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책을 읽어야 하는데, 손에 잘 잡히지 않아서 걱정인 사람들이 있다면 우선 재미있는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어떤 일을 위한 자료 조사를 위한 독서가 아니라 책을 읽고 싶어서 읽는 것이라면 첫번째 조건은 재미와 흥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은 관심이 가고 읽고 싶은 생각이 들어야지 의무가 아닌 재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책을 읽는데 어려움을 겪는 분에게 이 책은 상당히 추천할 만 하다.

주제는 '조선왕조실록'이다. 그런데 책의 형태는 만화책이다. 그리고 내용의 형식은 우리가 휴대폰으로 매일 사용하는 카카오톡 대화창이다.


무적핑크라는 이름으로 네이버웹툰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MBC TV 프로그램으로도 편성되어 방송되어지는 『조선왕조실톡』이다. 이 책은 그동안 옴니버스 형식으로 연재되어 오던 웹툰을 독자들이 읽기 쉽게 연대순으로 새롭게 편집해서 내놓은 책이다. 이 책은 총3권으로 '조선 패밀리의 탄생(1권)', '패밀리의 활극(2권)' , '패밀리의 빛과 그림자(3권)' 로 구성되어 있다. 아직은 1권만 출간되었고 나머지도 조만간 나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내용으로 쓰여진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수많은 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방의 작은 서재에도 조선시대 역사에 관련된 책이 십여권에 이른다. 한 마디로 '조선의 역사'에 관련된 책은 그동안 꾸준히 출간되어 왔고, 우리에게 익숙하고 평범하다. 이 말은 우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주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 점에서 나는 이 책 『조선왕조실톡』을 높게 평가한다. 기존에 익숙한 주제를 가지고 새로운 형식과 무적핑크(변지민)이름으로 책의 곳곳에 센스있게 표현한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항상 평범한 무엇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어 하는 이들,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 카카오톡 대화 형식과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이용한 센스


책 자체가 만화책이라보니 자칫 내용적으로 부실할 수도 있는데, 이 부분에서도 적절하게 역사해설을 담고,  만화의 재미를 유지시켜주면서 가볍게 느껴지지 않게 만들었다. 

평소에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이렇게 왕의 이름을 외워왔지만 여러 권의 책을 읽어도 전체적으로 조선의 역사를 개인적으로 정리하기가 힘이 들었다. 개별의 책들을 통해 어떤 사건을 이해할수는 있었으나, 조선의 전 역사에서 그런 사건들이 어떻게 엮여있고, 왕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항상 어렴풋했고 모호했다. 이런 면에서도 이 책의 구성은 이해하기 좋다. 각 왕들의 특성에 따라 몇 그룹의 패밀리로 구성해서 표현하는데 이 부분이 좋았다.





최근 여의도는 국정교과서 문제로 떠들석하다. 정부는 지난 12일에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교과서'라 명명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계획을 발표했다. 아마도 우리의 근현대사 부분에 대해서 왜곡될 가능성이 크기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조선왕조실톡』 이 책의 매력은 저자가 기존과는 새로운 접근방식과 해석방식으로 스마트폰에 익숙한 지금 세대에게 접근했고, 그것이 이어서 이렇게 출판물로 나왔다는 점이다. 역사라는 것은 사람이 기록하는 것이기에 절대로 주관적인 요소가 배제될 수 없다. 그러기에 다양한 견해의 역사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보수와 진보의 성향을 가진 역사책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선택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생각에 대해서는 근거를 가지고 끝없이 토론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자신의 의견에 대해 더욱 견고한 주장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국정교과서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올바른 교과서'라고 명명한 것을 가지고 가뜩이나 힘든 지금의 학생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바른' 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올바르다고 결정해버리면 그 틀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들은 올바르지 않게 되고, 올바르지 않은 것을 고쳐야 되고, 그리고 그것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배척되고, 이것은 곧 수많은 갈등을 야기시킨다.


'올바르다'는 것은 함부로 규정되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기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상대방과 계속해서 토론하는 길 밖에 없다.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왕이 붕어하신 이후에 실록청이 만들어지고 그동안 사관들이 각자 비밀리에 보관해오던 사초와 승정원일기등을 모아서 만드는데, 이때는 그 기록들을 통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역사의 보고가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큰 역사적, 지적 보물인지 모른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일에 반추해서 배울 점은 배우고, 배우지 않아야 할 부분에 대해서 반면교사로 삼아서 경계하라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그렇게 배워왔다. 그런데 왜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이들은 그것을 배우지 않을까 의구심이 든다.


마지막으로 얼마전 전우용 역사학자가 남긴 말로 글을 마친다.

"훌륭한 지도자는 역사를 바꾸고, 저열한 권력자는 역사책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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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이성계 - 변방 출신의 무장, 대중적 인기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세운다.

정도전 - 신진 사대부, 급진 개혁파의 기수로 이성계와 역성혁명을 이뤄낸다.

공민왕 - 고려의 재건을 꿈꾸었던 개혁 군주, 개혁히 실패한 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신돈 - 승려로서 공민왕을 도와 과감한 개혁정치를 펴 나가다 역모 혐의로 참수된다.

이인임 - 공민왕 사후, 우왕의 후견인으로 실권을 장악한 뒤 친원 보수정책을 폈다.

최영 - 전쟁영웅, 요동정벌을 추진하였으나 이성계의 회군으로 실각한 뒤 참수된다.

정몽주 - 역성혁명을 막기 위해 공양왕과 손잡고 이성계 세력과 대립하다 피살된다.

공양왕 - 고려의 마지막 왕

이색 - 고려말의 대 유학자로 역성혁명에 반대하였다.

이안사 - 이성계의 고조

이자춘 - 이성계의 아비

조민수 - 위화도 회군을 함께 했다.

조준 - 이성계의 왼팔

이방원 - 이성계의 5남


◆ 이안사 - 이자춘 - 이성계


고려 후기 1250년대 이성계의 고조인 이안사는 전라도의 가장 큰 고을 전주에서 삼척으로 간다. 이유는 당시 관기 때문에 고을 수령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북쪽 끝인 동북면으로 간다. 당시 전주에서부터 이안사를 따라나선 이가 170여 가구에 달한다고 실록은 전한다. 그래도 이안사가 어느정도의 리더십을 갖춘 인물임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이안사는 당시 동북면에서 어느정도의 세력으로 성장을 하고 몽고(원제국)으로 부터 관리가 된다.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은 가문의 명운을 건 결심을 한다. 당시 원제국이 눈에 띄게 약화되고 폐망의 그림자가 비춰지면서 이자춘은 개성으로 간다. 고려를 등진 지 100년 만에 이안사의 후손은 다시 고려 국적을 되찾는 것이다.

고려로 돌아온 이자춘은 공민왕의 밀명에 따라 원이 빼앗아 쌍성총관부를 두고 통치해 오던 동북면 지역을 되찾기로 하고 고려군의 공격에 내응하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이자춘은 동북면의 유력자에서 유일 패권자가 되었고, 원에 투항했던 반역자 집안에서 왕이 직접 하사한 집에 사는 공신의 가문으로 거듭나게 된다.


◆ 공민왕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아들로 11세에 볼모가 되어 원나라로 가서 10여 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또한 공민왕의 평생의 연인인 원나라의 노국공주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에 원나라는 그들의 지역정세에 따라 고려가 그들의 입장에서 안정될 필요가 있어서 그 인물로 공민왕을 선택하고 어린 충정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삼촌인 공민왕을 왕으로 세웠다.


예상과는 다르게 왕에 오른 공민왕은 친원세력인 권문세족의 수장인 기철과 그 일당을 숙청한다.

기철은 원제국 황후인 기황후의 올아비다. (공녀로 원나라 끌려와 원제국의 황후에 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


당시 공민왕의 개혁에 기득권 세력은 반발했으며 원의 급격한 약화에 따른 동북아 정세의 혼돈이 결정적으로 공민왕의 앞길에 장애가 되고 있었다. 원에 반기를 든 한족 반란부대의 한 갈래인 홍건적이 원의 토벌에 밀려 쫓기다가 고려에 쳐들어오게 되고, 차례로 여진, 원, 왜구들이 고려를 침범하게 된다.


◆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는 아비와 함께 5년을 개경에서 머물고 동북면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1361년, 고향으로 돌아온 이자춘은 세상을 뜬다. 그 해 겨울,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경까지 함락시킨다. 이에 궁성을 비우고 줄행랑을 쳤던 조정은 병사를 모집하여 수도탈환작년을 전개하는데 이때 이성계도 가병 2,000병을 이끌고 참여한다.


당시 이성계는 2,000명의 가병으로 그 몇 배의 전공을 세우고 가장 먼저 동대문을 돌파했을 뿐만 아니라 홍건적의 수장 및 장수의 목을 베었다. 이를 계기로 무명의 이성계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후에 원나라의 장수도 물리치면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당시 고려의 권신으로 공민왕에게 원한이 있던 최유가 원나라의 기황후를 설득해 군사 1만을 주어 고려로 들어간다. 이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려군은 초반에 기세가 밀렸으나, 이성계 부대의 활약으로 크게 물리치고 불채의 명장으로서 위신과 명성도 높아졌다.


◆ 혁명의 씨앗 - 목은 이색


고려 말의 대유학자, 목은 이색은 14세의 나이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원나라 과거에 응시 1,2,3차 시험에 각 1,1,2등을 한 당대의 수재이다. 모친의 연로를 이유로 그가 귀국하자 그의 집엔 공부를 하려는 새싹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고려 최고의 명문 학원이 되었다. 후에 신진사대부라 일컬어 지는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윤소종 등이 다 이색의 후학들이었어다.


그들은 100년에 걸친 무신란과 다시 100년에 걸친 원의 지배로 낳은 권문세족보다는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권문세족은 산과 강을 경계로 삼을 만큼 광대한 사유지를 확보했으며 이에 따라 일반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 졌다. 한 예로 권세가의 종, 곧 노비가 되면 납세, 국방, 노역 같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지지않게 되자 권세가들의 종이 되기 위하여 농민들이 찾아가게 되고 이에 따라 신분질서는 무너지고 권문세족의 세력과 재산은 늘어만 갔다.


권문세족과 더불어 대토지를 소유한 곳이 있으니 바로 사찰이다. 고려 건국과 함께 국교로 대접받아온 불교인 만큼 왕실이나 종친, 권세가로부터 기증받은 토지가 엄청났다. 결국 왕실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 공민왕의 개혁실패와 죽음


공민왕은 밖으로는 원의 지배를 물리치고 안으로는 권문세족을 제압해 토지집중 문제를 해결함과 아울러 부당하게 노비가 된 자를 면천시켜 양인 수를 늘림으로써 나라 재정을 건실케 하고 국방을 튼튼하게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엇다.

하지만, 끊임없는 외침과 권문세족의 반발, 그의 연인인 노국공주가 산고 끝에 죽으면서 무너져 내렸다.


1365년에는 한 승려(신돈)가 왕으로 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개혁을 추진한다. 신돈은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를 돌려주고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은 양인 신분을 되착제 하고 좌주, 문생들이 부정하게 합격시켜주는 폐단을 제거하고, 권문세가와 공신들에게 베풀었던 특전인 국자감시도 폐진한다. 

또한 성균관을 재건하였다. 성균관이 재건되고 성균관의 주요 인물들은 이색과 그의 제자들이 되었으며 신돈의 개혁 결과 최대 수혜자가 되었으며 이들이 바로 신진사대부였다.


하지만, 급격한 개혁과 신돈이 성공에 취해 갔으며 정적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1371년 신돈은 역모사건에 휘말리고 유배되었다. 4일 후에는 목이 잘렸다. 그의 죽음과 함께 고려 재건의 열정도 차츰 식어가기 시작했다.


1374년 9월에는, 공민왕은 어이없는 최후를 맞게 된다.  당시 자제위 (고관의 자제들 중 용모단정한 아이들을 골라 궐 안에 살며 왕의 시중을 들도록 한 특별기구)는 왕과 더불어 다양한 변태적인 해위를 하는데, 왕의 지휘 아래 후궁을 범하는 따위도 하였다. 후에 익비가 태기가 있다 하자. 이를 계기로 자제위를 죽이려 한다. 취중에서 한 말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말을 들은 내시 최만생이 자제위에게 알리고 자제위는 우발적으로 공민왕을 살해한다.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공민왕 사후, 총리격인 시중 이인임이 직접 진상파악에 나서고 가담자, 그들의 아비, 형제들을 포함한 일대의 피바람이 몰아쳤다. 공민왕은 죽기존에 신돈의 미모의 여종인 반야라는 여인과 잠자리를 갖고 아이를 낳았으며 그 아이가 '모니노'다. 모니노를 원자로 삼고 어미의 낮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이미 죽은 한씨와의 아들이라 한다.

그렇게 우왕(모니노)의 시대가 시작된다. 아니 이인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 어린 왕(우왕)의 후견인 이인임


이인임은 권문세족의 출신으로 벼슬생활도 과거가 아닌, 귀족 자제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었던 '음서'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는 정치적 처신이나 정치감각이 뛰어났고, 권문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신돈의 눈에 들어 개혁 실무 책임을 맡았고 신돈 제거시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일당이라는 이유로 숙청되었지만 그는 오히려 승진하였고, 어린 왕의 후견인이 되어 권력을 쥐게 되었다.


이인임의 측근들인 염흥방, 임견미 등이 요직을 독차지 하고 실세들의 집앞에는 뇌물을 싫은 우마차들로 가득했다. 이에 혁명 세력들은 기가 막혔다. 또한 명나라에게 사대를 표하는 동시에 집권세력인 북원과의 국교회복 또한 결정하며 국정의 혼란을 가져온다.


◆ 혁명을 꿈꾸는 정도전


정도전, 호는 삼봉. 경북 봉화 출신이다. 아버지 정운경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부상서에 이르렀던 인물이며 고려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기록될 만큼 치부와 세력 쌓기 같은 일엔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명문가인 우현보 집안 여종의 외손녀이다. 어머니 쪽 가계로 인하여 두고두고 귀족 출신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과거에 급제하고 빼어난 일솜씨로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며 30대 중반의 나이로 정4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하고 있었다. 당시 원나라 사신에 대한 접대를 정도전에 맡기니 정도전은 스스로 유배지로 떠나버린다.

정도전이 유배되자 정몽주, 박상충, 김구용 등이 상소를 올렸고 이첨은 간신 이인임을 베어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비록 저항의 대가는 혹독했으나 세상은 이제 신진 사대부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유배생활을 통해서 현실을 통해 이론을 확인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가며, 이색학원 시절이래 꿈꿔온 고려 개혁 구성을 다듬고 또 다듬게 된다. 2년이 넘게 지나 차츰 유배된 자들이 정계에 복귀하게 되지만 정도전은 유배를 해제하나 개경에 들어올 수 없다는 명을 듣게 된다. 정치 활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에 정도전은 북한산 자락에 학원을 차리고 개혁사상을 전파하고 인재를 양성하지만 인근 재상가 사람들이 초막을 헐어버렸다. 그렇게 세 번이나 집을 옮겼다. 


[집을 옮기다]

오 년에 세 번 집을 옮겼는데

올해에 다시 옮겨야 한다.

들은 넒은데 초막은 자그마하고

산은 길고 길지만 고목은 성글어라.


밭 가는 농부는 서로 성을 물어오지만

옛 친구는 편지마더 끊어버렸다.

천지가 나를 능히 용납해주리니

표표히 가는 대로 내맡겨두자.


유배된 때로 부터 8년이 흐르고, 어느덧 나이도 40줄에 들어선 정도전은 결심하고 혁명의 주력군이 될 이를 만나러 간다.



◆ 고려 후기의 두 영웅 - 최영과 이성계


왜구들은 내륙까지 들어와 곳곳을 유린 했다. 이를 잠재운 것이 두 명장이었다. 60대의 노구이나 불패의 명장인 최영과 40대의 한창나이로 불패지장 이성계였다.

최영은 일찍이 젊어서는 원나라의 요청에 따라 장사성 반군을 토벌하는 싸움에 참전하여 중국 대륙을 누볐고, 김용의 난을 제압하였으며 홍건적의 싸움에서나 최유, 덕흥군이 원나라 군대를 이끌고 왔을 때에도 그의 공이 드높았다. 신돈 시절 유배생활을 겪기도 했으나 신돈이 죽자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당시 어린 왕이 시중 자리를 맡아달라 청하지만 시중이 되면 쉽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왜구를 물리칠 수 없다 하여 거절한다. 그 후 60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직접 선봉에서 홍산대첩을 거둔다.


권력의 핵이었던 이인임이 노환을 이유로 은퇴를 자청하자 72세의 최영은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고 이성계와 신속하게 행동한다. 당대의 실권자들인 임견미, 염흥방, 도길부와 그 일당들을 잡아 목베었다. 아내와 딸들은 관비로 삼았고, 어린 아들들은 임진강에 던져졌다. 당시 최영은 이인임을 변호해 줌으로써 이인임과 그 자식들의 목숨은 살려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왕은 소원대로 권신들을 몰아냈다. 최영은 늘그막에 권력의 정점에 섰고, 외곽만 맴돌던 이성계도 드디어 권력 핵심부러 진입했다."


◆ 요동정벌 - 위화도에서 회군하다.


명나라 사신 살해사건 이래 명과 고려는 오랫동안 긴장관계에 있었고 명은 계속 으름장을 놓았고, 고려는 마땅한 대책이 없어 고심했다. 더 나아가 홍무제는 공민왕 때 되찾은 쌍성총관부 관할지역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에 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의 결심을 굳힌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른바 4불가론으로 반대를 한다.


[4불가론]

첫째,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침이 엃지 못하고,

둘째, 여름에 군사를 일으킴이 옳지 못하며,

셋째, 왜구들에게 빈틈을 보이게 되고

넷째, 장마철인 가닭에 활에 입힌 아교는 풀어지고 전염병의 우려가 있어 옳지 못합니다.


이 내용은 정도전을 필두로 한 개혁파 신진 사대부들의 생각이라 짐작된다.


그렇지만 최영은 이성계의 주장은 묵살하고 왕을 설득해 요동정벌 구상을 밀고 나간다. 지휘체계도 8도 도통사 최영, 좌군 도통사 조민수, 우군 도통사 이성계로 세운다.


하지만, 우왕은 최영의 정벌군 참여는 반대한다. 자기 옆을 지켜달라는 요청이었다. 무모한 최영은 철없는 소망을 들어준다. 그렇게 총사령관은 남은 채 정벌군은 떠난다. 끝까지 4불가론을 고수하는 이성계에게 동원 가능한 모든 군사를 주어 보내고 자신은 홀로 남은 것이다.


이성계의 예측대로 장마가 시작된 탓도 있지만, 위화도에 다다른 군대는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하질 았았다. 또한 거듭 글을 올려 회군에 대한 명분을 쌓는다. 하여 발길을 돌리니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회군은 질서정연했으며 천천히 이루어졌다. 때를 맞춰 이성계의 가족은 일존의 몰모로 왕의 처소에 있다가 소리 없이 이성계군 쪽으로 달아났다. 회군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최영은 유배된 후에 처형된다.



◆ 조민수와 이색 우왕의 장자 창왕을 후계로 삼다


회군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조민수는 좌시중에 이성계는 우시중에 오른다. 왕은 변화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에 어둠을 틈타 내시 80여 명을 무장시켜 이성계, 조민수의 집을 급습한다. 무계획적인 도박은 실패로 끝나고 왕은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이에 후계 결정이 필요했는데 이때 조민수는 회군시 이성계와 약속한 다른 종친 중에서 후계를 세운다는 것과는 다르게 선왕의 장자인 창왕을 후계로 삼자 하고 이색과 의기투합한다. 이에 두 사람은 대비의 입을 빌려 폐위된 우왕의 아들을 세우니 곧 창왕이다. 이 때 나이 9세였다.


◆ 이성계파 정국을 장악하다 - 우왕, 창왕 유배,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후계 문제 결정에 있어 조민수와 이색에게 밀렸지만, 실권은 여전히 이성계 측에 있었다

그와 함께 종군하면서 공을 세운 퉁두란 등의 무장들, 회군의 막전막후를 연츨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도전, 남은, 윤소종등과 그들의 후배들, 그리고 또 한 사람 조준이 있었다.

조준은 권문세가 출신인데도 음서가 아닌 과거를 통해 벼슬을 시작했으며, 왜구 토벌에도 공이 컸으며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회군 후 이성계를 만나보고는 그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이성계의 천거로 대사헌에 오르고 그의 상소로 조민수는 유배형에 터해진다.


뒤이어 구세력들의 몰락에 이른느 사건이 불거진다. 최영의 친척인 김저와 정득후란 자가 강화도로 가서 우왕을 만나 이성계를 암살한 계획을 세우고 이성계에게 가지만 그들의 함정에 걸려 정득후는 그 자리에서 자살하고, 김저는 옥에 갖힌다.  가혹한 국문 끝에 김저는 '이성계 대감을 제거한 뒤 우현보, 변안렬, 왕안덕, 우홍수 등과 공모하여 우왕을 맞이하고 금상(차왕)은 이에 내응키로 했다' 고 자백한다. 그리고 급사한다. 그리고 거명된 사람들은 투옥되거나 유배되었다.


후에 흥국사에 이성계파 아홉 대신이 모였다. 이성계, 정도전, 조준, 심덕부, 지용기, 설장수, 성석린, 박위 그리고 정몽주. 그래서 결정 된 것이 우왕은 강릉은 유배지가 옮겨지고 창왕은 강화에 유배된다.

그리고 45세의 정창군을 보위에 올리니 고려의 마지막인 제34대 공양왕이다. 


이렇게 최군과 폐가입진(거짓 임금을 폐하고 진짜 임금을 세운다)의 명분 아래 행한 쿠데타 덕에 이성계파는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 토지개혁 실시


토지문제를 개혁하는 일은 정도전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개혁안이 통과되자 전국의 토지에 대한 조사사업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새로운 토지대장이 작성되었다. 과전법이 실시된 것이다. 1391년 1월의 일이다.

그 해 9월엔 이제는 한낱 종이쪼가리에에 불과한 옛 토지대장이 개경거리에서 불태워졌다. 뒤이어 조세제도도 크게 개선되어 백성들은 오랜만에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 고려를 지키려는 자 - 정몽주

공양왕이 이성계 세력의 집요한 공세에 맞서 고군분투할 때 왕의 발언에 옹호하는 자가 있었으니 흥국사 9공신의 한 사람이면서도 조금 다른 사람 바로 정몽주였다. 자는 달가요, 호는 포은이다. 

그는 이색 학원에서 공부하였는데 단연 출중하였다. 스승인 이색이 말하기를 '달가야 말로 이 나라 이학의 원조! 그의 말은 어떤 말이든 이치에 닿지 않는 게 없다.' 고 하였다.


일치감치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는데 세 번의 시험에서 세 번 모두 장원이었다. 원 사신 접대 문제로 신 진 세력이 이인임 정권과 한판 붙었을 때 그는 선두에 섰고,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몽주는 유배세력의 불순한 의도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이전에 떠난 사신들의 소식을 알 수가 없던 때였다. 이 때 정몽주는 정도전을 서장관으로 해서 명에 당도했으며 홍무제를 설득하여 억류되어 있던 전임 사절까지 데리고 돌아온다.


이성계와는 초년 관료시절 이성계 부대에 배속되어 참전했고 황산대첩을 거둘 때도 이성계 밑에 있었다. 둘은 서로 좋아했고 존경했다 정도전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하여, 선후배를 떠나 (정몽주가 5년 선배)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서로를 믿고 아껴온 사이였다.


하지만 정몽주는 고려를 개혁하고자 구세력을 제거하고 임금까지 바꾸면서 이룩한 개혁을 고려 안에서 하기를 원했고 정도전은 새 술은 새부대에 부라며 낡은 고려가 아닌 새로운 왕조 속에서의 개혁을 꿈꾸었다. 이런 서로 다른 노선은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 정몽주의 반격


이색과 조민수를 참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정몽주는 상황 정리에 나서며 결국 이색은 무죄, 조민수는 유죄로 인정한다는 왕의 명을 받게 된다. 이 후 추후 이일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자에 대해서는 무고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헌부의 우현보 탄핵 사실이 아직은 대외비 상태였는데, 정도전이 이 사실을 몇몇 측근에게 흘린 사실이 드러난다.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던 사건이지만 반 이성계파 대간들이 움직였고 결국 정도전은 공신녹권을 박탈하고 유배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 그 후 이색, 이숭인, 우현보, 심덕부, 이종학 등 이색 계열과 구세력들은 대거 유배지에 불러들여 조정의 요직을 장악한다.


◆ 드디어 발생하다. 역성혁명


양자 간의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던 와중에, 세자를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다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정몽주는 이를 계기로 상소를 올려 조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한다. 이에 공야왕은 조준, 남은, 윤소종, 남재, 조박등을 유배형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정몽주 측은 참수를 청한다. 이에 반해 이성계 세력은 유배에 반대하는 창을 한다.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은 정몽주 제거를 위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때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사위여서 일가이기도 하지만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한 변중량이란 이가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정몽주에게 전한다.


이런 암살 음모를 알고 있는 정몽주는 돌연 이성계 집을 방문하다. 아마도 할 수 있는 일은 다했고 어디 어떻게 흘러가나 보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던 중에 선죽교 위에서 이방원 일당에서 살해된다.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1392년 4월, 개경 선죽교. 그의 나이 56세였다.


이방원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를 제거했다. 이성계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도 생각했을 것이다.

아들의 냉혹한 결단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벼렸을지도 모른 다는 것을, 방원은 과거에 급제하여 변방의 촌놈 출신이란 콤플렉스를 덜어준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아들에 대한 아비의 신뢰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간 소소한 공이야 있었지만 이성계의 똑똑한 아들에 불과했던 방원은 일약 정도전 등과 어깨를 겨룰 만한 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성계는 아들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이에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성계파의 유배자들은 하나 둘 돌아오고, 그들을 탄핵했던 이들은 유배길로 올랐다.


왕으로부터 양위받는 형식으로 모양 좋게 이성계를 옥좌를 앉히고 싶었던 이성계 당 핵심들은 다른 방법을 택한다. 대비전에 찾아간 것이다. 대비는 공민왕 15년에 후궁이 되었으며 말년에 총기를 잃은 공민왕이 자제위 소년들을 시켜 범하려 하자 머리를 풀고 목을 매려 함으로써 저지했다.  우왕은 종종 안씨의 처소를 찾아 안씨를 곤란하게 했고 추문이 뒤따랐다. 우왕이 유배된 뒤 그의 아들 창왕을 세운 교지는 그녀으 몫이었고 창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것도 그녀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군주제 나라에서 임금 위에 누가 있으랴마는 왕대비 이름으로 왕을 폐한다는 교서가 발표되었다.


폐위된 왕은 원주로 옮겨지고, 옥좌는 그 후 4일 동안 빈자리가 된다.1392년 7월 16일 대비로부터 옥새가 전해지고 다음 날 수창궁에서 즉위식이 거행된다.


새로운 힘과 새로운 시대사상을 대표하는 이성계와 정도전, 둘이 만나 후 9년, 역성혁명을 통한 새 왕조 새 세상 건설이라는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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