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전 : 조선 건국의 주역, 요동정벌을 준비하다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 태조 이성계 : 조선의 창업자로서 초대 임금, 아들의 반란으로 권력을 잃는다.
▷ 남은 : 왕자의 난 때 살해된다.
▷ 신덕왕후 강씨 : 자신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만드는 데 성공하지만 비극을 부르고 만다.
▷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 : 모두 왕자의 난 때 살해된다.
▷ 정종 : 얼떨결에 왕이 된 격구 마니아
▷ 홍무제 : 명의 초대 황제, 조선 정국을 뒤흔들어놓는다.
▷ 이방원 : 태조의 5남,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다. 태종
▷ 하륜 : 이방원의 핵심참모로 왕자의 난을 기획했다.
▷ 이방간 : 태조의 4남으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패하여 지방으로 추방된다.
▷ 이방원의 부인 민씨, 이숭인, 원천석, 길재, 변중량, 이무, 박위
▷ 왕자의 난 주요 공신들 : 이숙번, 이저, 이거이, 조영무, 민무구, 민무질
▶ 고려에서 조선으로
태조는 새 왕조를 함께 이끌어갈 내각을 구성, 발표한다. 배극렴, 조준, 정도전, 김사형, 남은, 이화, 이지란 등 철저한 공신 위주의 친위내각이었다. 그리고 명의 홍무제에게 나라 이름을 선택해 달라고 요청한다. (조선, 화령 중 하나로)
▶ 절개를 지킨 사람들
정도전, 남은, 조준이 청하기를 정몽주와 한때를 이뤄 태조세력을 몰살시키려 했던 이색, 우현보, 설장수 등 56인은 극형을 처해달라 요청한다. 이에 태조는 곤장형으로 하라고 하는데 정도전을 곤장을 치대 살아서는 안된다고 지시한다.
이렇게 떠난 이 중에는 도은 이숭인, 이종학, 김진양, 우홍수 등 8명이나 되었다.
도은 이숭인은 14세 어린 나이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16세에 대과에 합격한 수재이며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높였으며 중국과 관련된 외교문서는 거의 그의 손을 거첬다고 한다. 그는 스승 이색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고 젊은 날엔 정도전과 막역한 사이였으나 정도전과의 정치적 입장 차이로 결국 죽음에 이른 것이다.
이종학은 이색의 둘째 아들이며, 우홍수는 보수파의 수장 우현보의 아들이다. 이때 우현보는 아들 셋을 잃는다.
반 역성형명 진영의 정신적지주인 이색의 경우는 태조의 배려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후 태조가 불러 도움을 요청했으나 목은 이색은 강력히 거부한다. 태조는 그런 이색을 죽는 날까지 존중해주었다. 1496년 신륵사에서 69세의 나이를 세상을 뜬다.
야은 길재의 경우는 정몽주의 후배이자 제자이다.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한 적이 있는 태종이 훗날 벼슬을 주려하나 소신을 밝히고 낙향한다. 낙향 한 후에는 후세 교육에 힘써 제자들을 길렀는데 그 제자의 제자.. 들이 힘을 길러 장차 조선의 주인인 사림이 된다.
[길재의 시조]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운곡 원척석의 경우는 고려가 멸망할 기색이 보이자 치악산에 들어가 운둔했다. 한때 그에게 배운 바 있던 태종 이방원이 벼슬을 주려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고려말의 정치적 격변을 기록한 책6권을 남겼는데 전하지 않는다.
[원척석의 시조]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신규, 조의생, 임선미, 서중보 등 수십 명은 벼슬을 버리고 개경 북쪽 두문동이란 골짜기에 들어가 운둔했다. 이들은 끝끝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니 이들을 일러 '두문동 72현' 이라고 했다. (두문불출)
▶ 공을 세운 사람들
배극렴, 김사형의 경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느 편에도 분명하게 가지 않은 중간파 그룹의 원로들인데 태조는 그들을 1등 공신으로 책봉한다. 이는 새나라가 측근들만의 나라가 아님을 보여주어 중간파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당시 개국공신들에게 주어진 포상은 1등공신(토지150~220결, 노비15~30명), 2등 공신(토지100결, 노비 10명), 3등공신(토지70결, 노비7명) , 왕자들에게 과전 100결이었다. 과전이란 해당 토지에 대한 수조권, 즉 나라 대신 세금을 거두어 쓸 권리인데 세금은 수확의 10%이다. 하지만 개국공신들에게 주어진 토지는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땅이었다.
공신을 세우면서 태조의 아들들은 불만을 가지게 된다.
태조가 후에 신의왕후로 불리게 된 한씨와 열 다섯에 결혼해 6남 2녀를 낳는다. 첫째 이방우(진안군), 둘째 이방과(영인군, 정종), 셋째 이방의(의안군), 넷째 이방간(회안군), 다섯째 이방원(정안군, 태종), 장녀 경신공주, 차녀 경선공주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가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누볐으며 개국과정에서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
▶ 세자 책봉, 비극의 씨앗을 품다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은 권문세족 강윤성의 딸로 개국과 함께 현비에 봉해진 신덕왕후 강씨다. 그녀는 태조와 2남 1녀를 낳았는데 방번(무안군), 방석, 경순공주 였다.
조선을 건국하 고 태조는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을 불러 정식으로 세자 문제를 제기하는데 평화로울 땐 장자로, 어지러울 땐 공이 큰 아들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태조는 방번을 세자로 하나 한다. 며칠 뒤에는 대신들의 의견으로 방석으로 세자를 바꾼다.
왕조국가에서 후계, 곧 세자를 세우는 일은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문제다. 장성한 형님들을 제쳐두고 나이 어른 막내 방석을 세운다는 것은 원칙에서 벗어난 무리한 수였다. 신덕왕후 강씨의 욕심은 이해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태조와 정도전은 왜 방석을 태자로 삼았을까?
정도전이 생각하는 조선은 안정적인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 군자의 나라이다. 바로 재상중심주의 정치이다. 왕은 재상에 대한 인사권만 갖고 실제 국정의 주요 문제들은 능력과 도덕이 검증된 우수한 재상들이 책임지고 풀어나가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지나치게 똑똑한 정안군(방원) 보다 방석이 세자로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렇게 태조나 정도전의 생각이 어떠했건 방석은 세자로 책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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