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 작가의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을 읽었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메이드 인 공장』를 읽었으니 그의 책 중에 세 권을 읽었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은 장편소설이고, 『메이드 인 공장』수필 혹은 견학기라고 해야할 거 같고, 이번에 읽은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단편집이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재미있는 입담이 김중혁의 트레이드 마크를 였지만, 역시 그의 진가는 글 속에서 나온다. 역시 작가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이 좋은 것은 작품마다 색깔이 다르다는 것이다. 감정에 너무 치우치지는 않지만, 담백한 글 속에서 나름의 진지함을 유지하는 점은 매력적인 부분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 사람은 세상에 참 관심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관찰하는 시선이 상당히 날카롭고,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세세한 감정들,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노출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과 원초적인 감정을 부담없이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표현해낸다.


포르노 배우와 제작자, 실종된 연예인과 그녀를 찾는 학생 팬, 알콜중독자 남자와 그의 옛 여자친구, 지진 발생으로 인해 겪게되는 것들, 화가와 큐레이터, 정체모를 외계비행물체 출현, 차량에 먼저 몸을 부딪혀 돈을 타내는 보험사기단, 시계공학과 남자와 멀티미디어과 여자


이번 작품에 들어있는 여덟개의 단편에 수록된 등장인물 혹은 주요 단어들이다. 상당히 다양하다. 우리 주변에 한 명 정도 있을 것 같은 인물도 있고, 뉴스를 통해 듣게 되는 사건사고가 생각나게 하는 장면들도 눈에 보인다. 그리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 하나가 독특한 개성과 함께 나름의 고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의 '작가의 말'에 [이 사람들에게 고맙다]라며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을 나열해놓은 것도 인상적이다.


작가들의 가장 부러운 점이자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똑같은 사건을 보고 그것을 직시하는 방식, 사람들의 행동에서 그 너머의 생각을 잡아내는 모습, 흙냄새를 맡고 몸을 움직일 때 마다 움직이는 신체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지나가는 행인들의 얼굴 속에서도 근심, 걱정, 행복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감수성, 부끄럽고 은폐하고 싶은 내밀한 감정의 과감한 표현 등이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느껴진다.


어제는 늦은 저녁 퇴근 길에 어두운 조명 아래 노란 은행잎이 수없이 많이 떨어진 것을 보면서 나름 감상에 젖기도 했고, 자기 전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을 하면서 톡 쏘면서도 진한 향에 역시 맥주야 하며 혼자 감탄하기도 했다. 자기 전에 책을 조금 읽으려 했지만 눈이 감기고 잠깐 잠깐 나도 모르게 빠져버리는 잠에 스스로 못이겨 침대로 들어가는데 부드러운 극세사 이불의 포근한 촉감이 기분이 좋기도 했다.


이제는 이렇게 조금씩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조금 더 관찰하고 그때 느끼는 내 감각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기억하려고 애써야 겠다. 조금 더 많은 촉수를 세우고 더 많은 감각들을 받아들여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 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도 하고, 조금 더 감상에 빠져보려한다. 이러면 삶이 즐거워지지 않을까, 이러면 나도 언젠가 짧은 글을 하나 쓸 수 있지 않을까. 혼자 웃음짓는다. 이제는 출근준비를 할 시간이다. 오늘 하루라는 소중한 시간을 주신 누군가에게 감사하다. 아낌없이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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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건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져서 내 손까지 오게 되었을까? '

평소에 혼자 궁금해하던 물음이다. 그래서 이 물음에 조금의 힌트라도 주는 책들을 하나 둘 찾아서 읽고 있다. 그냥 궁금했다. 어떻게 이런 물건들을 만들 생각을 했고, 실제로 만들어지고, 어떤 유통경로를 통해서 내 손 안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대한민국 유통지도>, <대한민국 업계지도>라는 책을 통해서 비슷한 물음에 힌트를 찾으려고도 했다. 그렇게 이 궁금증은 항상 간직하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한 책이 내 레이더망에 걸리면 바로 찾아서 읽으리라 생각된다.


오랜 만에 소설을 읽으려고 온라인서점에서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국내작가들의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에 항상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던 김중혁 작가의 책을 찾아 보았다. 마음의 빚이라는 건 이동진, 김중혁, 이다해가 함께 진행하는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즐겨 듣고, 항상 유쾌한 김중혁 작가의 방송을 좋아하는데 그의 책은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만 읽어보고 손을 대고 있지 않아서이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발견했다. 

부제로는 '소설가 김중혁의 입체적인 공장 산책기'라고 적혀있는 『메이드 인 공장』이다. 이 책의 표지는 상당히 좋다라고 생각된다. 이 책의 색을 정확히 어떤 색이라고 표현하기 어렵지만 하늘색(?) 계통의 색에 노란 글씨 그리고 공장의 그림을 간략하게 그려놓은 점이 역시 표지 전문가 답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어떤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내 손까지 오게 되었을까?' 라는 내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이고, 나머지 하나는 최근에 누군가의 에세이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인문학 책을 한참 동안 읽다보면 다른 장르의 책을 한 번씩 읽으면서 환기를 해줄 필요가 있다. 그럴때 누군가의 수필을 읽는 것은 상당히 좋다. 수필은 보통 작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다. 소설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면, 수필은 자기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풀어내서 읽는 사람도 마음이 편하다. 마치 빡빡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편안 옷을 갈아 입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무겁지 않아서 좋다.





『메이드 인 공장』은 김중혁 작가가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만드는 공장을 직접 다녀와서 적은 에세이다. 책에 등장하는 공장으로는 제지, 콘돔, 브래지어, 간장, 가방, 지구본, 초콜릿, 글, 도자기, 엘피, 악기, 화장품, 맥주, 라면 공장이 나온다. 글의 구조도 상당히 참신하고 하나의 아이템에 대해서 간단하게 얽힌 에피소드를 던져주면서 일상에 우리가 흔히 접하는 것들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게 만든다. 이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적이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그저 당연히있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데,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게 되면 당연한 사물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사물이 되고 궁금해진다. 그렇게 삶이 풍성해지는 것이다.


책의 본문에도 존재하고, 책 표지의 왼쪽 날개에 붙어 있는 글귀다.


애초 목표는 단순한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공장에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건을 만든 장소에 가서 만드는 모습을 보면 물건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 공장에는 사람이 있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 만들어내는 일이다. 사람을 빼고 공장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달의 전면을 보며 후면까지 상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장의 진짜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복잡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중국 사서의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8조목' 가운데 두 조목인 '격물치지(格物致知)' 다.

'사물을 깊이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넓히는 것(치지)'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렇게 우리의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순한 물건 하나를 깊이 바라보면 그곳에서 사람이 보이고, 세상의 흐름이 보인다. 그렇게 세상의 흐름이 보이면 그 흐름 속에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이 책은 흥미로웟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궁금했다.오늘 부터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무엇이 있는지 하나하나 적어봐야 겠다. 또 어떻게 그것들이 나에게 왔는지 찾아봐야 겠다. 250페이지의 이 책에서 수천페이지의 지식으로 확장하기 바란다. 


김중혁 작가의 책으로는 두번째 읽는 것인데, 소재가 참신해서 마음에 든다. 그의 활기차고 자신에 찬 목소리 그리고 장난기있는 모습이 그대로 책에 전달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출간된 『가짜 팔로 하는 포옹』도 기대된다. 일단 제목은 잘 지었다. 아직 사놓은 책들이 쌓여있어서 꾹꾹 참아오고 있는데 조만간 김중혁 작가의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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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의 만남, <이동진의 빨간책방>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즐겨 듣는다.

여러 종류의 팟캐스트를 듣는데, 창비의 <라디오책다방>과 함께 가장 선호한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가장 큰 매력이 있다.

진행자 이동진과 소설가 김중혁의 유쾌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서로 웃으면서 장난을 치지만 그 속에 묘한 진지함이 베어 있다.

작가 김중혁도 팟캐스트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의 신작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이 나왔다고 한다.

그동안 즐겁게 들은 빚이 있다는 생각도 들고,

알고보니 이미 문단에서는 이름이 있는 작가였다.

이렇게 김중혁을 글로 처음 만났다.

 

 

# 등장인물과 이야기

 

구동치 : 악어빌딩 거주, 전직 형사, 현재 탐정, 딜리팅 일을 주로 함

이영민 : 이영민에게 딜리팅을 의뢰하러 옴, 천일수를 능가하려는 계획을 도모

한유미 : 이영민과 만난지는 얼마 안 된 연인 사이, 테니스장에서 만남, 구동치를 소개함

백기현 : 악어빌딩에 거주, 1층에서 철물점 운영

차철호 : 악어빌딩에 거주, 2층에서 합기도장 운영

이강혁 : 처음에 배동훈이 떨어지는 날 같은 건물에 있었음, 원수도장 일원이었음, 사건의 매개

배동훈 : 건물에 떨어지면서 사망함, 이야기의 발단을 이끄는 인물

박찬일 : 악어빌딩에 거주, 지하 레스토랑 '시칠리아의 향기'의 사장이자 주방장

빈일   : 성은 잘 모르겠다, 악어빌딩 3층 PC방에서 아르바이트함

천일수 : 노블엔터테인먼트 회장

미영   : 천일수 회장의 비서, 테니스를 항상 같이 친다.

오윤정 : 악어빌딩 거주, 구동치와 맡은 편인 4층에 산다.

정소윤 : 구동치가 딜리팅 의뢰를 받고 지운 하드디스크를 찾으려고 구동치를 따라 다님

나영욱 : 천일수의 경호원, 원수도장을 이으려는 굳은 의지

 

소설을 읽을 때는 등장인물들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중에 어떤 등장인물이 있는지 정리해본다.

줄거리를 적는 것보다,

서로 간의 관계를 생각하다보면 이야기가 다시 떠오른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그들의 직업들이 무엇인지 한 번쯤 살펴보면 흥미를 더한다.

이번에는 어떤 직업들이 있었나?
소설의 주요 인물은 구동치와 천일수이다.

작가는 팟캐스트에서 말한다.

자기는 치읓(ㅊ)을 들어가는 이름을 좋아한다고,

재미있는 것 한 가지,

PC방 알바의 빈일은 우리가 흔히 비닐봉투를 말할 때

비닐을 소리나는 대로 발음해 빈일이라 했단다.

작가들도 요런 재미가 있구나!

 

이 소설의 핵심은 바로 '딜리터(Deleter)' 라는 직업이다.

스릴러이면서도 탐정소설같은 향기가 많이 풍기면서도,

'딜리터'라는 직업은 분명히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구동치는 고객과 '딜리팅(Deleting)' 계약을 한다.

만약, 고객이 죽는다면 고객이 생전에 계약했던 사항들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인터넷 상의 기록들, 기타 여러 문서들이나 자료들을 없애주는 일이다.

이 소설은 구동치가 딜리팅을 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인물들이 겹쳐지는 장소는,

주로 구동치가 사는 건물인 악어빌딩과 테니스장이다.

테니스의 이야기도 종종 등장한다.

 

 

# 작품 속 묘사

 

이번 책에서는 무엇보다 작가의 표현력이 눈에 자주 들었다.

처음에 등장인물들의 주요무대인 악어빌딩을 소개하는 장면이다.

작가 김중혁은 이 장면에서 글 속에서 그 냄새를 직접적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글을 읽으면서 건물에 들어가는 생각을 하면 정말 고약한 냄새가 나길 바랬다.

 

p9

누군가 이 냄새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깊게 땅을 판 다음 음식물 쓰레기와 동물의 시체와 곰팡이와 사람의 땀과 녹슨 기계를 한데 묻고 50년 동안 숙성시키면 이런 냄새가 날 거라고 했다. 악어빌딩 사람들은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에는 등장인물들을 묘사하는 몇 부분을 한 번 찾아보자.

 

실제로 작가들은 길거리를 가다가 사람들을 슬쩍 한 번 보면서 많은 정보를 파악하고 묘사할 수 있다고 한다. 마치 형사가 범인을 찾느냐고 사람들을 스캔하듯이 작가들 역시 일상의 사람들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소설을 많이 읽다보면 그런 유혹에 가끔 사로 잡힌다. 바로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긴다.

거리를 걷다가 다가오는 사람을 안 보는 척 하면서 바라본다. 어떤 머리에 바지는 뭐에, 티셔츠는 어떻고, 신발은 구두인지 운동화인지, 색깔은 어떤지. 얼굴 표정은 어떤지, 몸에 문신은 있는지, 걸음걸이는 어떤지, 화장은 했는지, 피부색은 어떤지 등에 대해서 예전에 없던 관심이 생기고 지나가다 눈으로 한 컷 사진을 찍어 묘사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p12

남자, 나이는 50, 키는 170, 얇은 금테 안경, 눈은 나쁜 편이고, 코의 형태를 보니 비염이 있을 것 같고, 얼굴에 큰 점이 두 개, 심하지 않지만 복부 비만, 튀어나온 배보다 내장 비만이 더 심할 것 같은 타입, 평범한 감색 재킷, 평범한 흰색 셔츠, 고객이 될지 알 수 없으니 1차 점검은 여기까지만.

 

p20

백기현은 눈가가 일그러질 정도로 환하게 웃고는 문을 닫았다. 키가 작고 상체가 발달해, 멀리서 보면 체조 선수 같았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단련된 다부진 몸이었다. 얼굴은 다부진 몸과 어울리지 않게 소년 같은 데가 있었다. 백기현은 구동치보다 정확히 스무 살이 많았지만 여전히 표정이 귀여운 구석이 있었고, 웃음 역시 맑았다.

 

p239

구동치는 정소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정소윤은 푸른색 트렌치코트 안에 얇은 데님 재킷을 입었고, 그 속에 하늘색 셔츠를 입었는데, 여섯개의 옷깃이 겹겹이 싸여 마치 포개진 꽃잎을 보는 것 같았다. 푸른 빛깔의 옷 때문에 정소윤의 화난 얼굴이 더욱 붉어 보였고, 차가운 공기를 지나왔다는 흔적이라도 남기듯 볼은 발그스름하게 상기돼 있었다.

 

이번에는 공간 묘사에 대해서 한 번 보자.

구동치의 사무실을 설명하는 장면이다.

 

p10

구동치의 사무실은 철제 책상 하나와 등받이가 뒤로 젖혀지는 고급의자, 벽 한 쪽을 채운 사람 키 높이의 커다란 파일 보관함, 폭이 1미터도 되지 않는 비닐 옷장, 접어둘 수 있는 간이침대가 가구의 전부였다. 비닐 옷장 안에는 비슷한 스타일의 검은색 재킷 세 벌, 아무런 그림도 없는 검은색 티셔츠 열 장, 청바지 세 벌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책상 위에는 스피커가 하나뿐인 소형 오디오가 놓여 있었는데, 구동치는 그 오디오를 '애꾸눈오디오' 라고 불렀다. 사무실에는 언제나 1920년대에 이탈리아 테너 가수가 모노로 녹음한 아리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테레오일 필요가 없었다. 1920년대의 녹음이다 보니 지글지글하는 잡음도 적당하게 들어가 있어 텅 빈 사무실을 채워주기에 좋았다. 공기 속의 불쾌한 냄새와 잡음은 잘 어울렸다.

 

 

# '딜리팅(Deleting)에 대해서

 

p328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

 

p344

구동치의 유일한 비밀은 자신의 비밀을 없애려는 사람들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는 숨길 게 없었다. 비밀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구동치는 비밀을 없애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자신이 조절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딜리팅은 타인의 힘을 빌려 그 삶을 조금 바꿔보려는 것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딜리터(Deleter)' 라는 직업이었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게 있듯이,

사람들은 명예를 남기기를 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남기기 위해 무언가를 지우기를 원한다.

과연 나는 삶을 정리할 때 남기고 싶은 것이 있는가? 혼자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런 질문은 다시금 나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고,

남긴다는 개념이 아닌 반대의 관점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혼자 생각으로는 최근에 불거진 많은 논란을 보면,

과거에 남겼던 SNS의 글, 어떤 연설들이 어느 순간 일판만판 커지는 것을 볼 때,

가능하다면 '딜리터(Deleter)'라는 직업이 대단히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반면에 자기가 한 일과 기록에 대해서 지우는 것이 어쩌면 자신의 책임을 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해서 반성하고 사죄하고 새롭게 나아가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과거를 지우려고만 하는 모순이 반복되는 아쉬움이 반복될 수 있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다.

 

 

# 나만의 에필로그
 

김중혁 작가를 뱉겨보자.

분명 이 작품은 언젠가는 영화로 나올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에필로그를 남겼는데 누군가가 지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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