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 전에 상당히 인상깊게 읽은 책 중에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가 있었다. 『스토너』의 마지막은 스토너가 암을 선고 받은 후 죽어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의 삶은 보는 관점에서 따라서 힘든 삶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스토너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마지막을 맞이 한다. 당시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었다.


러시아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중단편 중에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를 읽었는데 『스토너』의 마지막과는 대조적으로 읽으면서 내가 너무 조마조마 했다. 이반 일리치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명성도 있었지만 삶의 마지막으로 다가올수록 그가 살아온 삶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괴로워 한다.


(p103) 왜? 왜 이렇게 된 것이지? 그럴리가 없다. 삶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삶이 그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이라면 왜 이렇게 죽어야 하고 죽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해야 한단 말이냐? 아니다, 뭔가 그게 아니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찾아들었다. '난 정해진 대로 그대로 다 했는데 어떻게 잘못될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삶 이후의 세상인 죽음에 대하여 궁금해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종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으로 채워진 사후세계의 그림을 제시하며 사람들의 두려움을 달래준다. 가끔 죽음의 문턱을 오간 사람들이 말하는 신비체험 같은 것들이 있지만, 결국은 모두 살아있기에 죽음은 여전히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감춰진 세상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어느 정도 성공한 법조인인 이반 일리치가 어느 날 부터 알 수없는 아픔에 고통받다가 삶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이야기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이반은 살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이 왜 이렇게 빨리 죽어야 하느냐는 의문에 휩싸인다. 자신의 몸은 점점 약해지고 움직임 조차 힘들 때, 건강한 육체를 지닌 젊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며, 평소 어느 정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한 자신의 삶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서 무의미했던 게 아닌지 의심하면서 내면의 갈들을 겪는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톨스토이의 중단편에서 손꼽는 이유는 아마도 모든 죽음은 사적이고 그들마다 다른 의미를 지니겠지만, 어쩌면 삶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시점에는 어쩌면 사람들의 심리와 감정이 이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죽음의 추체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의 추체험은 변증법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삶'에 눈을 돌리게 만든다.


(박웅현,『여덟 단어』中) 메멘토 모리와 아모르 파티. '죽음을 기억하라'와 '운명을 사랑하라'는 죽음과 삶이라는 상반된 의미의 조합이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봅니다.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니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것이고 그러니 지금 네가 처한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죠. 저는 이런 태도가 자존 같습니다. 어떤 위치에 있건, 어떤 운명이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라는 것은 어쩌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품 속 이반 일리치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느꼈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무의미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 역시 느끼게 된다면 어떨까?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얼마나 속상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살면서 조금씩 생각해봐야 한다. 죽음을 가정하고 지금을 돌이켜본다면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조금은 덜 후회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무거운 주제지만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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