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를 읽었다.

그의 작품은 『데미안』, 『싯타르타』에 이어서 세번째다.

『데미안』은 유독 사람들마다 여러번 읽고 새로운 감동을 받았다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한 번 읽은 나는 지금은 어렴풋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싯타르타』는 우리가 흔히 석가, 부처라고 부르는 고타마 싯타르타와 관련된 내용이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두 작품 모두 우리 내면에 대해서 깊숙히 들어가서 뱉어낸 작품이었던 것 같다.

 

『크눌프』는 이전에 읽은 두 작품 보다는 읽기 편하다.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지만 그렇게 무겁게만은 다가오지 않는다.

어쩌면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보다는 밝은 느낌의 주인공 크눌프 때문인지도 모른다.

헤세는 '크눌프'라는 작품 속 인물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크눌프'를 헤르만 헤세가 자신을 본떠서 만든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헤세가 애정을 간직한 인물, '크눌프'에 나 역시 두껍지 않은 책을 읽는 동안에 좋아하게 됐다.

이런 인물을 가슴 속에 하나, 둘 심어두고 가끔 한 번 꺼내 보는 것도 삶을 사는 재미가 아닐까.

'크눌프'는 어쩌면 나와는 다른 성격의 인물이기에 가슴 속에 더 심어두고 싶은지 모른다.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 보면 예술은 우리들의 삶의 균형감각을 맞추어준다고 한다.

우울하고 힘든 사람들은 더 침잠해지기를 원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아름답고 경쾌한 미술작품을 통해 위로받는다.

형식적인 틀에 얽매인 사람은 자유롭게 표현하는 작품에 매료된다.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임산부들이 평소에 먹지도 않거나 심지어 싫어했던 음식을 찾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몸 속에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하기 위해서 우리 몸이 반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 역시 '크놀프'를 가슴 속에 담아두고 싶은 이유는 나와는 다른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크눌프'에 대해서,

그가 부럽고 동시에 내 부족함을 대신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질감 뿐만 아니라, 그와 나는 비슷하다는 동질감 또한 갖게 되니 애정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는 '초봄',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종말' 이라는 서로 이어지는 듯 하지만 단편적인 작품 세 편으로 구성된다.

이 작품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쓰여졌지만, '크눌프'라는 인물에 대한 것이라는 공통점으로 1915년에 한 권으로 묶여졌다.

 

<초봄>은 크눌프라는 '자유로운 영혼' 크놀프에 대해 여실없이 보여준다.

크눌프는 어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을 하며 떠돌아 다닌다.

세련된 매너와 여행을 통해서 보고 들은 경험으로 펼쳐지는 입담으로 사람들은 그가 그들의 집에 방문해주기를 원한다.

 

'자유롭다'라는 의미에는 때로는 '무절제하다', '버릇없다', '문란하다' 와 같은 곁가지들이 따라 붙는데,

'크눌프' 어떤 게 진정한 자유인지 알고 있다. 친구의 아내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자 재치있게 넘어간다.

하지만 자신이 애정을 가지는 대상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표현한다.

어떻게 보면 이 친구는 한마디로 'Gentle and Cool' 이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크눌프가 그렇게 의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며 영혼이기에 그가 밉지 않다.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은 한 때 크눌프와 친구였던 이가 기억하는 크눌프에 대한 이야기다.

(p76)크놀프가 말했다
「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것과 섞을 수는 없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가까이 함께 서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 내리고 있는 꽃과도 같아서 다른 영혼에게로 갈 수가 없어. 만일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하는데 그것 역시 불가능하지. 꽃들은 다른 꽃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향기와 씨앗을 보내지. 하지만 씨앗이 적당한 자리에 떨어지도록 꽃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야. 바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곳 저것 불어댈 뿐이지.

작품 속에서 크눌프가 하는 말은 친구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이며, 그가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는 말한다.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 내리고 있는 꽃과 같다' 라고.

나 역시 크눌프의 말로 회상한다.

 

<종말> '크눌프'의 마지막을 담고 있다.

크눌프의 몸은 점점 아파 온다. 그리고 마치 숙명처럼 고향으로 돌아 간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고향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고 삶의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끊임없이 하느님과 대화를 나눈다.

크눌프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한다. 무엇인가 잘못된 삶을 살지 않았나 자책한다.

 

그때 하느님이 말한다「이제 그만 만족하거라.

크눌프의 마음은 점점 편안해지는 것 같다.

 

(p134)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이렇게 나는 작품 속에서 '크눌프'라는 친구를 만났고, 마지막을 함께 했다.

그는 삶에서 마주한 어떤 사건으로 자신의 삶이 바뀌었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 사건 역시 그의 삶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간 게 아닐까.

나는 '크눌프' 이 친구가 마음에 든다.

자유롭지만 경솔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그가 좋다.

자유, 자연, 여행,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 '크눌프'가 그립다.

어쩌면 나에게는 끊임없는 결핍의 요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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