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페스트』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4년 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흔히들 '실존주의 철학의 입문서'라 말하는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난 후에 '실존주의'라는 철학과 '카뮈'라는 작가, 그리고 그가 태어난 '알제리'라는 지역적 배경이 궁금해서 한 동안 관련된 책과 영화들을 찾아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페스트』를 그가 말하는 부조리에 '반항'하는 작품 세계의 연장선으로 이해하고, 그 철학을 표현하기 위한 소설이라 생각했습니다. 

 

동일한 작품을 2020년 7월 4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확진자 10,963,552명, 사망자 524,261명이 발생한 현 시점에 다시 읽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부조리를 찾아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저항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너무나 명확한 부조리가 모든 사람 앞에 펼쳐져버렸습니다. 마치 한 번 어떻게 그 부조리에 맞서는지 지켜보겠다고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는 듯 합니다.

 

새로 읽은 『페스트』를 읽고 난 후에 처음으로 든 생각은 이 책은 소설이 아니고 어쩌면 르포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오랑이라는 도시의 봉쇄, 도청을 제외한 시설들은 환자 수용을 위한 시설로 변경되고, 쏟아지는 시체를 처리하기 위한 각종 수단과 장례절차 등은 마치 최근 전세계적으로 들려오는 뉴스의 일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지나갈수록 소설을 읽을 때는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의 삶들이 들어옵니다. 이번에도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납니다. 의사로서 페스트와 직접 그리고 끝날 때까지 헌신하는 '리유', 어릴 적 다른 죄수의 사형선고를 경험하며 삶에 대한 부조리를 느끼며 자신만의 목적을 찾아내고 보건대를 스스로 조직하는 '타루', 신문기자로 처음 도시 봉쇄 이후 도시를 탈출하기 위한 많은 시도를 하지만 결국 생각을 바꾸고 보건대에 참여하는 '랑베르', 페스트의 창궐으로 오히려 자신의 죄를 숨기며 살아가는 '코타르', 서기이자 보건대에 참여하고 한 여자를 사랑하며 그녀를 위한 편지를 쓰기위해 고민했던 '그랑' 등이 소설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타루'의 아버지는 재판관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 남자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타루'가 보면서 심한 내적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 장면을 카뮈가 『이방인』의 '뫼르소' 재판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뫼르소'도 그 재판에 대한 부조리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타루'도 다른 방식으로 부조리를 느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말 지금 몸소 전염병의 한 가운데에서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이 소설을 읽다보니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저려오기도 했습니다. 바로 오랑의 봉쇄가 풀리고, 기차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민음사 p384)
그들은 모두 서로를 꼭 껴안고 자기들 밖의 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이, 겉으로는 페스트에 승리한 듯한 얼굴로, 모든 비참함을 잊어버린 채, 그리고 역시 같은 기차를 타고 왔지만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서야 그 오랜 동안의 무소식이 그들 마음속에 빚어 놓았던 두려움을 현실로 확인해야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잊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 잊힌 사람들, 이제 동반자라고는 아주 생상한 고통밖에는 없게 된 사람들, 또 그 순간 사라져 간 사람의 추억밖에는 매달릴 곳이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서, 이별의 슬픔은 절정에 달했다. 이름도 없는 구덩이에 허망하게 묻혀 버렸거나, 또는 잿더미 속에서 녹아 없어진 사람과 더불어 모든 기쁨을 잃어버린 어머니들, 배우자들, 애인들에게 페스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다시 이렇게 되뇌어봐도 다시 너무나 아픕니다. 페스트는 끝나더라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모든 게 변해버린 사람도 있으니까요. 누군가는 가족을 만나고 위의 글 대로 모든 비참함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쩌면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나는 게 그 사람이 어쩌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연민과 그 아픔 만은 간직하려고 합니다. '리유'와 '타루' 처럼 헌신하는 삶은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랑베르'처럼은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그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도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리유'와 '랑베르'의 대화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민음사 p216)

"옳은 말씀이에요, 랑베르. 절대로 옳은 말씀이에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금 하시려는 일에서 마음을 돌려 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일이 내 생각에도 정당하고 좋은 일이라 여겨지니까요. 그러나 역시 이것만은 말해 두어야겠습니다. 즉,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하고 랑베르는 돌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관련 포스트]

2016/07/14 - [◆ 독후활동_서평/□ 소설,수필,시] - 『페스트』 그리고 알베르 카뮈

2016/09/04 - [◆ 책, 작가, 시, 글, etc/◇ 작가] - 알베르 카뮈, 부조리로 세상을 말하다.

2016/12/21 - [◆ 독후활동_서평/□ 소설,수필,시] - 아직 너무 젊은데, 『카뮈의 마지막 날들』을 읽고

2017/01/21 - [◆ 영화_시작 한 번/□ 영화 남기기] - '알제리 전투', 낯설지만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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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

그리고 또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 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中 -


불안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매몰되어 버릴까봐 

답답하다. 내가 하는 일이 '밥벌이의 지겨움'으로만 남아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초조하다. 언젠가 나도 교체되어 버릴 부속품으로 전락되어 버릴 수도 있을 테니

간절하다. 이 생각들에서 자유로워지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무언과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어쩌면 '왜?' 가 솟아오르는 지점이 아닐까.

그 유쾌하지 않은 기분, 이게 부조리를 인식하는 접점이다.

이것에 매달리자. 이게 삶을 바꾸게 만들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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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너무 젊은데······."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또렷한 발음으로 그녀가 한 말은 이 세 마디뿐이었다. 사막처럼 희미하고 고통스럽고 억눌려 있는 수많은 문장들이 묻혀 있는 오랜 침묵이 흐른 뒤에 나온 세 마디 였다. 울 수도 없었다. 커다란 불덩이가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 저 밑바닥부터 타오르면서 눈물을 말려 버렸다. (p12)


누군가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카뮈의 마지막 날들』 입니다. "가장 잘못된 죽음의 방법이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 이라고 말했던 카뮈는 1960년 마흔 일곱살의 나이에 그가 부조리하게 생각했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을 담고 있는 책으로 작가는 카뮈의 입장이 되어 그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아직 너무 젊은데······." 라며 안타까워 하는 이는 카뮈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열두 살 때 티푸스에 감염된 이후에 거의 벙어리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카뮈를 낳은 다음 해인 1914년에 남편을 세계1차대전에서 잃게 됩니다. 이번에는 자식을 먼저 보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녀의 아픔을 이해하겠습니까. 그녀가 내뱉은 세 마디는 어쩌면 아픔의 극한을 표현해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카뮈는 아버지 없이 외가에서 자라게 됩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카뮈에게는 그러기에 더 특별한 어머니였습니다.


알베르는 단어들이 입에 물고 있던 조약돌의 벽을 넘어가도록 애를 쓰며 크게 낭독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돌을 내뱉어버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가장 힘든 것은 돌을 통제하는 것, 혀와 돌이 혼연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움직이게끔 하는 것이었다. 결핵에 걸렸을 때 나던 소리와 똑같은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아직은 분명치 않은 음절로, 어머니가 내는 그런 발음처럼 어렵사리 변해갔다. 알베르는 그 소리에 익숙해져 갔고 자기 자신이 내는 소리를 거울 삼아 어머니가 소리를 삼켜버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언어를 표현함으로써 마침내 그 소리들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을 하고 싶을 때 조차도 어머니의 말들은 결국 체념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파도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불분명한 문장을 삼켜버리는 이 해변에서 알베르는 침묵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p46)


카뮈는 어머니가 말하는 부분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장애로 인해서 불분명한 발음을 하게 되는 것을 카뮈는 스스로 바닷가에서 조약돌들을 입에 가득 물고 말을 해봅니다. 반 친구들이 이상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에게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는 오직 어머니를 이해하고 싶을 뿐이니까요.


카뮈가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 어머니 다음으로 생각났던 분은 제르맹 선생님이었습니다. 카뮈의 할머니는 그가 상급학교 진학이 아닌 졸업장을 따면 공장의 견습생으로 일을 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공부를 시킬 여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르맹 선생님은 좋은 성적을 받아서 장학금을 받으면 가능하다고 할머니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할머니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때 갑자기 어머니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 애 학교 갈 거예요!" 


잘못했으면 우리는 카뮈라는 작가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은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며 세상에 그의 작품과 이름을 남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카뮈가 얼마나 어머니에게 자신이 쓴 글을 보여드리고 싶었을까요. "어머니, 제가 쓴 글이에요. 사람들이 많이 읽고 좋아하는 거 같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어리광도 부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자동차 사고가 나기 전에 카뮈는 유난히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쓴 작가의 상상이겠으나, 그 당시에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을 것입니다. 말하지 않더라도 그 누구보다 깊게 들어주는 어머니였기에...


오늘 저녁도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렸을 적 밤마다 리듬을 맞추던 어머니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악몽을 꾸고 나서 달아나버린 잠을 다시 청해야 할 때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되곤 했었다. 눈을 감고 가벼운 증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소리를 똑똑히 듣곤 했었다.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최대한 옆에 붙어 어머니와 같이 숨을 쉬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꿈을 훔쳐 자기 마음속으로 조금씩 주입시키면 나중에 소리 없는 밤에 그것들을 깨울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르네 샤르 생각이 났다. 어느날 그에게 자기와 어머니와의 이상하고도 서글픈 관계에 대해 말했더니 그가 잠시 사이를 두고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그건 침묵이 아니라네." (p104)

다시 어머니의 독백으로 돌아옵니다. "아직 너무 젊은데·····." 이 부분이 왜 이렇게 아플까요. 

그녀는 얼마나 아들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고 싶어 했을까요. 아들이 쓴 글들을 한 글자 한 글자 읽고 싶었을까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알베르 카뮈가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머니를 남겨두고 먼저 떠났기에 더 마음이 아프네요.



『조르바 위버멘쉬를 꿈꾸다』의 카뮈

『이방인』, 알베르 카뮈

- 『페스트』 그리고 알베르 카뮈

- 알베르 카뮈, 부조리로 세상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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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소설을 읽지 못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고파지네요. 비소설을 읽다가 소설로 돌아오는 저의 주기입니다. 이야기에 주릴 때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소설, 무엇을 읽을지 망설일 때 손에 잡게 되는 세계문학전집을 다시 한 번 뒤적여 봅니다. 역시 예전에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번에 제 주린 허기를 채워준 책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였습니다. 예전에 그렇게 손에 안 잡히던 책이었는데, 시기가 잘 맞았나 봅니다. 이번에는 다르네요.


카뮈의 책은 『이방인』에 이어 두번째로 만납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로 시작되는 『이방인』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세 번을 곱씹어서 읽었네요. 그의 작품 뿐이 아닙니다. 

코트의 깃을 바짝 세우고, 입술 끝으로 짧게 문 담배 그리고 무언가를 살짝 응시하면서 자연스럽게 잡힌 이마와 입가의 주름을 보게 되면 이 작가에게 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름부터 작가스러운 '알베르 카뮈'에 대해서 알고 싶어집니다.


▲ 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는 1913년 알제리에서 프랑스계 이민자로 태어납니다. 그 다음 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고,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전사하게 됩니다. 그 후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불우하게 살아가게 되죠. 중등학교에 다닐 때는 폐결핵에 걸려서 가족과 떨어져 숙부와 함께 살게 됩니다. 정육점을 하고 있던 숙부의 집에는 에밀 졸라, 발자크, 휴고와 같은 프랑스 문인들의 전집이 있었고, 카뮈는 이런 책들을 읽게 됩니다. 후에 고학으로 알제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평생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만나게 됩니다. 카뮈는 그르니에의 격려를 받아 그의 초기 작품들을 문예지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삶의 부조리 인식하기


▲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표지


카뮈는 1940년 28세의 나이에 그의 대표작인 『이방인』을 발표합니다. 

주인공 뫼르소가 뜨거운 태양 때문에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재판을 받아 사형 선고를 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는 뫼르소가 아랍인을 쏘아 죽인 것보다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 냉담했다는 사실, 장례 다음 날 해수욕을 하고 여자와 부정한 관계를 맺었으며 그녀와 함께 희극 영화를 본 것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결국 사람들은 뫼르소에게 비판의 날을 세우고 그에게 사형을 구형합니다.


뫼르소는 재판 과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자기가 아랍인을 쏘아 죽인 것과 상관없는 다른 것들을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심판하는지 의아해합니다. 재판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인데 왜 자신은 거기에 배제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을 때도 자기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같은 사람의 생명을 결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같습니다.


카뮈에 의하면,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합리의 욕망이 있는 까닭에 세계의 뜻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세계는 인간이 알아볼 만한 아무런 뜻도 없다. 인간이 가진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합리'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것, 이러한 이율배반으로부터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카퀴의 부조리이며, 인간이 피하지 못할 숙명,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졸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습관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상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문제 삼지 않는다. 그처럼 졸고 있으면 존재자의 의식일 수 없으므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히 인식할 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 『이방인』, 문예출판사, p179 -


『이방인』은 이러한 부조리로 가득차 있는 작품입니다.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수 많은 무조리가 있지만, 사람들은 뫼르소의 행동에 드러나는 부조리 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카뮈는 뫼르소의 극단적인 성향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부조리는 보이지 않느냐고 묻고 있다 생각합니다. 『이방인』은 수많은 해석이 있으며, 지금도 제가 제대로 읽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독법으로 받아들인 것은 '세상의 부조리를 인식하라.' 였습니다. 그래야 다음에 무엇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반항하는 행동적 휴머니즘


  ▲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표지


몇 년 동안 읽혀지지 않은 채 꽂혀 있던 카뮈의 다른 작품은 『페스트』입니다. 이 작품은 1947년, 카뮈의 나이 35살에 쓰여졌습니다. 지금의 제 나이네요. 그래서 그렇게 안 읽히던 책이 잡혔나 보네요 라고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어 봅니다.


조용한 해안 도시 오랑에서 언젠가부터 거리로 나와 비틀거리다 죽어가는 쥐 떼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정부는 페스트를 선포하고 도시를 봉쇄합니다. 오랑은 무방비가 되고 대혼란에 빠집니다. 이런 와중에도 의사로서 사명을 다하려는 리유와 부당한 죽음을 거부하려는 타루, 오랑에 체류 중이던 신문기자 랑베르 등은 공포와 불의의 도시에서 페스트와 저항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반면에 페스트는 신이 내린 형벌이며, 신의 뜻에 따르자는 신부 파늘루, 고통의 세상에서 오히려 소속감을 느끼는 코타르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방인』에서 부조리에 대해서 인식했다면, 『페스트』에서는 부조리를 인식하고 난 다음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부조리를 넘어서려고 하는 것이죠. 카뮈는 이렇게 인식된 부조리에 대해서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는 '반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반항'은 부조리로 인한 모순을 없애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그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진리를 바라보고, 행복을 바라는 욕구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반항하는 행동적 휴머니즘'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의 '반항'은 작품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럼요" 그는 말했다. "아마 자존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나 나는 필요한 정도의 자존심 밖에는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지, 이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당장에는 환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반성할 것이고, 또 나도 반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긴급한 일은 그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나는 힘이 미치는 데 까지 그들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그뿐이지요." - 『페스트』, 민음사 p170 -


늦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비 속에서도, 매일 같이 한밤 중이면 승객 없는 전동차의 괴상한 행렬이 바다 위 중턱으로 덜거덕거리면서 지나다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시민들도 마침내는 그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순찰대가 임해 도로에 접근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흔히 몇몇 무리의 사람들이 파도 치는 바다를 굽어보며 솟아 나온 바위 틈에 숨어 있다가 전동차가 지나갈 때면 유람차 안에 꽃을 던지곤 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전동차가 꽃과 시체를 싣고 여름 밤 속을 더 한 층 심하게 흔들리며 달리는 소리를 듣곤 했다. 

- 『페스트』, 민음사 p234 -


등장인물 그 중에서도 의사인 리유는 자신의 사명감과 다른 이유 없이 자신 앞에 있는 환자들을 살리겠다는 의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페스트가 심해져 사람들의 장례 절차도 없이 땅에 묻기 위해 수송될 때 사람들은 전동차에 꽃을 던집니다. 먼저 떠나지 않게 붙잡으려는 노력과 먼저 떠난 이에 대한 인간애입니다. 그들은 페스트라는 부조리에 각자 나름대로 반항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행동을 합니다. 그것이 부조리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런 반항하는 행동적 휴머니즘의 모습은 카뮈의 삶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카뮈는 사형제도를 반대하고, 인권운동에 매진합니다. 1952년에는 스페인이 프랑코 치하에 있을 때, UN 회원국으로 받아들여지자 당시 유네스코 임원직을 사임합니다. 그 다음 해에는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한 소비에트 연방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노벨상 그리고 카뮈의 죽음


▲ 프랑스 루르마랭의 알베르 카뮈 묘지


카뮈는 1957년 노벨상을 수상합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우리 시대 인간의 정의를 탁월한 통찰과 진지함으로 밝힌 작가"라고 평하지요. 그리고 3년 후 카뮈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게 됩니다.


카뮈는 1960년 바캉스를 마치고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통해 파리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가 미끄러져 나무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 사고로 카뮈는 48살이라는 짧은 삶을 정리합니다. 평소 '아이들의 죽음과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 보다 더 부조리한 것은 없다.' 라고 했던 카뮈이기에 그의 마지막은 무엇보다 더 아쉬울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카뮈의 검은색 가방에는 그의 유작인 『최초의 인간』 자필원고와 메모, 수첩 등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 작품은 그의 아내에 의해 1994년에 출간됩니다.


▲ 영화로 제작된 알베르 카뮈의 유작 『최초의 인간』


지금까지 카뮈를 통해 만난 두 작품, 『이방인』과 『페스트』는 '우리 시대 인간의 정의를 탁월한 통찰과 진지함으로 밝힌 작가' 라는 한림원의 평을 여실히 증명해 줍니다.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자아(自我)' 그리고 '인간(人間)' 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한 번 쯤은 자기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심연을 바라보기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들어가봐야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부조리한 세상과 인간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이 부조리하게 느껴지시나요?

뜨거운 여름, 카뮈의 작품을 권합니다.

단, '뜨거운 태양은'은 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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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소설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고픕니다. 이게 비소설을 읽다가 소설로 돌아오는 저의 주기입니다. 이야기가 고플 때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소설, 무엇을 읽을 지 망설일 때 찾게 되는 세계문학전집을 다시 한 번 뒤적여 봅니다. 역시 예전에 사놓고 읽지 않은 게 많이 있습니다. 이번에 제 주린 감성을 채워준 책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였습니다. 예전에 사 놓고는 그렇게 손에 안 잡히던 책이었는데, 시기가 잘 맞았나 봅니다. 이번에는 다르네요.


알베르 카뮈(1913 ~ 1960)의 책은 『이방인』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납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로 시작하는 『이방인』은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 세 번 정도 읽었습니다. 그리고 코트의 깃을 세우고 짧게 문 담배와 무언가를 살짝 응시하면서 자연스럽게 잡힌 두 줄의 이마 주름의 사진을 보면 이 작가에게 끌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소설도 궁금하지만, 이름부터 작가스러운 '알베르 카뮈'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집니다.




카뮈의 『페스트』는 그의 나이 35살(1947년 作)에 지은 작품입니다. 지금의 제 나이입니다. 그래서 작년에 그렇게 손에 안 잡히던 것이 잡혔나보네요 라고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어 봅니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어느 한 마을에 페스트가 발생해서 사라지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우선 책의 뒷 표지에 적힌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합니다.


조용한 해안 도시 오랑에서 언젠가부터 거리로 나와 비틀거리다 죽어 가는 쥐 떼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정부 당국이 페스트를 선포하고 도시를 봉쇄하자 무방비 도시는 대혼란에 빠진다. 의사로서 사명을 다하려는 리유와 부당한 죽음을 거부하려는 미지의인물 타루, 우연히 오랑에 체류 중이던 신문기자 랑베르 등은 공포와 불의가 절정에 달한 도시에서 페스트에 맞서 싸우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 이 재앙을 신이 내린 형벌이라고 보고 신의 뜻에 따르자고 설교하는 신부 파늘루, 모두가 고통에 빠진 상황에서 오히려 세상에 소속감을 느끼는 코타르도 있다. 페스트는 쉽사리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보건대 사람들은 새로운 혈청의 실험 대상이었던 어린아이가 죽어 가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본다.



반항하는 행동적 휴머니즘


카뮈의 소설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두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카뮈는 살아 생전에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제 2차 세계대전(1939~1945)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전쟁의 시대를 살아간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기존의 진리, 제도를 파괴하고 합리주의에 대한 한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인간 존재와 삶의 태도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문이 생겨나게 됩니다. 카뮈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부조리', '반항하는 행동적 휴머니즘'으로 대답합니다.


인간은 합리적인 세상을 원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와 다르게 비합리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는 의의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곧 부조리로 인식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식한 부조리에 대해서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는 '반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조리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에 반항해서 무의미한 삶이라고 느껴지더라도 진리를 바라며, 행복을 바라는 욕구를 가지고 나가라는 것이 카뮈의 행동적 휴머니즘입니다.


'행동적 휴머니즘'은 『페스트』에서도 등장인물들을 통해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럼요" 그는 말했다. "아마 자존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나 나는 필요한 정도의 자존심 밖에는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지, 이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당장에는 환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반성할 것이고, 또 나도 반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긴급한 일은 그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나는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그들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그뿐이지요." (p170)


그래서 늦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비 속에서도, 매일같이 한밤중이면 승객 없는 전동차의 괴상한 행렬이 바다 위 저 중턱으로 덜거덕거리면서 지나다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시민들도 마친내는 그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순찰대가 임해 도로에 접근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흔히 몇몇 무리의 사람들이 파도치는 바다를 굽어보며 솟아 나온 바위 틈에 숨어 있다가 전동차가 지나갈 때면 유람차 안에 꽃을 던지곤 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전동차가 꽃과 시체를 싣고 여름밤 속을 더한층 심하게 흔들리며 달리는 소리를 듣곤 했다. (p234)


등장인물 그 중에서도 의사인 리유는 의사라는 자신의 사명감과 다른 이유없이 자신 앞에 있는 환자들을 살리겠다는 의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도 타루는 보건대를 스스로 조직합니다. 그리고 페스트가 심해져 사람들이 장례 절차도 없이 땅에 묻히기 위해 수송되어 질 때 사람들은 전동차에 꽃을 던집니다. 먼저 떠나는 이에 대한 인간애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페스트라는 부조리에 각자 나름대로 반항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행동을 합니다. 그것이 부조리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게 됩니다.




알베르 카뮈 (1913~1960) 


우리 시대 인간의 정의를 탁월한 통찰과 진지함으로 밝힌 작가 


- 1957년이 밝힌 노벨상 수상 사유



지금까지 제가 만난 두 작품 『이방인』, 『페스트』를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인간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번쯤은 자기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깊이있게 파고들어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심연을 바라보기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들어가봐야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인간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쯤 진지하게 나 자신을, 인간을 바라보고 싶은 분들에게 카뮈의 작품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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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에 의하면,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합리의 욕망이 있는 까닭에 세계의 뜻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세계는 인간이 알아볼 만한 아무런 뜻도 없다. 인간이 가진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합리'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것, 이러한 이율배반으로부터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카뮈의 부조리이며, 인간이 피하지 못할 숙명,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졸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습관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상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문제삼지 않는다. 그처럼 졸고 있으면 존재자의 의식일 수 없으므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부조리와 직면하여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 그것이 '반항'이다.

책의 마지막 표지를 보고, 작품설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카뮈가 29세 때, 지금 나보다 젊은 시절에 발표한 <이방인> 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라 하고 실존주의 문학이라 평한다. 그런데 부조리라는 말도 실존주의라는 의미도 나에게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실존주의 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인 것일까?
존재의 이러한 불가사의를 끝까지 질문하는 철학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실존주의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지만 그 공통점은
인간의 존재, 그것도 단독적인 개체인 나 자신의 존재에 계속 관심을 갖는 방법적 태도이다.

이방인은 한 번 읽어보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방인이라기 보다는 카뮈를 한 번 접해보고 싶어서였다.
이방인을 읽는 내내, 나는 그냥 무표정인 듯 했다. 왠지 주인공 뫼르소는 작가 카뮈를 닮고 항상 무표정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고,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아랍인을 죽이고, 재판을 받고, 그리고 사형대에도 그 무표정으로 올라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내가 있는 그대로 <이방인> 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사건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다루어진 셈이었다.
나를 참여시키지도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나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문득 나는 귀를 기울였다. "제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하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는 그런 투로 이야기를 하며, 나에 관해서 말할 때마다 '나는'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놀랐다. 나는 간수에게로 몸을 굽혀 그 이유를 물었다 ......... 나로서는 그것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놓고, 나를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고, 이를테면 그가 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방인> 의 내용의 진행과정을 보면 어머니의 죽음에서 부터 뫼르소 자신의 사형 구형이 있기까지 철저하게 뫼르소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진행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에 자고 싶어하는 뫼르소, 장례식 다음날 여자와 관계를 갖고, 재판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들 속에서 철저히 뫼르소 자신에 대한 생각을 나타낸다.

이렇게 철저히 자신의 존재만을 집중하는 것이 실존주의인가? 그렇다고 이러한 것이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 카뮈는 무엇을 말하려 하고 있던 것일까? 아직도 내 머리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누가 설명해줄 수 있는 분 얘기해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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