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과 영영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철학 -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philosophy - is the study or creation of theories about basic things such as the nature of existence, knowledge, and thought, or about how people should live

철학은 우리 인간 자신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 그리고 인간들 내부의 생각에 대해 다루는 학문인 것이다. 


최근에 '삶이란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글귀를 보면서 내가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기도 하였고, 얼마 전 작고하신 변화경영전문가 구본형의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책에서 철학에 대한 세대별 해야 할 것을 보면서 한 번쯤 철학에 대해 살펴볼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구본형 선생은 철학에 대해 세대별로 "30대는 철학사를 뒤적여 가장 매력적인 철학자 한 '분'을 골라라. 그 '분'에 관한 책 두 권을 정독해 그 '놈'으로 만들어라. 40대는 자신의 철학을 가다듬어라. 차용한 철학으로는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길을 갈 수 없다. 50대는 자신의 철학을 이웃과 조직에 나누어주어라. 철학이란 삶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다." 라고 표현했다."


바로 지금까지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연구했던 철학자들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고 거기에서 나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하나씩 나를 바꾸어나가고 후에는 바람직한 내 삶의 철학을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도록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말인 듯 하다.


아직도 철학하면 동양의 공자, 맹자, 노자, 서양의 플라톤, 소크라테스 밖에 떠오르지 않으며 현대의 척학자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는 형편이라 예전에 사두고 이상하게 손에 잡히지 않았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손에 잡았다.


책에는 48명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에 대해서 짧게 소개하고 있는데, 하나하나 다 깊이 스며드는 내용이었다. 단지 한 번 읽어보고 글로 똑같이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무엇인가 내가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방식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P25 - 니체의 영원회기

니체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가 순간의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리는 없다. 순간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그리고 지금의 삶이 비겁하다면 우리는 자신이 10만 년 주기로 지금까지 비겁했다는 슬픈 과거를, 동시에 자신이 앞으로도 영원히 10만 년 주기로 비겁하리라는 슬픈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P39 - 페르소나

맨얼굴이 건강하다면, 우리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쓸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불행히도 맨얼굴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쓰고 있는 페르소나를 벗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벗는 순간 망가진 맨얼굴을 볼까 두렵기 때문이다.


P56  - 인내천

개체에 내재하는 신적 생명력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라고 불렀다면, 최시형은 한울님, 즉 천주라고 부른다. 흥미롭지 않은가?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초월자를 긍정하는 초월적 사유를 부정하자마자, 인간 내부에 잠재한 생명력을 긍정하는 내재적 사유가 전개된다는 사실이 말이다. 서양의 스피노자, 그리고 우리의 동학이 중요한 이유는 두 사유 전통이 공통적으로 인간이 직면하는 난제를 초월자에게 호소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인문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록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P83 - 생각

생각은 오직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과 조우할 때에만 발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이데거라는 현대철학자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존재와 시간]이란 유명한 철학책을 썼던 이 독일 철학자는 인간이 생각한다는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이 과연 언제 사유하게 되는지를 숙고했다.


P89 - 돈오

지눌의 눈에는 당시 고려의 선승들은 자신들이 왜 치열하게 정진해야만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맹목적인 수행만을 일삼고 있는 원숭이들로 보였던 것이다. 수행을 하기 이전에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것이 지눌의 문제의식이었다. 왜 우리는 고통에 빠져 사는가, 왜 고통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가, 어떻게 하면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가, 그리고 고통이 해소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게되는가? 우리는 자신의 실존적 상태나 수행의 방향을 지적으로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P106 - 진인사대천명

'사람의 일을 모두 다 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가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유명한 구절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난 뒤, 조용히 그 결과를 기다리는 태도, 어떤 결과가 나오든 기꺼이 수용하는 태도!


P222 - 아우라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그리고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253 - 스펙터클사회

스펙터클 사회는 인간으로부터 상품에 대한 시각적 감각을 제외한 일체의 현실 감각을 박탈해버린 거대한 매트릭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역설적으로 스펙터클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볼 수 있다. 촉각으로 접할 수 있는, 즉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여 현실 감각을 키워야 한다. 단지 이것만이 권력과 자본이 내건 집어등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기억 속에 잡아두고 싶었던 내용이 너무나 많았고,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진 내용도 있었다. 라캉, 라베송, 하이데거, 지눌, 장자, 스피노자, 벤야민, 리오타르 같은 철학자에 대해서 한 번 더 그들의 생각을 알고 싶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19세기 프랑스의 작가 폴 부르제의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과 지금의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인간스러움을 잃게 되는 것이다.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남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의 하나의 부속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지는 자명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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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 : 조선 건국의 주역, 요동정벌을 준비하다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 태조 이성계 : 조선의 창업자로서 초대 임금, 아들의 반란으로 권력을 잃는다.

▷ 남은 : 왕자의 난 때 살해된다.

▷ 신덕왕후 강씨 : 자신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만드는 데 성공하지만 비극을 부르고 만다.

▷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 : 모두 왕자의 난 때 살해된다.

▷ 정종 : 얼떨결에 왕이 된 격구 마니아

▷ 홍무제 : 명의 초대 황제, 조선 정국을 뒤흔들어놓는다.

▷ 이방원 : 태조의 5남,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다. 태종

▷ 하륜 : 이방원의 핵심참모로 왕자의 난을 기획했다.

▷ 이방간 : 태조의 4남으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패하여 지방으로 추방된다.

▷ 이방원의 부인 민씨, 이숭인, 원천석, 길재, 변중량, 이무, 박위

▷ 왕자의 난 주요 공신들 : 이숙번, 이저, 이거이, 조영무, 민무구, 민무질



▶ 고려에서 조선으로


태조는 새 왕조를 함께 이끌어갈 내각을 구성, 발표한다. 배극렴, 조준, 정도전, 김사형, 남은, 이화, 이지란 등 철저한 공신 위주의 친위내각이었다. 그리고 명의 홍무제에게 나라 이름을 선택해 달라고 요청한다. (조선, 화령 중 하나로)


▶ 절개를 지킨 사람들


정도전, 남은, 조준이 청하기를 정몽주와 한때를 이뤄 태조세력을 몰살시키려 했던 이색, 우현보, 설장수 등 56인은 극형을 처해달라 요청한다. 이에 태조는 곤장형으로 하라고 하는데 정도전을 곤장을 치대 살아서는 안된다고 지시한다.

이렇게 떠난 이 중에는 도은 이숭인, 이종학, 김진양, 우홍수 등 8명이나 되었다. 


도은 이숭인은 14세 어린 나이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16세에 대과에 합격한 수재이며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높였으며 중국과 관련된 외교문서는 거의 그의 손을 거첬다고 한다. 그는 스승 이색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고 젊은 날엔 정도전과 막역한 사이였으나 정도전과의 정치적 입장 차이로 결국 죽음에 이른 것이다.


이종학은 이색의 둘째 아들이며, 우홍수는 보수파의 수장 우현보의 아들이다. 이때 우현보는 아들 셋을 잃는다.

반 역성형명 진영의 정신적지주인 이색의 경우는 태조의 배려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후 태조가 불러 도움을 요청했으나 목은 이색은 강력히 거부한다. 태조는 그런 이색을 죽는 날까지 존중해주었다. 1496년 신륵사에서 69세의 나이를 세상을 뜬다.


야은 길재의 경우는 정몽주의 후배이자 제자이다.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한 적이 있는 태종이 훗날 벼슬을 주려하나 소신을 밝히고 낙향한다. 낙향 한 후에는 후세 교육에 힘써 제자들을 길렀는데 그 제자의 제자.. 들이 힘을 길러 장차 조선의 주인인 사림이 된다.


[길재의 시조]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운곡 원척석의 경우는 고려가 멸망할 기색이 보이자 치악산에 들어가 운둔했다. 한때 그에게 배운 바 있던 태종 이방원이 벼슬을 주려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고려말의 정치적 격변을 기록한 책6권을 남겼는데 전하지 않는다.


[원척석의 시조]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신규, 조의생, 임선미, 서중보 등 수십 명은 벼슬을 버리고 개경 북쪽 두문동이란 골짜기에 들어가 운둔했다. 이들은 끝끝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니 이들을 일러 '두문동 72현' 이라고 했다. (두문불출)


▶ 공을 세운 사람들


배극렴, 김사형의 경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느 편에도 분명하게 가지 않은 중간파 그룹의 원로들인데 태조는 그들을 1등 공신으로 책봉한다. 이는 새나라가 측근들만의 나라가 아님을 보여주어 중간파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당시 개국공신들에게 주어진 포상은 1등공신(토지150~220결, 노비15~30명), 2등 공신(토지100결, 노비 10명), 3등공신(토지70결, 노비7명) , 왕자들에게 과전 100결이었다. 과전이란 해당 토지에 대한 수조권, 즉 나라 대신 세금을 거두어 쓸 권리인데 세금은 수확의 10%이다. 하지만 개국공신들에게 주어진 토지는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땅이었다.


공신을 세우면서 태조의 아들들은 불만을 가지게 된다. 

태조가 후에 신의왕후로 불리게 된 한씨와 열 다섯에 결혼해 6남 2녀를 낳는다. 첫째 이방우(진안군), 둘째 이방과(영인군, 정종), 셋째 이방의(의안군), 넷째 이방간(회안군), 다섯째 이방원(정안군, 태종), 장녀 경신공주, 차녀 경선공주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가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누볐으며 개국과정에서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


▶ 세자 책봉, 비극의 씨앗을 품다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은 권문세족 강윤성의 딸로 개국과 함께 현비에 봉해진 신덕왕후 강씨다. 그녀는 태조와 2남 1녀를 낳았는데 방번(무안군), 방석, 경순공주 였다.


조선을 건국하 고 태조는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을 불러 정식으로 세자 문제를 제기하는데 평화로울 땐 장자로, 어지러울 땐 공이 큰 아들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태조는 방번을 세자로 하나 한다. 며칠 뒤에는 대신들의 의견으로 방석으로 세자를 바꾼다.


왕조국가에서 후계, 곧 세자를 세우는 일은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문제다. 장성한 형님들을 제쳐두고 나이 어른 막내 방석을 세운다는 것은 원칙에서 벗어난 무리한 수였다. 신덕왕후 강씨의 욕심은 이해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태조와 정도전은 왜 방석을 태자로 삼았을까?


정도전이 생각하는 조선은 안정적인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 군자의 나라이다. 바로 재상중심주의 정치이다. 왕은 재상에 대한 인사권만 갖고 실제 국정의 주요 문제들은 능력과 도덕이 검증된 우수한 재상들이 책임지고 풀어나가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지나치게 똑똑한 정안군(방원) 보다 방석이 세자로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렇게 태조나 정도전의 생각이 어떠했건 방석은 세자로 책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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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이성계 - 변방 출신의 무장, 대중적 인기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세운다.

정도전 - 신진 사대부, 급진 개혁파의 기수로 이성계와 역성혁명을 이뤄낸다.

공민왕 - 고려의 재건을 꿈꾸었던 개혁 군주, 개혁히 실패한 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신돈 - 승려로서 공민왕을 도와 과감한 개혁정치를 펴 나가다 역모 혐의로 참수된다.

이인임 - 공민왕 사후, 우왕의 후견인으로 실권을 장악한 뒤 친원 보수정책을 폈다.

최영 - 전쟁영웅, 요동정벌을 추진하였으나 이성계의 회군으로 실각한 뒤 참수된다.

정몽주 - 역성혁명을 막기 위해 공양왕과 손잡고 이성계 세력과 대립하다 피살된다.

공양왕 - 고려의 마지막 왕

이색 - 고려말의 대 유학자로 역성혁명에 반대하였다.

이안사 - 이성계의 고조

이자춘 - 이성계의 아비

조민수 - 위화도 회군을 함께 했다.

조준 - 이성계의 왼팔

이방원 - 이성계의 5남


◆ 이안사 - 이자춘 - 이성계


고려 후기 1250년대 이성계의 고조인 이안사는 전라도의 가장 큰 고을 전주에서 삼척으로 간다. 이유는 당시 관기 때문에 고을 수령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북쪽 끝인 동북면으로 간다. 당시 전주에서부터 이안사를 따라나선 이가 170여 가구에 달한다고 실록은 전한다. 그래도 이안사가 어느정도의 리더십을 갖춘 인물임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이안사는 당시 동북면에서 어느정도의 세력으로 성장을 하고 몽고(원제국)으로 부터 관리가 된다.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은 가문의 명운을 건 결심을 한다. 당시 원제국이 눈에 띄게 약화되고 폐망의 그림자가 비춰지면서 이자춘은 개성으로 간다. 고려를 등진 지 100년 만에 이안사의 후손은 다시 고려 국적을 되찾는 것이다.

고려로 돌아온 이자춘은 공민왕의 밀명에 따라 원이 빼앗아 쌍성총관부를 두고 통치해 오던 동북면 지역을 되찾기로 하고 고려군의 공격에 내응하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이자춘은 동북면의 유력자에서 유일 패권자가 되었고, 원에 투항했던 반역자 집안에서 왕이 직접 하사한 집에 사는 공신의 가문으로 거듭나게 된다.


◆ 공민왕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아들로 11세에 볼모가 되어 원나라로 가서 10여 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또한 공민왕의 평생의 연인인 원나라의 노국공주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에 원나라는 그들의 지역정세에 따라 고려가 그들의 입장에서 안정될 필요가 있어서 그 인물로 공민왕을 선택하고 어린 충정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삼촌인 공민왕을 왕으로 세웠다.


예상과는 다르게 왕에 오른 공민왕은 친원세력인 권문세족의 수장인 기철과 그 일당을 숙청한다.

기철은 원제국 황후인 기황후의 올아비다. (공녀로 원나라 끌려와 원제국의 황후에 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


당시 공민왕의 개혁에 기득권 세력은 반발했으며 원의 급격한 약화에 따른 동북아 정세의 혼돈이 결정적으로 공민왕의 앞길에 장애가 되고 있었다. 원에 반기를 든 한족 반란부대의 한 갈래인 홍건적이 원의 토벌에 밀려 쫓기다가 고려에 쳐들어오게 되고, 차례로 여진, 원, 왜구들이 고려를 침범하게 된다.


◆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는 아비와 함께 5년을 개경에서 머물고 동북면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1361년, 고향으로 돌아온 이자춘은 세상을 뜬다. 그 해 겨울,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경까지 함락시킨다. 이에 궁성을 비우고 줄행랑을 쳤던 조정은 병사를 모집하여 수도탈환작년을 전개하는데 이때 이성계도 가병 2,000병을 이끌고 참여한다.


당시 이성계는 2,000명의 가병으로 그 몇 배의 전공을 세우고 가장 먼저 동대문을 돌파했을 뿐만 아니라 홍건적의 수장 및 장수의 목을 베었다. 이를 계기로 무명의 이성계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후에 원나라의 장수도 물리치면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당시 고려의 권신으로 공민왕에게 원한이 있던 최유가 원나라의 기황후를 설득해 군사 1만을 주어 고려로 들어간다. 이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려군은 초반에 기세가 밀렸으나, 이성계 부대의 활약으로 크게 물리치고 불채의 명장으로서 위신과 명성도 높아졌다.


◆ 혁명의 씨앗 - 목은 이색


고려 말의 대유학자, 목은 이색은 14세의 나이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원나라 과거에 응시 1,2,3차 시험에 각 1,1,2등을 한 당대의 수재이다. 모친의 연로를 이유로 그가 귀국하자 그의 집엔 공부를 하려는 새싹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고려 최고의 명문 학원이 되었다. 후에 신진사대부라 일컬어 지는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윤소종 등이 다 이색의 후학들이었어다.


그들은 100년에 걸친 무신란과 다시 100년에 걸친 원의 지배로 낳은 권문세족보다는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권문세족은 산과 강을 경계로 삼을 만큼 광대한 사유지를 확보했으며 이에 따라 일반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 졌다. 한 예로 권세가의 종, 곧 노비가 되면 납세, 국방, 노역 같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지지않게 되자 권세가들의 종이 되기 위하여 농민들이 찾아가게 되고 이에 따라 신분질서는 무너지고 권문세족의 세력과 재산은 늘어만 갔다.


권문세족과 더불어 대토지를 소유한 곳이 있으니 바로 사찰이다. 고려 건국과 함께 국교로 대접받아온 불교인 만큼 왕실이나 종친, 권세가로부터 기증받은 토지가 엄청났다. 결국 왕실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 공민왕의 개혁실패와 죽음


공민왕은 밖으로는 원의 지배를 물리치고 안으로는 권문세족을 제압해 토지집중 문제를 해결함과 아울러 부당하게 노비가 된 자를 면천시켜 양인 수를 늘림으로써 나라 재정을 건실케 하고 국방을 튼튼하게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엇다.

하지만, 끊임없는 외침과 권문세족의 반발, 그의 연인인 노국공주가 산고 끝에 죽으면서 무너져 내렸다.


1365년에는 한 승려(신돈)가 왕으로 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개혁을 추진한다. 신돈은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를 돌려주고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은 양인 신분을 되착제 하고 좌주, 문생들이 부정하게 합격시켜주는 폐단을 제거하고, 권문세가와 공신들에게 베풀었던 특전인 국자감시도 폐진한다. 

또한 성균관을 재건하였다. 성균관이 재건되고 성균관의 주요 인물들은 이색과 그의 제자들이 되었으며 신돈의 개혁 결과 최대 수혜자가 되었으며 이들이 바로 신진사대부였다.


하지만, 급격한 개혁과 신돈이 성공에 취해 갔으며 정적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1371년 신돈은 역모사건에 휘말리고 유배되었다. 4일 후에는 목이 잘렸다. 그의 죽음과 함께 고려 재건의 열정도 차츰 식어가기 시작했다.


1374년 9월에는, 공민왕은 어이없는 최후를 맞게 된다.  당시 자제위 (고관의 자제들 중 용모단정한 아이들을 골라 궐 안에 살며 왕의 시중을 들도록 한 특별기구)는 왕과 더불어 다양한 변태적인 해위를 하는데, 왕의 지휘 아래 후궁을 범하는 따위도 하였다. 후에 익비가 태기가 있다 하자. 이를 계기로 자제위를 죽이려 한다. 취중에서 한 말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말을 들은 내시 최만생이 자제위에게 알리고 자제위는 우발적으로 공민왕을 살해한다.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공민왕 사후, 총리격인 시중 이인임이 직접 진상파악에 나서고 가담자, 그들의 아비, 형제들을 포함한 일대의 피바람이 몰아쳤다. 공민왕은 죽기존에 신돈의 미모의 여종인 반야라는 여인과 잠자리를 갖고 아이를 낳았으며 그 아이가 '모니노'다. 모니노를 원자로 삼고 어미의 낮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이미 죽은 한씨와의 아들이라 한다.

그렇게 우왕(모니노)의 시대가 시작된다. 아니 이인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 어린 왕(우왕)의 후견인 이인임


이인임은 권문세족의 출신으로 벼슬생활도 과거가 아닌, 귀족 자제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었던 '음서'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는 정치적 처신이나 정치감각이 뛰어났고, 권문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신돈의 눈에 들어 개혁 실무 책임을 맡았고 신돈 제거시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일당이라는 이유로 숙청되었지만 그는 오히려 승진하였고, 어린 왕의 후견인이 되어 권력을 쥐게 되었다.


이인임의 측근들인 염흥방, 임견미 등이 요직을 독차지 하고 실세들의 집앞에는 뇌물을 싫은 우마차들로 가득했다. 이에 혁명 세력들은 기가 막혔다. 또한 명나라에게 사대를 표하는 동시에 집권세력인 북원과의 국교회복 또한 결정하며 국정의 혼란을 가져온다.


◆ 혁명을 꿈꾸는 정도전


정도전, 호는 삼봉. 경북 봉화 출신이다. 아버지 정운경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부상서에 이르렀던 인물이며 고려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기록될 만큼 치부와 세력 쌓기 같은 일엔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명문가인 우현보 집안 여종의 외손녀이다. 어머니 쪽 가계로 인하여 두고두고 귀족 출신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과거에 급제하고 빼어난 일솜씨로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며 30대 중반의 나이로 정4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하고 있었다. 당시 원나라 사신에 대한 접대를 정도전에 맡기니 정도전은 스스로 유배지로 떠나버린다.

정도전이 유배되자 정몽주, 박상충, 김구용 등이 상소를 올렸고 이첨은 간신 이인임을 베어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비록 저항의 대가는 혹독했으나 세상은 이제 신진 사대부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유배생활을 통해서 현실을 통해 이론을 확인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가며, 이색학원 시절이래 꿈꿔온 고려 개혁 구성을 다듬고 또 다듬게 된다. 2년이 넘게 지나 차츰 유배된 자들이 정계에 복귀하게 되지만 정도전은 유배를 해제하나 개경에 들어올 수 없다는 명을 듣게 된다. 정치 활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에 정도전은 북한산 자락에 학원을 차리고 개혁사상을 전파하고 인재를 양성하지만 인근 재상가 사람들이 초막을 헐어버렸다. 그렇게 세 번이나 집을 옮겼다. 


[집을 옮기다]

오 년에 세 번 집을 옮겼는데

올해에 다시 옮겨야 한다.

들은 넒은데 초막은 자그마하고

산은 길고 길지만 고목은 성글어라.


밭 가는 농부는 서로 성을 물어오지만

옛 친구는 편지마더 끊어버렸다.

천지가 나를 능히 용납해주리니

표표히 가는 대로 내맡겨두자.


유배된 때로 부터 8년이 흐르고, 어느덧 나이도 40줄에 들어선 정도전은 결심하고 혁명의 주력군이 될 이를 만나러 간다.



◆ 고려 후기의 두 영웅 - 최영과 이성계


왜구들은 내륙까지 들어와 곳곳을 유린 했다. 이를 잠재운 것이 두 명장이었다. 60대의 노구이나 불패의 명장인 최영과 40대의 한창나이로 불패지장 이성계였다.

최영은 일찍이 젊어서는 원나라의 요청에 따라 장사성 반군을 토벌하는 싸움에 참전하여 중국 대륙을 누볐고, 김용의 난을 제압하였으며 홍건적의 싸움에서나 최유, 덕흥군이 원나라 군대를 이끌고 왔을 때에도 그의 공이 드높았다. 신돈 시절 유배생활을 겪기도 했으나 신돈이 죽자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당시 어린 왕이 시중 자리를 맡아달라 청하지만 시중이 되면 쉽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왜구를 물리칠 수 없다 하여 거절한다. 그 후 60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직접 선봉에서 홍산대첩을 거둔다.


권력의 핵이었던 이인임이 노환을 이유로 은퇴를 자청하자 72세의 최영은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고 이성계와 신속하게 행동한다. 당대의 실권자들인 임견미, 염흥방, 도길부와 그 일당들을 잡아 목베었다. 아내와 딸들은 관비로 삼았고, 어린 아들들은 임진강에 던져졌다. 당시 최영은 이인임을 변호해 줌으로써 이인임과 그 자식들의 목숨은 살려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왕은 소원대로 권신들을 몰아냈다. 최영은 늘그막에 권력의 정점에 섰고, 외곽만 맴돌던 이성계도 드디어 권력 핵심부러 진입했다."


◆ 요동정벌 - 위화도에서 회군하다.


명나라 사신 살해사건 이래 명과 고려는 오랫동안 긴장관계에 있었고 명은 계속 으름장을 놓았고, 고려는 마땅한 대책이 없어 고심했다. 더 나아가 홍무제는 공민왕 때 되찾은 쌍성총관부 관할지역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에 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의 결심을 굳힌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른바 4불가론으로 반대를 한다.


[4불가론]

첫째,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침이 엃지 못하고,

둘째, 여름에 군사를 일으킴이 옳지 못하며,

셋째, 왜구들에게 빈틈을 보이게 되고

넷째, 장마철인 가닭에 활에 입힌 아교는 풀어지고 전염병의 우려가 있어 옳지 못합니다.


이 내용은 정도전을 필두로 한 개혁파 신진 사대부들의 생각이라 짐작된다.


그렇지만 최영은 이성계의 주장은 묵살하고 왕을 설득해 요동정벌 구상을 밀고 나간다. 지휘체계도 8도 도통사 최영, 좌군 도통사 조민수, 우군 도통사 이성계로 세운다.


하지만, 우왕은 최영의 정벌군 참여는 반대한다. 자기 옆을 지켜달라는 요청이었다. 무모한 최영은 철없는 소망을 들어준다. 그렇게 총사령관은 남은 채 정벌군은 떠난다. 끝까지 4불가론을 고수하는 이성계에게 동원 가능한 모든 군사를 주어 보내고 자신은 홀로 남은 것이다.


이성계의 예측대로 장마가 시작된 탓도 있지만, 위화도에 다다른 군대는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하질 았았다. 또한 거듭 글을 올려 회군에 대한 명분을 쌓는다. 하여 발길을 돌리니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회군은 질서정연했으며 천천히 이루어졌다. 때를 맞춰 이성계의 가족은 일존의 몰모로 왕의 처소에 있다가 소리 없이 이성계군 쪽으로 달아났다. 회군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최영은 유배된 후에 처형된다.



◆ 조민수와 이색 우왕의 장자 창왕을 후계로 삼다


회군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조민수는 좌시중에 이성계는 우시중에 오른다. 왕은 변화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에 어둠을 틈타 내시 80여 명을 무장시켜 이성계, 조민수의 집을 급습한다. 무계획적인 도박은 실패로 끝나고 왕은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이에 후계 결정이 필요했는데 이때 조민수는 회군시 이성계와 약속한 다른 종친 중에서 후계를 세운다는 것과는 다르게 선왕의 장자인 창왕을 후계로 삼자 하고 이색과 의기투합한다. 이에 두 사람은 대비의 입을 빌려 폐위된 우왕의 아들을 세우니 곧 창왕이다. 이 때 나이 9세였다.


◆ 이성계파 정국을 장악하다 - 우왕, 창왕 유배,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후계 문제 결정에 있어 조민수와 이색에게 밀렸지만, 실권은 여전히 이성계 측에 있었다

그와 함께 종군하면서 공을 세운 퉁두란 등의 무장들, 회군의 막전막후를 연츨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도전, 남은, 윤소종등과 그들의 후배들, 그리고 또 한 사람 조준이 있었다.

조준은 권문세가 출신인데도 음서가 아닌 과거를 통해 벼슬을 시작했으며, 왜구 토벌에도 공이 컸으며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회군 후 이성계를 만나보고는 그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이성계의 천거로 대사헌에 오르고 그의 상소로 조민수는 유배형에 터해진다.


뒤이어 구세력들의 몰락에 이른느 사건이 불거진다. 최영의 친척인 김저와 정득후란 자가 강화도로 가서 우왕을 만나 이성계를 암살한 계획을 세우고 이성계에게 가지만 그들의 함정에 걸려 정득후는 그 자리에서 자살하고, 김저는 옥에 갖힌다.  가혹한 국문 끝에 김저는 '이성계 대감을 제거한 뒤 우현보, 변안렬, 왕안덕, 우홍수 등과 공모하여 우왕을 맞이하고 금상(차왕)은 이에 내응키로 했다' 고 자백한다. 그리고 급사한다. 그리고 거명된 사람들은 투옥되거나 유배되었다.


후에 흥국사에 이성계파 아홉 대신이 모였다. 이성계, 정도전, 조준, 심덕부, 지용기, 설장수, 성석린, 박위 그리고 정몽주. 그래서 결정 된 것이 우왕은 강릉은 유배지가 옮겨지고 창왕은 강화에 유배된다.

그리고 45세의 정창군을 보위에 올리니 고려의 마지막인 제34대 공양왕이다. 


이렇게 최군과 폐가입진(거짓 임금을 폐하고 진짜 임금을 세운다)의 명분 아래 행한 쿠데타 덕에 이성계파는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 토지개혁 실시


토지문제를 개혁하는 일은 정도전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개혁안이 통과되자 전국의 토지에 대한 조사사업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새로운 토지대장이 작성되었다. 과전법이 실시된 것이다. 1391년 1월의 일이다.

그 해 9월엔 이제는 한낱 종이쪼가리에에 불과한 옛 토지대장이 개경거리에서 불태워졌다. 뒤이어 조세제도도 크게 개선되어 백성들은 오랜만에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 고려를 지키려는 자 - 정몽주

공양왕이 이성계 세력의 집요한 공세에 맞서 고군분투할 때 왕의 발언에 옹호하는 자가 있었으니 흥국사 9공신의 한 사람이면서도 조금 다른 사람 바로 정몽주였다. 자는 달가요, 호는 포은이다. 

그는 이색 학원에서 공부하였는데 단연 출중하였다. 스승인 이색이 말하기를 '달가야 말로 이 나라 이학의 원조! 그의 말은 어떤 말이든 이치에 닿지 않는 게 없다.' 고 하였다.


일치감치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는데 세 번의 시험에서 세 번 모두 장원이었다. 원 사신 접대 문제로 신 진 세력이 이인임 정권과 한판 붙었을 때 그는 선두에 섰고,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몽주는 유배세력의 불순한 의도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이전에 떠난 사신들의 소식을 알 수가 없던 때였다. 이 때 정몽주는 정도전을 서장관으로 해서 명에 당도했으며 홍무제를 설득하여 억류되어 있던 전임 사절까지 데리고 돌아온다.


이성계와는 초년 관료시절 이성계 부대에 배속되어 참전했고 황산대첩을 거둘 때도 이성계 밑에 있었다. 둘은 서로 좋아했고 존경했다 정도전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하여, 선후배를 떠나 (정몽주가 5년 선배)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서로를 믿고 아껴온 사이였다.


하지만 정몽주는 고려를 개혁하고자 구세력을 제거하고 임금까지 바꾸면서 이룩한 개혁을 고려 안에서 하기를 원했고 정도전은 새 술은 새부대에 부라며 낡은 고려가 아닌 새로운 왕조 속에서의 개혁을 꿈꾸었다. 이런 서로 다른 노선은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 정몽주의 반격


이색과 조민수를 참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정몽주는 상황 정리에 나서며 결국 이색은 무죄, 조민수는 유죄로 인정한다는 왕의 명을 받게 된다. 이 후 추후 이일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자에 대해서는 무고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헌부의 우현보 탄핵 사실이 아직은 대외비 상태였는데, 정도전이 이 사실을 몇몇 측근에게 흘린 사실이 드러난다.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던 사건이지만 반 이성계파 대간들이 움직였고 결국 정도전은 공신녹권을 박탈하고 유배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 그 후 이색, 이숭인, 우현보, 심덕부, 이종학 등 이색 계열과 구세력들은 대거 유배지에 불러들여 조정의 요직을 장악한다.


◆ 드디어 발생하다. 역성혁명


양자 간의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던 와중에, 세자를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다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정몽주는 이를 계기로 상소를 올려 조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한다. 이에 공야왕은 조준, 남은, 윤소종, 남재, 조박등을 유배형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정몽주 측은 참수를 청한다. 이에 반해 이성계 세력은 유배에 반대하는 창을 한다.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은 정몽주 제거를 위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때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사위여서 일가이기도 하지만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한 변중량이란 이가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정몽주에게 전한다.


이런 암살 음모를 알고 있는 정몽주는 돌연 이성계 집을 방문하다. 아마도 할 수 있는 일은 다했고 어디 어떻게 흘러가나 보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던 중에 선죽교 위에서 이방원 일당에서 살해된다.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1392년 4월, 개경 선죽교. 그의 나이 56세였다.


이방원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를 제거했다. 이성계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도 생각했을 것이다.

아들의 냉혹한 결단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벼렸을지도 모른 다는 것을, 방원은 과거에 급제하여 변방의 촌놈 출신이란 콤플렉스를 덜어준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아들에 대한 아비의 신뢰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간 소소한 공이야 있었지만 이성계의 똑똑한 아들에 불과했던 방원은 일약 정도전 등과 어깨를 겨룰 만한 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성계는 아들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이에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성계파의 유배자들은 하나 둘 돌아오고, 그들을 탄핵했던 이들은 유배길로 올랐다.


왕으로부터 양위받는 형식으로 모양 좋게 이성계를 옥좌를 앉히고 싶었던 이성계 당 핵심들은 다른 방법을 택한다. 대비전에 찾아간 것이다. 대비는 공민왕 15년에 후궁이 되었으며 말년에 총기를 잃은 공민왕이 자제위 소년들을 시켜 범하려 하자 머리를 풀고 목을 매려 함으로써 저지했다.  우왕은 종종 안씨의 처소를 찾아 안씨를 곤란하게 했고 추문이 뒤따랐다. 우왕이 유배된 뒤 그의 아들 창왕을 세운 교지는 그녀으 몫이었고 창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것도 그녀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군주제 나라에서 임금 위에 누가 있으랴마는 왕대비 이름으로 왕을 폐한다는 교서가 발표되었다.


폐위된 왕은 원주로 옮겨지고, 옥좌는 그 후 4일 동안 빈자리가 된다.1392년 7월 16일 대비로부터 옥새가 전해지고 다음 날 수창궁에서 즉위식이 거행된다.


새로운 힘과 새로운 시대사상을 대표하는 이성계와 정도전, 둘이 만나 후 9년, 역성혁명을 통한 새 왕조 새 세상 건설이라는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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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선을 본적이 있으십니까? 무언가 이상하지 않나요?

보통 한 나라의 국경선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러하기에 보통 복잡한 곡선을 띄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국경선은 보시다시피 직선들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서구 열강들이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끼리 임의로 그어버린 국경선인 것입니다. 


1884~1885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회의 (베를린회의) 에서 콩고분지 지역의 영유권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서구 열강들이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을 공식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확정된 국가간 분할선은 원주민의 인종과 문화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순히 열강들의 이익만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현재까지 아프리카의 정치적 불안정과 분쟁, 내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는 서구 열강들의 일방적인 국경선 성립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정치,경제,사회적인 이유로 여전히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전세계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으며, 정치, 경제, 사회적인 복합적인 이유로 여전히 굶주리고 있으며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이런 아프리카의 모습을 분야별로 살펴보고,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아프리카의 정치와 정치인

아프리카의 과거 통치구조는 왕, 부족장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종족, 씨족 중심 사회입니다. 여전히 그 문화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왕과 부족장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바로 순종해야 하는 대상이지요. 또한 지배 계급들 역시 나라와 국민을 자신의 소유로 알고 있습니다.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서구식 민주주의와는 다른 구조 입니다.

하지만, 냉전이 끝난 후에 유럽과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민주주의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민주주의의 축제인 선거를 통해서였습니다. 분명, 선거는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힌 곳에서는 축제가 분명합니다. 아프리카에서의 그 축제는 때로는 아니 많은 경우가 갈등과 분쟁의 축제이기도 합니다. 선거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에 대항하고, 심할 경우 상대편 야당 주요인사들을 무참히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국제 원조, 그 허와 실

아프리카의 국제 원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들 나라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아주 큽니다.

보통 아프리카 국가들의 GDP의 약12~15%정도에 해당되고, 어떤 국가의 경우에는 거의 50%에 육박할 정도로 국제 원조는 아프리카 경제의 중심 축입니다. 

문제는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이 아닙니다. 원조되는 비용이 적절한 곳에 사용된다면 문제되지 않겠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이 통치 계급의 부정부패로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국민을 위한다기보다는 대통령과 일부 부족, 종족을 위해서 쓰인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은 한 끼 식사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만, 일부 정치인들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비자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국제원조는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는 국민들을 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 자생능력을 떨어뜨리고 계속적으로 원조에 의지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아프리카 정치인들이 평가받는 중요한 기준 중에 하나가 자기 지역에 얼마나 많은 국제 원조를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국책 사업을 한다거나 할 때 항상 자금 원조의 첫번째 대상이 국제 원조입니다.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자생 능력 결핍 현상 발생 등이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의 국가의 정치 청렴도 등에 따라 지원을 달리하고, 식량 지급 뿐망 아니라 교육 및 근본적인 것에 원조를 하고 있어서 그 방법론적인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의 식량 문제

아프리카에서 재배되는 농작물은 자국의 식량 생산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커피, 코코아, 땅콩 등 서구에 수출하기 위한 작물을 재배합니다. 이런 작물은 식민지 시기에 서구인들이 재배하기 시작하기 시작한 것인데 독립 이후에도 자국 내 식량생산 보다는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아프리카는 국제 곡물가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됩니다. 식량으로 먹을 수 있는 쌀, 밀 등의 곡물가 상승은 바로 아프리카의 기아에 직결되며, 상품작물의 가격 하락 또한 영향이 크게 미칩니다.

아프리카와 비슷한 시기에 독립을 한 아시아에서는 독립 이후 한 차례의 농업혁명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작물을 개발하고 비료 연구에도 힘을 실어서 어느 정도 식량확보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그런 단계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석유와 같은 지하자원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국내 식량 확보보다는 지하자원을 팔아서 식량을 얻었으며, 식민시대의 잔재인 상품작물을 식량 생산을 위해서 바꿀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당장의 이익을 바라본 소위 지배계층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노예화와 종족 갈등

아프리카에서는 스페인이 진출한 이후에 약 600년 동안 약 1,500 만명이 되는 인구가 신대륙 및 유럽의 국가에 노예로 팔려나갔습니다. 이렇게 노예로 팔려나가는 경우는 실제로 유럽인들이 흑인들을 잡아서 데려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서 얻은 포로들을 유럽인들이 가져온 럼부, 칼, 각종 장신도구 등 싸구려 물품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유럽의 물품에 익숙해진 부족장들은 다른 부족을 공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부족민들을 팔아서 싸구려 물품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국외로 유출된 인구는 아프리카의 발전 저해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노예로 유출된 인구 외에 아프리카 내부에서 종족 갈등 및 내전으로 사망한 인구 수는 약 50년 동안 1,500만명이 된다고 합니다. 실로 엄청난 숫자입니다. 르완다 대학살, 콩고 대학살 등 제노사이드가 일어난 것이 다른 나라가 아닌 같은 나라에서 종족 문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국가보다는 종족의 개념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처음에 언급한 국경문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구 열강들에 의해 만들어진 국경선은 같은 종족을 여러 나라에 분리시키기도 했고, 서로 반목하는 종족을 하나의 국가로 묶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내전 및 종족 갈등은 이미 예견된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프리카의 내전 - 나쁜 이웃들

아프리카의 내전은 단순한 내전이 아닙니다.  아프리카는 위에 언급하였듯이 같은 종족이 서로 다른 국가에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국가에서 내전이 발생할 경우 다른 국가의 같은 종족들이 지원을 합니다. 이제 더이상 내전이 아니게 됩니다. 국제사회는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에 무기수출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기는 끊임없이 공급됩니다.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해관계에 있는 유럽,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은 아프리카의 정부군 혹은 반군을 지원하면서 내전은 더 이상 내전이 아니게 됩니다.


아프리카는 여러 면에서 자의든 타의든 많은 갈등 요소와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소위 재스민혁명이라 불리는 아랍권의 민주화 물결은 알제리, 사우디, 예멘, 바레인, 시리아로 이어졌으며, 그 파급효과는 아프리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일부 국가에서는 자생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중입니다.
아프리카가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오고 빈곤과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와 아프리카 내부의 정치인들과 국민들의 각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국제사회는 물질적인 지원만이 아닌 교육과 같은 장기적인 개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곳에 더 많은 원조를 해주고 아프리카의 정치인들은 권력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국민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들 역시 같은 종족만을 의지하는 투표가 아닌 관심을 가지고 정치인들을 바라보고 원조에 의지하기 보다는 보다 자발적인 자세로 극복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내가 저런 곳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는 안도감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앞으로 새롭게 진출하기 위한 시장이기 때문' 도 아닙니다. 내 아이와 같은 아이들이 기아에 허덕이면서 죽어가고, 열악한 의료환경으로 간단한 질병에도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글자 하나 알지 못해서 선거 참여 역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현실을 알고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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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에 몰랐던 내한민국> 처음에 들었을 때 대한민국을 잘 못 들었는지 알았다. 다시 들어보니 내한민국이 맞았다. 
내가 들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처음에 이 책을 만난 것이 팟캐스트 <라디오 북클럽 김지은입니다> 에서 였기 때문이었다. 책과 작가를 소개하는 자리인데 이 책은 다른 역사를 다룬 것과는 다른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서 참신하게 다가왔다. 바로 우리의 눈이 아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외국인,  외국인 중에서도 서구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야기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대때 일본은 서구에 흑색선전을 퍼부었다. 바로 조선은 미개한 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이 나서서 개발을 시켜주고 근대화시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바로 침략자국가 아닌 조력국가로서 그들의 나라를 선전했으며, 당시 서구의 많은 사람들 또한 일본의 선전에 따른 인식변화와 고정관념이 생겨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맞다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서구인들의 많은 이들이 바로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당시 제국주의 국가의 사람들이었다. 바로 제국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이들이 많았다. 또한 이들은 한국인들의 실질적인 삶 속으로는 들어와보지 못하고 단순히 어떻게 하면 자원을 많이 가져갈 수 있을까하는 착취의 관점을 가진 이들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지식을 가진이들이 바라보는 한국인의 모습은 미개하고 다른 나라가 대신 나라를 통치해줘야 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적이고 정신적으로 성숙한 민족이었으며, 잠재력이 뛰어난 민족임을 그들도 알아가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일상적 표현은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활기차다. 얼굴 생김새는 가장 잘생긴 사람들을 기준으로 보아 힘이나 의지의 강인함보다는 날카로운 지성을 나타낸다. 한국인들은 확실히 잘생긴 종족이다. (이자벨라 버드 비숍)


피압박 국가가 작고 약하며 전통과 민족적 이상이 결여된 민족이 아닌 한, 대등한 관계에서의 동화란 이루어지기 어려운 법이다. 하물며 피압박 민족보다 더 열등한 민족이 4천년 역사를 가진 민족을 동화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과업이다.. 일본인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반면에 한국인의 능력을 과소 평가했다. (메킨지)


메킨지가 의병을 만났을 때

"우리 의병들은 무기가 없습니다.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용감하지만 당신이 알다시피 우리의 총은 쓸모가 없으며 이제는 거의 떨어졌습니다.우리는 무기를 살 수가 없습니다만 당신은 원하는 곳이라면 아무 곳이나 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우리의 요원으로 활약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무기를 좀 사다 주십시오."
매킨지는 의병들을 도울 수는 없었지만 한국인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우리나라의 구한말, 일제강점기의 시대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또한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표현하기를 꺼린다. 어쩌면 힘이 없던 그 시대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들은 다른 민족과 다른 우리 민족의 잠재력과 반만년의 역사속에 전해내려오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몸에 새겨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체화되어 있다. 
<스무살에 몰랐던 내한민국>, 아직도 잘 모르지만 "내한민국"이 기본이 되어야 함은 잊지 않아야 하겠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다문화가정이 상당 부분 차지하는 국가이다. 이런 시점에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냐? 라는 비판어린 시선을 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에 대해 작가는 머리말에 이렇게 말한다.

'민족'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시민의식을 품어야 할 오늘날, 한 종족의 '긍정성'을 끄집어 내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시민상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반추가 이루어진 이후에 더 성숙해진다고 믿고 있다. 정체성은 어딘가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나는 누구이고, 앞으로 누구일 것인가? 우리는 매력적인 인간이고 싶지 않은가? 우리의 정체성은 어느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도 유동적으로 계속 진화해 나가는 것이다. '조선'은 우리의 조상이기 이전에 '역사의 약자'였다. 한국인의 긍정성을 조명해 보는 것은 우쭐대고 싶어서가 아니다. 역사에 묻힌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고 우리의 자화상에 드리워있던 그늘을 걷어, 우리의 정체성에 유쾌한 자신감을 갖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과 어울릴 것 같은 동영상을 하나 추가해본다. (http://youtu.be/wygOocOS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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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2
건축은 '사람의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도 한다. 그릇은 그릇 자체보다도 무엇을 담느냐가 더 중요하다. 똑같이 생긴 그릇이라도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국을 담으면 국그릇이 된다. 하지만 보통 그릇이 똑같이 생기지 않고 담을 내용물의 특성에 따라 모양이 제각각이다. 밥그릇은 좁고 오목하지만, 국그릇은 좀 더 넓고 납작하다. 때로는 접시처럼 아주 납작한 그릇도 많이 쓰인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건축물 자체보다는 그 건축물에 사는 사람의 특성과 삶에 더 주목해야 한다. 이는 하드웨어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삶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삶을 담는 그릇의 의미로 본다면 사회적 교감이 잘되게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적 감정과 감각까지도 충분히 표현되고 발휘될 수 있도록 건축이 도와야 한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눈으로는 보아야 하고, 입으로는 먹어야 하고, 코로는 맡을 수 있어야 하고, 귀로는 들을 수 있어야 하고, 피부로는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것이다.

p167
시각장애인에게는 평소 위험요소가 많지만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살펴본다. 첫째는 '볼라드'라고 하는 차량이 보행로로 들어오지 못하게 설치해놓은 일종의 방해물이다. 자동차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볼라드는 대부분 화강석 돌덩이나 콘크리트로 제작한 뭉툭한 모양이다. 일반인은 그 사이로 아무 어려움 없이 다닐  수 있지만, 시작장애인에게는 그야말로 '지뢰'와 같은 존재이다. 대부분 걸려서 넘어지기 딱 좋은 무릎 높이인 것도 그 위험을 더하게 된다. 선진국에서는 볼라드를 둥근 파이프로 허리 높이까지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원래 목적인 차량의 보행로 진입을 막을 수 있고 사람이 무심결에 볼라드에 부딪히더라도 배 부분에 닿기 때문에 앞으로 고꾸라지는 일 없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

p226
우리나라 건물과 유럽 건물 사이에는 왜 수명 차이가 날까? 일반적으로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성 기후지역에 속해 있다. 따라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분명해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다고 말하지만, 건축물 처지에서 보면 정말 견디기 어려운 조건이 아닐 수 없다. 무더운 여름에는 40도에 가까운 더위를 이겨야 하고 추운 겨울에는 지방에 따라 영하 20도가 넘는 곳도 있으니 온도 차는 무려 50~60도를 넘나들게 된다.
우리나라 건물의 수명이 짧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여름에는 건축물이 더위 때문에 팽창하고 겨울에는 추워서 잔뜩 수축하니 제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어졌어도 수축과 팽창을 몇 십년 반복하면 오래 버틸 재간이 없다. 소위 건물이 골병이 든다 할 수 있다.

p228
일반적으로 건물을 이야기할 때 남방형, 북방형으로 나눈다. 남방형이란 더운 나라의 가옥형태를 의미하고 북방형이란 추운 나라의 것을 말한다.

타이를 비롯한 동남아의 주택들과 적도 인근에 있는 나라의 주택형식은 모두 남방형이다. 이들의 주택은 더울수록 지면에서 위로 올라가 마루를 설치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마루' 라는 말에는 '높다'라는 의미가 있다. 더운 지방에서 마루를 두어 바닥을 높게 설치하는 이유는 지면에서 멀어질수록 복사열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지면에서 아주 먼 곳에 있는 높은 산들의 만년설이 녹지 않는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지면에서 방사되는 복사열이 산 정상까지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눈과 얼음이 녹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바람을 통해 열을 식히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따. 마루 위의 열은 바람을 통해 식혀지고, 마루 아래의 다습한 공기 또한 바람의 영향으로 제거되는 효과를 보게 되어 시원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추운 나라의 주택일수록 지면과 가깝고 오히려 땅속으로 파고드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바람의 영향을 덜 받고 추위도 피할 수 있다. 온돌을 비롯한 난방장치를 설치해서 추위를 적극적으로 극복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주택형식을 '북방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한옥은 이러한 두 가지 특징인 높은 '마루'와 낮은 '온돌'을 같은 높이로 채택한 세계 유일의 주택 형식이다.  그래서 여름에는 시원한 마루인 대청에서 주로 생활하고 겨울에는 구들을 들인 온돌방에서 생활 했다.

p235

액체나 기체가 온도 차로 움직이는 것을 대류라고 하는데, 이 대류로 바람이 저절로 생긴다. 액체 또는 기체의 성질상 온도가 따뜻한 물질이 위로 상승하는데, 목욕탕 안의 물이 아래쪽보다 위쪽이 더 뜨거운 것은 대류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공기도 마찬가지이다. 공기가 데워져서 온도가 높아지면 따뜻한 공기는 대류현상으로 위로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원래 공기가 있던 자리는 밀도가 희박해졌기 때문에 근처에 있던 다른 차가운 공기가 저절로 끌려오게 된다. 이러한 공기의 움직임에 따라 '바람'이 생긴다.

한낮에 똑같이 햇빛을 받더라도 물질의 성질에 따라 온도가 다르다. 육지를 구성하고 있는 흙이나 바위, 모래 등은 빨리 데워지고 빨리 식는다. 그렇지만 바다를 구성하는 물은 천천히 데워지고 천천히 식는다. 그래서 한낮에는 빨리 데워지는 육지의 온도가 높고 바다의 온도가 낮으며, 반대로 밤에는 바다가 낮에 받았던 태양열을 육지보다 천천히 발산하기 때문에 바다의 온도가 육지보다 높다. 온도가 높은 곳의 공기가 위로 상승하게 되면 그곳의 공기가 희박해지므로 주변의 차가운 공기를 끌어들이는 작용을 하게 되면서 낮에는 온도가 높은 육지 쪽으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밤에는 온도가 높은 바다쪽으로 육지에서 바람이 불게 된느 것이다. 더 크게 보면 여름철에는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고, 겨울철에는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찬바람이 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겨울철 계절풍인 북서풍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나라는 지형의 특성상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1면만이 육지에 접해 있다. 이렇게 접해 있는 1면의 방향은 북서면에 비스듬히 있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등 큰 대륙이 북서쪽에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게 바로 이유가 되어 여름철에는 바다 쪽에서 남동풍이 불고 겨울철에는 육지 쪽에서 북서풍이 불어온다. 만약 우리나라가 대륙에 접한 위치가 지금과 다르다면 바람이 부는 방향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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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333   단군이 나라를 열다        
  1000 동이족, 중국 희화와 랴오등에서 영역 확대, 한반도에서 농경문화 이룩됨
  300 옛 조선에 한자 전래  
  221 대동강 아래 남쪽, 삼한의 나라들 일어남  
  194 위만 왕검성 공격, 위만조선 세움  
  108 한나라 군사 왕검성 공격, 위만조선 멸망, 한사군 설치  
  82 고구려족, 랴오둥과 한반도에서 한사군 차례로 축출  
  57 신라 시조 박혁거세 즉위, 국호를 서라벌(경주)이라 함  
  37 고구려 시조 주몽, 졸본 부여에서 즉위  
  18   백제 시조 온조, 위례성(서울 몽촌토성)에서 즉위    
기원후 3 고구려, 수도를 국내성(중국 길림성 집안현)으로 옮김  
  9 백제에 의해 마한 멸망  
  42 금관가야 수로왕 즉위  
  284 백제 아직기, 일본에 가서 태자의 스승이 됨  
  372 고구려, 전진의 승려 승도가 불교 전함  
  384 중국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 백제에 불교 전함  
  400 고구려 광개토대왕, 남쪽 왜구 정벌, 신라 구제  
  427 고구려, 국내성에서 대동강 가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김  
  475 고구려 장수왕, 백제의 수도 한성 함락시킴. 백제,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김
  502 신라, 순장을 금지하고 소갈이 실시  
  503 신라, 국호를 신라로 정함  
  528 신라 이차돈 순교, 불교 공인  
  532 신라, 금관가야 통합  
  538 백제,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김  
  552 백제, 일본에 불교 전함  
  598 고구려, 수문제의 30만 대군 격파, 계속 수군 격퇴  
  645 중국 당나라, 고구려 침략과 안시성 패배  
  658 중국 당나라 설인귀, 고구려 침략 패배, 백제,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멸망
  668 고구려,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멸망  
  674 신라, 경주에 임해전과 안압지 완성  
  675 신라, 당나라 주둔군 공격 승리, 삼국 통일  
  698 발해, 고구려 후예 표방하고 동모산에서 건국, 신라와 발해, 남북국 시대 엶
  751 신라, 석굴암과 불국사 창건  
  828 신라 장보고, 청해진 대사가 됨  
  900 진훤, 후백제 건국  
  905 궁예, 철원으로 수도를 옮김  
  918 고려 왕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 건국, 수도를 송악(개성)으로 옮김
  926 발해, 228년 만에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멸망  
  935 고려, 신라 그리고 태봉과 후백제를 멸방시키고 통일  
  943 왕건, '훈요10조'를 내림  
  958 과거제 도입, 동반-서반의 양반 성립  
  993 거란, 1차 고려 침입  
  1018 거란, 3차 고려 침입, 강감찬, 귀주에서 거란군 대파  
  1085 의천, 송에서 불경 1,000여 권을 가지고 고려에 돌아옴  
  1108 윤관, 여진 평정, 두만강 언저리 국경비 세움  
  1190 지눌, <정혜결사문> 발표  
  1193 이규보, <동명왕편> 지음  
  1231 몽골, 1차 고려 침입. 고려, 강화도로 수도를 옮김  
  1234 세계 최초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 간행  
  1236 팔만대장경 조성 시작  
  1238 몽골군, 경주 황룡사9층 목탑 불태움  
  1270 몽골과 화해로 개경 환도  
  1274 몽골-고려 연합군 일본 정벌 실패  
  1285 일연, <삼국유사> 편찬  
  1351 공민왕 즉위, 원과 대립  
  1363 문익점, 원에서 목화씨 가져옴  
  1377 최무선, 화약무기 제조  
  1388 최영, 랴오둥 정벌, 이성계 위화도 회군으로 집권  
  1389 박위, 쓰시마 정벌  
  1392 고려 멸망, 조선 건국  
  1395 조선 새 도읍지 한양 건설  
  1398 성균관, 문묘와 명륜당 건립  
  1401 일본 무로마치 막부, 조선에 사절 보냄  
  1403 주자소 설치, '계미자' 제작  
  1413 <태조실록> 완성  
  1418 세종 즉위  
  1434 앙부일구' (해시계) 설치  
  1443 일본에 통신사 파견  
  1446 훈민정음' 반포  
  1467 <경국대전> 간행  
  1560 이황, 도산서원 세움  
  1577 이이, 해주향약 실시  
  1592 일본군, 조일전쟁(임진왜란)도발  
  1594 이순신, 남해 일대에서 일본군 격파  
  1597 일본군, 다시 침입  
  1598 노량진에서 일본군 대파, 이순신 전사  
  1607 허균, <홍길동전> 지음  
  1610 허준, <동의보감> (세계문화유산 등재) 완성  
  1619 명나라 요청으로 후금 정벌군 1만 명 파병  
  1620 창덕궁 중건  
  1627 대금군 3만 명, 조선 침입  
  1636 대금, 국호를 청으로 고침, 조선 침입(병자호란)  
  1645 소현세자, 천주교 관련 서적 가지고 귀국  
  1653 네덜란드이 하멜, 제주도에 표류  
  1658 조선군, 러시아 나선정벌 파병  
  1668 하멜, 네덜란드에서 <제주도 난파기> 간행  
  1689 김만중, <구운몽>,<사씨남정기> 지음  
  1693 안용복,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 일본에 확인  
  1711 북한산성 수축 시작  
  1724 개혁군주 영조 즉위  
  1728 김천택, <청구영언> 편찬  
  1730 송진명, 백두산지도 제작  
  1753 이중환, <택리지> 저술  
  1759 안정복, <동사강목>편찬  
  1763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시킴  
  1769 유형원, <반계수록> 간행  
  1776 정조 즉위, 규장각 설치  
  1778 박제가, <북학의> 지음  
  1784 김홍도, <단원도> 그림  
  1788 천주교 금지하고 서적 불태움  
  1791 천주교도 윤지충, 권상연 처형  
  1796 수원 화성 완공(세계문화유산 등재)  
  1799 규장각에서 <홍재전서> 간행  
  1800 정조 죽음, 정순왕후 수렴청정, 천주교 박해(기해박해)  
  1811 홍경래 주도 평안도농민전쟁 전개  
  1817 정약용, <경세유표> 지음  
  1848 한국 연안에 이양선 출몰  
  1860 최제우, 동학 창도  
  1861 김정호, <대동여지도> 제작  
  1862 삼남에 농민봉기  
  1863 고종 즉위, 흥선대원군 등장  
  1866 평양 시민,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대동강에서 불태움  
    프랑스 동양함대 강화부 점령, 약탈 방화 (병인양요)  
  1871 미국 아시아함대 강화도 전투 (신미양요)  
  1873 고종 친정, 민비 실권 장악  
  1876 일본의 강요로 개항조약 성립  
  1879 지석영 최초로 종두 실시  
  1882 구식 군인 폭동, 조선-미국, 조선-영국, 조선-독일 통상조약 체결  
  1883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  
  1884 김옥균 등 갑신정변 실패  
  1885 서양병원 관혜원 설치,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배재학당 설립  
    영국함대 거문도 불법 점령  
  1889 유길준, <서유견문> 완성  
  1893 최초로 전화기 도입  
  1894 동학농민전쟁 및 청일전쟁 발발.   
    일본군 경복궁 강점과 친일내각 성립, 관보에 국한문 혼용  
  1895 일본군 경복궁에 침입해 민비 시해, 단발령 내려 강제로 삭발  
  1896 고종,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김  
    독립협회 결성과 독립문 기공과 종로 중심 만민공동회 활동  
  1897 국호를 대한으로 결정, 대한제국 성립  
  1899 서울 전차 개통  
  1900 경인철도 개통식, 부산 초량에서 경부철도 기공식  
  1902 국기 제정  
  1903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  
  1904 러시아-일본 러일전쟁 발발  
  1905 일본, 독도를 다케시마로 명명하고 시마네현에 편입.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 체결  
    미국과 일본, 가쓰라-테프트 밀약 체결(일본의 조선 침략 인정)  
  1906 의병 봉기, 이인직 신소설 <혈의누> 발표  
  1907 나라 빚 갚기운동 전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참석 자결  
  1909 나철, 대종교 창설. 안중근,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일본, 청과 간도신협약 체결(간도를 중국에 이양)  
  1910 한일병합조약 강제 체결, 조선총독부 설치  
    언론 사회단체 통제, 양반 유생들에게 은사금 지급  
  1911 성균관 폐지, 조선교육령 공포로 일본화 촉진  
  1912 창덕궁 박물관 준공  
  1913 철도호텔 준공  
  1914 호남선 완성,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915 상해 영국조계에서 신규식, 이상설 등 신한혁명당 조직  
  1916 일본신사를 대구 달성공원에 세움, 이후 각지에 신사 건립  
  1917 관부역락선(부산-시모노세키)정기 운항  
  1918 미국 워싱턴에서 안창호, 이승만 등 신한협회 조직  
  1919 고종 죽음,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문 발표, 3.1 운동 일어나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20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월간잡지<개벽> 창간, 만주 청산리전투 대승
  1921 러시아 적군, 한국 독립군 공격(자유시참변)  
  1922 어린이날 제정  
  1923 백정들 '형평사' 조직,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인 학살  
  1925 소록도에 나병전문병원 '자혜의원' 설립  
  1926 조선총독부, 경복궁 안의 새 청사로 이전, 경성제국대학 설립  
    순종의 국장을 계기로 6.10만세시위 일어남, 나운규 제작 영화(아리랑) 상연
  1927 경성방송국 개국, 민족운동연합단체 '산간회' 창설  
  1929 최현배 <우리말본> 간행, 사이토 마꼬토 조선총독 재임. 광주학생운동 일어남
  1931 만주에서 한국과 중국 농민들 충돌(만보산사건), 일본 관동군 만주사변 도발
  1935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 개봉, 총독부 신사 참배 강요  
  1936 안익태 <애국가> 작곡,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재패와 일장기 말소사건 일어남
  1937 독립단체 연합해 '한국광복전선'조직. 일본, 중일 전쟁 도발  
    소련, 조선 동포 20만 명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시킴  
  1938 조선총독부 방공훈련 전국에 실시  
  1939 조선인에 창씨개명 강요  
  1941 임시정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 설치. 일본군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 도발
  1942 조선총독부 구정 폐지, 조선에 징병제 실시  
  1944 여자정신대근무령' 공포, 정신대 동원  
  1945 조선총독부, 국민총동원 물자 공출실시. 건국준비위원회 발족  
    일본 연합군에 항복, 소련군, 북한으로 진주. 미국, 미국 군정청 설치. 
    이승만, 김구, 김일성 등 귀국  
  1946 미소공동위원회 개막과 좌우합작위원회 출범.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개원
  1947 중도파 여운형 암살. 유엔총회에서 남북총선거 통한 정부수립 결정  
  1948 남북협상. 제주 4.3 항쟁, 남북 정부 각각 수립, 여순사건 등 발생  
  1949 김구 암살  
  1950 한국 전쟁 발발. 미군 개입. 임시수도를 부산에 둠  
  1951 휴전회담 시작  
  1953 휴전협정 조인  
  1954 사사오입개헌' 으로 이승만 대통령 3선 보장  
  1956 북한 천리마운동 시작, 남한 경제 추월  
  1958 진보당 사건 조작  
  1959 경향신문' 폐간, 조봉암 사형, 재일교포 북송 시작  
  1960 3.15 부정선과 4.19혁명으로 이승만 하야. 제2공화국 출범  
  1961 5.16 군사쿠데타 일어남. 군사최고회의 발족  
  1962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1963 박정희 대통령 취임  
  1964 한일회담 반대시위 일어남. 베트남 파병 시작  
  1965 한일기본조약 조인  

 

1967 동백림간첩단사건 일어남  
  1970 오적필화사건 일어남. 경부고속도로 개통. 전태일 분신  
  1971 새마을운동 시작  
  1972 남북공동성명 발표, 유신 쿠데타  
  1973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1974 긴급조치 1~9호 발동, 인혁당사건 일어남  
  1975 베트남전쟁 종결  
  1976 판문점 도끼사건 일어남  
  1977 동일방직파업사건 일어남  
  1979 부마항쟁 일어남. 박정희 대통령 피살, 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  
  1980 광주민주항쟁 일어남. 전두환 대통령 취임  
  1982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일어남  
  1986 서울 아시안게임  
  1987 박종철고민치사사건 일어남. 6월 민주항쟁, 직선제 개헌, 노태우 대통령 당선
  1988 노태우 대통령 5년 단임 취임, 서울 올림픽 개최, 5공 청문회 열림  
  1989 문익환 목사 방북, 전교소 결성  
  1990 소련과 국교 수립  
  1991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1993 김영삼 대통령 취임  
  1994 김일성 사망  
  1995 지방자치선거 전면 실시  
  1997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 요청  
  1998 김대중 대통령 취임  
  2000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 김대중 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  
  2002 한일 공동 월드컴 개최  
  2003 노무현 대통령 취임  
  2006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 개최  
  2007 이명박 대통령 취임  
  2008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제로 촛물시위 일어남  
  2010 천안함 침몰 사건  
  2011 병인양요 때 약탈당했던 <조선왕조의궤>가 프랑스에서 돌아옴  
  2013   박근혜 대통령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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