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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의 사모뿔을 빌립시다."


수양대군이 해가 저물어 김종서의 집에 들려서 사모뿔을 빌리자 한다. 그리고 잠시 틈을 타 가동 임어을운이 감추었던 철퇴로 김종서의 머리를 내리쳤다. 


p319

향년 70세, 태종 5년 식년과에 합격해 진사로 벼슬에 나온지 48년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고 태종, 세종, 문종, 단종 네 임금을 섬긴 '훈로'가 비참한 생을 마친 것이었다.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며 북방을 개척한 대호, 아내의 장사도 다 치르지 못하고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 평안도로 떠났던 인생이 이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김종서의 죽음은 그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종의 죽음이자 그가 섬겼던 세 임금, 즉 태종과 세종, 문종이 만들어놓은 정상적인 헌정질서의 죽음이었다. 


김종서는 문관이었지만 '대호'라고 불리워졌으며 아직도 논란이 있지만 조선의 북방강역을 넓힌 인물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에게 주어지는 역사편찬을 맡기도 한다. 그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마치지 못했으나 <세종실록>의 편찬에 앞장선다. 김종서는 향년 70세까지 관직에는 48년동안 있으면서 그야말로 조선의 숨겨진 기둥이었다. 몽골군 침입이 예상되어 북방으로 출전할때 그의 나이는 67세이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다.



김종서, 북방강역을 넓히다. 4군 6진의 개척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4군 6진은 위의 지도에서 표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4군 6진의 개척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지도 모양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세종 때 북방 개척의 영웅은 국왕 세종과 문신 김종서, 무신 최윤덕과 이징옥 이 네 사람이었다. 

이 당시 북방 개척의 범위는 공형진이라는 부분까지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공험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공험진은 고려시대 윤관이 여진족을 무찌르고 개척한 9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다. 윤관은 공험진의 선춘령에 '고려지경' 이라는 비를 세웠다. 고려의 땅이라는 경계비를 세운 것이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우리의 땅이 공험진과 선춘령에 미친다고 생각해왔다. 문제는 공험진이 현재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공험진이 두만강 이북 700리에 위치해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조선 후기 일부 학자들과 일제 식민사학자, 그리고 중국은 동북공정의 근거로 길주 이남 함흥평야까지 축소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은 하륜에게, 세종은 김종서에게 이 비석을 찾아볼 것을 명했다. 이 비석이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면 공험진의 위치를 갖고 논쟁할필요도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비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인식의 시초는 조선 중·후기 한백겸(1552~1615)이 <동국지리지> 동계조에서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00리가 아니라 길주 남쪽에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 시초였다. 하지만 한백겸 이전으로 돌아가면 조선의 강역은 두만강 북쪽 700리의 공험진까지가 된다.


동쪽은 큰 바다에 임하고, 남쪽 경계는 철령이며,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했는데, 높은 봉오리가 백두산에서부터 기복하여 남쪽으로 철령까지 뻗쳐 1,000여 리에 걸쳐 있다. 북쪽은 야인(여진족)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 철령으로부터 북쪽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1,700여 리이다.            -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이 문제는 현재도 대단히 예민한 문제이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간도는 지금 사람들에게 점차 잊혀져가고 있다. 당연히 우리의 인식에서 배제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일제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민초들의 삶의 장이었다. 간도에 대해서는 한 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북방개척, 김종서 개인에게는... 


북방개척은 분명 조선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김종서의 삶의 태도로 보아서는 그에게 조선의 일은 아마 그의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는 잃은 게 너무 많지 않나 생각해본다.


 당시 북방으로 나가는 장수들에게는 가족이 동행할 수 없었다. 만약 난이 일어날 경우 가족을 먼저 챙길 우려가 있어서 동행 자체를 금지한 것이었다. 김종서는 병약한 노모와 아내 그리고 어린 아이들을 두고 오랜 시간 동안 조선의 북방을 위해서 살아갔다.


김종서가 북방에 있을때 그의 노모가 죽게된다. 당시 사대부의 장례법은 3년 동안 부모의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100일 후에 다시 임소로 돌아가라는 영을 내린다. 북방을 맡길 사람은 김종서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웠으나 조선을 위해서는 한시라도 북방을 김종서 없이 비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4년 후, 김종서는 아내가 위독하여 그의 나이도 쉰여섯 살이 되어 세종20년(1438)에 사직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세종은 윤허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아내를 잠깐 위로하고 떠날 뿐이었다. 조선의 북방이 튼튼해질수록 아마 김종서의 마음은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문인으로서의 김종서


아마 어떤 이는 김종서를 무인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보통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때 김종서하면 4군 6진, 북방개척이다. 하지만 김종서는 본래부터 문관출신이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영성균관사로서 성균관을 총괄했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마치지 못한 <세종실록> 편찬을 주도했다.


p139

김종서가 유학자라는 김돈의 평가는 김종서의 인격에 대한 것이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세종 또한 김종서를 유신으로 불렀다. 조선시대 유신이란 표현은 학문과 수양이 갖추어진 문신들에게만 사용하는 칭호였다.


p186

성균관은 지방 향시에 급제한 진사, 생원들이 대과를 보기 위해 숙식하며 공부하는 곳이었다. 정3품 대사성이 관할했으나 정1품 대신 중에서 영성균관사가 총괄했는데, 김종서를 영성균관사로 임명해달라는 청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모인 집단은 예나 지금이나 현실 비판적인 법이다. 특히 선비를 자처하는 조선의 젊은 선비들이 공동 상언에서 김종서를 '태산북두'로 표현하며 영성균관사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한 사실은 김종서가 당시 젊은 선비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p198

세종은 김종서에게 <고려사>를 편찬토록 명한 것이다. <고려사> 편찬을 명령받은 김종서는 기존에 사용되어 왔던 날짜별 기술인 편년체는 고려시대 전체를 조망하고 평가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서 <사기>와 같이 기전체로 <고려사>를 편찬했다. 


또한 고려사의 중요 사항만 연대별로 정리하는 편년체 사서인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여 뜻을 강조하는 기전체<고려사>와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를 보면서 많이 놀랐다. 첫번째는 문신이었지만 문무에서 모두 아주 탁월함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세종은 김종서 이후의 북방관리자들에게 '북방에 관련된 일은 먼저 김종서와 논하라.' 고 할 정도로 북방의 전문가이자 대호라고 불리우는 무신이었다. 반면에 문신으로서도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에게 주어지는 역사편찬을 맡고 흔들리지 않는 소신으로 국정을 주도했다. 그래서 훗날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수양대군에게는 첫번째 제거대상이었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은 예전에 한 번 읽고 다시 읽고 있는 중이다. 올해 한 번 조선시대에 대해서 알아보겠다고 하나씩 살펴보고 있다. 한 번 읽은 책이지만 정리를 해두지 않으니 다시 읽는데도 마치 처음 읽는 듯 했다. 

지금까지는 김종서가 편찬한 기전체인 <고려사>처럼 사건 중심 역사를 알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인 시야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일단은 개별적인 사건 중심으로 한 번쯤 개괄하고 나중에 이들을 편년체 형식인 <고려사절요>처럼 하나씩 이어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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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의 이덕일 소장의 책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올해 독서 목표 중에 하나가 그의 출간된 책 중에 아직 읽지 못한 책을 모두 읽어보는 것이다. 아직 역사 관련 책들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국내 출간된 책 중에서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흥미롭게 내용을 전개하는 책은 아마도 그의 책이 으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의 책들을 통해서 무지했던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조금씩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이제는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역사를 알고자 한다.

시간은 단절되지 않듯이 [근대를 말하다]의 근대 또한 근대만을 놓고 설명한다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한다. 조선이 일제의 지배를 받게된 이유는 무엇일까? 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면 책에서도 말하듯이 인조반정 이후, 노론 위주의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기득권 유지를 위해 유학을 고집하면서 신규문물과 개방에 대해서 철저하게 빗장을 걸어서이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여러 사건들이 이어져서 결국 근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흔히, 과거에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다시는 반복적인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바로 역사는 반복되기에 좋은 일들은 선순환을 일으켜 자주 반복하게 만들고 잊고 싶은 과거는 그때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큰 관점에서 세계사, 국사가 될 것이고, 좁은 의미에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도 적용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렇게 개인적인 삶에 적용을 하려면, 일단은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야한다는 것이 우선시된다. 우리는 학교에 다닐때에도 국사를 배울 때, 다른 시대에 대해서는 자세히 배우지만 근대에 대해서는 큰 몇가지 사건에 대해서 간략하게 배우고 넘어간다. 동학농민운동, 아관파천, 갑오개혁, 임오군란 정도가 지금 생각나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리고 시중에 나와있는 많은 책들도 근대를 주제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들은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를 말하다]는 근대를 개괄할 수 있는 개론서로서도 아주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역사적 주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근대에 대해서 전개하는 것을 통해서 근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우리의 독립운동의 본거지인 간도가 지금은 중국의 땅이 된 것이 철도부설권을 매개로 일본이 중국에 넘긴것이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백두산 정계비에 나와있는 부분을 작위적으로 해석하면서 동북공정을 하는 중국의 모습에 대해서도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참을 수 없었다.

만주에 그렇게 많은 우리 민족들이 그 당시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번을 계기로 알게 되었고 지금도 그 당시 애국지사들의 후손들이 그곳에서 대를 이어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매국노 이완용에 대해서 읽는 내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 민족끼리 서로 갈등하는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읽으면서 그 당시 사회에 대해서 대강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조금 더 상세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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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인 이덕일 선생님의 책이다. 이 분의 책은 출간된 것은 모두 읽어보려고 하고 있다.
아직도 읽어야 할 책이 쌓여있다. 이덕일의 책을 찾아서 읽는 이유는 우선 정말 재미있다. 책을 손에 잡다보면 어떤  책은 이 책을 빨리 읽어야 겠다. 하면서 계속 잡고 있어도 잘 안 읽혀지는 책이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이 그렇다. 이런 책들은 책을 읽는데 여간 노력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책은 잡으면 나도 모르게 시간이 한시간, 두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린다. 그러면서도 기억에 남는 책들이 있다. 바로 재미있는 책이다. 바로 역사학자 이덕일의 책이 그러하다.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 버린다. 또한 기존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분야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소재들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그의 이야기 솜씨는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의 책은 일단 나에게는 보증수표다. 일단 작가 이름만으로 85점 이상은 기본으로 가지고 시작한다. 게다가 [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내가 잘 모르고 있던 일제시대 독립군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그동안 이름도 알지 못했던 분이셨던 이회영 선생님에 대해서 알게 해주었다. 책의 기쁨 중 하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는 것에 대한 기쁨 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한 장면 한 장면 그 시대를 떠올려 보았다.

이 책의 주요 인물인 이회영 선생님은 일가를 모두 데리고 만주로 떠난다. 바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다. 이 당시 선생은 일제 지배하에서도 기존 가문의 경제력과 오래전 조상들도 정계에서 고위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하던 집안이었다. 바로 그 시대의 주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일가를 모두 데리고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두 가지고 만주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여러 부분에서 활약을 하게 되는 인물들을 배출하고 인연의 끈을 만든 신흥무관학교 세운다. 

책 속에는 이회영 외에도 김구, 안창호, 신채호, 윤봉길, 김좌진 등 일제시대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등장한다. 예전에는 단순히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제에 투쟁한다고 생각했다.  이 말이 맞긴하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사이에도 그들이 생각하는 사상에 따라서 서로 다른 노선으로 가고 때로는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공산주의 측면, 외교중심적인 측면, 무정부주의적인 측면 등 여러 방향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서로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의심하지 않는 것은 모두의 염원은 독립이라는 것이다. 같은 동포에 의해 죽은 김좌진 장군, 또 같은 동포에 의해 발고 되어 사형에 처해지는 독립운동가들을 보면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웠고, 아직도 일제의 편에 섰던 이들의 자손들이 그 때의 재산으로 이 나라의 부를 세습하고 있다는 생각에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큰 실수 중, 하나는 독립 후 제대로 된 과거사청산이 없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부 역시 이당시 일제의 편에 섰던 이들의 자손들이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 지금은 많이 늦었지만, 늦었다고 생각될 수록 하나씩 하나씩 제대로 된 청산은 해야된다고 생각된다.

내가 이 시대에 대한 역사를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 많이 부끄러웠다. 을사조약 이후 독립 전까지의 역사에 대해서 조금 더 공부해봐야 겠다. 과거에 대한 후회, 일제에 대한 분노 보다는 이미 벌어진 사실인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알고, 앞으로 우리의 역사, 나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키를 잡아야 할지 배우고 느끼고 몸으로 옮겨야 겠다.


[ 1932년, 이회영이 만주로 떠나기 전에 동지들에게남긴 말 ]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목은 없을 것이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 또한 행복 아닌가. 남의 눈에는 불행일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은 옛날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만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이 죽음을 제 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내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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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에 우리는 왜 유성룡을 읽어야 하는가?"

위기돌파 능력 유성룡은 흔히 우유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인물로, 임진왜란 와중에 발생한 여러 위기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냈다.

비전제시 능력 유성룡은 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 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 경제에 해박한 학자다. 때문에 그는 전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과 정치, 경제, 민생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다.

탁월한 국정수행 능력 유성룡은 대동법, 진관체제, 중강개시, 기득권 타파, 노비 충군 등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해 백성들의 공역부담을 덜어 주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뛰어난 현안해결 능력 유성룡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명분보다는 시급한 현안해결에 매달렸다. 극단이 아닌 중용의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능수능란한 외교력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유성룡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의 전략과 계략을 한눈에 파악한 뒤 이를 역이용하는 등 뛰어난 외교 전략을 펼친다.

유연한 사고방식 유성룡은 표면적으로 성리학자를 자처했지만 교조적인 신봉자는 아니었다. 모든 학문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다.

날카로운 인재발탁 능력 유성룡은 하급 무관이라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했고, 두 장수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행주대첩과 한산도대첩을 승전으로 이끈다.

책의 내용을 이루는 큰 줄기가 있다면,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 받치고 사대부의 특권보다는 나라의 존립과 백성들의 안정을 꾀하는 유성룡의 모습과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을 떠나 난을 피하고 싶어하고 난이 끝난 후에는 진정한 공신들을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고 처단하는 선조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사대부라는 자신들의 특권을 버리지 않고 권력에서 멀어지지 않으려는 그 알량한 사대부들의 모습과 조선조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지금도 항상 볼 수 있는 당파싸움이 그 병풍을 만들어 주고 있다.

너무 안타까웠다. 중간 중간 징비록에 나와있는 그 당시의 처참한 상황속에서도 그저 세치 혀로 당파싸움이나 하려 했던 것들이 너무나 화가 나게 했다.

약 520년 전의 임진왜란(1592)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유성룡> 결코 5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래서 역사는 반복되고 과거로 부터 배워나가는 것이다.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후, 서로 상이한 의견을 내어 놓은 대신들, 명나라에 의존하려는 조선의 왕 선조, 외교력의 부재로 인한 국가적 손실, 서로 다른 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 등이 과연 500년 전만의 일인가? 라고 물어본다.

과연 2012년 대한민국을 사는 내가 접하는 현실의 모습은 과연 위의 상황과 어떻게 다른가? 나는 딱히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러한 리더 바로 유성룡이 다시 한 번 나타나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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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 책 재미있을 것 같네. 관심있는 역사 관련 책을 집어서 조금 읽다보면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이름을 살펴본다. 이런 또 이덕일 작가가 쓴 글이다.
이제는 그의 책 목록을 살펴보고 하나씩 하나씩 모두 읽어내려 갈 예정이다.
그러면 아마 조선의 중, 후기에 대한 나름의 맥은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최선의 역사 공부는 이덕일의 책 속에 빠져드는 것이라 혼자 생각 되었다. 하지만 편협하지 않은 시각으로 항상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려 한다. 작가 이덕일이 새롭게 접근했던 것처럼 말이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과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등이 궁금했다.
과연 왜 그들이 그런 것에 집착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300~400년 전의 조선의 정치 현실이 지금의 정치 현실과 너무나 흡사하게 진행되는 것 같은 아쉬움이 무엇보다도 크게 남았다.

잠깐 역사적인 시점과 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 인조반정
- 1623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과 이모제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폐륜을 자행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실정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은 반정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 조금 다른 관점
: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 힘들어지고, 대외적으로는 조선이 상국으로 받들던 명의 국운이 다해가고 새롭게 청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해군으로서는 조선의 운명을 쇠퇴해가는 명나라 만을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명과 청 사이에서의 중립외교를 하면서 조선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러한 현실적인 대응 방식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정치적, 논리적 뿌리인 명나라 만을 붙잡고 있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제1차 예송논쟁
- 1659년 효종이 죽자 효종의 어머니 조대비의 복상을 서인의 뜻에 따라 기년(만1년)으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남인 허목, 윤휴 등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일어난 사건. 이들은 효종은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나 다름 없으므로 3년(만2년)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는데 비해,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은 인조의 둘째 왕자이므로 장자의 예로 할 수 없다고 반박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받아 들여졌다.

◆ 제2차 예송논쟁
- 현종 15년(1674) 효종의 비가 죽자, 다시 조대비 복상을 몇 년으로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이에 대해 서인은 대공(8개원) 설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현종은 예조에서 대공복제를 채택한 것은 결국 효종을 차자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 잘못 적용된 예제라 판단, 이 후 송시열 계의 서인 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한다.

◆ 예송논쟁의 의미는 무엇일까?
- 예송논쟁은 단순히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왕과 사대부들간의 힘싸움이다.
서인들의 주장은 왕도 사대부와 마찬가지의 기중이 적용되어야 하는 입장이고 남인들은 왕은 사대부와는 다른 절대권자로서 그 기준을 뛰어넘는다. 라고 맞서고 있다. 당시, 서인은 그 정치적 세력이 이미 왕권을 능가할 정도라고 여겨질 정도로 그 힘이 대단했다. 그리고 왕권과 남인의 대응 방식이 바로 이 예송논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 예송 논쟁의 두번째 의미는 청에 인질로 살다가 돌아온 장자 소현세자(인조가 사사했다고 의심이되어짐..)가 죽자 그 다음 왕위 계승을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종을 왕권으로 세운 것에 대한 정통성 문제가 달려있다. 바로 효종의 정통성을 인정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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