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 김승옥의 『무진기행』 中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의 명문장인 이 글을 보고 나서 안개는 저에게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기존에 제가 알고 있던 안개가 단순히 자연적인 현상 하나였다면, 지금 만나는 안개들은 때로는 저를 뺑 둘러싼 적군, 다른 때는 저를 둘러싸고 지켜주는 아군과 같이 느껴집니다. 아침에 안개가 끼는 날이 있으면 어김없이 이 문장이 생각납니다. 아직 무진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무진에 갈 일이 있으면 아침 일찍 일어나 무진의 안개에 둘러싸여 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안개를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이라고 표현 할 수가 있었을까요. 다시 한 번 감탄하고 이글을 읽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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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사상 최고의 단편소설로 평가받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잊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초반에 무진의 안개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이 부부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른다. 어떻게 안개를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까. 작가 김승옥과 그리고 그의 우리말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겨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더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p10)


『무진기행』은 1964년 작품이다. 

그 시대를 잠깐 살펴보면, 1960년 4월 19일 자유당정권의 부정 선거에 반발해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혁명이 일어나서 이승만과 자유당의 12년간의 장기집권이 종식된다. 하지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한다. 그 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1962년부터 추진하면서 전후 산업화가 급격하게 추진된다. 이렇게 1960년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대적 배경을 감춘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시대를 담고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현대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제약회사 전무가 되기 위해 아내와 장인이 손을 쓸 수 있도록 잠시 무진에 온 주인공과 고등고시를 패스해서 세무서장이 되어 무진에 있는 친구 조가 당시 한국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속물주의, 출세주의를 엿보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50년 뒤의 한국의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나 다른 요소들은 배제하고, 초반에 묘사된 무진의 안개가 작품 속을 뒤덮은 것 처럼 축축하면서도 희미한 그리고 쓸쓸한 감정을 읽는 내내 떠나보낼 수 없었다. 특히 어머니의 산소에 들렸다가 방죽길로 돌아오는 길에 약을 먹고 자살한 술집여자를 보게되는데 이 부분에서 작품 속 나의 쓸쓸함이 진하게 느껴지는건 왜 인지 모르겠다.


나는 문득, 내가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었던 게 이 여자의 임종을 지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금 해제의 사이렌이 불고 이 여자는 약을 먹고 그제야 나는 슬며시 잠이 들었던 것만 같다. 갑자기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프긴 하지만 아끼지 않으면 안 될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p32)


주인공인 나를 보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느정도 성공을 했지만 무진의 안개에 둘러싸여 희미하게 보이듯이 삶에 대한 애정이나 자신에 대한 만족감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결핍이 느껴졌다. 하지만 왠지 나는 그보다 더 못한 경제적 여유만을 쫓으려고 아둥바둥 사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잠시 서글프기도 했다.


이런 작품을 읽고 나서 분명 좋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답답할 때가 많이 있다. 책의 뒷표지에 있는 김미현 평론가의 글로 내가 표현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 본다.


"김승옥의 소설은 1960년대 서울의 근대성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첨예하게 문제 삼는다. 그래서 '감수성의 혁명'을 보여 주면서 '슬픈 도회의 어법'을 그 누구보다도 '지적인 절제'를 통해 소설화함으로써 '1960년대 문학의 기둥'이라는 찬사를 받는 김승옥의 소설은 한국 문학의 근대성 논의에서 뚜렷한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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