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tion) 타조 사냥하는 방법을 아시나요? 


타조를 발견하면, 일단 타조를 쫓기 시작합니다. 근데 쫓는 방법이 있다고 해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계속 쫓아간다고 합니다. 타조 이 녀석이 지겨울 정도로 말이죠. 그렇게 계속해서 쫓다 보면 어느 순간에 타조가 자기를 쫓아오는 사냥꾼과 자기 사이에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긴장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대가 자기 머리를 처박는답니다. 그러면 머리를 처박고 있는 타조를 그냥 주워 오면 되는 거예요. 이게 타조 사냥이예요. (p242)


이 부분을 처음 읽을 때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조가 바로 나라면? 라는 생각을 하니 정말 섬뜩했습니다. 스스로 머리를 처박을 때까지의 수많은 고민과 공포 그리고 결국 땅에 쳐 박아버리는 절망이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나 사이에도 이렇게 일정한 긴장이 존재합니다. 이 긴장을 어떻게 관리하는가가  삶의 실질적인 모습이 되는 것이죠. 어떻게 해야 타조처럼 안타까운 일을 피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따라오는 이를 향해 뒤돌아 당당히 응시할 수 있을까요?



■ 온전한 '나'로 거듭나기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생각을 하거나 결정을 내릴 때 이념이나 가치관 혹은 신념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게 있습니다. 이념, 신념, 가치관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 어쩌면 대부분은 살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일 겁니다. 그럼 그런 사회와 문화 속에서 갈등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요?

저는 이럴 때 18세기 프랑스 철학자인 콩도르세의 말을 떠올려 보곤 합니다.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나 역시 앞으로 계속 고집할텐데 대체 바뀔 가능성이 없는 나의 생각은 어떻게 내것이 되었을까?"

우리는 처음에 모두가 이렇게 일정한 틀에 얽매여 있지 않는 원시성을 지녔습니다. 이념과 신념과 가치관으로 얽매여 있는 틀을 과감히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온전한 '나'로 거듭나게 됩니다.


'나'로 존재한다는 말은 내가 '우리'가 되기 이전의 오직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충동, 힘, 의지 활동성, 비정형성의 감각 등이 주도권을 가지고 행위 과정에서 최초의 동기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이성적이기 이전에 내적 충동성에서 출발한다는 뜻이지요. 나의 내적인 충동성에서 출발한다는 뜻이지요. 나의 내적인 충동성이 외적이고 이성적인 계산법으로 제어되기 이전의 감각에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p81)


■ 앎을 넘어서는 실천할 수 있는 주체력


왜 우리는 자유에 대한 지식은 있는데 자유롭지 못할까?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나는데도 왜 우리는 더 유연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더 행복하지 않을까? 이제 질문에 답을 해 봅시다. 우리한테는 지식을 지혜로 숙성시키거나 자기가 아는 지식과 경험을 유연함, 행복, 창의성 등과 같은 인격적 단계로 밀어 올릴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지식이 지혜로 넘어가고, 이미 있는 경험의 기억이나 지적 체계들이 삶의 동심원을 더 활발하게 펼쳐 줄 수 있는 활동의 힘이 갖춰져야 합니다.체계가 아니라 힘입니다! 그 힘을 저는 '주체력'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인문력'이라고 하면 너무 억지일까요? (p163)


독서를 하는 것은 일종의 간접경험으로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입니다. 단순한 앎의 단계죠. 독서의 진정한 의미는 읽은 후에야 나타납니다. 책을 읽고 답사를 하고, 미술 전시를 보고, 관련된 체험도 해보고, 사람들과의 인연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매개로도 이용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책을 바탕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타자를 이해하게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결국 이런 과정의 반복 속에서 앞을 먼저 내다 볼 수 있는 지혜와 통찰력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 육체성의 확인


몸을 움직여서 한계를 경험할 때라야, 자기를 극한의 경계선에 서 보게 할 때라야, 자기의 의식 속으로 오히려 자기 자신이 성큼 드러납니다. 자기가 자기를 꽉 채우는 이 경험, 오로지 자기 자신이 자신으로만 남는 일입니다. 자기를 몸으로 느낄 때 자신에게는 가장 현실적입니다. 운동은 단순히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대면하는 가장 극적인 장치입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자기 몸에서 분비되어 자기 코로 다시 돌아오는 땀 냄새, 심장을 터지게 할 것 같은 박동, 모두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자기에게 보여주는 극적인 증거들입니다. 운동하면서 보이는 자기보다 더 극적인 자기가 있을까요? (p267)


어떤 이들은 정신적인 활동을 육체적인 활동의 우위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육체는 정신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단순한 도구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독립적 주체가 되는 일은 육체성을 확인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육체를 통해서만 인간은 타인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구별이 됩니다. 이렇게 육체성을 근간으로 한 독립적주체로서의 온전한 '나'로 거듭나는 사람이 스스로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Question) 이제 다시 한 번 질문을 해봅니다. 타조가 잡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스스로 온전한 '나'로 거듭나라, 앎을 넘어서 실천할 수 있는 주체력으로 통찰력을 가져라, 자신의 육체성 회복을 통해 독립적 주체로 거듭나자. 어떻게 보면 다 뻔한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문학을 주제로 책을 내놓는 많은 이들의 책 속에서 등장하는 주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시 확인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이렇게 하지 못하는 제가 너무나 아쉬울 뿐입니다. 하지만 작심삼일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것에 도달할 거라 생각합니다. 특별한 방법은 없는 거 같습니다. 묵묵히 뻔한 이야기를 제 이야기로 만드는 수 밖에.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 아닌 것은 힘이 없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아름답지도 창의적이지도 않습니다.

나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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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심리학 그리고 자녀교육, 용기주는 법]

 

자녀양육, 자녀교육처럼 자녀○○ 이런 단어들은 일단 호락호락하지 않다.

 

최근에 어린이집 교사의 아이 폭력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자 전국민이 들고 일어났다. 일단 아직 신체적 성장이 미숙한 아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한 분노였다. 또한 결코 남일 같지 않은 내 아이, 손주, 조카가 갑자기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자녀교육하면 우리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오바마 대통령 방한과 연설에서도 몇 번이나 언급되었던 대한민국의 교육열이다.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도 아이들을 교육시켰고, 대학이 우골탑이라고 불릴 정도로 시골에서 꼭 있어야 하는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자식들이 경제성장을 이끌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경제강국이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자녀교육의 힘, 결과를 경험했다. 자신들이 경험한 것은 체화된다. 체화된 것은 어쩔 수 없이 자녀들에게 되물림된다.

 

이렇게 우리는 자녀의 건강과 안전 그리고 그들의 미래를 위한 교육에 대해 열을 올린다. 그리고 그 속에 나도 포함된다. 아이도 셋, 게다가 모두 아들이니 양육과 교육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집에 서가에 보면 자녀교육에 대한 책이 많이 있다. 이 책들은 거의 다 아내가 사달라고 하면 주문한 책들이다. 내용들도 다양하고 가지각색이다. ‘유대인식 교육’, ‘프랑스식 아이키우기’, ‘아이의 자존감 키워주기’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아들과의 대화법등 정말 다양하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답이 없다는 말이다.

 

6, 4, 1살 남자아이로 구성된 우리 아이들이다. 일단 아래층 사람에게 항상 미안하다. 몇 번 연락이 왔을 때는 나 역시 화도 났지만, 생각해보면 그 동안 참아준 것만 해도 고마울 뿐이다. 가끔 아내와 얘기한다. ‘아래층에 한 달에 일정 금액을 주고 마음껏 뛰어 놀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마음놓고 뛰어 놀 수 있는 마당있는 집에 살고 싶다.’ 쉽지 않다.

 

일단 처음 아이가 생겼을 때, 아빠로의 컨셉은 일단 식상한 단어인 친구 같은 아빠였다. 최근 방송 프로에서 <아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아버지와 딸들의 관계도 이렇게 쉽지 않은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말해 주듯 엄마를 두고 경쟁하는 경쟁자인 아버지와 관계는 안 봐도 뻔하다. 그러기에 아들과 친해지려는 아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들은 말로 아들 셋을 키우는 엄마는 깡패가 되거나 아니면 보살이 된다고 한다. 아내가 교회를 다니니 성인으로 바꾸어 주어야겠다. 아빠 또한 하루에 같이 생활하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똑같은 심정이다. 몇 번 말을 해도 고쳐지지 않으면 쉽사리 나 혼자 분노게이지가 높아져서 소리를 지르고 엉덩이를 때린다. ~!! 그 동안 읽었던 책들에서 가르치는 것들, 아내와 나누었던 많은 대화들도 어느 순간 소용이 없어지곤 했다. 결혼 후에 몇 번 싸운 것도 모두 다 아이들 문제였다.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지금도 여전히 우여곡절 중에 있지만 몇 가지 깨달은 점은 있다. 그러한 점이 아들러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과 상당 부분 겹쳐지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이 책에 주목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벌은 주거나 혼내는 게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남자아이들이다 보니 신체적으로 위험하게 노는 경우가 자주 있다. 말로 혼내고, 엉덩이도 때리고, 형이 동생에게 한 것 그대로 따라하면서 너도 아프지? 하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방식의 유치한 방식도 취해봤지만 변화는 없었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 나의 분노게이지만 오를 뿐이다. 이럴 때 방법이 없다. 계속해서 반복해서 얘기해주는 방법 밖에 없다. 6살이 된 첫째에게는 충분히 이해시켜야 한다. 왜 하면 안되는지. 아이가 스스로 수긍을 해야지 무언가 바뀐다. 이게 답인 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쉽지 않다. 이성적으로는 가능한데, 그 맥락에 내가 들어가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렵나 보다.

 

두 번째는 아이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가 출산 전 아이를 낳으려고 할 때,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남편들은 종교의 유무에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기도를 할 것이다. 그때, ‘이 아이가 좋은 직장을 얻어서 돈을 많이 벌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다. 아마 기도는 거의 비슷할 거다. ‘아이와 아내 모두 건강하게 해주세요.’ 바로 존재 자체에 대한 기도이다. 이랬었는데 시간이 지나다보면 다른 아이보다 뒤쳐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고, 아이를 통해 부모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아 보인다. 나 또한 어쩌면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항상 존재 자체에 대해 감사함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해본다.

 

내 입장에서는 아들러 심리학을 자녀 양육, 교육의 관점으로 보고 읽었을 때 다가오는 점이 더 많았다. 다른 육아서적보다 확실히 느낀 점이 더 많았다고 생각된다. 아들러 심리학에 대한 책은 <미움받을 용기>,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두 권으로 마치려고 하는데 자녀교육 관점에 대해 고찰한 책이 나온다면 기꺼이 다시 한 번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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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는 정치가 아닌 제대로 된 육아와 교육을 통해서만이 개인의 구원, 그리고 나아가 인류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러는 빈 아동상담소를 설치하고 상담 활동에 힘을 쏟아부었다.

 

부모나 선생님은 아이가 성장해서 어떤 어른이 되길 바라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눈앞에 놓인 일에만 급급해서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만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1.     자립한다.

2.     사회와 조화롭게 살아간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심리적으로는 다음 두 가지를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 가지 심리목표다. 심리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마음가짐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1.     나는 능력이 있다.

2.     사람들은 나의 친구다.

아들러는 행동은 신념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이가 자립해서 조화롭게 살아가게끔 하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적절한 신념을 키워줘야 한다고 말한다.

 

벌을 주거나 꾸짖거나 비판하면 무엇보다도 서로의 관계가 나빠진다. 상대와의 관계가 멀어진 상태에서 필요한 경우에만 상대의 행동을 개선하도록 요구할 수는 없다.

또한, 벌을 주고 얻는 효과는 일시적이다. 그래서 혼내는 사람이 없으면 다시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 설사 부적절한 행동은 하지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마음을 바꿔 올바른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과연 벌로써 아이가 적절한 신념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벌을 받는 아이는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 학교나 가정에서 자신이 있을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면 극단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친구가 아니라 자신의 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사실, ‘자신이 있을 곳이 있다는 안도감은 그 어떤 것보다 우리 인간이 기본적으로 갈구하는 것이다. 벌을 받거나 꾸중을 듣는 아이는 극단적인 경우, 이 세상에도 자신이 있을 곳은 없다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크게 보이기 위해 발돋움한다. 이 간단한 방법으로 성공과 우월감을 얻으려고 한다. 아이가 문제 행동을 한다는 건 아이를 향한 애정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의 용기가 꺾였기 때문이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이를 평범해질 용기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보통으로 있을 용기가 없기에 우선은 남들보다 특별히 잘하려고 한다. 그리고 만일 해내지 못할 경우에는 특별히 나빠지려고 한다. 비뚤어지거나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간단히 성공과 우월감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무엇인가를 했기에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로 이미 기쁘다고 전해야 한다. 이상적인 모델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그 대신 내 눈앞에 있는 아이에게서 출발해야 한다. 이상적인 아이의 모습을 기준으로 현실 속의 아이를 보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를 기준으로 삼고 현실 속의 아이를 보면 그 아이가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쁨이다. 그 아이의 어떤 모습이라도 좋게 보인다. 바로 그런 느낌을 아이에게 말로 전해주는 것이 용기를 주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가 결말을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를 테면 숙제하지 않는 아이에게 숙제하는 훈계는 필요 없다. 대신 아이가 숙제를 하지 않았을 때 학교에서 어떤 사회적인 결말을 ㅊㅔ험하게 되는지는 직접 겪도록 해야 한다. 결말을 체험하게 할 때 아이는 자신에게 능력이 있고, 사람들은 자신의 친구라고 느끼게 된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온화하고 단호하게 아이를 대하라고 권한다. 온화하다는 것은 힘으로 누르지 않고 끈기 있게 대화를 나눈다는 걸 의미한다. 단호하다는 것은 아이와 부모의 과제를 분리한 뒤,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과제에 맞설 수 있다면 불필요한 개입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이는 온화하고 단호하게 키워야 한다.

 

말로 문제 해결을 꾀하지 않는 배경에는, 상대를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며, 상대에게 말해봤자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나이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아이가 몇 살이든 당신과 대등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해요. 아이를 위에서 내려다보듯 칭찬하는 건 아예 그만두세요.”



함께 읽어 보기


■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법 (나, 용기얻는 밤)     
   
http://zorbanoverman.tistory.com/489 

■ 미움받을 용기   - 고가 후미타케, 기시미 이치로 / 인플루엔셜
   
http://zorbanoverman.tistory.com/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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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심리학 그리고 나, 스스로 용기를 얻는 법

 

아들러 심리학이 서점가에서 열풍을 불고 있다. 한 마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원래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일단 그 뒤에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고, 왠지 쉽게 다가가지 않는 게 내 성향인데, 아들러 심리학에 대해서는 나 역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학시절 때 읽은 책을 보면 거의 자기개발서였다. 취업에 대한 고민과 성공에 대한 갈망,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되돌아보기 위해서, 남들은 어떻게 했나 하는 관음증, 조금 편하게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방법을 따라 가다 보면 무엇인가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자기개발서에 손을 내밀게 만들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개발서에 손을 끊었다. ‘결국 뻔한 소리하는 거잖아.’ ‘그런 소리는 나도 하겠다.’ 하는 생각에 제목이 자기개발의 냄새를 내는 것은 거의 반사적으로 외면했다. 아들러 심리학에 관한 책은 <미움받을 용기>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이 두 권을 접했다. 어떻게 보면 이 책들도 자기개발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왜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모든 중심에 개인을 두었다는 점이다. 분명 사회 속에서 몸을 담그면서 살다 보면, 개인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개인에 의하기 보다는 각종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어떤 기제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이 있다. 사실 이러한 점도 아들러 심리학의 관점에서는 모두 인생의 거짓말일 것이다. 아들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주체성을 강요하고 과거의 트라우마에 의한 원인론이 아닌 앞으로 자신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갈 지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는 목적론을 지향하면서 삶에 지친 이들을 위로 한다.

 

그리고 가볍지 않게 접근한다. 내가 자기개발서라고 부르기 싫어하는 작가의 책이 있다. 그 작가는 바로 지금은 고인이 된 자칭 변화경영전문가라고 부르는 구본형 작가이다. 이분의 책에서는 진지한 고민이 엿보였다. 그래서 가벼운 자기개발서에 지친 나에게 때로 위로를 해주곤 했다. 아들러 심리학에 관한 책 역시 이처럼 가볍지 않다. 그리고 논리를 체계적으로 이어간다.

과제 분리’, ‘자기 수용’, ‘타자 신뢰’, ‘타자 공헌’, ‘공동체 감각이라는 나름의 정의를 내리고 이들 간의 관계를 서로 연결시키면서 전체적인 틀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그 곁에 가볍게 생각하지 않은 철학적인 고찰이 이루어졌을 거라는 신뢰가 엿보인다.

 

이런 접근 방식에서 나 또한 위로를 받는다. 아들러 심리학을 용기의 심리학이라고도 하는데, 분명 표현할 수 없는 용기를 얻었다고 생각된다. 항상 나는 주체적이고 무엇이든 닥치면 잘 할 수 있어!’ 라는 자신감은 가지고 있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개인적인 신뢰 상실, 아들러가 말하는 모든 문제는 인간 관계에서 온다는 듯이 가끔씩 뒤돌아보게 되는 나는 과연 타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라는 고민과 갈등으로 마음이 심란해진다.

 

이럴 때 아들러 심리학에서 말했듯  인생의 의미는 당신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떠 올리고, 지금의 나 자신을 충분히 받아들이는 자기 수용을 해본다. 그렇게 차분해진다. 아니 차분해져야 한다고 혼자 깊은 숨을 들이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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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주어진 인생의 의미라는 것은 없다. ‘인생의 의미는 당신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며 어떤 일에 대해 가능성이라는 여지를 남겨두려 하지 마라. 평생 그 일을 유보하게 될 것이다.

 

자유롭게 인생을 산다는 것은 그것에 동반하는 책임까지 짊어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진로를 선택했기에 그로 인한 결말을 스스로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이라면이라는 조건을 붙여 과제에서 도망치려고 하기 일쑤다. 이처럼 인생의 과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우리가 늘어 놓는 구실들을 아들러는 인생의 거짓말이라 부르며 일축한다. 인생의 과제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나서야 한다. 그렇게 나서지 않고 뒤로 물러서며 내어놓는 모든 구실들은 인생의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를 통해 주장을 전달하지 않고 누군가 알아차려주고 배려해주길 바랄 경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낙천주의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다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낙관주의는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바로 그 현실에서 출발하는 태도다.

 

아들러 심리학은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정신 건강을 해치는 가장 큰 요인이라 지적한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평범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자면 먼저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바로 자기 수용이다.

 

아들러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지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 가이다.” 라고 말했다.

 

공동체 감각이나 협력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아들러는 종종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내게 아무런 관심이 보이지 않아요. 그럴 땐 어떻게 하죠?”

이에 대해 아들러의 대답은 단순명료했다.

누군가 먼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설사 다른 사람이 협력적이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당신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내 조언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시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적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하지 말고요.”

 

나는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서 멀어져서 공동체나 인류라는 것을 우선적으로 상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는 개인이 모인 집합 그 이상이지만, 개인을 벗어나 공동체라는 개념을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객관적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함께 읽어 보기

■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자녀교육)  
   http://zorbanoverman.tistory.com/491


■ 미움받을 용기  - 고가 후미타케, 기시미 이치로/인플루엔셜

   http://zorbanoverman.tistory.com/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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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렵다. 인문학이라고 흔히들 문사철(文史哲)이라고 한다. 문학은 그 중에서도 소설은 읽을 수록 빠져들게 만들고 작가들마다 개성이 넘쳐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아직 시(詩) 에 대해서는 나 역시 문외한이어서 아직 그 매력을 잘 알지 못한다. 역사의 경우는 궁금증을 유발하고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이 역시 흥미를 끄는 요소가 다분하다. 하지만 언제나 벽이 있다. 바로 철학이다. 예전부터 책꽂이에 꽂아둔 버드런트 러셀의《서양철학사》는 항상 앞장만 조금 읽고 그 이상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올해 목표 중 하나가 바로 《서양철학사》의 완독이다. 하지만 이전에 먼저 철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 기초적인 철학을 배우기 위해 몇 가지 책들을 찾아보았다. 요슈타인 가이더의 《소설로 읽는 철학 소피의 세계》, 양운덕의 《피노키오 철학》시리즈를 읽기로 했다. 하지만 이 책들도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 나에게 철학의 벽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철학자 탁석산의 《자기만의 철학》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창비청소년문고 시리즈인데 철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초심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철학을 과학과 종교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나간다. 그리고 철학을 기하학의 발전단계에 빗대어 잠재적 철학, 경험적 철학, 전문 철학으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이 중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경험적 철학을 해 나갈 것을 권한다. 철학 그 심오한 세계로 빠져 보자. 심오하지만 어차피 나와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니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다.


우선 철학 공부를 시작했으니 한 가지를 명심하고 들어가자. 이게 어쩌면 철학하는 근본 정신일 것이다.

p13

"지금은 바로 이해가 안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철학은 언제나 상식에 도전한다는 것, 그것만은 잊지 마세요."



과학, 철학과 얼마나 다른 거야?


과학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통째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통째로 이해한다'는 말은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한다는 뜻이다.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며 자연에 실제로 있는 것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형이상학적인 것도 알고자 하는 범위에 포함한다. 이렇게 둘의 목적은 동일하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것이 과학과 철학의 분류 기준이 된다. 과학은 그 이해를 표현하는 방식이 수식에 의해 나타난다. 반면에 철학은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철학은 수식 대신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가 지녀야 할 논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이 실험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듯이 철학 역시 언어를 사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사고 실험'을 통해서 이론을 전개하며 막연하고 애매한 주장이 아닌 논리적인 글이 되어야 한다.


종교, 철학과 무엇이 다르지?


종교와 철학의 가장 큰 차이는 종교는 철학과 달리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종교는 철학과 달리 경전, 제의, 예배, 교단 등과 같이 정해진 형식이 존재한다. 종교는 왜 사는지에 대해 확고하고 분명한 답을 준다. 반면에 철학은 어떤 의미든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종교는 인생의 의미를 일일이 알려주지만, 철학처럼 스스로 탐구하려고 하지는 않느다.

 

종교에서는 절도를 왜 나쁘다고 할까요? 그것은 신이 나쁘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전에 도둑질하지 말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절도 자체가 본성상 나쁘거나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에 해가 되기 때문에 나쁜 게 아닙니다. 신이 나브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종교는 일단 우리의 행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해야겠지요.

 

종교는 왜 사는지에 대해 확고하고 분명한 답을 줍니다. 반면에 철학은 어떤 의미든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인생의 의미도 에외가 아닙니다. 과연 인생에 의미가 있는지조차 물음의 대상이 됩니다. 종교는 인생의 의미를 일일이 다 알려 주지만, 철학처럼 스스로 탐구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종교는 창시자의 삶과 주장 전부가 모두 대상이 되지만, 철학은 단지 주장이 주요할 
뿐이다. 철학자는 여기서 배제된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종종 자신의 사상과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철학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철학은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주지 않는다. 이것이 어쩌면 종교처럼 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사고를 풍부하게 하고 스스로 생각하게하는 철학만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의 세 단계


기하학의 발전 과정은 철학의 세 단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기하학의 단계를 셋으로 나눠보면,

첫 번째는 잠재적 기하학으로, 기하학에 대해 모호하게 알고 있는 단계이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 원통, 구, 삼각형 이런 것을 인식은 하지만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단계를 말한다.
두 번째는 과학적 또는 실험적 기하학으로 실제로 해 본 것을 바탕으로 정리한 기하학이다.

세 번째는 연역적 기하학으로 경험이 아닌 논리적 증명에 의한 기하학이다.


이 세 단계를 철학과 연결시켜본다.

잠재적 기하학은 잠재적 철학으로 연결되어 진다. 우리가 흔히 '개똥 철학'이라고 하는 것들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만의 주장을 가치관을 강요하면 사람들은 흔히 '개똥철학'이라고 말한다. 이런 철학은 분명 개인의 인식에는 무엇인가가 자리잡혀 있지만, 상대방을 설득하기에는 무언가 2% 부족한 무엇인가가 있다. 아마도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력의 부재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철학의 시발점으로 보면 상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과학적 또는 실험적 기하학은 경험적 철학으로 이어진다. 경험적 철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경험, 둘째는 한계치까지 생각을 밀어붙이는 치열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상의 능력이다. 경험적 철학자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사람들이다. 경험적 철학자가 되려면 단순히 낱낱에 대한 설명이 아닌 분야 전반적으로 일반화하는 추상적 능력이 요구되어 진다. 그래서 작가는 일반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경험적 철학자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연역적 기하학은 전문 철학과 통한다.

전문 철학이 경험적 철학과 다른 점은 경험 철학이 자신의 전문 분야를 다루는 반면 전문 철학은 전문 분야가 아닌 영역에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전문 철학자가 경험적 철학자와 다른 점은 두 가지인 듯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전문 분야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행복, 신, 죽음 등과 같은 것들로도 영역이 넓어진다. 이미 많은 선지자들이 이런 여러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논리력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철학을 펼쳐냈다. 그래서 전문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앞선 사람들이 고민했던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자신이 지금 생각하는 것에 대한 답이 이미 있을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생각으로 철학의 탑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금까지 철학을 과학과 종교와 비교해 보고, 철학을 단계별로 풀어놓아 보았다. 

이 책의 제목처럼 자기만의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내 문제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부터 철학은 시작된다. 그리고 문제의식은 처음부터 언급했듯이 상식으로 부터 도전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개인적인 문제를 벗어나서 공동체, 생명, 지구와 같은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 토대도 바로 문제의식으로 부터 발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철학은 쉽지 않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생각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풀어내야 한다는 점, 상식에 과감히 질문을 던지는 점, 고정관념과 아집에 빠지지 않고 지식과 논리를 바탕으로 내 생각을 풀어내야 한다는 점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분명 개인적으로 전문 철학자는 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에 대해서 최대한 많이 경험하고 치열하게 파고 들고 논리력을 바탕으로 추상화할 수 있는 경험적 철학자로 거듭날 필요는 있을 듯 하다. 

이 책이 나에게는 철학에 대한 입문서이자 짧은 개론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부터 차곡 차곡 내실을 다져나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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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

사전적인 의미로 사회과학은 인간 사회 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모든 경험과학을 말한다. 사회학, 정치학, 법학, 행정학, 심리학 등이 사회과학에 포함된다. 우리가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고, 그 틀 안에서 생겨난 문제점을 함께 논의하고 해결하는 과정에 사회과학의 인식과 도구가 필요하다.

예전부터 사회학에 대해서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고 있으며, 사회의 한 구성원인 나는 사회로 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궁금했다.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현상이 발생하면 단순히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사회 내부의 시스템의 결함에 의해서 발생했는지도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처음에 어떤 통로를 통해서 사회과학에 접근해야 할지를 몰랐다. 너무 광범위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기에 처음 시작이 힘들었다. 출판잡지
 《기획회의》를 읽다가 우석훈의 《나와 너의 사회과학》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고 사회과학 입문자에게 적당하다는 언급이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선택했다.

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사회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개인이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로 전환해야 한다는 논리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곤 했다. '내가 먼저 잘해보자.', '내가 먼저 착해지자' 하지만 사회문제는 모든 사람이 착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또한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대신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 지식을 전달하고 습득하고 스스로 똑똑해지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어쩌면 문제의 해결에 한 발 다가서는 방법일 것이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사회과학은 그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 지금의 대학 혹은 학문의 체계는 하나의 분야에 특화되어 있는 전문가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고, 전체를 바라보고 지향하고 사회적 담론을 주도할 수 있는 지식인이 부족한 현실이다. 전문가는 많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거장'은 등장하기 쉽지 않은 구조가 된 것이다. 이런 시점일 수록 사회과학을 통해서 전방위적인 백과사전식 지식을 갖춘 사람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소위 인문학이라고 하는 '문사철'이 자리잡고 있다. 백과사전식 지식을 갖춘 사람이란 다른 말로 기획자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자기가 다 알 필요는 없지만 누가 뭘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지는 않아도 정확하에게 아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제 부터 '사회과학' 에 대한 학습이 시작된다. 이 책이 사회과학의 바른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아직 다음에 어떤 방향으로 사회과학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지 여전히 깜깜하기는 하다. 우선 사회과학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 부터 알아본다.

◆ 경제적 인간과 사회적 인간
다른 말로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방법론적 전체주의'로 말할 수도 있다. 개체와 구조의 문제라고도 한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개인주의 측면, 전체주의 측면 에서 바라볼 수 있다.
'방법론적 전체주의'는 집단은 개인의 속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자체의 독특한 속성이 있다고 보고, 사회를 단순한 개인의 집합이 아닌 사회 전체를 직접 연구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것으로부터 사회학은 본격적으로 출발 된 것이다.

◆ 설명과 이해 (과학철학과 해석학)
과학철학에서 강조하는 점은 과학의 예측능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리 순수한 형태의 법칙을 설정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법을 '사전적 접근'이라고 부르고 '설명'의 방식이라고 한다. 반면에 해석학을 바탕으로 한 접근법은 지금까지의 현상을 맥락을 기초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사후적 접근'이라고 부르고 '이해'의 방식이라고 한다.
'설명'은 텍스트와 숫자가 중요하지만 '이해'는 저자 혹은 행위자의 의도와 함께 맥락(Context)가 중요해진다. 텍스트가 어떻게 쓰여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의도로 그렇게 쓰여졌으며 어떤 맥락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느냐가 중요해진다.

◆ 환원주의와 다원론
일원론은 아주 강력한 환원주의를 띠게 되는데 한 가지 요소로 환원해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의미를 두지 않고 무시해버린다. 대표적인 예가 중세시대의 기독교의 신을 생각하면 된다. 지나친 환원주의는 경계의 대상이지만 정치적, 사회적으로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또한 한 요소가 지나치게 강력해지면 근본주의로 빠지게 되기도 한다. 
다원론의 성향이 강한 곳은 그리스, 인도 및 인류문명이 시작된 곳으로 대부분 여러 신을 믿었다. 이때 사회지도층은 신들의 이름과 의미를 다 알아야 했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야 했다. 이렇게 복합적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다원론의 기반이었다.

경제적인간/사회적인간, 설명/이해, 일원론/다원론은 어떻게 옳고 그르다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고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해서 인식하는 하나의 틀로 작용되는 것들이다. 다른 사항들도 존재하지만 철학적인 접근이 이루어진 부분들은 아직은 내가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사회현상을 바로 보는 인식의 틀이 마련되었다면 이제는 사회에 대한 모델링(Modeling)을 하게 된다. 모델링을 통해서 만들어진 모델을 통해서 사회를 바라보게 된다. 이 때 모델은 컴퍼넌트(Component) 바로 구성요소가 존재하게 된다. 

모델에 넣는 구성요소가 한 종류이면 균질적인 것이고, 두 종류 이상이면 이질적 혹은 비균질적 모델이 되는 것이다.
모델을 만들 때, 균질한 모델로 할 것인지 비균질한 모델로 할 것인지는 분석가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결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분석도구 선정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구성요소는 늘어날 수록 설명력이 높아지고 사실성도 커지는 반면에 설득력과 전달력은 떨어지게 된다. 이 점을 잘 생각해야 한다.

위에서 만들어진 모델을 분석할 때 수학이 많이 쓰인다. 사회현상 분석에 수학적 사유에 의존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시뮬레이션 방식 등과 같은 것들은 사회현상 분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다. 이 밖에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는 비가역성, 공간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사회적부분을 잠시 언급한다.

◆ 선형과 비선형
모델을 분석할 때 수학에 많이 의존하는 데 많은 부분이 선형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은 부분이 많은데 최적화기법(Optimization)을 통해서 선형으로 바꾸어 주고 선형적인 분석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기계론적 성장주의의 폐해에 대한 사회적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선형적인 접근법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점점 비선형적 현상들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이 생겼다

◆ 시간을 다루는 법
사회과학에서 시간을 바라볼 때 특별한 목적론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 목적론의 대표적인 경우가 진화론인데 인간을 최종 목표로 설정하는 시각이다. 아리안 족이 궁극의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나치즘과 사회 진화론의 결합이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는 이미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다. 사회를 바라볼 때 앞으로의 시간의 방향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결정하고 나서 그것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다원주의를 통해서 목적론을 벗어버리고 나서야 진화론이 다시 과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 공간을 다루는 법
공간을 볼 때는 언제나 그 안에 깃들어 살아야 할 사람들의 삶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투기의 목적이 아닌 그 곳에서 삶을 꾸려갈 사람,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 묻힐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간, 그런 눈을 갖고 보아야 한다. 사회과학에서는 인간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닌 말장난에 불과하다.

사회과학의 개론적인 개념에서 《나와 너의 사회과학》을 처음 접했을 때는 살짝 당혹스러웠다. 사회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이론서의 개념이었다. 그리고 그 이론을 설명하는 데 철학적인 요소가 가미된다. 읽는 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그 기반을 마련해주는 책으로는 나에게 훌륭했다.

마지막으로 좋은 사회과학자가 되려면 '맥락'을 잘 파악하고 '공감'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흐름을 인식하고 큰 파도에 몸을 얹는 것이 아닌 사회의 질적 성장과 변화에 손을 뻗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혼자 꾸는 꿈은 허무지만, 같이 꾸는 꿈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겁니다." 라는 작가의 마지막 말을 남긴다.

p213
공감을 얻기 위해 제가 개인적으로 했던 훈련이 '바다의 눈으로 보기'입니다. 멸정 위기에 처한 고래를 연구하면서 고래라면 어떤 심정일까, 만약 내가 바다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습니다. 그 과제를 통해 해양 사막화 같은 개념들을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좋다. 나쁘다. 이런 잣대만 들이댈 게 아니라 사람이 가진 아주 중요한 능력 중 하나인 공감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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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미움받을 용기》를 한 문장으로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인 듯 하다정통적인 심리학의 방법론으로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한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지 않고,새로운 방식인 목적론으로 접근한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제시하는 이론들은 현실을 살아가고앞으로의 좀 더 나은 삶을 희망하는 이에게 힘을 실어준다단순히 시장경제의 논리 속에서 기업의 하나의 부속품으로서 근면을 강조하는 자기개발서와는 분명 다르다고 생각된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제시하는 몇 가지 정의부터 알아본다


▶ 과제의 분리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 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 무늬만 인과관계

원래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것을 마치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납득하는 것

 

▶ 공동체 감각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공동체 감각이다. 여기서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범위는 우주와 무생물까지 확장된다.

 

▶ 자기긍정 vs 자기수용

자기긍정이란 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강하다.” 라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것이다. 이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삶의 방식으로 우월 콤플렉스에 빠질 수 있다.

자기수용이란 ‘하지 못하는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60점짜리 자신에게 “이번에는 운이 나빴던 것 뿐이야. 진정한 나는 100점짜리야.” 라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 자기긍정이라면 60점짜리 자신을 그대로 60점으로 받아들이고 “100점에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라고 방법을 찾는 것이 자기수용이다.

 

▶ 타자신뢰

다른 사람을 믿을 때 조건을 일절 달지 않는 것이다. 비록 신용할 수 있을 만큼의 객관적 근거가 없더라도 믿는다. 담보가 있든 개의치 않고 무조건 믿는 것 그것이 신뢰이다.

지금 ‘누군가를 무조건 신뢰해봤자 배신당할 뿐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 배신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다. 나는 그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된다.

 

▶ 타자공헌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 공헌하려는 것이다.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이다.


내가 이해한 아들러 심리학은 개인을 위한 심리학이며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용기’ ,’사용의 심리학이다중심에는 개인이 있으며 개인의 자유의지가 중심이 된다사람들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 가지 요인들도 결국은 개인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그렇기에 자신이 역시 스스로 바꿀 수 있다는 의미이다그 다음을 자신이 속한 사회즉 인간관계로 눈을 돌린다우리의 갈등을 모두 인간관계를 통해서 일어난다고 가정한 그는 사회와 조화롭게 살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위의 행동 목표 중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에 대한 것으로 공동체 감각’, ‘수평관계’, ‘존재에 대한 감사’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이 세 가지는 읽으면서 내가 앞으로 변화해야 하 는 방향이라고 생각했다어쩌면 나에게 아들러 심리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아들러 심리학은 모든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를 만들자고 주장한다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받아들이면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보고 개입하게 된다는 점이다이것은 분명하다하지만 실제로 가장 실제 자신의 생활에 반영하는 것은 쉽지 않다부모자녀 관계직장 상사와의 관계선후배 관계 등에서 내 스스로 먼저 실천해야 하는 부분이다수평관계라는 것은 자신의 역할은 분명히 하되 과제의 분리를 통해서 타인의 과제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과제의 분리를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어쩌면 가장 필요한 부분이다.

 

존재에 대한 감사는 경험으로 알게 된 부분이지만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다어떤 것을 판단할 때 타인의 행동만을 강조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주변을 잘 생각해보라있을 때는 모르지만 분명히 어느 날 갑자기 자리를 비우거나 없어진다면 크나큰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사물사람에 관계없이 우선 존재에 대한 감사라는 인식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공동체 감각수평관계 형성존재에 대한 감사타자공헌 등을 개인이 직접 실천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고 물어본다

아들러의 대답이 진지하게 내 가슴 속을 울렸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내 조언은 이래요당신부터 시작하세요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말고.”

 

나는 앞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실천하고 시작할 것이다그와 동시에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삶에 대해서도 그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미움받을 용기》 라는 책과 이를 통해 만난 아들러 심리학이 어쩌면 새로운 삶의 동력과 기저가 되길 바란다.



함께 읽어 보기


■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 기시미 이치로/살림


   (자녀교육)  http://zorbanoverman.tistory.com/491
   (자아찾기)  http://zorbanoverman.tistory.com/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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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 라는 가장 큰 매력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을 얻는 즐거움과 함께 현재의 나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생각의 관점이나 나와는 다른 배경에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통해서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서경식의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통해서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보여주듯이 미술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미술 작품과 그에 대한 설명 위주로 내용이 전개되는 다른 미술 관련 책들과는 구성 자체가 다르다. 실제로 책 속에는 미술 작품이 그렇게 많이 수록되어 있는 편도 아니다. 하지만 읽고 나면 많은 그림이 가득차있는 것들 보다 더 깊이 미술작품을 감상한 기분이 든다. 작가 서경식은 미술 작품에 먼저 접근하기 보다는 작가의 삶을 먼저 들여다 본다. 이런 접근법은 나와 같은 미술 작품 감상에 문외한에게는 너무 반갑다.

미술에 대해 관심이 점점 생겨나고 있지만, 아직 미술관도 많이 가보지도 못했으며 작품을 보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다. 미술 사조가 등장하면 그때부터는 앞이 캄캄해진다. 그런데 작가의 삶에 대해서 알게 되면 왠지 모르게 그 작품이 이해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은 후에 고갱의 작품을 보면 느낌이 다르고,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고 나서 고흐와 동생 테오와의 관계와 고갱과의 인연을 알게 되면 고흐의 작품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을 읽고 나니 그가 그리는 소와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그림이 어떻게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서경식은 이런 식으로 작가에게 먼저 접근하면서 그들의 개인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근현대사의 내용으로 가기도 한다.

처음에 책을 개괄하기 위해 책 속에 있는 그림들을 하나씩 볼 때는 이게 도대체 뭐야 했던 것들도 있었다. 이런 것도 미술 작품이야? 도대체 예술작품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직도 솔직히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정연두, [상록타워], 2001

 

이 작품은 작가 정연두의 경험을 통해서 나온 작품이라고 한다. 어느날 아파트의 이웃집 여자가 복도에 나와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여자는 그와 마주치자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다음 날 그 이웃집의 주인집에서 연락이 왔다. 혹시 옆 집에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냐고? 실은 그 날 옆집 가족은 야반도주를 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벽 하나 사이를 두고 이루어지는 똑같은 구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불행은 무엇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점과 무서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한 아파트의 같은 구조에 살고 있는 다른 가족들을 작품에 담았다고 한다.

 

이 책의 다른 중요한 한 지점은 바로 '민중미술'과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에는 민중미술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민중미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민중미술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대두한 미술의 한 갈래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사회운동이 번지던 무렵에 등장,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의 삶과 행동을 주제로 하는 미술을 주장했다. 민중미술은 본래 비판적 리얼리즘의 면모가 강하였으나,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노동자 계급성이 강화된 양상을 띠게 되면서 주변적 장르였던 만화, 판화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벽화, 걸게그림 등을 통해 선전, 선동성이 강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작가 신경호와 홍성담에 대한 부분에서는 이렇게 민중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사회에 대한 작가의 역할과 접근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근한다.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로부터 태어나어 베를린으로 입양된 작가 미희, 중국 만주에서 태어나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나눔의 집에 작품을 설치하면서 인연을 이어가는 윤석남, 산업화 시대에 간호사로 파독되어 그곳에서 작가로 거듭난 송현숙을 통해서 바라보는 디아스포라를 통한 미술적 접근과 그들의 삶에 대해서도 깊이 바라본다.

 

 

 

좌(左) -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초혼 1980」, 1980년
우(右) - 윤석남 「어머니Ⅰ: 열아홉 살」, 1993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미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작가들의 삶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어떤 이유로 그저 눈으로 보았을 때 의아한 것들이 예술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지 고민을 해봐야 겠다고 생각을 해본다. 그런 노력이 쌓여야만 새로운 작품이나 다른 것들을 받아들 일 때 무조건적인 배척 또는 수용이 아닌 그 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우선은 많이 접해야 겠다.

다른 하나는 예술인들의 사명의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민중문학이 생기게 된 것도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사회는 부조리 속에 빠져 있는데 그저 작품만 만들면 되는가 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작품을 통해서 사회의 변화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서 였다.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않은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문인들과 시민들이 만든 '304 낭독회'도 어쩌면 그런 예술인들의 사명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모든 예술인이 이렇게 사명의식을 가져야 하는가? 에 대해 물어볼 깜냥은 나에게는 없다. 하지만 그런 사명 의식을 가진 분들에 대해서는 지지해주고 존경해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신경호, 홍성담 작가의 글을 남긴다.

 

p57

만약 제 그림에 아직도 관심이 있다면 그이는 아마도 예술적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간직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 예술적 삶은 '함께 현실을 아파하고, 같이 뛰어넘고자 하며, 더불어 치열하게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저의 리얼리즘입니다

p345예술가는 원칙적으로 모든 권력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입니다. 국가 그 자체를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예술가는 오히려 허무주의자나 아나키스트에 가깝고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예술가에게는 처음부터 커다란 권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술가인 것이 하나의 권력입니다. 자기 자신이 바로 하나의 '정부'이자 '대통령'이므로, 그렇게 가장 훌륭하고 가장 멋지게 태어났으니 권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혁명정부가 탄생한다고 해도 그 과오마저 지적하는 정도가 되지 않으면 예술가가 아닙니다. 예술가의 역할이란 언제나 그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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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호

p57

만약 제 그림에 아직도 관심이 있다면 그이는 아마도 예술적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간직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 예술적 삶은 '함께 현실을 아파하고, 같이 뛰어넘고자 하며, 더불어 치열하게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저의 리얼리즘입니다.

정연두

p85

정연두 : 예술가는 사회적인 리더도,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관찰자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p89
약 한 달 동안 산속을 걸으면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은 만들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p92

역사는 해석하기 나름이잖아요. 기무사 자체도 역사를 바꾸고 만들어내는 장소였고요. 이 작품은 결국 권력의 상징적 장소였던 건물 옥상에서 경복궁을 바라면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셈이죠. 다큐멘터리 형식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줍니다. 그와 동시에 뒤의 무데를 떼어서 다시 앞으로 붙이는 방식을 취해서 말이 안되게, 어떻게 보면 바보스러운 세상에서 가장 불합리해 보이는 방식으로 영향을 촬영해서 만들어낸 작업입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라는 것도 저런 식으로 조물조물 만들어서 보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역사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과는 무관할 수 있으며 때로는 입장만 존재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p93

하지만 그 당시 힘들었던 사회 현실이 반영된 상징적인 장소가 이제는 바뀌어서 누구나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을 때, 여전히 과거에 대한 의식을 지닌 채 현재의 모습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한국 사람들은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어서...... 사람들이 민중미술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고유의 미술사적인 관점이 있다는 생각으로 바라보기는 해도 현재와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아요.

 

p99

양약으로는 병이 더 진전되지 않게 막고, 한약은 스스로 낫게끔 몸을 도와주는 거예요.

p102

저는 시각예술을 하는, 즉 눈에 보이는 것을 예술로서 다루는 사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질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술가의 경우에도 조각을 공부했으니까 조각가, 영상을 주로 하니까 영상작가, 이렇게 부르지만 결국 다루고 있는 매체는 매체일 뿐이죠. 그보다 중요한 건 누군가에게 내 아이디어를 전달해서 공감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통해 생각하게끔 만드는 게 아닐까요?

p119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지 불과 3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그 일을 말하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반응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도 마찬가지 상황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술가가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한다해도, 그 작품에 대한 반응 속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미술이 사회적 문제와 얼마나 평행선을 그리며 나아갈 수 있을지를 생각해볼 때, 한쪽(현대미술)은 꽤 늦은 템포로 움직인다면, 다른 한쪽(사회적 문제)은 순간순간이 중요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괴리가 생길 수 밖에 없겠지요. 저는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고 있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굉장히 혼돈스럽고, 동시에 미토라는 도시에서 열리는 전시에 외국 작가로 참가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믿음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느낍니다. 제작자인 저도, 제 작품을 받아들이는 관객도 그 작품이 가진 가치를 즉각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작가가 작품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원전 사태나 세월호 사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이 작가의 개인적 관점과 맞물린 상태에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문맥과 함께 작품의 가치도 차차 파악되겠지요. 작가의 개인적 역량이 사회에 큰 파급효과와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리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p121

그가 전형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선택하여 카탈로그 사진을 찍으려 했을 리는 없다. 그는 피사체인 인물에 흥미와 애착을 느끼지만, 대상에 정서적으로 일체화되지 않으면서 차가운 객관성을 잃지 않고 관찰한다. 그런 애착과 객관성의 미묘한 균형이 '정연두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란 한국인이라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문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p123정연두라는 인물 안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근대인의 뜨거운 마음과 탈근대(모스트모던)를 살아가는 세대로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깨어 있는 시선이 공존하고 있다.
윤석남
p137처음 그림을 시작한 동기도 나의 삶, 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예술이 예술 자체로 승화되는 것도 물론 중요한 과제지만, 그 사회에 대해 작품을 통해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제 생각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미적인 감각을 향해가는 길도 희구하고 있지만, 동시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p138
많은 분들에게 보편타당한 아름다움의 전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윤석남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입니다.
p154어린아이들이 그렇게 하기는 어렵죠.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고정된 틀을 돌파하고 해체하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p171바리데기는 우리나라 무속에 등장하는 최초의 신이에요. 우리나라 무당들은 바리데기 전설에서 시작한 거죠. 바리데기는 왕의 일곱째 딸로 태어났어요. 나라를 물려주려면 아들이 필요한데 계속 딸이 태어나니까 왕이 화가 나서 신하를 시켜서 죽이라고 명령하죠. 신하는 차마 죽이지 못하고 강에다 띄웁니다. 그 공주를 어느 할머니 할아버지가 데려가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왕이 죽을병에 걸린 거예요. 그런데 딸 중에 누구라도 죽음의 강을 건너가서 생명수를 구해오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다른 딸들에게 물어보니까 다 거절해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버림받았던 딸이 나서서 가져오겠다고 했어요. 바리데기는 고생 끝에 강을 건너갔고 무장생과 결혼해서 애까지 낳아야 했어요. 하지만 결국 생명수를 가지고 돌아와 이미 죽은 아버지의 상여가 나가는 길에 생명수를 뿌려 살려내요. 감동한 아버지는 나라 땅의 절반을 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 딸은 땅도 필요 없고, 왕도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살면서 혼령을 좋은 곳에 보내는 역할을 맡겠다고 합니다. 바로 무당의 기원이 된 것이죠. 그 신화를 모티프로 한 작업입니다. 저는 무당에 관심이 많아요.
이쾌대
이쾌대는 서양에서 유래한 미술이론과 기법을 일제시대에 습득했고, 군상 을 통해 전면적으로 실천한 듯 하다. 일본의 패전에 의해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 조선인은 드디어 집단적 주체를 주어로 삼아 말할 가능성을 손에 넣었다. 일제시대에는 그릴 수 없었던 역동감 넘치는 대화면의 공적 회화를 그릴 '주어'를 획득했던 것이다. 아니, 획득해야 했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까? '주어'를 획득했던 것이다. 아니, 획득해야 했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까? '주어'를 손에 넣어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펼쳐지지 못했다. 해방공간에서 이쾌대가 일제시대에 축적했던 지식과 기량 모두를 쏟아부어 군상과 씨름했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리고 거기에 일본 전쟁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도 불가사의하지 않다.
일본의 전쟁화에서 침투해 들어온 집단주의와 전체주의적 정서를 가리킨다.
신윤복
p2602011년에 폴란드, 스웨덴 합작으로 만들어진 [브뤼헐의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예수가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로 가는 장면은 서양 회화에 종종 등장하는 주제인데 그것을 컴퓨터 그래픽 영상으로 움직이듯 만든 것이죠. 16세기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가난한 농부들의 풍속이 그림에 나옵니다. 춤추고 축제를 벌이고 돼지를 잡고 수확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나와요 그때까지의 서양회화에서는 예수가 화면의 중심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민중들이 등장하게 되는 거죠.
p277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신윤복은 외부인이자 경계인이고 세상의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것은 제가 항상 해온 이야기와도 딱 들어맞아요.

p282
바로 이런 인상이다. 나 역시 [미인도]에서 같은 인상을 받았다. 남성이 지닌 시선의 폭력에 갇혀 긴장하는 모습도 없고, 거꾸로 거기에 아양 떨며 자신을 상품하려는 생각도 없이, 정녕 '자연체' 인 것이다. 한마디로 [미인도]의 여성은 '기호'가 아니다. 자신을 그리고 있는 화가가 동성인 여성이거나, 혹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기에 가능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미희
p321미희가 태어난 1960년대 말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뒤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시기에 해당한다. 부산 인근에 위치한 마산에는 수출자유지역이 만들어져 일본 기업이 진출했고 그와 동시에 많은 일본인이 한국 회사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미희의 아버지인 '기무라'씨도 그런 일본인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소녀였던 미희의 어머니에게 아기를 갖게 한 뒤 그대로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당시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진된 '일본 신식민주의의 재진출'과 베트남 파병이 가져다준 군사 특수에 의해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성장이 시작되었다. "우리 입양인은 고도경제성장의 폐기물'이라는 미희의 말이 단지 비유 이상의 생생함으로 다가온다.
홍성담

p332 
섬이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사방이 가로막혀 마치 죽음과 같은 허무나 절망이 감도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이 바다를 넘어 저쪽 끝에는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으리라는 희망과 낙관이 뒤얽혀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즉 비관과 낙관, 그런 극과 극의 상태가 매일 교차하는 곳입니다.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가서 강풍과 높은 파도를 만나면 언제 죽은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죽음은 도처에 널려 있으며 그렇기에 죽음과 생의 영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 속에는 언제나 생과 죽음이 교착하고 있다.'
p336한국사회가 1970년대 개발독재를 통해 산업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농촌 젊은이들 대부분은 공장이 있는 마산, 인천, 부산, 서울 등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제 초등학교 동창생 30명 중에 두 명만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 대도시로 나갔습니다. 엄청난 공해에 찌든 봉제공장과 같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을 했겠지요. 그들은 재벌, 그리고 재벌과 결탁한 독재정권을 살찌우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5년 정도 일을 하면 쉽게 병을 얻고 맙니다. 대부분 결핵입니다. 요양소에 들어왔다면 오히려 운이 좋은 편입니다. 훨씬 많은 젊은이들이 손도 제대로 못 쓰고 피를 토하며 죽어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그런 젊은이들, 고향 친구들 같은 그 젊은이들과 결핵환자로서 만났던 겁니다.
p345예술가는 원칙적으로 모든 권력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입니다. 국가 그 자체를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예술가는 오히려 허무주의자나 아나키스트에 가깝고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예술가에게는 처음부터 커다란 권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술가인 것이 하나의 권력입니다. 자기 자신이 바로 하나의 '정부'이자 '대통령'이므로, 그렇게 가장 훌륭하고 가장 멋지게 태어났으니 권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혁명정부가 탄생한다고 해도 그 과오마저 지적하는 정도가 되지 않으면 예술가가 아닙니다. 예술가의 역할이란 언제나 그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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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드래곤볼>이라는 만화책을 보면 손오공이 선두콩 한 알을 먹으면 10일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 때는 정말 저런게 빨리 발명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음식을 만들고 먹고 즐기는 삶의 큰 즐거움을 하나 잃어버린다고 생각해보니 그렇게 좋아할 일도 아니었다. 

 

중국요리를 주문할 때 고민에 빠지는 짜장면 vs 짬뽕, 회식에 찌든 몸을 위한 아침의 뜨끈한 국물의 해장국, 저녁에 식구들과 동료들과 함께 구워 먹는 삼겹살, 가끔 가다 한 번씩 생각나는 햄버거와 감자튀김, TV를 보고 영화를 볼 때 저절로 손이 가는 스낵과 팝콘, 사람들이 모이면 빠질 수 없는 여러 종류의 술 ...
음식은 곧 삶이고 살아가는 재미다. <음식잡학사전>은 먹는 즐거움에 더해 음식에 스며있는 뜻밖의 이야기들을 소개해준다. 우리가 다 아는 음식들인데 하나하나 이렇게 만들어진 사연과 유래를 알게 되니 재미가 쏠쏠하다. 책의 편집도 하나의 음식에 몇 페이지씩 흥미롭게 배치되어 있어 가독성도 좋다. 이 책은 내 책상 앞에 놓아두고 가끔 하나씩 다시 읽어보려 한다.

 

이 책은 총78가지의 음식에 대해 소개한다. 그 중 마파두부, 포테토칩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들려주려 한다.

그 외에도 다들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하니 이렇게 '잡학'에 관심있는 분들에게는 적극 추천한다.

 

 

 

마파두부는 부드럽고 고소한 두부의 맛과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매운 맛이 조화를 이루는 전형적인 중국의 쓰촨요리다. 마파두부를 그대로 풀이하면 '곰보 아줌마네 두부'라는 뜻이다. 원래 곰보 아줌마가 만들어 파는 두부요리였는데 이것이 요리이름으로 그대로 굳어진 것이다. 이 요리를 처음 만든 이는 19세기 중반의 온교교라는 아가씨였는데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살짝 얽은 곰보였다. 교교는 성이 진씨인 사내에게 시집을 가서 진교교가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진씨 곰보 아줌마'라는 뜻으로 진마파라고 불렀다. 지금도 중국 쓰촨성 청뚜에는 진마파두부라는 음식점이 그대로 있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마파두부를 먹을 때 곰보아줌마를 생각해 보시기를 권한다. 

 

 

포테토칩이 만들어진 유래는 황당하고 재미있다. 뉴욕 부근에 위치한 사라토가스프링스라는 곳에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조지 크럼(George Crum)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크럼은 다혈질에 화를 잘 내고 특히, 손님이 음식에 대해 불평을 하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이상한 음식을 내놓았다. 어느 날 레스토랑을 찾은 한 손님이 주문한 감자튀김이 너무 두껍고 잘 익지 않았다고 불평을 하자 크럼은 괴짜버릇이 발동해서 주방장에게 포크로 감자를 찍을 수 없도록 최대한 얇게 썰라고 시켰다. 그런 다음 냅킨에 싸서 30분 동안 얼음물에 담가 놓았다가 뜨거운 기름에 튀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크럼은 그 위에 소금을 잔뜩 뿌린 다음에 손님 식탁으로 보냈다. 

 

그런데 화를 내야 하는 손님은 맛있다며 더 달라고 주문을 하게 되었다. 크럼은 실망했지만 이를 계기로 '포테이토 크런치'라는 메뉴로 내놓았다. 후에 그 주방장이 독립하여 손님들 식탁에 포테이토칩을 올리게 되었고 그 때는 지역의 이름을 따서 '사라토가 칩'이라 했다. 그리고 1920년대 이후에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포테이토칩'으로 바뀌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맛 뿐만 아니라 음식의 향과 시각적인 것도 중요하다. 여기에 하나 더 '이야기'를 더한다면 더 맛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포테이토칩을 먹으면서 주방에서 화가나서 감자를 얇게 썰고 소금을 확 뿌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어쩜 혼자 웃을 수도 있고, 마파두부를 먹을 때는 곰보아줌마가 두부에 매운 고추기름과 고기를 넣는 게 떠오를지 모른다. 이게 음식을 먹는 재미요. 이야기의 즐거움이다. 음식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음식에 관한 재미있는 책은 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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