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페스트』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4년 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흔히들 '실존주의 철학의 입문서'라 말하는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난 후에 '실존주의'라는 철학과 '카뮈'라는 작가, 그리고 그가 태어난 '알제리'라는 지역적 배경이 궁금해서 한 동안 관련된 책과 영화들을 찾아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페스트』를 그가 말하는 부조리에 '반항'하는 작품 세계의 연장선으로 이해하고, 그 철학을 표현하기 위한 소설이라 생각했습니다. 

 

동일한 작품을 2020년 7월 4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확진자 10,963,552명, 사망자 524,261명이 발생한 현 시점에 다시 읽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부조리를 찾아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저항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너무나 명확한 부조리가 모든 사람 앞에 펼쳐져버렸습니다. 마치 한 번 어떻게 그 부조리에 맞서는지 지켜보겠다고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는 듯 합니다.

 

새로 읽은 『페스트』를 읽고 난 후에 처음으로 든 생각은 이 책은 소설이 아니고 어쩌면 르포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오랑이라는 도시의 봉쇄, 도청을 제외한 시설들은 환자 수용을 위한 시설로 변경되고, 쏟아지는 시체를 처리하기 위한 각종 수단과 장례절차 등은 마치 최근 전세계적으로 들려오는 뉴스의 일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지나갈수록 소설을 읽을 때는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의 삶들이 들어옵니다. 이번에도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납니다. 의사로서 페스트와 직접 그리고 끝날 때까지 헌신하는 '리유', 어릴 적 다른 죄수의 사형선고를 경험하며 삶에 대한 부조리를 느끼며 자신만의 목적을 찾아내고 보건대를 스스로 조직하는 '타루', 신문기자로 처음 도시 봉쇄 이후 도시를 탈출하기 위한 많은 시도를 하지만 결국 생각을 바꾸고 보건대에 참여하는 '랑베르', 페스트의 창궐으로 오히려 자신의 죄를 숨기며 살아가는 '코타르', 서기이자 보건대에 참여하고 한 여자를 사랑하며 그녀를 위한 편지를 쓰기위해 고민했던 '그랑' 등이 소설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타루'의 아버지는 재판관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 남자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타루'가 보면서 심한 내적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 장면을 카뮈가 『이방인』의 '뫼르소' 재판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뫼르소'도 그 재판에 대한 부조리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타루'도 다른 방식으로 부조리를 느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말 지금 몸소 전염병의 한 가운데에서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이 소설을 읽다보니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저려오기도 했습니다. 바로 오랑의 봉쇄가 풀리고, 기차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민음사 p384)
그들은 모두 서로를 꼭 껴안고 자기들 밖의 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이, 겉으로는 페스트에 승리한 듯한 얼굴로, 모든 비참함을 잊어버린 채, 그리고 역시 같은 기차를 타고 왔지만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서야 그 오랜 동안의 무소식이 그들 마음속에 빚어 놓았던 두려움을 현실로 확인해야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잊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 잊힌 사람들, 이제 동반자라고는 아주 생상한 고통밖에는 없게 된 사람들, 또 그 순간 사라져 간 사람의 추억밖에는 매달릴 곳이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서, 이별의 슬픔은 절정에 달했다. 이름도 없는 구덩이에 허망하게 묻혀 버렸거나, 또는 잿더미 속에서 녹아 없어진 사람과 더불어 모든 기쁨을 잃어버린 어머니들, 배우자들, 애인들에게 페스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다시 이렇게 되뇌어봐도 다시 너무나 아픕니다. 페스트는 끝나더라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모든 게 변해버린 사람도 있으니까요. 누군가는 가족을 만나고 위의 글 대로 모든 비참함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쩌면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나는 게 그 사람이 어쩌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연민과 그 아픔 만은 간직하려고 합니다. '리유'와 '타루' 처럼 헌신하는 삶은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랑베르'처럼은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그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도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리유'와 '랑베르'의 대화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민음사 p216)

"옳은 말씀이에요, 랑베르. 절대로 옳은 말씀이에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금 하시려는 일에서 마음을 돌려 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일이 내 생각에도 정당하고 좋은 일이라 여겨지니까요. 그러나 역시 이것만은 말해 두어야겠습니다. 즉,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하고 랑베르는 돌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관련 포스트]

2016/07/14 - [◆ 독후활동_서평/□ 소설,수필,시] - 『페스트』 그리고 알베르 카뮈

2016/09/04 - [◆ 책, 작가, 시, 글, etc/◇ 작가] - 알베르 카뮈, 부조리로 세상을 말하다.

2016/12/21 - [◆ 독후활동_서평/□ 소설,수필,시] - 아직 너무 젊은데, 『카뮈의 마지막 날들』을 읽고

2017/01/21 - [◆ 영화_시작 한 번/□ 영화 남기기] - '알제리 전투', 낯설지만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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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

그리고 또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 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中 -


불안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매몰되어 버릴까봐 

답답하다. 내가 하는 일이 '밥벌이의 지겨움'으로만 남아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초조하다. 언젠가 나도 교체되어 버릴 부속품으로 전락되어 버릴 수도 있을 테니

간절하다. 이 생각들에서 자유로워지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무언과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어쩌면 '왜?' 가 솟아오르는 지점이 아닐까.

그 유쾌하지 않은 기분, 이게 부조리를 인식하는 접점이다.

이것에 매달리자. 이게 삶을 바꾸게 만들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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