탕으로 수천 점의 고동서활르 수집했다. 당대의 서화가들과 교유한느 것은 물론이고 특히 오세창과 늘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자문을 받아 서화, 도자기, 고서 등 수천 점을 수집했으며 컬렉션의 수준도 상당히 높았다. 추사 김정희의 서예 「계산무진」도 그가 소장했고,1930년대 중반 오세창으로부터 그의 대표적 컬렉션인 「근역서휘」,「근역화휘」를 넘겨받기도 했다.

 

그는 친일파라고 비판을 받는 인물이지만 연암 박지원의 글을 모아 「연암집」을 발간했고 자신의 소장품을 대학에 기증하는 등 컬렉터로서는 귀감이 될 만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근역서휘」, 「근역화휘」를 비롯해 자신의 고서화 100여 점과 함께 진열관 건립비를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우경 오봉빈(1893~1945)

 

출가를 앞두고 오봉빈은 가산을 정리하기 위해 서울로 잠깐 올라갔다. 그러나 잠시 들렀던 서울에서 위창 오세창과의 만남이 그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꾸고 말았다. 오세창이란 인물을 통해 민족 문화와 전통 고미술의 보존과 계승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오봉빈은 오세창과 교유하면서 고미술품을 수집했고 오세창의 권유와 지도로 1930년 광화문통 종로경찰서 인근에 조선미술관을 세워 운영했다. 조선미술관은 19세기 서화포의 전통을 계승하고 여기에 기획전과 같은 전시의 기능을 추가한 미술공간이다. 판매와 전시를 병행한 곳으로 지금의 갤러리라고 할 수 있다.

 

 

■ 일제강점기 이후

 

호암 이병철(1910~1987)

 

우리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던 이병철(삼성그룹 창업자)의 컬렉션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1천여 점에 이르렀다. 그는 호암미술관 건립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병철은 미술관 건립의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던 1978년 국보 제133호 청자진사 연화무늬표주박모양 주전자, 국보 136호 용두보당, 국보 제138호 단원 김홍도의 <군선도>등 자신이 소장해온 문화재 1,167점을 삼성미술문화재단에 기증했다. 

1982년 개관한 호암미술관은 이병철이 기증한 컬렉션을 중심으로 고미술품뿐만 아니라 현대미술품까지 적극적으로 수집해 고미술과 근현대미술의 균형을 맞춰가면서 국내의 사립 공공박물관 가운데 최고의 컬렉션으로 자리잡았다.

 

 

호림 윤장섭(1922~)

 

개성 출신의 성보실업 회장인 윤장섭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은 고향 선배들을 만나면서 본격화됐다. 바로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황수영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진홍섭 전 이화여대 박물관장들을 1970년대 들어 만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컬렉션이 바탕이 된 호림박물관은 삼성미술관 리움, 간송미술관과 함께 3대 사립박물관으로 꼽힌다. 호림박물관의 소장품은 토기, 도자기, 회화, 금속공예품 등 1만 1천여 점, 지금도 계속 유물을 수집하고 있으며 매년 새로 구입한 작품들을 선보이기도 한다.

 

 

 

■ 컬렉션의 기증

 

수정 박병래(1903~1974)

 

1974년 3월 박병래는 자신이 40여년 간 모아온 조선백자를 국립중앙박물관에 흔쾌히 기증했다.

1929년경부터 평생 조선백자를 수집하여 말년에는 700여 점을 수집했는데 그 중 362점을 내놓은 것이다.

박병래는 원래 도록까지 함께 모두 넘겨줄 생각이었다. 단순히 유물만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도록까지 챙겨 완벽하게 기증을 하고 싶었다. 

기증을 마친 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해 5월 24일부터 전시회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 뜻 깊고 감격적인 전시를 열흘 앞둔 1973년 5월 14일, 서울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서 박병래는 세상을 떠났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수정 전시실'을 별도로 마련하여 기증품의 대표작들을 공개하고 있다.

 

 

동원 이홍근(1900~1980)

 

그가 유물을 수집하기 시작한 지 10년 정도 지나고 1960년대부터 이홍근은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 진홍섭 전 이화여대 박물관장 등 당대의 내로라 하는 문화재 전문가, 미술사학자들과 어울리면서 고미술을 감상하고 품평하곤 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1967년 서울 성북동 자신의 집에 동원미술관을 건립했다. 그 이후 그 미술관에 기거하면서 직접 수집유물을 보존관리해왔었다.

 

그렇게 수집 보관해온 문화재를 이홍근의 장남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1980년 12월 22일 2,899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고 이어 1981년 4월까지 모두 4,941점을 헌납했다. 게다가 유족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고고학과 미술사학 연구발전기금으로 은행 주식 7만여 주를 내놓았다. 또한 학술기금을 출연해 한국고고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비를 지원해오고 있다.

 

 

송암 이회림(1917~2007)

 

동양제철화학(OCI) 창업자인 송암 이회림 명예회장은 2005년 5월 서화, 도자기, 금속공예품 등 50여 년 동안 수집한 문화재 8,400여 점을 인천시에 기증했다. 작품뿐만이 아니다. 이들 문화재를 소장 전시하고 있는 인천 남구 학익동의 송암미술관까지 통째로 기증했다. 이회림이 기증한 8,400여 점은 국내 문화재 기증사상 가장 많은 양이었다. 특히 미술관 건물과 땅까지 함께 기증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시가로 환산할 경우, 건물과 땅이 약 150억원을 넘고 문화재까지 합하면 수백억원이었다.

 

그는 1960년대에 당대 최고의 문화재 컬렉터였던 개성 출신의 동원실업을 운영했던 동원 이홍근의 집에 드나들었고 1970년대에는 개성 출신인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교유하면서 문화재를 열심히 배우고 구입했다. 소장품이 늘어나자 1989년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송암미술관을 세웠고 이후 1992년 인천에 건물을 새로 지어 미술관을 옮겼었다.

 

 

두암 김용두(1933~2003)

 

경남 사천 출신의 김용두는 8세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간 뒤 철공장 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다. 고향을 생각하면서 1950년대말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문화재를 수집해 모두 1천여 점을 모았다. 그렇게 수집한 문화재를 그는 1997년 회화, 도자기, 목가구, 공예품 등 114점의 문화재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어 2000년에는 고려청자, 조선 분청사기, 불화 등 50억 원대에 이르는 문화재 57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2001년에는 여덟 폭짜리 병풍 그림인 16세기 <소상팔경도>를 기증했다. 이는 조선시대 <소상팔경도> 중 최고 명품인데다 국공립 박물관 기증 단일 문화재 중 가격면(80~100억원)에서 최고 수준인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세 차례에 걸쳐 기증한 문화재는 모두 179점으로, 국보급 보물급이 즐비하다. 가격으로 치면 수백억 원을 호가한다. 이들 기증문화재는 김용두의 뜻에 따라 고향 사천에서 가까운 국립진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01년 두암관이라는 건물을 새로 짓고 그곳에 기증한 유물을 보존 전시하고 있다.

 

 

이병창(1915~2005)

 

1999년 1월 일본 오사카에서 이색적인 뉴스가 있었다.

오사카 초대 영사를 지낸 재일교포 사업가이자 경제학자인 이병창 박사가 평생 모은 한국 도자기 301점과 중국 도자기 50점, 그리고 집을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당시 도자기의 평가액은 45억 엔, 집까지 합할 경우 47억 3천만 엔(당시 약 490억원)에 이르렀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에서는 왜 한국에 기증하지 않고 일본에 기증하느냐는 논란이 일었다. 당시 이병창은 인터뷰에서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에 우리 도자기를 기증한 것은 한국 도자기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60만 재일 한국인도 일본 사회에 기여한다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아쉬움은 깊게 남지만 오사카를 찾는 수많은 세계인들이 아름답고 당당한 청자, 백자, 분청사기를 보고 한국문화의 우수성에 대해 알고 그곳을 찾는 한국인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송성문(1931~2011)

 

성문종합영어의 저자인 송성문 선생은 2003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국보4건, 보물22건을 기증했다.

1960년대부터 베스트셀러였던 영어 참고서를 팔아 번 돈을 모두 투자해 수집한 수준 높은 컬렉션이었다. 돈으로 치면 수백억 원대를 호가한다.

 

그가 전적류 유물 구입에 나선 것은 같은 이북 출신이자 고문서상을 운영했던 전문이라는 분을 만나고 부터다. 그는 "제지공장 등에서 양잿물에 씻겨내려가는 귀중한 고서와 고문서의 글자들을 보고 가만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전적류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 후 통일이 되면 고향인 북한 땅 정주에 박물관을 지어 이 책들을 진열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전에 어렵다고 생각이 들어 모두 나라에 기증했다고 한다.

 

 

 

우리 문화재와 미학에 대해 한 발자국 더~


■ 우리 문화재 그리고 미학 - http://zorbanoverman.tistory.com/531
 

 

 

 

 

 

 

더보기

p65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의 대표적인 서화 컬렉터로는 사천 이병연, 상고당 김광수(1699~1770), 석농 김광국(1727~1797),  능호관 이인상(1710~1760), 남공철, 이하곤 등을 들 수 있다.

 

이병연은 정선의 후원자로서 컬렉터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컬렉터 이병연은 정선 작품의 컬렉터이기도 했고 동시에 정선의 후원자가 되어 당대의 미술 문화를 풍요롭게 해준 인물이다.

 

상고당 김광수도 18세기의 대표적 컬렉터다. 김광수는 옛것을 숭상한다는 의미에서 상고당이라고 호를 붙일 정도로 고동서화를 좋아했다. 그는 서책, 고동서화, 금석탑본, 문방구류 등 다양한 소장품을 갖고 있었고 이 컬렉션을 상고당 건물에 보관했다.

 

'만권루'의 주인공인 문인화가 담헌 이하곤은 서책은 물론이고 많은 서화를 수집했던 컬렉터였다. 또한 수준 높은 감식안을 지닌 비평가이기도 했다. 이하곤은 단순히 서화 수장에 머물지 않고 높은 감식안을 발휘해 비평을 남기기도 했다.

 

p66

정조대의 남공철 역시 대단한 고동서화 컬렉터였다.

 

p67

성해응(1760~1839), 그는 수집에 그치지 않고 서화 감평에도 일가견이 있어 자신이 소장했던 많은 작품들에 대한 발문을 써서 자신의 문집 속에 남기기도 했다. 그는 특히 당대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소장했으며 소장 경위나 작가의 활동 등도 함께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중인 출신의 시인인 유최진(1793~1869), 중인 출신의 역관이자 서화가이며 추사 김정희로 하여금 <세한도>를 그리게 한 우선 이상적(1804~1865), 중인 출신의 의원이자 화가인 고람 전기, 중인 출신의 서리이자 시인인 나기(1828~1874), 중인 출신의 역관이자 서화가인 역매 오경석(1831~1879)등이 19세기의 대표적인 중인 컬렉터였다.

 

<김광수>

p72김광수는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1686~1761), 현재 심사정(1707~1769) 등 당대의 일급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작품을 주문하기도 했다. 컬렉터로서 그의 이같은 활동은 모두 18세기 미술 창작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p74김광수는 또한 석농 김광국과 교유하면서 어린 김광국을 18세기 최고의 컬렉터로 키웠다. 선구적인 컬렉터가 또 한 명의 걸출한 컬렉터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들의 교유는 심사정의 그림 <와룡암소집도>에 잘 스며있다. 어느 날 김광수가 김광국의 별장인 와룡암 거처를 찾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고 현재 심사정이 비를 흠뻑 맞은 채 비틀거리며 와룡암의 문을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비가 그쳤고, 비 개인 와룡암의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이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김광수가 분위기를 돋우자 심사정은 단숨에 일필휘지로 이 풍경을 그려냈다.김광수는 모든 것을 다 바쳐 컬렉션을 하다보니 말년이 궁핍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컬렉션을 헐값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흔히 보아온 근대적 예술인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기도 하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뒤집어보면 예술과 문화에 대한 열정, 컬렉션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주는 역설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병연>p76사천 이병연은 조선 영조 때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다. 그는 시인이면서 그림을 좋아했고 그림을 수집했던 컬렉터였다. 이병연은 또 진경산수화가 겸재 정선과 절친한 60년 지기였다. 이병연이 시를 쓰면 정선은 거기에 그림을 그렸다.
p82정선은 1751년 병중의 이병연이 완쾌되기를 기원하면서 <인왕제색도>를 그렸다. 비 개고 있는 인왕산, 그 인왕제색의 풍경이 묵직하면서도 장엄하다. 빗물을 머금은 소나무들, 그 사이로 서서히 번져가는 물안개, 화면을 압도하는 짙은 화강암 봉우리가 범상치 않은 인왕산의 풍경은 60년 지기에 대한 우정이자 자신의 열렬한 후원자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정선이 작품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병연은 세상을 떠났다. 아, <인왕제색도>를 탄생시킨 것은 어찌보면 정선이 아니라 진정한 컬렉터 이병연이었다. 불후의 명작은 이렇게 탄생했으니, 저 짙고 묵직한 먹의 무게가 절절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김광국>p83무엇보다 김광국이 대컬렉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상고당 김광수와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광국은 18세 때부터 당대 유명 수집가였던 김광수를 만났다. 김광수는 김광국보다 28년이나 나이가 위였다. 김광수의 집에 드나들며 김광수의 소장품을 보고 각종 서화를 감상하고 안목을 키워나갔다. 좋은 작품을 보는 일은 좋은 컬렉터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어려서부터 김광수의 컬렉션을 볼 수 있었으니 김광국은 가장 중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김광국은 김광수의 집에서 정선, 조영석, 심사정, 이인상, 강세황 등 기광수의 교유하는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김광국은 점점 더 우리 서화에 빠져들었고 동시에 작품들을 수집하게 된 것이다.
p85<석농화원>은 1780년 전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농화원>에 수록됐던 작품은 현재 73점까지 확인되어 있다. 물론 이후 지속적인 연구 조사에 의해 그 작품 수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여기 수록됐던 작품들은 조선 전기인 15세기 안견의 작품부터 강희안, 신사임당을 거쳐 강세황, 정선, 강이천, 이인문(1745~1821), 신위, 신한평(1726~?), 김홍도, 조영석, 최북(1712~1786), 심사정 등 김광국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던 18세기 대표 화가들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를 망라하고 있다.
p89<화원별집>은 당시의 문인 서예가였던 유한지(1760~?)가 썼다. 여기에는 안견, 강희안, 신사임당, 김명국, 윤두서, 정선, 심사정, 조영석, 이광사 등의 작품과 선조의 묵죽, 공민왕의 그림 등 총 79점이 수록되어 있다.
p91김광국은 대컬렉터답게 교유가 활발했다. 그가 수집한 작품에 곁들여놓은 발문을 보면 김광국의 교유의 양상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 김응환(1742~1789), 담졸 강희언(1710~1764), 표함 강세황,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인 김노경(1766~1840) 등 사대부 문인화가들과 교유했다. 물론 그들과의 교유에서는 서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p94김광국의 컬렌션은 현재까지도 다수가 전래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조선시대의 다른 컬렉터들과는 변별되는 두드러진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오경석>p95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1807~1877), 친구인 유홍기(1831~1884)와 함께 개화사상을 전파하고 동시에 김옥균, 박영효 등을 지도함으로써 개화파의 선구가 됐다.
p99오경석의 컬렉션은 당대의 서화가나 지성인들의 안목과 교양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또한 서구의 문명서적들도 함께 들여옴으로써 이 땅에 개화사상이 형성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오경석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서화에 대한 안목이 그의 아들 오세창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는 점도 오경석 컬렉션의 또 다른 의의로 꼽을 수 있다. 오세창이 근대기 최고의 서화비평가이자 컬렉터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근역서화징>, <근역화휘>, <근역서휘> 같은 전통 미술 관련 저술과 화집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버지 오경석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p114고려청자가 일본인에 의해 도굴되기 시작한 때는 대략 1880년대로 알려져 있다. 당시 조선을 드나들던 일본인들이 고려청자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고 이를 도굴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894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한 일본은 이같은 상황을 등에 업고 공공연하게 고분을 파헤쳤다.1900년대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1905년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온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청자 수집관이었다. 고려청자에 매료된 그는 고관 귀족들에게 청자 선물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청자 도굴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이토 히로부미가 사람을 시켜 개성 일대의 고분을 도굴해 일본으로 빼돌린 청자는 1천여 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이 훔쳐간 것 가운데 최상급의 청자는 일본 왕실에 기증했다. 이 기증 청자 가운데 97점이 1966년 한일협정 때 반환되어 우리에게 돌아왔다. 현재 보물 제 452인 청자 거북모양 주전자도 이쌔 돌려받은 것이다.
p115이왕가 박물관 건립을 위해 1908년 열심히 전시품을 구입한 것도 도자기 도굴을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이 됐다. 이왕가박물관이 청자 등의 고미술품을 대량으로 구입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기에 물건을 공급하고 돈을 벌기 위해 무덤을 파헤쳐 청자를 도굴하는 일이 더욱 빈번해진 것이다. 특히 이왕가박물관은 물건 채우기에 급급해 도굴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중가보다 비싼 가격으로 청자를 사들여 결국 도굴을 조장하고 말았다. 일본인들의 청자 도굴은 주로 개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청자 도굴의 배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고려시대 고분 2천여 기가 도굴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1910년대에는 도자기 수집 열기와 도굴 행태가 더욱 고조됐다. 이어 1920~1930년대에는 고려청자 도굴이 더욱 극성을 부렸다. 청자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재에 대한 도굴과 약탈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다. 1921년 경주의 금관총에서 금관이 발견되자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굴꾼들이 경주와 개성은 물론이고 평양, 김해, 고령, 부여, 공주 등과 같은 역사적 고도의 고분을 무참히 파괴하고 유물을 도굴해갔다. 이와 함께 철화 분청사기의 본고장이었던 충남의 계룡산 가마터에서도 분청사기 도굴이 횡행했다. 이런 도굴의 범람 때문에 1910년대 이후 고려청자는 시장에 가장 많이 나왔고 또한 가장 인기있는 고미술품으로 자리잡았다. 청자 등 고미술의 인기가 높아지고 거래가 늘어나자 일본인 골동상들은 미술품 경매회사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한국의 청자와 각종 고미술품을 수집해갔다. 특히 부유한 일본인들의 돈이 한국의 고미술로 몰리면서 1930~40년대는 경매시장을 중심으로 고미술 거래가의 호황기를 맞았다.
p119이왕가박물관은 1909년 11월 1일 대한제국의 제실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설립했다. 그러나 그 역사는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8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창덕궁의 바로 옆인 창경궁에 설치한 것이다. 이후 고려자기, 금속공예품, 조선시대 회화 등 고미술품을 집중 수집해 이듬해인  1909년 11월 1일 창경궁의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일반인 관람을 허용하면서 공식 개관한 것이다.박물관이 개관한 1909년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고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일제가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그 품격을 훼손하던 시절이었다. 또한 창경궁의 이름마저 일개 놀이동산의 의미인 창경원으로 바꾸어 그 이미지를 비하하려던 때이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만들어진 것이 제실박물관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박물관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20세기 초의 슬픈 역사가 담겨 있는 셈이다.
제실박물관은 이왕직에서 관리했다. 이왕직은 조선의 왕가와 관련된 업무를 맡고 있는 조직이었다. 따라서 제실박물관은 자연스럽게 이왕가박물이 되었다. 조선의 황실을 일개 이씨 왕족의 가문 정도라는 의미로 격하시켰다. 일본은 이를 노린 것이다.
제실박물관이 문을 열 때는 창경궁의 양화당, 명정전과 그 행각, 경춘전과 통명전 등 창경궁의 주요 전각을 전시실로 사용했다. 이어 1911년 3월에는 창경궁의 자경전 자리에 이왕가 박물관의 전용 건물을 세웠다. 이왕가박물관은 이후 1928년 덕수궁으로 옮겨갔고 이때 덕수궁의 근대일본미술 진열관과 창경궁 이왕가박물관을 합쳐 이왕가미술관으로 개편했으며 광복 이후 1946년 덕수궁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69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통합했다.
p124조선총독부 박물관은 1915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두 달 전인 1915년 10월 조선물산공진회가 경복궁에서 열렸는데 그때 전시 공간으로 쓰기 위해 지었던 서양식 2층짜리 미술관 건물을 비롯해 근정전 등 여러 전각을 박물관 공간으로 사용했다.총독부 박물관은 순수하게 우리 문화유산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동경제국대학에서 파견된 인류학자, 건축학자, 미숙사학자 등을 중심으로 조선에서 고적 조사를 진행했고 총독부 박물관을 그 거점으로 이용했다. 이곳에서 발굴과 각종 자료조사를 진행하고 그것을 연구하고 보존 전시했으며 그것은 결국 일제의 조선침략을 위한 수단이었다.개관 당시 유물은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3,300여 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속적인 고적 조사사업과 발굴에 따라 유물은 꾸준히 증가했다. 1924년 기록에 따르면 약 9,600여 점이나 됐다고 하며 1932년에 1만 2,908점, 1935년에 1만 3,752점이었다고 한다총독부 박물관의 소장품 증가에는 기증이 한몫을 했다. 조선 3대 통감 및 초대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한국에서 많은 문화재를 약탈하고 수지했다. 그는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1916년 총독부 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했다. 국보 중의 국보인 금동반가사유상(현재 국보 제 78호)를 비롯해 각종 청자, 청동은입사 물가풍경무늬 정병(국보 제92호),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등 800여 점이었다.일본으로 건너간 데라우치는 데라우치문고를 만들었다. 데라우치문고는 데라우치가 수집한 1만 8천여 점의 한국, 중국, 일본의 고서화와 전적류를 말한다. 여기에는 1910년부터 1915년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각종 고서화, 문집 등 1,500여 점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광복 이후 1945년 12월 국립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1963년 국립중앙박물관보관 소장품 목록에 따르면 이왕가박물고나 컬렌션은 1만 1,114점, 조선총독부 박물관 컬렉션은 4만 836점이었다. 이것이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 컬렉션의 토대가 되었다.
p136오구라 다케노스케, 그는 일제 강점기 때 한국에서 우리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수집한 사람이다.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오구라는 일본에서 우편과 관련된 일을 하다가 한국으로 건너왔다. 경부철도를 다닌 후 대구에서 대구전기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흥전기, 남선합동전기로 발전을 거듭해 1910년대 당시 조선에서 제일 가는 전기회사가 됐다.오구라는 자신의 부를 토대로 1921년경부터 조선의 유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이후 30여 년에 걸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유물을 수집했다. 그는 유물을 수집하면서 "일본의 고대사 가운데에는 의외로 조선의 발굴품과 고미술품을 근거로 하여 비로소 명확해질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선 문화재의 중요성을 알고 유물을 수집했다는 말이다.
초대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 박사는 "오구라라는 자는 우리나라 문화재 최대의 약탈자임에 틀립없다"고말했던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p140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이자 서화비평가였던 위창 오세창과 해외로 반출되는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재산을 기꺼이 바친 간송 전형필, 일본에 가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온 소전 손재형, 밀반출되는 조국의 문화재를 안타까워하며 평생 백자를 수집한 뒤 말년에 이를 국가에 기증한 수정 박병래 등
오세창은 당시 최고의 안목을 지닌 문예인이자 컬렉터였다. 아버지인 오경석으로부터 컬렉션과 감식안을 물려받은 오세창을 조선시대 이전의 서화 명품까지도 망라한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세창은 이들 작품을 한데 묶어 <근역화휘>, <근역서휘>등을 편찬하기도 했다. 오세창은 그 자신도 컬렉터였지만 그의 안목과 생각을 전수해 많은 컬렉터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간송 전형필, 우경 오봉빈(1893~1945), 다산 박영철(1869~1939)등 일제강점기 한국을 대표하는 컬렉터들이 모두 오세창의 문하생이었다.
컬렉터 손재형의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태평양전쟁이 절정이던 1944년, 손재형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소식을 듣고 돈을 마련해 곧바로 일본 도쿄로 날아갔다. 포탄이 쏟아지는 일본 도쿄에 들어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100일 가까이 머리를 조아린 끝에 그 일본인의 마음을 돌려 <세한도>를 찾아온 그의 일화는 듣는 이의 마음을 울리지 않을 수 업사.

p141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한국인 컬렉터로는 김찬영*1893~1960), 박창훈, 유복렬, 창랑 장택상(1893~1969), 인촌 김성수(1891~1955), 고경당 이병직(1896~1973)등을 들 수 있다.









 

반응형

'■ 책과 영화 > □ 인문, 역사, 미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피의 세계1 (플라톤 편)  (0) 2015.06.20
소피의 세계1 (철학의 탄생~소크라테스)  (0) 2015.06.17
빨간 도시  (0) 2015.04.12
금요일엔 돌아오렴  (1) 2015.04.09
인간이 그리는 무늬  (0) 2015.03.19
더보기

p78

문화는 밥과 반찬처럼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두 번 작심하고 다가가야 할 순례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아직도 진행형인 우리 문화의 모습이다.

 

p88

이처럼 초대형의 문화적, 도시적 폭발력을 지닌 건물을 절해고도에 세워서 사진의 피사체로만 삼겠다는 것이 진정 문제였다. 이런 건물이 도시 내에 자리 잡으면 주위는 금방 연관된 문화 공간으로 바뀌어 간다.
p93미술관은 창고에서 시작했다. 권력자나 귀족이 소유한 귀중품을 소장하고 있는 공간일 뿐이었다. 그래서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은 유전자의 뿌리가 같다. 미술 권력은 그림을 구입하는 사람이 쥐고 있었다. 그림을 굳이 전시한다면 빼곡하게 그림을 붙여놓았다.
p108토론 없는 결론보다 결롭 없는 토론의 가치가 중요한 것이 민주주의의 가치라면 이해할 수도 있는 과정이다.
p112감시와 처벌, 이것은 책의 제목이면서 건물의 주제이기도 하다. 바로 감옥이다. 최소의 간수가 최대의 죄수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재조직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간단명료한 주제로 재구성된 공간을 부르는 이름이 바로 파놉티콘이다. 그것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시선으로 이루어진 권력의 비대칭이다. 간수는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어두운 방의 간수를 볼 수 없다. 그래서 죄수는 간수실에 간수가 있든 없든 거기 항상 간수가 있다고 전제할 수밖에 없다. 죄수는 스스로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p115건축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존재한다. 건물이 일상의 소비재가 아니고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적 환경이라는 가치관이 건축을 의미있게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 의미이면서 다음 세대에 대한 역사적 책임 의식이기도 하다.
p116사형 제도 폐지의 가장 큰 논거는 오심의 가능성이다.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예는 예수의 처형일 것이다. 종교적인 판단을 접어둔다면 그 처형은 번제를 요구하는 집단 광기와 정치적 이기심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2000년 동안 유럽 사회에 이어지던 유태인 혐오의 근저에는 예수 처형자의 자손들이라는 적개심이 깔려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이 혐오감이 무려 600만 명의 인간을 처형했다. 역사는 집단 광기의 몸부림으로 휘청거려왔다.
p12116세기의 도시와 그림을 치밀하게 그려나간 이 소설은 단지 터키의 문학적 성취에 그치지 않는다. 이스탄불이라는 도시가 얻게 된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다. 건물에만 관심있던 여행자에게 회색빛이던 도시는 이제 빨갛고 파란 속살을 지닌 도시로 변모했다. 그 색을 보여준 도구가 바로 소설이다. 2006년의 노벨상은 이렇게 언어로 도시를 쌓아 올린 작가 오르한 파무크에게 수여되었다.
건축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담는다. 건축 교육은 벽돌 쌓는 지식을 넘어 자신의 세계관을 요구한다. 건축이 아름다운 것은 도시와 역사를 다루는 작업이고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건축가는 닭장 같은 건물에 대한 시민들의 비난도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다.
p122도시는 건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설, 음악, 영화에 담긴 도시의 모습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도시가 지닌 문화적 자산들이고 도시를 의미 있게 만드는 것들이다. [토지]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하동이고, [탁류]를 의미 있게 하는 것은 군산이다. 메밀꽃 필 무렵이면 봉평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건물이 아닌 소설 때문이다.
p123도시는 살아 있어야 하고 새로운 제안을 통해 계속 변화해 나가야 한다. 좋은 도시는 우리의 야심이어야 한다.
p130도시가 살 방향은 모방과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에 있다. 그것은 단지 건물의 창조에만 있는 가치가 아니다. 좋은 도시의 창조에는 미술이 개입한다.
p207이 개발회사는 건물의 크기뿐 아니라 건물의 질적인 수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시민, 공무원, 언론인, 심지어 철학자도 포함된 위원회가 매월 모여 건축가를 선정하고 건물의 질적인 문제를 검토한 뒤 전략을 만들어나갔다.
p214도시 구석구석에 이웃의 시선으로부터 감춰질 수 있는 곳을 없애는 것이 안전한 도시를 만드는 길이다. 높은 담장을 쌓는 것이 아니라 담장을 없애는 것이 범죄를 막을 수 있다. 가로등도 차도뿐만 아니라 인도의 구석을 비출 수 있도록 별도로 마련되어야 한다.
p215상점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말로는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세제 감면과 같은 세금의 예외 조항을 두는 것은 뉴질랜드의 정신이 아니다." 시정부 기관인 캔터베리개발공사의 국제 담당관의 단언이다. 다만 공동 광고를 해주고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도록 다양한 축제를 기획하는 등의 작업을 해주는 것이다.
p217중요한 것은 시민을 위한 도시다. 시민이 아니고 관광객을 위한 정책을 펴온 한국의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새겨야 할 이야기다.
p241헬싱키는 토지 이용권을 양도하더라도 토지 이용자에게 최고 수준의 건물을 지을 것을 요구한다. 건축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현상공모를 하든가, 자격을 지닌 건축가를 섭외하여 시의 동의를 얻을 것을 계약 조건으로 내거는 것이다. 건축가 선정 과정의 형식적 공정성을 갖추기 위한 것이 아니고 최고의 디자인을 얻기 위한 장치다. 핀란드는 유로화 통용 이전의 지폐에 건축가가 등장했던 나라다.
p251우리 사회의 가치는 분명 전도되어 있다. 시험은 기량을 가늠하는 도구이거늘 우리 사회에서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고 극복해야 할 목표로 바뀐다. 언어는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거늘 영어 시험은 자격이 아니고 능력의 위상을 갖고 있다. 세계적인 업적을 남긴 이에게 수여하는 결과물이 노벨상이라는데 한국에서는 국가 자존심의 표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연말이 호들갑스럽다.
p261건축을 공부하려면 필요한 자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내 대답은 상상력과 논리적 설득력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머릿속에서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상상력이다. 또한 건축은 개인의 작업 아니고 여러 사람이 개입하는 작업이기에 그들을 설득하여 자신이 상상한 바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p266많은 이가내게 물었다. 가장 아름다운 도시는 어떤 도시냐고, 나는 대답했다. 가장 공정한 사회가 만드는 도시가 가장 아름답다고, 실제로 우리가 그림엽서로 만나는 그 아름다운 도시들은 모두 소위 선진국의 도시들이고 그들은 모두 사회적 공정성을 기반으로 선진국이 되었다. 나는 우리가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나가는 사회에서 멀어질까봐 두렵다.

 

 

반응형




많이 망설였다. 이런 글을 내가 써도 될까? 지금까지 아무런 관심도 제대로 두지 않았고, 어떤 행동 한 번 하지 않았던 내가 감히 이 사건에 대해서 말을 해도 될까? 책을 읽고 나서 느낀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과연 이게 내가 해도 되는 건가 하고 몇 번을 다시 고민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는 조금이라도 내가 위안이 되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글을 남기고 싶었다.


창비의 《금요일엔 돌아오렴》은 출간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읽어야 할지를 혼자 수없이 고민했다. 무슨 내용이 나올지 그 무거움을 알기에 쉽게 손에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얼마 전, 회사 근처에 있는 서점에 들렀다가 이 책과 다시 마주했다. 이번에는 보자마자 책을 잡았다. 늦기 전에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얼마 지나면 그 일이 있은 지 1년이 되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 책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작가들이 쓴 글이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의 상황, 그리고 4월 16일 그 이후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새벽에 서재에서 홀로 책을 읽기도 했고,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읽기도 했다. 그리고 빌린 책을 반납하러 집 근처 도서관에 갔다가 나머지를 모두 읽었다. 솔직히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읽다가 어떡하지, 어떡하지? 라는 말을 수없이 속으로 반복했다. 어쩔 때는 눈물을 떨구기도 하고, 때로는 어금니를 꽉 물고 주먹을 쥐면서 분노하기도 했다. 다 읽고 나서는 큰 숨을 내 쉬었다. ‘아,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서 책을 덮고 나서도 많이 힘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수 없이 많은 걸 느꼈지만, 계속 가슴에 남는 것만 몇 가지 이야기하려 한다. 


# 부모들이 모두들 함께 이야기한다. 처음에 아들, 딸들에게 전화연락이 왔다고 한다. 그러면 괜찮다면서 선생님 말 잘 듣고, 그곳에 있는 승무원들 말을 잘 들으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전원구조’라는 속보가 떠들썩하게 보도되었다. 그래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후에 알고 보니 그 말은 현장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 한 말을 기자가 그대로 방송국에 전달하고 실제 방송으로 내보냈다.


# 그런 부모들이 팽목항에 가는 길에 아이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도착해보니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방송에서는 대대적인 수색작업과 첨단장비의 투입한다는 식의 보도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말한다. ‘배만 가라앉고 있었다.’, ‘수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상황을 물어보니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만약, 그런 보도가 없었고 실제 상황만이라도 사실적으로 보도되었다면 구조를 하려고 다른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 실종자수색작업을 하면서 아이들의 휴대폰들도 복원이 되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았다. 배 안에서는 방송이 나온다. 구조가 될 테니 그대로 있으라고 한다. 그런데 선장과 승무원들은 배를 버렸다. 수 많은 아이들을 버렸다. 아이들은 ‘어른들 말 잘 들어라’ 라는 말을 잘 따랐다. 그래서 그렇게 됐다. 형편없는 어른들 때문에 불빛이 삭으러 들었다. 실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니 아이들은 서로에게 구명조끼를 전해주고 손을 잡아주고 먼저 나가게 한다. 괜찮다고 서로 위로했다. 어른들 말 안 듣고 나갔어야 했는데 아이들은 너무 착했다.


# 아무런 매뉴얼이 없었다. 해양 사고에 대한 어떠한 매뉴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중 어떤 사람은 서해페리호의 유가족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말한다. 그때보다 나은 게 없다고 한다. 구조방법도 알지 못한다. 유가족들이 방법을 찾아내서 알려주면 그 방법대로 한다. 그리고 안 되면 당신네들이 말한 대로 하니 안 된다. 이렇게 반응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어디 있나. 처음에 실종자들을 하나씩 찾았을 때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단일한 통로가 없어서 사람들은 모여서 대화를 해봐야지 신원을 알 수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번 세월호 사고로 매뉴얼이 만들어진다고도 했다.


# 남은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지. 이게 읽으면서 가장 크게 다가왔다. 딸과 단 둘이 살았던 아버지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형을 통해서 가족과 소통했던 작은 아들이 어느 날 홀로 세상을 등지려고 시도했다. 차가 우회전을 하는 걸 아는데 일부러 몸을 던졌다. 집 안에 더 이상 대화가 사라졌다. 자식들을 기다리면서 정부와 대응하면서 누군가는 암에 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대상포진에 걸리고 몸은 망가져갔다. 삶이 송두리째 망가지고 바뀌어갔다. 4월 16일 이전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더 이상 그들의 가정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있다.


# 서명운동을 벌이고, 특별법 제정을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일부 어떤 이들은 보상금만을 이야기한다. 그게 주목적이 아니냐고 한다. 단식투쟁을 하는 부모들 앞에서 폭식투쟁을 하는 인간 이하의 행동을 보이는 이도 있다. 부모들은 말한다. 당신들은 그 돈으로 자식과 바꿀 수 있겠냐고, 특별법 제정을 해도 자기네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다음 번에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자기네들도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다고 그러니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겨도 결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세월호의 침몰은 대한민국의 침몰이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서 아이들이 빛을 잃었다. 해양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응 매뉴얼은 부재했고, 언론은 왜곡보도로 모든 것을 혼란 속에 파묻히게 했다. 배는 과적용량의 두 배를 채웠고, 선장과 승무원들은 방송에서는 가만히 있으라 했으면서 배를 타고 도망갔다. 누군가는 유가족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렸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자기 만의 우주를 가지고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그들의 이름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비록 짧은 생애를 살고 갔지만 그들의 삶은 분명 의미 있었고, 개별적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우리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누구는 4시 16분에 알람을 맞추어 놓았다고 한다. 누구는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닌다. 아이들을 기억하면서 그때의 언론을 기억하고 그때의 정부를 기억하고 그때의 어른들을 기억하고 그때의 나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반응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