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성은 분명 미덕입니다. 여전히 인력을 채용하는 많은 곳에서 성실성은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각 개인의 입장으로 잠시 생각을 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개성 혹은 장점을 성실성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너무나 힘이 들지도 모릅니다. 성실성을 자기 자신의 미덕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성실함의 틀에서 벗어나면 자기 자신부터 먼저 힘들어집니다. 


성실함의 특성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노력이 상당합니다. 그리고 일관성과 지속성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일관성과 지속성이 없는 성실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성실해지기 위해서는 꾸준한 자기 통제와 상당한 시간 투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무기로 만들기에는 부담스러운 성질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자신 만의 독특한 무기를 찾지 못할 경우,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성실성입니다.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을 경우에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성실성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럴 경우가 가장 안타깝습니다.


세상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손 선생님은 무슨 늪을 겪어보셨나요? 제가 만나본 것은 성실성의 늪이에요. 성실함만으로는 답이 찾아지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성실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상황이지요. 슬럼프인데도 쉬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끝없이 노력해요. 성실 외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예전에 즐거워서 하던 일이었는데, 점점 스스로를 잠식하는 고통이 되고 맙니다. -  손철주, 이주은 <다 그림이다> 中


위에서 언급된 경우는 성실함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 경우지만 성실 이외에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성실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성과없이 수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됩니다.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서 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는 경우,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그냥 먼저 퇴근하거나 다른 것에 신경을 쓰게 되면 관계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일이기에 이런 부분도 상당히 중요하기는 합니다. 


성에서 일하는 관리의 대부분이 형식화된 관례만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제는 타성에 젖어서 <쉬지 않고, 늦지 않고, 일하지 않고>라는 <하지 않는 세가지>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 도몬 후유지, <불씨> 中


얼만 전에 인상깊게 읽은 도몬 후유지의 <불씨>에서 언급된 부분인데, 이것을 읽고 오늘 주제인 성실함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하지 않는 것 세 가지 중에 앞에 두 가지는 '쉬지 않고, 늦지 않고' 입니다.  바로 '성실'하면 떠오르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앞의 두 가지를 듣고 마지막 '일하지 않고' 를 읽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쿵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때로는 제가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늦지 않고, 쉬지 않았습니다. 저는 분명히 성실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성실함은 분명 부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성실함의 좋지 않은 면만을 이야기한 것 같아 좀 걸립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가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느낀 점은 성실만 하지는 않아야 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성실만 하면 조금 안타깝습니다. 대신 다른 무기와 성실함이 함께 한다면 개인적인 성장에 가시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분명 성실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성실함으로 인해 가정이나 혹은 다른 부분이 침해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사양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현명하게 성실해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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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1840.5.7 ~ 1893.11.6)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낭만주의 시대의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 지휘자이다.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 비창 교향곡의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은 선율적 영감과 관현악법에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1860년대에는 러시아의 민족주의 음악파인 러시아 5인조의 지도자 밀리 발라키레프와 교제하여 국민악파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반에는 낭만주의 경향의 곡을 작곡하였으며 베토벤, 슈베르트의 전통을 러시아로 확산시켰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 (Symphony No.1 "Winter Day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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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홀리데이는 미국의 재즈가수이자 작곡가이다.

음악적 동료인 레스터 영이 지어준 'Lady Day'라는 별명을 갖고있으며, 재즈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보컬로 평가받는다. 억양과 템포를 조절하는 새로운 보컬 형식을 창조하였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현실을 노래에 이입하여 진심어린 감정을 표현하였다. 이에 대해 평론가 존 부시는 "미국의 팝 보컬의 예술을 영원히 바꿔놓았다"라고 평하였다.





GLOOMY SUNDAY




You Don't know What Love Is




Lover Man (Oh Where Can You Be)




I'm a fool to want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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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는 1817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났다. 교사들의 눈에 띄어 1833년 하버드대학에 입학했지만, 학점에 무관심했고,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에 파묻혔다. 중간 정도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중등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엄격한 학교 문화에 거부감을 느껴 바로 사직했다.

소로우는 1845년 봄,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도끼를 들고 월든 호숙가의 숲속으로 들어가 석 달에 걸쳐 통나무집을 지었다. 

소로우는 "숲 속으로 들어간" 이유를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밝혔다.


소로우는 숲속에서 사방 1.5km안에 아무도 살지 않았던 곳에서 혼자 밭을 일구며 먹고 살았다. 그 경험을 담아 집필한 <월든>은 소유 욕망을 부추기는 문명을 비판하고 자급자족 생활을 내세움으로써 큰 파장을 일으켰다. 21세기 생태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줄 만큼 원든 실험은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소로우의 책 <월든>에 견주어 지나치게 과소평가된 책이 있는데 소로우가 통나무집에서 부닥친 경험을 녹여낸 다른 책이다. 바로 1849년 5월에 발표된 <시민불복종>이 그것이다.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그 책은 소로우의 통나무집으로 경관이 불쑥 찾아온 1846년의 어느 여름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세금징수원을 겸하고 있던 경관을 소로우를 경찰서로 연행해 그때까지 여러해 동안 소로우가 내지 않고 있던 세금, 인두세를 납부하라고 압박했다. 소로우가 거절하자 경관은 곧장 감옥에 가뒀다.


소로우는 하루 만에 풀려났다. 다음 날 아침에 그의 숙모가 익명으로 세금을 대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옥에서 보낸 하룻밤의 경험을 소로우는 잊지 않았다. 왜 자신이 인두세를 내지 않았는가를 정리했다. 소로우는 노예제도를 암암리에 인정하고 멕시코를 침략하는 제국주의 전쟁을 서슴지 않는 미국 정부를 지지할 수 없고, 그런 불의를 저지르는 정부를 유지하는 세금을 낼 수 없다는 논리를 다듬었다. 그것이 바로 <시민불복종>이다.


소로우는 그가 살던 시기의 '미국 정부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 올바른 자세일까'를 물은 뒤 바로 이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대답한다. 수치감 없이는 이 정부와 관계를 가질 수 없노라고 말이다. 나는 노예의 정부이기도 한 이 정치적 조직을 나의 정부로 단 한 순간이라도 인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정부의 폭정이나 무능이 심해 참을 수 없을 때 정부에 저항하는 권리, 곧 혁명의 권리를 주창한 소로우의 글은 발표 뒤에도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활자의 힘은 나중에 주목받았다.


톨스토이는 미국에게 "왜 당신네 미국인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나 군인들 말만 듣고 소로우가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거요?"라고 개탄했다.


인도의 간디는 "나는 소로우에게서 위대한 스승을 발견했으며 '시민의 불복종'에서 내가 추진하는 운동의 이름을 땄다"며 비폭력 저항운동의 뿌리가 소로우라고 밝혔다.


1950년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소로우를 '발견'하면서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에 무기가 되었다. 1960년대 미국의 반체제운동과 저항문화의 사상적 젖줄도 소로우였다. '시민불복종'의 논리는 불의와 싸우는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을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미국과 유럽의 반전운동, 평화운동, 환경운동, 생태주의, 무정부주의, 심지어 나체주의와 히피도 소로우를 즐겨 인용했다. 시민불복종에 담긴 '시민저항권'은 정치 사상과 법철학의 주요 개념으로 떠올랐다.


소로우는 말한다.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라. 당신의 생명으로 하여금 그 기계를 멈추는 역마찰이 되도록 하라."


소로우는 단호하게 말한다.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감옥이다."


소로우는 1862년 결핵으로 고통받다가 45세의 나이로 삶을 정리했다.


- 기획회의 389호 인용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에 대해서는 <월든> 밖에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 <시민불복종>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처음에 이 내용을 읽었을 때는 작은 충격을 받았다. 불의를 저지르는 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소로우가 다르게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국가, 정부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따르려고 한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법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다들 수긍하고 따른다. 그런데 소로우는 그것에 대해 부정한다.

수동적이지 않다. 국가를 상대해서도 당당하다. 기존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의심을 품게 한다. 과연 나는 지금 불합리한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며 수용하고 있는가, 너무나 익숙해서 나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없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그들만의 리그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저 내 월급통장에 돈만 똑바로 들어오고, 우리 가족만 괜찮다고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조용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 세상은 움직이고 그 속에서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이 결정되어 진다.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언젠가 그 무관심의 대가가 나를 덮칠 것이다. 깨어있어야 한다.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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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지금 스페인엔 왕이 있습니다. 몸이 굉장히 아파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데 가끔 뉴스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스페인은 입헌군주국입니다. 그런데 1936년에는 공화정이었습니다. 왕이 없었어요. 그 시절의 공화정 정부를 보통 인민전선정부라고 부릅니다. 인민전선 정부는 1936년에 스페인만이 아니라 그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도 있었고 1970년대에는 칠레에도 있었습니다. 오른쪽 사람들이나 중간에 있는 자유주의자들부터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까지 연합해 만든 정권, 이런 연대를 인민전선이라고 하고 이런 사람들로, 이런 정파들로 이뤄진 정부를 인민전선정권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건 투표를 통해서 뽑힌, 완전히 민주적인 정권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스페인 식민지였던 모로코에는 프랑코라는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프란시스코 프랑코. 이 사람은 인민전선정부가 들어서자 이걸 굉장히 위험시했습니다. '내 조국이 어쩌면 빨갱이 국가가 되겠구나! 잘못하면 소련처럼 되겠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1936년에 반란을 일으켜 그해 6월 스페인내전이 시작됩니다. 이 스페인내전은 당대 지식인들한테 무지무지하게 큰 영향을 줬습니다. 이 내전은 당시 '세계 양심의 시험장'이라고까지 불렸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스페인내전을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왜냐? 지금 민주적으로 뽑힌, 그러니까 정통성이 있는 인민전선정부가 프랑코라는 파시스트의 반란에 의해서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영국이나 프랑스나 미국 같은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스페인의 민주 정부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 정치인들도 좀 의심을 했거든요. 저 인민전선정부가 혹시라도 나중에 소련처럼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말입니다. 스페인 인민전선에는 분명히 좌파 색깔이 꽤 짙게 있었습니다. 아주 오른편에 있는 사람 말고는 중간파와 왼편을 모두 아우른 거니까요. 그래서 영국이나 프랑스가 정부 차원에서 스페인 정부를 돕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독일 정부와 이탈리아 정부는 달랐습니다. 독일은 1933년에 히틀러가 이미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내전이 일어난 건 1936년이고, 무솔리니는 그 당시 이미 25년째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이랑 이탈리아는 프랑코 반란군을 돕기 위해 직접 군대를 보냅니다. 무기도 지원합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그림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게르니카>는 스페인내전에 관련한 그림입니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 게르니카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습니다. 독일 공군이 어느 날 그곳을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립니다. 마을 하나를 완전히 없애버려요. 그 장면을 그린게 <게르니카>라는 그림입니다. 실제로 내전은 내전인데 스페인 사람들끼리만 싸운 게 아니라 독일군, 이탈리아군까지 반란군 편에 서서 스페인 정부군과 싸운 겁니다. 반면에 미국이나 영국이나 프랑스는 직접적으로 스페인 정부에 도움을 안 줬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 정부의 성격이 좀 불안했거든요, 혹시 소련이랑 비슷한 정부가 될까봐. 그러다 보니 결국 프랑코는 반란에 성공했습니다. 반란이 1939년에 성공적으로 끝났어요, 슬프게도. 프랑코는 1975년 죽을 때까지 독재정치를 합니다. 프랑코가 죽은 뒤에야 스페인은 왕정복고와 더불어 민주화가 시작됩니다. 지금 스페인은 군주제 국가입니다. 물론 민주적인 군주제, 입헌군주제 국가입니다.


사실 군부가, 더구나 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가 반란을 일으키면, 정부로서도 그 반란을 제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페인내전에서는 정부 쪽, 즉 공화파 쪽에 그 못지않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건 내분이었습니다. 조지 오웰이나 앙드레 말로나 어니스트 헤밍웨이처럼 널리 알려진 작가들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국제여단을 이뤄 정부군을 돕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코의 반란군 측은 일치단결해 있었던 데 비해, 공화파 쪽은 내분이 심했습니다.


예컨대 똑같은 공산주의자들끼리도 스탈린주의자들이랑 트로츠키주의자들이랑 사이가 굉장히 나빴습니다. 실제로 그 내전의 와중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자들에게 학살을 당합니다. 무정부주의자들도 스탈린주의자들에게 학살당했습니다. 같은 편이 같은 편을 죽이는 겁니다. 그러나 그 당시엔 그 사실이 외국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공산주의 운동의 주류가 스탈린주의였기 때문에, 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프랑코와 내통한다는 소문까지 내며 그들에게 총부를 들이댔습니다.


- 고종석의 문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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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나무 숲의 나무들은 그렇게 위로만 곧게 자라면서도 절대 흔들리거나 부러지는 예가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저희끼리 적당한 간격으로 무리를 이뤄 각종 풍상을 이겨내기 때문이다. 만일 전나무가 저 혼자 잘났다고 한 그루씩 떨어져 자랐더라면 그 곧은 줄기가 눈이나 바람, 서리를 이겨내지 못하고 부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강직하게 외대로 자라지만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전나무, 결국 더불어 사는 전나무의 모습은 제 스스로를 더 굵고 강하게 만드는 바탕이 된다. 남을 앞지르려 하기 보다 손잡고 함께 사는 것이 종국엔 스스로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中, 우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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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흔해져 버린 탓일까. 회양목을 보면 "아~, 저 나무구나" 하고 알아보는 이는 많아도 정작 회양목의 특성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무는 워낙 볼품이 없다. 아무리 크게 자란다고 해도 나무 폭이 한 뼘을 채 넘지 못하고 키도 짤막하다. 다른 나무 사이에 있으면 그저 소박한, 이름 없는 나무 정도로 인식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자라는 모습을 알고 나면 관심 없던 사람이라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게 바로 회양목이다.


나무의 직경이 한 뼘 정도 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한 십 년? 길어야 이십 년? 그러나 회양목이 그 정도의 직경을 가지려면 최소한 오백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주변에 웬만큼 나무 모양새를 갖춘 회양목이 있다면 최소한 증조부 때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맞다.


그러나 그렇게 더디게 성장하는 동안 회양목은 그 속을 다지고 또 다져 그 어떤 나무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단단함을 지닌다. 더디 자라는 만큼 조직이 치밀하고 균일해져 그 어떤 충격에도 뒤틀리지 않는 견고함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단함은 귀한 가치를 지녀 도장을 만드는 훌륭한 재료로 쓰인다.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나무 도장들이 대부분 이 회양목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조들은 회양목을 가리켜 '도장나무'라 불렀다.


-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中, 우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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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만나는 자연에 관심을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나무, 꽃, 돌이 아니라 어떤 나무, 어떤 꽃, 어떤 돌 하는 식으로 개별적으로 접근해가기로 했다. 사실 예를 들어 소나무라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개개인별로 특성이 있듯이 한 그루 한 그루 개별적인 특성을 알아가는 것이 좋겠으나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관심이다. 관심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은 내 주변에 있는 나무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책을 읽고 거기에 나와 있는 나무들을 위주로 시작할까도 생각했는데 지면 속에 있는 것과 실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서있는 나무를 직접 보고 그것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팝나무를 알게 되었다. 이팝나무는 5~6월에 꽃이 피며, 열매는 흑자색으로 10~11월에 익는다고 한다. 이팝나무는 정말 주변에 흔하다. 아파트 입구를 나서면 주차장 뒤의 나무이기도 하고, 출퇴근 길에 지나가는 작은 공원에 심어져 있는 나무도 이팝나무다. 사진을 찍은 곳도 바로 그 작은 공원이다. 그리고 매일 지나가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출퇴근 버스를 타는 곳과 버스정류장에 세워진 가로수가 이팝나무였다.

 

오늘은 산뜻하게 봄비가 내렸는데, 봄비에 이팝나무의 꽃들이 떨어져서 붉은색 블록의 인도 위에 떨어져서 유난히 더 하얗게 빛난다. 다른 꽃들과 다르게 마치 게살의 하얀 부분이 떨어져 내린 것 같다고 홀로 생각했다. 옛날에는 수북히 담겨진 쌀밥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아마 지금 꽃이 하얗게 피어있어 이팝나무를 알겠지만, 꽃이 지면 다른 나무와 여전히 구별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나뭇잎도 어떤 색인지, 나무의 껍질은 어떠한지 조금 더 살펴봐야 겠다. 나뭇잎은 사진을 찍었는데 껍질과 가지 부분도 조금 더 살펴보아야 겠다. 그래서 한 겨울에 꽃, 잎, 열매가 다 떨어진 후에도 길가에 서 있는 이팝나무를 알아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퇴근 길에 일이 생겼구나. 나무껍질, 가지에 대해서 사진을 찍는 일, 그리고 10월달의 달력에도 적어두어야 겠다. 이팝나무의 흑자색 열매가 익는 날이라고, 그리고 그때 다시 이팝나무의 열매의 사진도 남겨야 겠다. 이팝나무를 시작으로 조금 더 깊이 주변의 나무들을 살펴보자. 나무의 그리고 꽃의 그리고 자연의 생명력을 느껴보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봄의 생명력을 몸소 알아가는 중이라서 올해 봄은 유난히 따듯하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던 나무가 바로 이팝나무이다. 농가 근처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었던 이 나무는 무리 지어 피는 꽃 모양새가 꼭 밥 공기에 수북이 담겨 있는 쌀밥을 닮아서 전에는 '이밥나무' 라고 불렀단다. 멀리서 보면 꼭 하얀 밥 덩어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예로 부터 이팝나무 꽃이 풍성하게 피면 그해 농사도 풍년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팝나무에 꽃이 많이 핀다고 해서 정말로 그해 농사가 잘 된느 건 아니었다. 내 기억 속에 이팝나무는 풍년이건 흉년이건 늘상 희고 풍성한 쌀밥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가 바뀌고 봄이 찾아오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이팝나무 아래서 풍성한 꽃들을 올려다보는 게 일상이었다. 그 중에 "저러면 뭐해. 그래도 맨날 배만 고픈걸"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한바탕 웃으며 올해 농사 잘 되겠다고, 서로 위로해 주고 다독여 줄 뿐이었다.


이팝나무에 얽힌 그런 애달픈 사연보다는 꽃 자체의 아름다움이 더 사람들 입에 오르 내린다. 작은 꽃 하나가 얼마나 섬세하고, 또 그 꽃이 무리 지어 다발을 이룬 모양새가 얼마나 풍성하고 예쁜지 보는 이마다 난리다. 오죽했으면 나무 학교에서 강의를 듣던 한 아가씨는 이팝나무 꽃을 결혼식 부케로 쓰고 싶다고 했을까.



- 나는 나무처럼 살고싶다 中,  우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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