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는 올더스 헉슬리의 1932년 작품이다. 이 소설은 공상과학 소설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의 사회상을 철저하게 풍자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약 80여 전에 쓰인 작품이라기 하기엔 너무나 현실성이 있어보이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과 지금의 현실에도 반영시킬 수 있는 공상과학소설이자 풍자소설이라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계속 떠오르던 소설과 영화가 있다. 소설은 얼마 전에 읽은 조지 오웰의 <1984>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이다. 두 소설과 영화는 맥락을 같이 한다. 하나의 체제, 사회가 있고, 이것은 안정이라는 미명하에 철저한 규칙과 통제하에 운영되어 진다. 처음에 그런 사회와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힘이 들고 많은 갈등이 있었겠지만 어느덧 정착이 되고 세대가 거듭될 수록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집에서 채집용 큰 통에 달팽이를 키운다. 큰 달팽이들은 다른 곳에 있다가 왔으니 변화에 대해 감지를 했을 것이다. 얼마 후 달팽이들의 알에서 새끼 달팽이가 태어났다. 아마도 그 새끼 달팽이에게는 그 좁은 공간이 하나의 세계로 인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끔 나타는 어떤 물체(사람의 손)은 하나의 신이 되어 먹이를 주고 물을 뿌려주는 존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누군가에 의해 사람들의 삶은 통제되어 진다. 어쩌면 태어날때부터...

<멋진 신세계>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계급이 정해집니다. 마치 음식을 만들 때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듯이 각 계급에 따라 투여되는 것이 다르고 이에 따라 몸집의 크기에서 부터 지적역량에 이르기까지 다르게 태어납니다. 엡실론 계급, 감마 계급, 델타 계급, 알파 계급이 이렇게 다른 계급들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조건반사적 교육이 진행되어 집니다. 뜨거운 곳에서 일하게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는 뜨거움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육받는다. 이는 나치 시대의 우생학과 어린 아이에게 세뇌교육을 시키는 모습이 그대로 겹쳐진다.


<1984>에서는 곳곳에 붙어 있는 텔레스크린과 곳곳에 숨겨지 있는 사상경찰관에 의해 사람들이 철저하게 감시 당한다. <설국열차>에서도 열차의 뒷칸으로 갈수록 계급이 낮아집니다. 그리고 바퀴벌레로 만든 묵을 식량으로 삼고 있다.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철저하게 나뉘어진 모습, 그들만의 규칙과 통제로  나뉘어진 계급대로 영원히 그 사회가 돌아가기를 바라는 강자, 지배자들의 논리가 작품들 속에 고스란히 베어난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문화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이 다르게 생각하면 우리를 통제하고 개인의 주체성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얼마 전에 읽은 <커피는 원래 쓰다>에서 아랍에서 처음 유행한 커피하우스는 술탄 왕조에 의해 금지되었었다고 한다. 이유는 사람들이 그곳에 보여서 사회, 정치이야기를 하고 현실에 대한 불만과 정치개혁에 대한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커피가 사람들을 생각하게 각성하게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다. 강자와 지배자들에게 가장 큰 적은 약자와 피지배자들이 현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그것을 바꾸어보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처음 들어온 계기 중에 하나가 전두환 시절에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정치계에서 큰 이슈를 덮기 위해서 연예인 관련 대형 스캔들을 터뜨린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려고 할 때, 자극적이고 생각하지 않고 관심을 확 끌 수 있는 일들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그대로 그곳에 매몰되어 버리는 법이다. TV같은 경우도 어쩔 때는 멍하니 보고 있다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아무런 개인의 노력없이 시선을 고정해서 생각을 없게 만들기에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그 사이사이에 흘러나오는 광고는 나도 모르게 세뇌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것이지만, 절대로 획일성에 빠져버려서는 안된다. 한 예로 명품 가방을 만드는 나라가 아닌 소비하는 나라인 우리나라는 수십, 수백만원에 이르는 가방이 국민 가방이라는 말이 돌기도 한다. 예전에 배낭 여행할 때 프랑스의 루이비통 매장을 가본 적이 있다. 그런데 공사를 한다는 안내가 한국말로 씌어져있고 직원 중 상당 수가 한국인이거나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명품 가방 소비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이들이 걸어 놓은 덫에 생각하지도 않고 빠지지를 않기를 바란다. 여러 이유를 고려해서 선택은 할 수 있지만, 항상 '생각'이라는 필터는 항상 한 번쯤은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멋진 신세계>로 돌아가 본다. 작품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시험관에서 태어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 이들의 세계로 온 야만인이 '멋진 신세계'의 총통이 나눈 대화가 등장한다.


p305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야만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스타파 몬드는 어깨를 추슬렀다.

"마음대로 하게"하고 그가 말했다.


작중 야만인은 불편함을 원한다. 유토피아를 가장하는 이들이 사는 디스토피아에서는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있을 경우에는 '소마'라는 알 약을 먹는다. 어렸을 때 드래곤볼 만화를 보면 선두콩 한 알만 먹어도 일주일이 배고프지 않는다는 내용을 보고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과연 정말 이런 세상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음식이라는 것은 힘든 노동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해줄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사랑과 정성을 담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약속을 잡을 때 '언제 밥 한 번 먹자'라고 한다. 여기서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저 허기를 달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유대를 확인해고 함께 살아가는 힘을 서로에게 불어넣어주는 것들이다.


건축가 승효상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전원주택을 원하면서 불편함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전원주택의 경우 잠깐 밖에 나와 신발을 신고 걸을 수도 있는 법이고, 겨울에 따뜻하게 하고 반팔을 입는 것이 아니라 추우면 내복을 입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원 주택에 살면서 아파트의 혜택도 원한다. 


우리는 어쩌면 사회와 체제가 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나려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지도 모른다. 그저 아무런 노력없이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매체가 아닌 자신이 직접 노력을 기울이는 창작활동과 독서활동 거기에 이은 사람들과의 대화와 토론이 필요한 듯 하다. 어떤 갈등을 겪게 될 경우에는 불편하더라도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잘못됐다고 판단될때까지는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것도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어린 두 아들을 키운다. '뭐 하지 마라. 뭐 하지 마라' 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한 번 말하고 나서 아이들이 정말 항상 다 고치고 내 말을 따른 다면 어쩌면 그게 더 나에게 걱정일지 모른다. 내 아이들이 후에 커서 자신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살기를 원하듯이 나 역시 이 사회에 매몰되어 있지 않으면서 나만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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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가브리엘 가브리아 마르케스(1927.03.06~2014.04.17)는 지난 4월에 타계한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이다. 당시 우리는 세월호 침몰이라는 믿기지 않는 참사로 다른 것들에는 암묵적 합의 하에 침묵했다. 이때는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누구인지 몰랐다. <백년의 고독>이라는 작품은 제목을 몇 번 들었던 기억은 있었지만 접하지 못했다.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할 때 선정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끌리는 제목으로 <백년의 고독>을 손에 잡았다.


처음에는 책과 작가의 배경적인 지식은 알지 못했다. 이게 내가 읽는 방식이다. 읽으면서 궁금한 사항이라던가 사건들이 어떤게 있는지 읽으면서 하나씩 찾아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계속 읽어나가도 되는 건지 나 자신에게 의심스러웠다. 작중 등장하는 수많은 아르까디오와 아우렐리아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사람이 어떤 아우렐리아노인지 그의 부모는 누군인지 책의 첫 페이지에 있는 가족관계도를 수시로 들춰보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게 <백년의 고독>에서 느낄 수 있는 오묘한 매력이다.


마르케스가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현대예술 사조의 선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콜롬비아의 역사에 대해서도 개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콜롬비아 내전인 '1000일 전쟁'에서의 자유파와 보수파의 갈등과 '바나나농장 학살 사건'은 소설 속의 중요한 축이기도 하다.


콜롬비아 바나나농장 학살 사건


1928년 12월 6일 콜롬비아 산타마리아 근처 시에나가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이다. 바나나농장에서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요구하면서 노동조합이 벌인 한달 간의 파업을 끝내기 위해, 콜롬비아 정부가 군대를 보내 진압하기로 결정한 뒤,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최소 47명에서 최대 2000명)이 군당국의 발포에 의해 살해됨.
당시 바나나 회사였던 '돌 푸드 컴퍼니'는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콜롬비아 정부를 압박했고, 콜롬비아 정부는 계엄을 선포하고 당시 파업의 일환으로 시에네가 시 광장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석한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이다.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윤회와 마술적 사실주의




약 100여 년 동안 한 집안에 7대에 걸쳐서 마치 과거의 조상들이 살아난 듯이 비슷한 성향의 자손들이 조상들의 삶을 마치 윤회하듯이 살아가는 모습은 특히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가족 내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났을 경우 '아르까디오', '아우렐리아노' 라는 이름은 반복해서 이름에 포함된다.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체구가 좋고 과격했으며, 충동적이고 모험적이었다. 반면에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차가워보이는 얇은 입술을 갖고 태어난 명민하고 은둔적인 성격을 보였다.


<백년의 고독>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마술적 사실주의'다. 이번을 계기로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것을 알게되었는데 마술적 사실주의는 사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가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라고 한다. 이 책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돼지 꼬리 달린 아이' 가 어쩌면 대표적인 하나의 소재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사촌 간인 우르술란과 호세 아르까디오는 근친상간으로 돼지꼬리가 달린 자신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서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아무도 닿지 않는 곳에서 '마꼰도'라는 마을을 세운다. 그렇게 한 가족의 역사는 시작된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서는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는 태어나지 않고 대를 거듭해서 6대 째인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와 그의 이모인 아마란따 우르슬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나면서 한 집안은 몰락해 간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전해져내려오는 멜키아데스의 양피지문서에 담겨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미녀 레메디오스가 하늘로 승천한다거나, 레베카가 흙은 먹고, 마꼰도에 처음 온 집시들이 가지고 온 하늘을 나는 양탄자 등 일반적이지 않은 정말 마술적인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백년의 고독>은 분명 콜롬비아의 역사와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이야기 속에서 사실적으로 나타내지만, 그 방법으로는 환상적이고 허구적이고 마술적인 요소를 가득 담아 표현해내고 있다.


20세기의 세르반테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는 <백년의 고독>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두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예술의 극치인 동시에 소설의 시대에 보내는 작별 인사"


마르케스가 <백년의 고독>과 같은 신비한 매력을 가진 책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 부모님과 떠어져 외할머니를 비롯해 외가 친척들과 함께 살아왔던 시절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 학살이 일어났던 곳이 바로 그들의 고향이었으며, 외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전쟁터에서의 모험담과 콜롬비아의 역사는 작중 아우렐리아노 대령에 영향을 미쳤고, 외할머니와 집안 여자들이 들려준 신기한 이야기 또한 그의 마술적 사실주의의 발판이 되었다.


마르케스는그의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에서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가장 좋은 출처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내 앞에서 나눈 다화들이다" 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매력


<백년의 고독>의 2편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그 이전에 윤회하듯 반복되던 모든 것이 결말로 수렴되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읽은 많은 소설들은 분명 현실에서 있을 듯한 소재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때로는 판타지 소설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이야기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환상적이고 몽환적이고 때로는 허무한 표현 방식 속에서 그대로 현실을 표현해냈고 민중들의 삶을 말하고 있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라틴아메리카의 세익스피어라고 칭해지는 세르반테스에 비유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얼마 전에 신문컬럼 <조용호의 문학노트>에서 본 글귀가 눈에 띄었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서서히 현실은 내면화하면서 밑바닥에서부터 인간들을 위로하는 치유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마르케스 역시, 조국 콜롬비아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 속에서 아파하는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이런 글을 쓰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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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인시공, 책 읽는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글이다.


책에 관한 책을 읽으면 편안하다. 이런 저런 분야의 책을 읽다가 이따금 한 번씩 이렇게 '책에 관한 책'을 읽으면 기분전환이 되고 내가 하는 책읽기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해 볼 시간을 준다.


사실 어떤 이야기를 할 거 같은지 대략 짐작은 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떨까?' 다시 궁금해진다.


책을 읽고 나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나는 어떤 책을 읽고 있고, 언제 어디서 책을 읽기를 즐기고 있을까? 


잠시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기분좋은 시간이었다.


◆ 어떤 분야를 읽고 있을까?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관심이 생기는 분야가 생기고 그 관심의 폭이 점점 넓어짐을 접하게 된다.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 쓰는 자기개발서 같은 책을 읽었다. 

무엇보다 지속적인 책 읽기를 위해서는 재미가 중요하기에 재미있다는 소설책을 찾아서 읽었다. 어느 순간 소설에 빠져들었고,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소설들, 바로 세계문학전집을 한 권씩 찾아 읽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소설이다. 특히 소설 중에서 사회를 반영하는 내가 없었던 공간과 시간에 대해 알려주는 그런 소설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때는 한 때, 고고학자나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저 생각만 있었을 뿐, 별다른 관심을 갖거나 노력은 하지 않았었다.

지금도 역사는 항상 관심을 가지는 분야이다. 올해 목표가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 개괄하는 정도의 독서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구입하고 정리하려 하는데 몸이 안 따르고 다른데 자꾸 관심이 간다. 그래도 목표는 올해 조선시대 역사에 대해서 개괄해 보고자 하고, 항상 책이 나올 때마다 기다리는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장의 책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려 한다.

그리고 내년에는 고려시대도 한 번 도전해보아야 겠다. 일단 조선시대부터라도 제대로 읽어보자.


최근에 부쩍 관심이 가지고 있는 부분은 미술이다. 얼마 전에 동대문디자이플라자에서 진행중인 간송문화전에 다녀왔는데 고려청자의 신비한 색채와 신육복의 화첩과 추사 김정희의 서화 등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이번이 직접 찾아서 간 두번째 전시작품관람이다. 앞으로 이런기회를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보는 감동은 컴퓨터로 책으로 보는 그 이상의 아우라를 담고 있다.

그래서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의 책들과 다른 여러 책들을 찾아보고 읽는 중이다. 읽을 수록 재미있다. 아마도 이쪽은 더 찾아볼 수 있을 듯 하다.

나중에는 고려청자에 대해서도 조금 더 공부해보려 한다.


서양미술에는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계기로 고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고갱과 흥미롭게 연관된 고흐를 알게되어 고갱, 고흐에 관련된 책을 찾아 읽고 있다.

이것을 기반으로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작품도 찾아보고 관련된 이야기들을 찾아보려 한다. 나중에는 곰 브리치의 <서양미술사>도 한 번 완독해야 겠다. 지금은 거의 사전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항상 기반이 되는 것은 인문/사회이다. 현재를 살아가면서 직접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다루게 되는 이 분야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보려 한다.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닌 타자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삶을 위해 관심을 가져보려 한다.


관심이 가는 분야가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쉽지가 않다. 철학인데 그 진입장벽이 나에게 좀 높은 듯 하다. 최근에는 입문서 정도라고 하는 피노키오의 철학을 찾아 읽고 있는데 심오한 철학의 세계가 언제쯤 나를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그리고 걷기, 건축, 클래식, 글쓰기, 교육관련, 여행, 인테리어 등이 앞으로 계속 나아가려고 한다. 

이런 관심이 불과 2~3년 만에 생긴 것이니 아마 2~3년에는 조금의 발전과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이 더 생기길 바란다.



◆ 책 읽는 시간


책을 읽으면서 좋은 점 한가지는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할 때가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반갑다는 점이다.

예전에 약속한 사람이 늦게 오면 전화를 몇 번 해보고, '어느까지 왔느냐?'고 확인하고 했는데, 이제는 덕분에 관대해진 기분이 들기도 한다.

가방에는 적어도 2권 정도의 책과 볼펜 한자루는 항상 들어가 있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나는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는 게 불편하다. 눈의 피로도 심한거 같고 그게 오히려 나에게는 더 좋은 듯하다.


굳이 가장 선호하는 시간을 꼽으라면 역시 세상이 조용한 새벽시간이다.

예전부터 나는 밤 늦게 자거나 시험기간에 밤을 지새우거나 하지 못했다. 지금도 아이들의 영향도 있지만 빨리 잠드는 편이다. 

그래서 오히려 새벽에 일어날 수 있게 되었고, 아무도 없는 듯이 조용한 새벽에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점심시간의 20~30분 정도의 독서도 맥을 잘 이어주는 연결의 시간이 되어준다.



◆ 책 읽는 공간


어느 기사에선가 '남자들은 자기만의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는 여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인이 선호하는 공간에서 소진되었던 힘과 기운을 천천히 채워주워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내일을 살게 해 준다.

아내는 나중에 아이들이 크면 내 방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결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공간이기에 그동안 방책을 세워야겠다.

쇼파에 앉아서 양 벽면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을 바라보면 무언가 뿌듯하고, 여러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생각이 차분하게 정리가 된다.

커피는 집에서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라 잔잔한 노래, 시원한 물 한 잔, 땅콩, 호두같은 것 한 접시, 볼펜 한 자루, 책 한 권이면 고마울 뿐이다.

하지만 어린 두 아들을 위해서는 쉽게 즐길 수 없는 사치아닌 사치가 되긴 했으나 가끔 누려보기도 한다. 


지하철과 버스도 훌륭한 장소다.

아침에 버스 속에서 밤 사이 달콤하고 황홀한 꿈을 잇기 위한 유혹을 벗어난다면 훌륭한 장소가 된다.

항상 짓눌려 출근하는 서울 지하철이나 출근길 만원버스에는 다소 힘들기는 하겠지만 이동 중 대중교통은 이상하게 집중이 잘 된다.

책을 읽을 때 주변 사람들의 대화나 전화통화는 방해가 되지만 지하철, 버스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엔진소리, 정차소리, 사람들의 숨소리와 발걸음은 묘한 리듬감을 만들어내어 책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내가 관심있어하는 분야와 좋아하는 공간, 시간에 대해서 적어보았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는 언제 어디서든 상관이 없는 듯 하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점점 다양한 분야로의 관심 확장과 끊임없는 호기심의 유지와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 게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 책 속 구절을 소개한다



P67

루치우스 세네카는 “인간은 항상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듯 행동한다.” 고 지적했지만 바쁜 시간 중에도 한가한 순간이 있는 법이다. 짬을 내고 틈을 내고 멍하니 흘려보내는 시간을 잘 활용하면 책을 읽을 시간을 얻을 수 있다.


P77

책은 영원히 남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함부로 펴낼 수 엇ㅂ는 것이다. 말처럼 내뱉고 나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록으로 남아 영원히 다른 사람에게 읽힐 것이라는 생각은 책을 쓰는 사람에게 책임감을 갖게 한다.


P78

청년이라면 자기 자신과 가족과 사회와 세계와 자연과 우주의 존재 이유를 물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던지지만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살 것이냐에 앞서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P82

장년의 독서는 지식 축적을 위한 독서에 머무를 수 없다. 장년의 독서는 그와 더불어 자신의 인생체험에서 나온 문제의식을 깊게 심화시켜 그 문제들에 대한 자기 나름의 체계적 답변을 마련하는 독서가 되어야 한다.


P84

청춘의 독서가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한 불타는 독서라면, 중년의 독서는 내면적 성숙을 위한 고요한 독서가 될 것이다.


P87

공자나 아인슈타인 같은 지적 업적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고, 그만큼 유명하게 되는 것도 삶의 보람이 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업적을 남기고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유명하게 되는 것보다, 그런 목적 이전에 오로지 앎 자체, 진리 자체에 정열을 갖고 자신의 지적 세계를 가능한 넓혀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각자 자신의 능력, 분수, 처지에 따라 자신의 지적 세계를 넓혀간다면 그만큼 그의 세계는 확대되고 그만큼 그의 삶은 깊고, 그만큼 그의 삶은 풍부하게 된다. 설사 내일 눈을 감고 의식을 잃은 송장이 되더라도 그 순간까지 하나라도 더 보고, 느끼고 알아가는 기쁨, 그 보람을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91

독서의 근본적 목표는 인간의 변화에 있다.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갖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나 자신의 내적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바에야 독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책을 읽기 전이나 읽은 뒤나 아무런 변화가 없이 똑 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을 것인가?


P126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도서관이나 친구들을 통해 책을 빌려 보기도 하지만 언젠가 돌려줄 생각에 부담이 되고 책에 마음대로 줄을 긋거나 표시할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낀다. 그래서 다른 데 쓸 돈을 아껴서 필요한 책과 읽고 싶은 책 들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호기심이 또 다른 호기심을 낳고 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자꾸 책을 사게 된다. 한계를 모르는 호기심과 지칠 줄 모르는 독서열은 계속 책을 사들이게 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한권 두권 늘어나는 책은 점점 서재의 수용능력을 넘어서게 된다.


P137

안동에 가면 퇴계 이황이 글을 읽고 가르치던 도산서원이 있고 퇴계가 앉아서 글을 읽던 돗자리가 원형 그대로 깔려 있고 퇴계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광수나 이상이나 김수영의 서재는 아예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얼마 전에는 최남선이 살던 집이 완전 철거되면서 우리나라 근대 지성사와 문학사의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는 공간이 없어져버렸다.


P176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이고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라는 말이 있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는 말도 있다.


P179

“신촌 기차역에서 일산으로 가는 기차는 왕복 1시간 20분이 걸렸다. 캔커피 하나, 책 두 권을 들고 매주 기차역으로 간 적이 있었다. 역 근처 서점에서 신간 한 권, 잡지 한 권 사는 기분을 늘 상쾌했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해도 내리기 싫어진다.”


P192

파리 만이 아니라 서울 거리에도 길을 걸어가면서 책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걸어가면서 책을 읽어도 넘어지거나 어디에 부딪히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책의 여신이 책에 빠진 사람을 보호하는 모양이다.


P196

영국에서는 서점을 bookshop이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bookstore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점(書店)과 더불어 서관(書館), 서림(書林)등의 한자어가 함께 쓰였다. 당시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서점은 박문서관과 한남서림이었다. 서점, 서관, 서림 가운데 ‘책의 숲’이라는 뜻을 담은 서림이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데 ‘책 파는 상점’을 뜻하는 서점이 점점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대현 서점들이 서점 대신 ‘글의 창고’라는 뜻을 담은 문고(文庫)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교보문고와 영풍문고가 가장 눈에 띄는 보기다. 1970년대 서울에서 가장 컸던 서점은 종로서적이었다. 그것에서 종로3가 쪽으로 조금 떨어져 양우당이라는 서점도 있었고, 신문로 쪽에는 범한서적이라는 서점도 있었다. 범한서적이나 종로서적은 서점이면서 출판사도 겸하도 있었다. 그래서 서점이라는 칭호 대신 서적이라는 간판을 달았던 모양이다.


P198

<근대의 책 읽기>의 저자인 국문학자 천정환은 이렇게 토로했다.


서점에 가는 일이 두렵다. 서점에서 수많은 책 사이에 서 있는 일은 고통 그 자체이다. 서점에 가지 않은 얼마 동안 책들이 쏟아져나와 있다.  그 책들을 들추고 있노라면 내 게으름과 무식함이 발가벗는 것 같다.


P206

오늘날에도 센 강변에는 약 80여 개의 부키니스트 중고책 서점이 오랜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부키니스들의 초록색 철제상자는 파리 시 소유로, 파리 시가 심사를 거쳐 서적상에게 영구 임대한다. 그 대신 서적상은 책 판매수익의 5퍼센트를 파리 시에 납부해야 한다. 서적상이 사망하면 자동 상속은 안 되지만 가족들이 승계를 신청할 수 있다. 서적상들은 개인 연결망을 통해 장서가들이 사망하고 난 뒤 인수하거나 고물상을 통해 사들인 책을, 먼지를 털고 바라믕ㄹ 쏘인 다음 작가별로 시대별로 분류하여 초록상자 속에 진열한다. 상자 안을 들여다보면 각 서적상들의 전공 분야를 알 수 있다. 정치가나 연예인 들의 전기물을 모아놓은 상자가 있는가 하면, 1차대전과 2차대전을 중심으로 전쟁에 관한 책을 모아놓은 상자도 있다. 그 밖에도 중고서적상의 취향에 따라 20세기 문학, 예술사, 종교사, 왕실의 역사, 파리 여행기나 관광안내, 영화 등 고객들의 관심을 끌 만한 주제의 책들이 상자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시되어 있다. 책 전체를 셀로판지로 싸고 오른쪽 위에 매직펜으로 가겨을 써놓기도 하며 때로 강변의 둑 위에 책을 올려놓기도 한다.


P233

책 속의 문장에 눈길이 닿으면 냉동되어 있던 생각의 얼음들이 녹아 따뜻해지면서 생각의 아지랑이를 무럭무럭 피어나게 한다.


도서관에는 서로 다른 입장과 의견을 표명하는 책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책들은 들리지 않는 소리로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 그렇다면 도서관은 서로 다른 생각들이 싸우고 있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P236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도서관에 소장된 책의 입장이 되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무덤이 되느냐 보물이 되느냐,

내가 말을 하느냐 침묵을 지키느냐는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것은 오로지 당신에게 달려 있다.

친구여, 욕구 없이는 부디 들어오지 마라.


도서관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원전 280년경에 북아프리카 교역의 중심지였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거대한 도서관 이야기다. 당시 지중해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주의적 이상을 지식의 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건립한 이 도서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재에 있던 장서를 그대로 가져와 소장하고 있었으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책을 모아서 무려 7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한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이었다. 


아테네와 로마가 인문학의 중심이라면 알렉사드리아는 자연과학이 강했다. 아르키메데스와 유클리드가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다. 그들은 아마 이 도서관에서 공부했을 것이다. 그런 유명한 학자들만이 아니라 클레오파트라도 그곳에 책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도서관은 여러 번에 걸친 전쟁으로 수난을 겪다가 기원전 48년 카이사르가 일으킨 전쟁의 와중에 불타 재가 되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2004년 그 자리에 다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1974년 유네스코가 인류문화의 상징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세계 최대의 도서관을 건립하자는 제아능ㄹ 한 지 30년이 지나, 드디어 그 도서관이 완공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라진 도서관이 부활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립에는 중동의 산유국들과 유럽 여러 나라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 도서관은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 사이의 대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 도서관의 서가에 처음 꽂힌 두 권의 책은 코란과 성서였다.


P241

도서관 서가의 수많은 책들은 19세기 말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에서 일하던 멜빌 듀이가 1876년에 창안한 십진분류법에 따라 총류, 철학사상, 사회과학, 자연과학, 어학, 문학, 예술, 역사 등으로 분류되어 진열되어 있다.


P244

“나는 시립도서관에서 동과 서, 옛것과 새것을 두루 찾아 읽었으며 그것을 향해 한발한발 내딛는 청년 시절을 보냈다. 어깨 너머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립도서관의 참고 열람실에서 이루어진 책읽기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희망 없는 내일과 궁핍이 의식을 목죄었지만 날마다 책을 읽는 것으로 그 고통을 견뎌냈다. 훗날 시인이자 평론가가 된 장석주의 회고담이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에게는 도서관이 대학이고 대학원이었다.


P263

모든 책은 의무적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하기로 되어 있어서 정식으로 출판된 책은 어떤 책이든 다 찾아볼 수 있다.


P267

도서관은 책을 보관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저자들에게 수액을 전달하는 장소


P285

얼굴의 형태는 태어날 때 결정되지만 얼굴의 분위기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사람들의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에 따라 달라진다. 스무 살까지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얼굴로 통할 수 있다. 또 그렇게 행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넘으면 조금씩 그 사람의 삶이 얼굴 표정 속에 반영된다. 인생을 피상적으로 함부로 막산 사람의 얼굴 표정과 진지하게 삶의 의미와 깊이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의 얼굴 표정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발자크의 말대로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며 한 권의 책이다. 용모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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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함의 다르게 보기

 

우리는 일상을 살아갑니다. 일상은 반복되는 '날마다, 늘, 항상' 이라는 뜻입니다. 변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일상에 매몰되어 버리면 우리의 생각 역시 변화 없는 일상, 바로 '날마다, 늘, 항상'이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세상은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다른 무언가를 찾음으로써 발전하고 변화해 왔습니다. 당연함을, 익숙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가끔 한 번씩은 의도적으로 다르게 삐딱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다르게 볼 수 있을까요? 날개 없는 선풍기를 만든 제임스 다이슨은 '다른 환경, 낯선 환경, 새로운 환경' 에 대해서 말합니다. 의도적으로 낯설게 만들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다른 분야의 사람을 만나거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할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책이 그 한 방법인 듯 합니다.

 

p94

날개 없는 선풍기가 있지요. '에어 멀티플라이어(Air Multiplier)'입니다. 이걸 최초로 만든 영국 발명가 제임스 다이슨은 자신의 작업실에 이런 글을 붙여 놓는다고 하지요.

'The first electronic fan was developed in 1882. All chop and no change for 127 years.'

'최초의 전기 선풍기는 1882년에 만들어졌으나 127년간 누구도 '촙촙' 소리를 내는 선풍기를 다르게 바꾸진 못했다.'는 뜻이지요.

 

 

◆ de + sign + er (상식파괴자)

 

'이노 디자인'의 김영세 대표는 '익숙함의 다르게 보기'를 이렇게 멋진 말로 표현합니다. de + sign + er

 

사람을 만나 보면 자신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축적된 역량과 경험으로 충분한 능력은 갖추고 있지만, 자신만의 생각 바로 고정관념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역시 제가 모르는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둘러쌓여 있을 겁니다. 단지 내가 둘려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서 탈피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말랑말랑한 감각과 이성을 갖추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p105

'이노 디자인'의 김영세 대표는 세계적인 디자이너입니다. '다르게 보는 걸 즐기는' 디자이너입니다. 그는 영어 단어 design조차 다르게 볼 줄 압니다. Design은 de와 sign의 조합이라는 것.  de는 '파괴하다(destruct)'의 접두어 de이고, sign은 도로의 교통표지나 비상구 표지처럼 달라지지 않는 것의 상징, 즉 고정관념이나 통념이나 상식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de + sign은 '상식을 파괴한다'는 뜻을 지닌 것이지요

고정관념을 깨뜨린다는 뜻인 거지요. 그럼 디자이너, 즉 designer의 뜻은?

맞습니다. '상식 파괴자' 또는 '창조적인 사람' 입니다.

 

 

◆ designer(상식파괴자)의 도구는 Book

 

상식파괴자는 무엇으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작가는 그 무기로 Book 그 중에서도 인문학을 꼽습니다.

 

문학은 '창조적 상상력'을 키워주고, 역사는 '비판적 사고력', 철학은 '합리적 사고력'을 키워줍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문학에 매력을 많이 느낍니다. 얼마 전에 라디오에서 표창원 소장의 프로파일링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는데, 프로파일링을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배우지만, 범죄자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문학 작품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범죄자이 심리를 잘 표현해 준다고 합니다.

 

문학 특히 소설은 허구라고 하지만, 그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직업, 행동양식, 생각패턴 등은 실제 누군가에게 존재하는 혹은 존재할 것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은 소설로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텍스트를 읽어가면서 독자들은 저마다의 한 편의 영화를 머리속으로 만들어냅니다. 이런 새로운 경험이 상식파괴자의 귀중한 자산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p144

인문학은 일반적으로 문사철로도 좁혀지지요. 문사철은 문학과 역사와 철학이고요. 문학은 '창조적 상상력'을 키워주고, 역사는 '비판적 사고력'을 키워주며, 철학은 '합리적 사고력'을 키워줍니다. 창조적 상상력, 비판적 사고력, 합리적 사고력을 통해 증진되고 완성되는 창의력, 진리, 자유, 정의, 평등, 사랑, 공정, 관용 등 위대한 가치는 인류의 창조적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들을 하나로 응축하면 'Beauty'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 Just Do It! , Ready ~ Action!

 

많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한 남자가 신에게 매일 간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제발, 복권에 당첨되게 해주세요.' 정말 간절합니다. 하지만 신은 답답한 나머지 한 마디 합니다. '제발, 복권을 사거라!'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바로 Action, 실행력입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어떤 것을 이루어낼 역량과 자질이 충분히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이 Choice를 잘하지 못하고 Action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가 많이 듣는 말이 진리임을 다시금 느낍니다. '시작이 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저 저지르고 보는 겁니다. 무책임하긴 하지만, 결국은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인가 노력을 할 것입니다.

 

내용에 어울리는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서울대 행정대학원장 최종훈 교수의 인생교훈이 생각납니다.

 

 

 

지금 무엇인가를 망설인다면 Just Do It 하시기 바랍니다. Ready ~ Action!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조언을 저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아쉬움이 남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읽은 이민규의 <실행이 답이다>가 이를 위해서 읽어볼만 한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한 번 다시 들추어 보아야겠습니다.

 

p112

아인슈타인은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박사님은 어떤 특별한 재능이 있습니까?"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고 하는 군요.

"저는 특별한 재능이 없습니다. 호기심을 '실행에 옮기는' 능력이 뛰어날 뿐입니다."

 

◆ 온전한 내 삶을 살기

 

말은 좋지만 우리는 쉽게 Just Do It!, Action! 하지 못합니다. 혹여나 내가 하는 일이 잘 못 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난처해지지 않을까? 두려움에 망설이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행복, 책에 나오는 '좋은 운명' 만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을 살면서 행복하게 살 수 만은 없습니다. 좋은 운명 만을 영위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쓰라린 아픔에 목 메어 울어 보기도 하고, 아쉬운 마음에 한 숨 짓기도 하고, 복잡한 갈등 상황에서 혼자 깊이 고민해보기도 해야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온전한 제 삶을 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온전한 삶을 살 준비가 된다면, 그때는 기꺼이 Just Do It!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온전한 삶을 살 준비가 되었다면  Ready 되었네요. ~ 그저 Action이 남았을 뿐입니다.

 

p253

장영희 교수를 그리워하면서 그의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읽었습니다. 장영희 교수가 대학 2학년 때 스스로에게 했다는 다짐의 글이 무척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읽을 때마다 긍정의 힘과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구절이어서 꼭 소개하고 싶습니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 <미국인>은 앞부분에서 한 남자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라고 하는 문장이 있다. 나는 그 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할것이다, 라고."

 

 

오늘은 제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습니다.

그동안 많이 아쉬워서, 그동안 많이 망설여서, 그동안 많이 후회해서 이제는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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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연을 맺다. 


이번에도 그동안 제목만 알고 있었던 책을 찾아 읽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에 몇 일 동안 푹 빠져 있었다. 글의 여운은 아직까지도 잔잔하게 남아있다. 근래에 읽었던 책 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힌다. 책을 읽자 마자 얼마 후 부터 '아! 드디어 만났구나' 하고 느끼는 보물들이 있는데 <달과 6펜스> 역시 그 중 하나이다. 특히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건지 읽는 내내 궁금했다. 하마터면 뒷부분을 먼저 읽어버릴 뻔했다. 

 

<달과 6펜스>는 등장인물 스트릭랜드를 통해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인 폴 고갱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런 배경이 있는지 모르고 읽은 책이어서 즐거움은 배가 된다. 실제 인물이 배경이 되는 이야기와 다른 장르와 연결해주는 책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자연스럽게 다른 분야에 다리를 놓아주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마리오를 자연스럽게 시에 대해 이야기듯이 <달과 6펜스> 역시 작품 속 스트릭랜드이자 실제 인물인 폴 고갱을 통해서 미술에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게 해준다.


예전부터 그림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저 관련 책을 읽는 것으로는 흥미가 생기지 않아 쉽게 포기하곤 했다. 이번에는 뜻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나면서 책읽기를 마치고 <반고흐, 영혼의 편지>를 찾아 폴 고갱 이후 반 고흐를 만나게 해주었다. 이 소중한 인연이 차곡차곡 조금씩 쌓아지기를 내심 바랄 뿐이다.


이야기 속으로


찰스 스트릭랜드는 런던에서 증권 중개인을 증권 중개인 일을 하던 부유한 사십대 남자였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홀로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는 가난한 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한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더크 스트로브는 그를 지원지만 스트릭랜드는 그에게 냉소적이었으며 그의 아내 블란치 마저 자살에 이르게 한다. 그는 오직 자신의 그림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으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양심과는 다른 게 있는 듯 했다. 


그는 문명의 땅을 뒤로 하고 남태평양의 외딴 섬인 타히티로 떠난다. 타히티라는 원시의 섬에서 그가 생각하는 낙원을 만나고 그림에 열중하고 아타라는 여자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문등병에 걸리고 심지어 눈이 멀기까지 한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의 집안에 신비로운 그림을 그린다. 


소설 속의 이야기가 폴 고갱의 삶을 그대로 재현해두고 있지는 않지만 거의 유사한 삶을 살았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한 예술가의 순수한 열정을 표현해준다. 분명히 자신 밖에 모르는 차디찬 냉소가 깊게 베어나지만, 그 열정이라는게 자연스럽게 다른 부정적 요소를 가려준다. 나 엮시 읽는 내내 안타까우면서도 그렇게 몰두할 수 있는 일에 빠져든 그가 부럽기도 했다.


작가 서머싯 몸은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왜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없고, 이야기의 중간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말로 이야기가 전환된다. 어쩌면 친절하지 않고 부연조차 없이 그렇게 아무렇게나 툭 던져 놓으니 확실한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더 극적인 표현을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의 묘미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손에서 놓지못하고 한 번에 읽은 기억이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1인칭 관찰자시점으로 내가 개츠비를 궁금해하고 서로 인연이 닿아가면서 그 궁금증을 조금씩 풀어가는 묘미가 있었다. <달과 6펜스> 역시 소설 속 작가인 내가 1인칭 관찰자 시점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이야기는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효과적인 것 같다.

어떤 이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절묘한 조화가 훌륭하다고 하는데 아직은 그 정도를 찾을 수 있지는 못해서 아쉽다.


소설을 읽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저도 모르게 손이 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책들은 읽고 나면 개운하게 숨을 내쉬며 책을 덮을 수 있다. 읽는 동안 긴장한 것을 놓는 숨이며 아쉬움의 표현이다.


폴 고갱의 작품 속으로


E.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서 고갱에 대해 표현한 부분을 찾아 보았다.


P551

타히티 섬에서 가져온 그의 작품들을 대했을 때 그의 옛 친구들조차 당황스러워 했다. 그 그림들은 너무 야만적이고 미개해보였다. 그것은 바로 고갱이 원하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야만적'인 색채와 소묘만이 타히티에 머물면서 감탄했던 때묻지 않은 자연의 아이들을 올바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중략)

그러나 고갱이 아주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낯설고 이국적인 것은 단지 작품의 주제만이 아니다. 그는 원주민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토착민 장인들의 수법을 연구하고 때로는 자신의 작품 속에 그들의 것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가 그린 원주민의 초상을 그러한 '원시'미술과 조화시키려 애썼다. 그래서 그는 형태의 윤곽을 단순화하고 넓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했다.  세잔과 달리 그는 단순화된 형태와 색체의 구성으로  인해 혹시 그의 작품이 평면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점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연의 아이들이 지닌 순수한 강렬함을 그리는 데 도음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는 수세기에 걸쳐 씨름해온 유럽 미술의 문제들을 기꺼이 무시해버렸다.


솔직하과 단순함을 이룩하려는 그의 목표가 항상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를 향한 그의 열의는 새로운 조화를 이룩하려는 세잔이나 새로움을 전달하려는 고흐의 열의만큼 여정적이고 진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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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다. 임금 문


역사에는 만약은 없다고 한다. 만약은 없지만 그래도 너무 아쉽다. 문종의 이른 죽음이...

우리는 흔히 문종하면 특별한 업적이 없고 병약한 조선의 임금으로 기억하기 쉽다. 사실 문종은 준비된 임금이었다. 세자 시절부터 이미 성군으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길렀으며 세종 대 후반에는 실질적으로 임금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여러 치적들을 쌓아올렸다. 


안타깝게도 세종과 소헌왕후의 잇따른  국상으로 세자는 몸이 쇠약해졌다. 하지만 39살의 나이에 돌연 병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종의 급작스러운 죽음에는 의문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당시 어의였던 '전순의'의 처방은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으며, 처방에 대한 의견은 당시 대신이었던 김종서 등과 의논하지 않고 수양대군과 의논하였다.

과연, 문종은 병에 의한 병사였는가? 아니면 동생 수양에 의한 타살인가? 의문이 남는다.


결국, 39살의 이른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문종의 뒤를 이은 단종은 당시 12살이었다. 단종은 그저 어리고 힘없는 왕이었다. 그에게는 수렴청정을 할 대비조차 없었다. 그리고 권력의 야심을 가지고 있는 수양이 있었다. 믿을 수 있는 건 김종서 뿐이었다. 하지만, 김종서 또한 난을 막지는 못한다.


p178

세종이 사망하기 전 7년 간은 사실상 세자 향이 임금 역할을 대행한 셈이었다. 세종 대 후반의 여러 치적들, 즉 세종 26년의 전분6등, 연분 9등의 전세법 제정이나 27년의 <용비어천가>완성, 28년의 훈민정음 반포 등의 치적은 사실상 세종과 문종의 공동 작품이다. 세자는 신병이 있는 세종을 대신하여 건원릉에 행차해 별제를 거행하는 등 사실상 국왕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역사의 후퇴, 계유정난


조선의 2대왕인 태종과 계유정난의 주역인 수양대군은 많은 면에서 유사하지만 다르다

둘은 모두 적장자가 아니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야심은 있었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왕권에는 오를 수 없는 인물들이었습니다. 태종이 1차, 2차 왕자의 난을 통해서 형제들을 숙청하고 당시 조정의 주역인 정도전마저 제거한다. 수양 역시 왕위에 오르면서 동복형제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죽인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은 부모도, 형제도, 자식조차 없나 보다.


태종은 즉위하고 나서 철저하게 왕권강화에 나서고 당시 주요세력이었던 공신들과 외척들을 철저하게 배쳑한다. 이는 개국 초기의 기반을 다졌고, 공신들의 나라에서 훗날 세종의 부흥기를 위한 초석을 마련합니다. 이렇게 다져놓은 기반은 불과 얼마만에 세조에 의해 공신들의 나라로 변모한다.


당시 상황을 보면 1만 명이 넘는 공신과 그 가족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심지어 공신들은 살인을 저질렀어도 사면되어지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관직은 공신과 관련된 자가 아니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쉽지 않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정난으로 옛 동료들의 부인과, 딸, 심지어 어머니까지 공신들이 차지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P315

한명회는 이들 역사, 즉 무뢰배들과 함께 문을 지켜 섰다. <종각잡기>에는 이때 한명회가 <생살부>를 들고 있었다고 전한다. <살생부>라고도 불리는데 <살조>에 이름이 올랐으면 죽고, <생조>에 이름이 올랐으면 살아서 이 문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대신들의 목숨이 일개 궁지기에 달려 있는 상황이 되었다.


P321

수양 측은 이날 밤의 쿠데타를 단종1년(1453) 계유년에 발생했다는 이유로 계유정난이라고 불렀다. '정난'은 국가의 위태로운 난리를 평정했다는 뜻이다. 어차피 이긴 자가 붙이는 이름이었다.


p362

옛 동료들의 부인과 딸, 심지어 어머니까지 차지한 공신들의 행위에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는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학을 정면에서 부인한 행위였다. 성인을 추구하는 유학을 거론할 것도 없었다. 최소한의 인간적 양식만 있어도 할 수 없는 행위였다. 체제를 거부하는 유학자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공신들은 이미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조선 중기 윤근수는 <월정만필?에서 "신숙주가 노산군(단종)의 왕비 송씨를 받으려 했다"고까지 적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때 국모로 모셨던 여인을 달라고 요청했다는 뜻이 된다.



사육신과 생육신


계유정난은 명분이 없는 왕위찬탈이다. 수양대군이 왕권을 차지하면서도 끊임없이 단종의 복권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명분이 없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관직에 나서지 않는다. 역사와 관련된 드라마나 책을 읽다보면 항상 나오는 부분이 바로 명분쌓기다.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꾸며서라도 명분을 만들어야 하는게 정치다. 세조가 수양대군이 왕권을 차지하고 나서 집권하는 과정이 모순될지라도 올바른 정치를 해나갔다면 아마도 사육신과 생육신이 이렇게 까지 알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아쉬움에 더욱 사육신과 생육신을 기억하려고 애쓰는지 모른다.


사육신의 닩종 복위 운동 당시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목숨을 끊은 사람은 70여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6명을 특별히 '사육신'이라고 기리게 된 것은 이른바 '생육신'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지는 남효온이 <추강집>에 수록된 '육신전'에서 이들 여섯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긴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사육신은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배되었고, 사대부들은 그들의 신원을 조정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성종 때에는 그들의 후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금고된 것을 풀어주었으며, 숙종 때인 1691년에는 사육신 6명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민절서원을 지어 이들의 위패를 안치하였다.


생육신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에 대비하여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았지만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사람들로,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이다. 사육신이 절개로 생명을 바친 데 대하여 이들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또는 방성통곡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하였다.

                                                                                                     - 두산 백과 -



동강은 단종을 기억하며 잔잔히 흐른다.



▲ 단종의 유배지 영월


어린 단종에 대해서는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단종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속에서 고작 12살의 나이로 등극하였다. 12살이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린 나이다. 심지어 그에게는 수렴첨정해 줄 대비조차 없었다. 피붙이라 할 수 있는 숙부들은 권력투쟁의 한 가운데 서있었고,  백종조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역시 단종 곁에는 없었다.


어쩌면 왕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을 맞이했다. 
단종의 죽음을 기억할지 모르는 동강은 오늘도 천천히 흐른다. 동강에는 아프고 잔잔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흐른다.


p370

신숙주는 "이유(금성대군)가 또 노산군을 끼고 난역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노산군도 편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단종의 사형을 선창했다. 정인지도 "노산군은 반역을 주도했으니 편안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가세했다. 임금으로 섬겼던 인물을 죽이라고 주창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양녕, 효령대군이 가세했다. 세종가의 골육상쟁을 즐기던 두 대군은 "속히 법대로 처치하소서"라고 단종의 사형 주청에 가담했다. 세조3년(1457) 10월 21일 단종은 결국 천명을 보존하지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나이 열일곱, 재위에 있은지 3년 2개월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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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은 작년 말에 읽은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 이후로 두 번째다.

보통은 이야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서사를 좋아한다. 보통 소설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빠져버리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정말 나에게 맞는 짝을 만났을 때이다. 그런 책들은 내일로 넘기기가 힘들다. 시간이 늦어도 읽어서 끝장을 봐야 한다. 


산문에서는 그런 종류의 감동은 덜하다. 그런데 산문집을 접하면서 산문 만의 매력을 새롭게 느껴가는 중이다. 서사와는 다른 간결하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점이다. 산문은 글쓰기 연습에도 훌륭한 선생님이 된다. 길지 않은 글에서 어떻게 도입부분을 표현했는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떤 식으로 전개했는지, 글을 어떻게 마무리지었는지 살펴보기 좋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은 지금껏 거의 책을 내놓지 않은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 문화운동가이자 우리 시대 대표적 인문학자인 도정일의 글이다. 지금껏 신문 칼럼이나 대담 형식의 책에서만 잠깐 만날 수 있었던 분이기에 이 책은 더 반갑다. 어떤 인터뷰를 보니 이제는 좀 더 늦기 전에 그동안 미루어왔던 글을 정리해보려고 한다고 들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는 2006년 대학에서 퇴임했으나 2010년 다시 대학으로 복귀해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으로 학부 교양교육을 쇄신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궁금했다.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무엇인지.


네이버의 기획물에 우리 시대의 멘토 '도정일'편에 소개된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인가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첫째는 '인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사랍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것에 따른 응답을 하고자 하는 사람, 인간성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사람이 후마니타스죠.


둘째로는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어가며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어떤 문명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문명은 기술이나 과학만으로 만들 수 없거든요. 종교도 필요하고 예술도 필요한 거죠. 인간이 무엇을 위해 문명을 만들었을까? 현대문명은 무엇을 위해서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인가? 문명의 목적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문명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잘못된 것을 반성하며 문명의 방향이 옳게 갈 수 있도록 애쓰는 사람이 바로 후마니타스입니다. 요약하자면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문명을 만들고 성찰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죠.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은 크게 4부에 걸쳐서 91개의 산문이 실려있다. 91개의 산문에는 정말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밑줄지고 단락을 지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 별도로 정리한 것만 해도 20장이 넘게 된다.

특히, 관심있게 읽었던 부분은 인문학에 관련된 주제, 독서와 도서관에 대한 생각, 민주주의에 대한 의견 부분이었다.


인간의 삶이 우연성의 개입을 완벽하게 차단할 방법은 없다. 엉뚱한 때에 엉뚱한 곳에 잘못 배달된 소포처럼 시대를 잘못 만나고 장소를 잘못 만나 불우한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을지 모른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태어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결정한 사항도, 선택한 사안도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삶에 대한 나의 책임, 당신의 책임,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탄생은 내가 결정한 바 없고 선택한 바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탄생 이후의 우리 삶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건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생각하는 게 인문학적 사유의 첫번째 과제라는 말의 의미다. 물론 그 과제에 포함되는 것이 어찌 운의 문제뿐이겠는가마는             - <내가 감당해야 하는 사건>


아무도 정답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인문학적 기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다른 사람 아닌 '내'가 내 손으로 찾아야 한다. 그 질문들에 '나만이' 응답할 수 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지고 조선 팔도에 아무리 문자를 날려도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고 찾을 수 없다. 기성의 해답이 없기 때문에 내가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질문의 위대한 중요성이다. 왜 응답해야 하는가? 인간에 대한 기본 질문에 내가 어떤 식으로건 나의 해답을 내놓지 않으면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를 당당히 말할 수 없고 내 존재의 정당성("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과 내 삶의 문법("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는 동물이며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확보하고자 하는 동물이다. 이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 조건이다.       -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이런 글들이 산문 곳곳에 흩어져 있다. 같은 글이더라도 소설처럼 배경을 묘사하고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많은 부분을 소요하는 것 대신에 이런 농축되고 함축적인 표현들이 산문에는 가득하다. 책을 읽을 때는 생각보다는 읽는 거 위주였던 거 같다. 읽은 것을 정리할 때는 생각이 많이 뒤따랐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은 산문 한 편을 읽고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서 그 주제에 대해서 사유해볼 필요가 있다. 위의 내용처럼 쉽사리 생각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삶을 살면 끊임없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냥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답을 찾을 수 없는 궁금증일지도 모른다.

위에 <내가 감당해야 하는 사건>에서도 표현했듯이 사람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간다. 어떤 이는 평생 건강하고 넉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어떤 이는 평생 불행에 불행이 겹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선하게 살아오던 사람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태어날때 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자연재해로 사람들이 무차별하게 죽는다. 흔히 종교에서 말하는 선악의 심판이 없는 듯 하다. 궁금하다. 과연 운명이란 것이 존재한가? 라는 생각도 해보기도 하고,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대답없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인문학을, 철학을 더 공부해볼 시기인 듯도 하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지만 결코 쓰잘데없지 않다. 그저 너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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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욕이 들어있었던 책이다. 거의 일관된 하나의 욕이다. '씨발'이다. 

다 읽고 나니 그 말이 빠지면 절대 안된다. 이 작품에서 '씨발'이 빠지면 읽은 후에 절반의 여운은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쉽게 표현할 수 없었던 소재인 듯 하다. 주된 흐름은 가정 내에서의 가정폭력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이게 가정에 국한된 폭력이 아님을 알아가게 된다. 결국은 모든 폭력에 대해서 작가는 말하고 있다.



책의 중간 중간에 작가는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아마 그대는 이걸 읽고 있던 내가 맞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어디까지 왔나' 과연 그 어디는 어디인가? 책을 덮고 나서도 확실히는 모르겠다. 내가 어디까지 가야했는지를······

글을 정리하면서 생각한 건, 과연 작가가 말하는 폭력에 대해서 이해를 했느냐? 그 폭력에 당신은 개입되지 않았느냐? 방관하지는 않았느냐? 하고 되묻는거 같아서 불편하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화자는 앨리시어이다. 앨리시어는 동생과 함께 어머니에게 학대받고 아버지는 그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한 대를 더 걸쳐서 올라가면 앨리시어와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어머니는 그녀의 아버지의 폭력 속에 살아왔고 그녀의 어머니는 폭력에 무관심한 듯 하다.


P42

그녀는 그보다 어머니가 궁금하다. 어머니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왜 내다보지도 않았을까. 왜 나를 들여보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죽고 싶을 정도로 나는 씨발 추웠는데 왜 나를 궁금해하지도 않는 얼굴로 자고 있나. 식구들이 저녁으로 먹고 남긴 수제비 냄새와 낡은 이불깃과 잠든 인간들의 냄새가 섞인 따뜻한 공기속에서 아주 조용하게 씨발 년이 발아한다. 씨발 년은 아버지 곁에서 편안하게 잠든 어머니를 내려다본다. (중략)

그녀가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일 때는 평화롭고 행복할 때다. 기생들과 즐기고 놀다 돌아온 가장이 신문지에 싸서 가져온 쇠고기나 꿩고기로 고깃국을 끓여 식구들이 모두 앉아 그것을 먹을 때다. 그녀는 배부르고 평온하다.

포스트 씨발 년을 탄생시킨 씨발 년이다.


앨리시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어머니는 그녀에게 폭력을 가한 그녀의 아버지와 무관심한 어머니로부터 발아했다는 표현을 한다. 폭력의 되물림이다. 안타깝다. 그런데 어쩌면 이게 정말 현실이 아닐까.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서툴다. 심지어 상대방이 폭력으로 느끼는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다. 작가 황정은은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표현하기 쉽지 않은 표현을 뱉어낸다. 그런데 당하는 당사자들은 혹여나 부모라도 그 당시에는 그랬을 거다라는 나 역시 뱉기 힘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정폭력


앨리시어의 동생은 소위 학교에서 왕따를 받는 그런 학생인 듯 하다.  가정에서 어머니에게 폭력을 당한 동생은 학교에서도 폭력과 따돌림에서 자유롭지 않다. 학교폭력


p87

너는 병신이 아니라고 엘리시어가 대답한다.

너더러 병신이라고 말하는 새끼가 있다면 그 새끼가 나쁜 거고 진정 병신인 거다. 앨리시어의 동생이 그걸 듣고 고객를 끄덕인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는 어쩌면 국가에 대한 불신과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는 국가 역시 폭력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게 한다. 앨리시어와 친구 고미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것을 보고 구청으로 갑니다. 무엇을 물어보려 했느냐. 그건 바로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어머니를 때려도 되는가? 였다. 소설 속의 화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국가에 공권력에 호소하는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앨리시어가 처음 찾아간 구청의 복지과에서 가정폭력에 대해서 상담하는 곳이 아니고 행정업무를 보는 것이라며, 사설기관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준다. 국가는 외면했다. 다시 사설기관을 찾아간다. 사설기관 왈, 부모를 데리고 오란다. 그리고 예약을 하고 오란다. 이런 정말 '씨발이 발아한다.' 국가폭력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앨리시어의 동생은 폭력과 무관심 속에서 내쳐지고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작가는 또 묻고 묻는다. 처음처럼......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앨리시어는 갤럭시에 대해 말하면서 이런말을 한다.


P63

팽창하고 팽창해서 별들 간 간격이 엄청나게 멀어져버린 갤럭시에서 앨리시어는 한 점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한 점 먼지도 되지 않는 앨리시어의 고통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 갤럭시는 좆같다.

앨리시어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갤럭시란 엘리시어에게도 아무것도 아니다.


한 개인의 고통은 그 개인만이 알 수 있다. 그 고통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갤럭시 속에서의 개인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듯이 타인의 무관심 또한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 그리고 친구 고미의 고통을 알지 못하고 외면해버린다. 

앨리시어 같은 이는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 주변에 가깝게 존재하고 우리가 아는 어떤 이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라는 질문은 이제 그들의 고통을 얼마나 알게 됐는가하고 계속 질문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덧붙이기>

황정은 작가의 책을 처음 읽었다. 162쪽 밖에 되지 않는 두껍지 않은 책인데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서사위주의 형식보다는 등장인물의 내면에서의 움직임이 주된 이야기의 흐름을 좌우하는 듯 하다. 익숙하지 않아 쉽지는 않았으나 그러기에 더 남는다. 황정은 작가의 책을 더 읽어봐야 겠다. 색깔이 있는 것 같아서 궁금하다. 어떤 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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