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 선언 (The Individualist Manifesto)



# 하나


대학을 졸업했다.

취직을 했다.

한 달 한 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을 받으며 한 달 한 달을 살아간다.


아내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세 아이가 생겼다.

아직도 내가 나를 잘 모르겠고, 세상을 잘 모르겠는데

어느덧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세상에 가장 어려운 것이 평범하게 사는 것이고,

남들 대학 갈때 가고, 남들 취직할 때 취직하고, 남들 결혼할 때 결혼하는 게 

모법답안이라면, 나름 대로 아직까지는 답안지를 잘 쓰고 있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하루 하루를 살아가지만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하루 하루 시간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길로 이어질 것이고, 여지껏 그렇게 살아왔지만,

여전히 잘못된 길인 것 같아서, 한발자국 내딛이면 금방이라도

움푹 주저앉게 될 것 같아서, 제 풀에 죽어서 못 견딜까봐 두렵기도 하다.


나는 누구보다 강하다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휘어지지 못해 부러질까봐 불안하다. 



# 둘


아버지, 어머니의 지난 삶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는 올해 나이로 하면 64세, 어머니는 62세다.

지금 내 나이가 34살이다.

아버지가 34살, 어머니가 32살일 때 누나는 10살, 형은 7살, 나는 4살이었다.

내가 취직해서 좋다고 술마시고 돌아다닐 때인 28살.

아버지가 28살, 어머니가 26살일 때 누나는 4살이고, 형은 1살이었다.

삶의 무게가 다르다.


살던 시대가 달랐다 한들 30년 전의 아버지, 어머니가 갑자기 생각이 난다.

지금 나는 방 세개에 큰 자동차에 크게 부족함 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 당시 아버지, 어머니는 작은 방 한칸에 부엌하나에서 

우리 셋을 키우셨다.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왔다. 어쩌면 그렇게 버텨왔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게 아프다.


나는 지금 책을 읽으면서

회사에 업무가 많아서 저녁 늦게 퇴근해서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하고,

개인적인 여가생활을 갖지 못해서 지금의 삶을 계속해서 곱씹고

이건 아니라고 말하지만,

30년 전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 내 자신이 너무나 사치스럽고 부끄럽다.

그래서 그럴 때 마다 아프고 시리다.



# 셋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현재의 나에 대한 생각부터 갑자기 튀어나왔다.

여전히 흔들리고 어느 길로 가야할지 잘 몰라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다른 이의 글에 기대본다.

(1부)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2부) 타인의 발견 (3부)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

책의 구조는 개인-타인-세상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확장되는 형식을 취한다.

개인주의자 선언이라 해서 나 혼자만 잘 살아볼거다라는 것은 아닐 거라 짐작은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책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문유석 판사는 우리 사회에서 지나친 것은 집단주의이고, 부족한 것은 개인주의라고 한다.


개인주의는 근대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함께 발전하며 서구사회의 근간을 형성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 밖에 없고, 그것은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근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p26)


나 역시 오늘부터 합리적 개인주의자 선언을 하는 바이다.



# 넷


사회에 나와 지금까지 겪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누구나 자기 몫의 아픔은 안고 살고 있더라는 거다. 굳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나 자신의 몫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직업병 때문일까. 어떤 때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고통만큼은 평등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도 권력자도 스타도 화려한 겉껍질 속에는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가득했다. 건강 때문에 가족 때문에 자식 때문에 때로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모를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물며 돈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 흔하디흔해 보이는, 건강하게 자라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아이를 갖고 키우며 사는 일들이 실은 얼마나 전쟁같이 힘든 일인지...(p13)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갸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의 글이다. (p119)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p136)

 

사람은 태어날 때 부터 공감력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공감력 그리고 민감하게 느끼게 하는 감수성은 삶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이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랬으면 좋겠다. 옆의 어떤 이가 너무나 아프고 지쳐있을 때 누군가 힘이 되어주고 같이 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힘이 들 때 누군가 위로해줬으면 좋겠다.

내 가족들이 힘들고 아플 때 주변에 도와주는 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공감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야 세상이 살만하니까. 



# 다섯


진보, 보수, 좌파, 우파. 결국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 문제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다층적인 면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목소리는 오히려 귀한 것 같다. (p228)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증은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는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든다. 가진 것이 나라 국적뿐인 이들이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성기 하나가 마지막인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p37)


악을 행하는 악마보다 선악 구분조차 없는 백지 상태의 야수가 더 무섭다. 자기 행동의 의미를 성찰할 줄 모르는 무지야말로 가장 위험한 야수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야수를 문명의 굴레에서 풀어준 것은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이다. (p235)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정치, 사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만 너무나 다양한 요소와 그 이면에 숨겨진 것들이 많아서 어떻게 해야 올바른 가치판단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회, 정치는 각각의 세부적인 요소로 들어갈 수록 복잡하고, 실질적인 사례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려 할 때 더욱더 힘들것이지만, 아직까지 그런 것은 모르겠고 내가 바라는 것은 단순하다.

세상이 너무나 자본주의적으로 빠지지 않고, 조금은 더 인간적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위험에 빠졌을 때, 내가 없더라도 사회시스템과 사람들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났으면 좋겠고, 한 번 실패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소외되고 버림받는 사회가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개인의 가치를 중요하게 다루어주며, 조금은 더 공평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지만 나 역시 혼란스럽다. 어쩌면 글로는 이렇게 좋은 말을 뱉어내지만, 허위의식으로 가득차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내가 이상으로 여기는 것들이고, 그런 것이 올바르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내가 그렇게 실천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 이상을 가끔씩 한 번쯤 들춰내고 조금이라도 그곳에 수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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