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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글쓰기훈련]베껴쓰기-얼음사나이

얼음사나이는 암흑 속의 빙산처럼 고독했다. 얼음사나이는 얼어붙은 듯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숨은 공중에서 쨍 하는 소리를 내며 얼음 알갱이가 되었다. 그는 무릎 위에다 서리가 어린 긴 손가락을 깍지 끼었다.

나는 그런 얼음사나이를 진지하게 사랑하게 되었다. 얼음사나이는 과거도 아닌 미래도 아닌, 단지 <바로 지금>의 나를 사랑해 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 과거도 미래도 아닌 단지 <바로 지금>의 얼음사나이를 사랑했다. 그것은 정말 멋진 일처럼 생각되었다.

막 스무 살, 얼음사나이는 내가 난생 처음 진지하게 좋아 하게 된 최초의 상대였다. 얼음사나이를 사랑한다는 것이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그때의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얼음사나이와 결혼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젊었고, 그런 아무 변화도 없는 하루하루의 반복을 이윽고 고통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어느 날 남편에게 제안했다. 기분전환으로 둘이서 어딘가 여행이라도 가지 않겠느냐고, 남극은 어떨까, 내가 남극을 고른 것은 추운 곳이라면 틀림없이 얼음사나이가 흥미를 갖겠지 싶어서였다.

얼음사나이는 얼어붙은 듯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숨은 공중에서 쨍 하는 소리를 내며 얼음 알갱이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남편에게 남극에 가자고 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이유는 모른다. 내가 '남극'이란 말을 꺼낸 이후로 남편 안에서 뭔가 변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남편의 눈은 전보다 훨씬 고드름처럼 날카롭게 되었고, 남편의 숨결은 전보다 훨씬 하얗게 되었으며, 남편의 손가락은 전보다 훨씬 많은 서리가 어리게 되었다.

우리들을 실어온 비행기가 재빨리 떠나버린 뒤, 그곳에 착륙한 비행기는 그 이상 한 대도 없었다. 그리고 활주로는 이윽고 딱딱한 얼음 밑에 묻혀버렸다. 내 마음과 똑같이, 겨울이 오는 거야, 하고 남편은 말했다.

굉장히 긴 겨울이야. 비행기도 못 오고, 배도 오지 못해. 죄다 다 얼어붙어 버렸어. 아무래도 우리는 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둘 새로운 한 가족이 남극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두 번 다시없을 거라는 것을, 영원한 과거가, 그 터무니없는 무게가 우리들의 발목을 꽉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이미 그것을 뿌리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정말로 외톨이인 것이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고독하고 차디찬 장소에 있는 것이다. 내가 울면 얼음사나이는 내 뺨에 입을 맞춘다. 그러면 내 눈물은 얼음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는 그 눈물의 얼음을 손각으로 떼어 그것을 혀 위에 올려 놓는다. 알지? 널 사랑하고 있어, 하고 그는 말한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건 잘 알고 있다. 얼음사나이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하얗게 얼어붙은 그의 말을 과거로 과거로 날려 버린다. 나는 운다. 얼음 눈물을 똑 똑 떨어뜨린다. 머나먼, 얼어붙은 남극의 얼음 집 안에서.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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