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tion) 타조 사냥하는 방법을 아시나요? 


타조를 발견하면, 일단 타조를 쫓기 시작합니다. 근데 쫓는 방법이 있다고 해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계속 쫓아간다고 합니다. 타조 이 녀석이 지겨울 정도로 말이죠. 그렇게 계속해서 쫓다 보면 어느 순간에 타조가 자기를 쫓아오는 사냥꾼과 자기 사이에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긴장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대가 자기 머리를 처박는답니다. 그러면 머리를 처박고 있는 타조를 그냥 주워 오면 되는 거예요. 이게 타조 사냥이예요. (p242)


이 부분을 처음 읽을 때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조가 바로 나라면? 라는 생각을 하니 정말 섬뜩했습니다. 스스로 머리를 처박을 때까지의 수많은 고민과 공포 그리고 결국 땅에 쳐 박아버리는 절망이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나 사이에도 이렇게 일정한 긴장이 존재합니다. 이 긴장을 어떻게 관리하는가가  삶의 실질적인 모습이 되는 것이죠. 어떻게 해야 타조처럼 안타까운 일을 피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따라오는 이를 향해 뒤돌아 당당히 응시할 수 있을까요?



■ 온전한 '나'로 거듭나기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생각을 하거나 결정을 내릴 때 이념이나 가치관 혹은 신념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게 있습니다. 이념, 신념, 가치관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 어쩌면 대부분은 살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일 겁니다. 그럼 그런 사회와 문화 속에서 갈등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요?

저는 이럴 때 18세기 프랑스 철학자인 콩도르세의 말을 떠올려 보곤 합니다.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나 역시 앞으로 계속 고집할텐데 대체 바뀔 가능성이 없는 나의 생각은 어떻게 내것이 되었을까?"

우리는 처음에 모두가 이렇게 일정한 틀에 얽매여 있지 않는 원시성을 지녔습니다. 이념과 신념과 가치관으로 얽매여 있는 틀을 과감히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온전한 '나'로 거듭나게 됩니다.


'나'로 존재한다는 말은 내가 '우리'가 되기 이전의 오직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충동, 힘, 의지 활동성, 비정형성의 감각 등이 주도권을 가지고 행위 과정에서 최초의 동기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이성적이기 이전에 내적 충동성에서 출발한다는 뜻이지요. 나의 내적인 충동성에서 출발한다는 뜻이지요. 나의 내적인 충동성이 외적이고 이성적인 계산법으로 제어되기 이전의 감각에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p81)


■ 앎을 넘어서는 실천할 수 있는 주체력


왜 우리는 자유에 대한 지식은 있는데 자유롭지 못할까?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나는데도 왜 우리는 더 유연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더 행복하지 않을까? 이제 질문에 답을 해 봅시다. 우리한테는 지식을 지혜로 숙성시키거나 자기가 아는 지식과 경험을 유연함, 행복, 창의성 등과 같은 인격적 단계로 밀어 올릴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지식이 지혜로 넘어가고, 이미 있는 경험의 기억이나 지적 체계들이 삶의 동심원을 더 활발하게 펼쳐 줄 수 있는 활동의 힘이 갖춰져야 합니다.체계가 아니라 힘입니다! 그 힘을 저는 '주체력'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인문력'이라고 하면 너무 억지일까요? (p163)


독서를 하는 것은 일종의 간접경험으로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입니다. 단순한 앎의 단계죠. 독서의 진정한 의미는 읽은 후에야 나타납니다. 책을 읽고 답사를 하고, 미술 전시를 보고, 관련된 체험도 해보고, 사람들과의 인연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매개로도 이용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책을 바탕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타자를 이해하게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결국 이런 과정의 반복 속에서 앞을 먼저 내다 볼 수 있는 지혜와 통찰력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 육체성의 확인


몸을 움직여서 한계를 경험할 때라야, 자기를 극한의 경계선에 서 보게 할 때라야, 자기의 의식 속으로 오히려 자기 자신이 성큼 드러납니다. 자기가 자기를 꽉 채우는 이 경험, 오로지 자기 자신이 자신으로만 남는 일입니다. 자기를 몸으로 느낄 때 자신에게는 가장 현실적입니다. 운동은 단순히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대면하는 가장 극적인 장치입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자기 몸에서 분비되어 자기 코로 다시 돌아오는 땀 냄새, 심장을 터지게 할 것 같은 박동, 모두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자기에게 보여주는 극적인 증거들입니다. 운동하면서 보이는 자기보다 더 극적인 자기가 있을까요? (p267)


어떤 이들은 정신적인 활동을 육체적인 활동의 우위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육체는 정신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단순한 도구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독립적 주체가 되는 일은 육체성을 확인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육체를 통해서만 인간은 타인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구별이 됩니다. 이렇게 육체성을 근간으로 한 독립적주체로서의 온전한 '나'로 거듭나는 사람이 스스로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Question) 이제 다시 한 번 질문을 해봅니다. 타조가 잡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스스로 온전한 '나'로 거듭나라, 앎을 넘어서 실천할 수 있는 주체력으로 통찰력을 가져라, 자신의 육체성 회복을 통해 독립적 주체로 거듭나자. 어떻게 보면 다 뻔한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문학을 주제로 책을 내놓는 많은 이들의 책 속에서 등장하는 주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시 확인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이렇게 하지 못하는 제가 너무나 아쉬울 뿐입니다. 하지만 작심삼일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것에 도달할 거라 생각합니다. 특별한 방법은 없는 거 같습니다. 묵묵히 뻔한 이야기를 제 이야기로 만드는 수 밖에.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 아닌 것은 힘이 없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아름답지도 창의적이지도 않습니다.

나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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