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83 -
[열하일기]에는 열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강희제 이후 역대 황제들이 거처했던 하계별궁의 소재지로, 북경에서 약


230킬로미터 떨어지 하북성 동북부, 난하지류인 무열하 서안에 위치한다. 열하라는 명칭은 이 무열하 연변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한 것. 이곳은 한족과 이민족 간의 격전지로 유명한, 장성 밖 요해의 땅이자 '천하의 두뇌'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황제의 열하행은 "두뇌를 누르고 앉아 몽고의 목구멍을 틀어막자는 " 고도의 정치적 포석의 일환이었다.  건륭황제의 치세에 이르러 국경도시로서 융성번화의 극치를 달렸던 바, 황제는 '피서산장'이라 불리는 장대한 별궁을 지어 놓고는 매년 순행하여 장기 체류하곤 했다.

성군트리오
청나라, 아니 중국사가 낳은 최고의 황제 '트리오'. 바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이다.
연암의 열하행은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셋 가운데서도 강희제는 지략, 경륜, 학문 등 다방면에서 막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한 '왕중왕'이고, 옹정제는 변방의 하급관리까지 일일이 체크할 정도로 치밀하고 성실한 군주로 유명하다. 너무 일을 열심히 하다 '과로사'로 쓰러진 드문 케이스다. 그 둘에 비하면 좀 급이 떨이지기는 하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공덕에 힘입어 건륭제 역시 청나라를 세계제국의 중심으로 이끌어갔다. 연암이 만날 당시에는 총명과 위엄이 여전한데, 마음의 평정을 잃어 노쇠의 기미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 p131 -
"비슷하다 함은 이미 참이 아닌데" "눈 앞의 일 속에 참된 정취 있거늘/어쩌자고 머나먼 옛날에서 찾는가" "사마천과 반고가 다시 살아난대도/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진 않으리라." 어설프게 고문을 본뜨지 말고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삼라만상'에 눈뜨라는 것이다. 사마천과 반고의 문장이 위대한 건 바로 그런 경제를 확보했기 때문인데, 그걸 보지 못하고 그저 베끼기에만 골몰하다니, 그들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그들은 지금 시대에 맞는 전혀 새로운 문장을 만들지, 예전 자신들이 썼던 문장을 본뜰 리가 없다. 그건 이미 지난 시대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 p150 -
조반을 먹은 뒤에, 나는 혼자서 먼저 말을 타고 떠났다. 말은 자줏빛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더구나 두 귀가 쫑긋한 품이 참으로 만리를 달릴 듯 싶다. 창대는 앞에서 경마를 잡고 장보근 뒤에 따른다. 안장에는 주머니 한쌍을 달되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장,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록 한 축을 넣었다. 행장이 이렇게 단출하니 짐 수색이 비록 엄하단들 근심할 것 없었다.

연암은 이제 마주치게 될 미지의 세계를 낱낱이 담기 위해 붓과 먹, 공책 등을 들고서 여행을 떠난다.

- p193 -
만일 괴상스럽고 잡스럽고 우습고 괴이하며 거룩한 것을 구경하려면 먼저 선무문 안에 있는 상방에 가봐야 할 것이다. ...... 몸뚱이는 소 같고 꼬리는 나귀와 같으며, 약대 무릎에, 범의 발톱에, 털은 짧고 잿빛이며 성질은 어질게 보이고, 소리는 처량하고 귀는 구름장같이 드리웠으며, 눈은 초생달 같고, 두 어금니는 크기가 두아름은 되고, 길이는 한 발 넘어 되겠으며, 코는 어금니보다 길어서 구부리고 펴는 것이 자벌레 같고, 코의 부리는 굼벵이 같으며, 코끈은 누에등 같은데, 물건을 끼우는 것이 족집게 같앗 두루루 말아 입에 집어 넣는다. <상기>

- p199-
여러 역관이 연암의 방에 모여들었다. 모든 사람이 연암이 가져온 봇짐을 흘겨보곤 했다. 그 가운데 먹을 것이나 없을까 하는 표정이다. 곧 창대를 시켜 보를 끌러서 속속들이 헤쳐 보게 했으나, 별다른 물건이 없고 다만 붓과 벼루가 있을 뿐이었다. 두툼하게 보인 것은 모두 필담과 난초로 된 '메모 노트'였던 것. 그제야 여러 사람이 모두 허탈하게 웃었다.

- p218 -
그의 관심은 이렇게 벽돌, 가마, 온돌에서 시작하여 수레, 말로 이동한다. 수레와 말은 공간적 한계를 가로지를 수 있는 이동수단이기 때문이다. "대개, 수레는 천리로 이룩되어서 따 위에 행하는 것이며, 뭍을 다니는 배요, 움직일 수 있는 방이다. 나라의 쓰임에 수레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시급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ㅈ선에도 수레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조선의 수레는 바퀴가 온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자국이 틀에 들지 않으니, 이는 수레 없음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은 "우리나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고 한다. 언어도단! 수레를 쓰지 않으니 길이 닦이지 않는 것인데, 사태를 거꾸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사방이 겨우 몇 천리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인민의 살림살이가 이다지 가난함은, 한 마디로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 까닭" 이다. 물산과 자원이 서로 통하지 않고 막혀 있으니, 물량이 달리면 융통할 길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 p225 -
부에 대한 연암의 메시지는 이렇다. "원하건데 천하의 인사들은 돈이 있다 하여 꼭 기뻐할 것도 아니요, 없다고 하여 슬퍼할 것도 아니다. 아무런 까닭없이 갑자기 돈이 앞에 닥칠 때는 천둥처럼 두려워하고, 귀신처럼 ㅜ서워하여 풀섶에서 뱀을 만난 듯이 머리끝이 오싹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p285 -
드넓은 평원을 보는 순간, 그 엄청난 스케일에 압도당하여 연암은 이렇게 독백한다. "내 오늘은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라고, 삶의 통찰이 담긴 멋진 멘트다. 하지만 뒷통수를 내려치는 건 그 다음 대목이다. 말 위에서 손을 들어 사방을 돌아보다가 느닷없이 이렇게 외친다.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 번 울 만하구나."
1천 2백리에 걸쳐 한 점의 산도 없이 아득히 펼쳐지는 요동벌판을 보고 처음 터뜨린 그의 탄성이다. 통곡하기 좋은 곳이라니? 어리둥절한 동행자 정진사의 물음에 연암의 장광설이 도도하게 펼쳐진다.

이름하여 [호곡장론] 혹은 통곡의 패러독스! 천고의 영웅이나 미인이 눈물이 많다 하나 그들은 몇 줄 소리 없는 눈물만을 흘렸을 뿐,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금석으로부터 나오는 듯한 울음"은 울지 못했다. 그런 울음은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

사람이 다만 칠정 중에서 슬플 때에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되는 것이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버림에는 소리보다 더 빠름이 없고,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이다. 지정이 우러나오는 곳에는 이것이 저절로 이치에 맞을진대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리요.

- p290 -
소경을 볼 수 있는 자는 눈 있는 사람이라 소경을 보고 스스로 그 마음에 위태로움을 느끼는 것이지, 결코 소경이 위태로운 것 아니오. 소경의 눈에는 어떠한 위태로움도 보이지 않는데 무엇이 위태롭단 말이오.

- p293 -
시점변환이야말로 연암이 즐겨 사용하는 기법 중 하나다. 말하자면, 타자의 눈을 통해 조선의 문화나 습속을 바라봄으로써 익숙한 것들을 돌연 '낯설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예컨데 조선 사신들의 의관은 신선처럼 빛이 찬란하건만, "거리에 노는 아이들까지도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서" 도리어 연국하는 배우 같다고 한다. 또 도포와 갓과 띠는 중국의 중옷과 흡사하다.

연암이 변관해와 더불어 옥전의 어느 상점에 들어갔더니, 수십 명이 둘러서서 자세히 구경하다가 매우 의아하게 여기면서 서로 말하기를, "저 중은 어디에서 왔을까" 한다. 유학자보고 중이라니?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대체 중국의 여자와 승려와 도포들은 옛날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조선의 의관은 "모두 신라의 예제도를 답습한 것이 많았고, 신라는 중국제도를 본뜬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당시의 풍속이 불교를 숭상한 까닭에 민간에서는 중국의 중옷을 많이 본떠서 1천여 년을 지난 오늘에 이르도록 변할 줄을 모른다."

- p298 -
어떤 유의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사물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유일무이한 시점을 고집하는 한, 사물의 다양성과 이질성은 함몰되고 만다. 그가 보기에 초월적인 법칙은 없다. 가령, 사람들은 백로를 보고서 까마귀를 비웃지만, 까마귀의 검은 깃털도 해가 비치면 혹은 비취빛으로 혹은 석록빛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데도 "까마귀의 검은 빛에 가"뒀을 뿐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다시금 까마귀를 가지고서 천하의 온갖 빛깔에다 가두어" 놓고서 공연히 화를 내고 미워한다.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배치에 따라 유동하고 변화하는 차이들 뿐이다.

- p304 -
다음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진실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화의 끼친 법을 모조리 배워" "밭갈기, 누에치기, 그릇굽기, 풀무불기 등으로 부터 공업, 상업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쳐 먼저우리 인민들을 이롭게 한 다음, 그들로 하여금 채찍을 마련해 두었다가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매질할 수 있도록 한 연후에도 중국에는 아무런 장관이 없다라고 이를 수 있겠다."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인민을 이롭게 하는 일을 두루 마스터하는 일이 급선무고, 그 이후에야 무력으로써 오랑캐를 다스려야한다는 것이다.

- p314 -
이놈, 소위 사대부란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오랑캐의 땅에 태어나서 제멋대로 사대부라고 뽐내니 어찌 앙큼하지 않느냐. 바지나 저고리를 온통 희게만 하니 이는 실로 상인의 차림이요, 머리털을 한 데 묶어서 송곳같이 짜는 것은 곧 남만의 방망이 상투에 불과하니, 무어가 예법이니 아니니 하고 뽐낼 게 있으랴. 이제 너희들은 대명을 위해서 원수를 갚고자 하면서 오히려 그까짓 상투 하나를 아끼며, 또 앞으로 장차 말달리기, 칼치기, 창찌르기, 활 튀기기, 돌팔매 던지기 등에 종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넒은 소매를 고치지 않고서 제딴엔 이걸 예법이라 한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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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빌리고 나서, 집에 와보니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가 아니었다. 그 뒤에 붉은 색으로 2.0 이 붙어 있었다. 출판사는 그린비니까 무언가 잘못된 거 같지 않았다. 책을 펼쳐보니 호모부커스의 다음 편이라고 한다. 살짝 아쉽긴 하지만 이 책 역시 그린비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의 한 권이니 특별하게 다가온 인연이라 생각하고 다른 호모부커스들은 어떻게 책을 읽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야 겠다.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 걸까? 이 두 가지 물음표 마크에 최근에 생각이 많아졌다. 책을 읽는 방법은 각자 마다의 개성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책 읽기에도 기본이라는 것이 있고 호모부커스 처럼 책의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 남과 다른 비법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책을 한 권 한 권 읽어가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법' 같은 지름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 고 있다. 어쩌면 단지 남들은 어떻게 하나 보고 싶은 나만의 책에 관한 관음증 생각하면서 그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읽어 나갔다.

 이권우 작가외 25명이 각자의 독서관에 대해서 쓴 글이기에 짧게 짧게 그들의 생각들을 풀어내는데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방법도 다르지만 결국은 이것들은 모두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서로 모두 이어지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도 어느새 그 끈의 한 쪽을 잡고 있는 듯 했다. 어떤 이는 나와 책을 읽는 스타일이 많이 비슷해서 공감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이는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풀어내어 어느새 내 눈이 커지기도 했다.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라는 내 질문에도 조금은 이 책이 방향성과 방법은 귀띔해주기도 하였다. 책의 서문에 보면 이권우 작가가 "읽고 성찰하기, 그리고 변화하여 성장하기, 그리고 다시 글쓰는 사람이 되라." 라는 글이 있다. 누군가는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에 달라진 점이 없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라고 까지 하였다. 그만큼 내가 읽은 책에 대하여 느끼고 무언가에 대해서 사유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책 속에 이런 글귀가 있다. "읽는 책이 그저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도움이 되고 실용적이면 소용이 없다. 은밀히, 그러나 거대하게 변화하는 세계를 뚫어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귀띔해 주는 책을 읽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책을 읽고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또 다른 대답이기도 하다.

 아직은 책읽기를 통해서 인생에 대해서 성찰하려고 하는 시작점이다. 모든 시작점에는 이런 저런 경험을 통해서 몸으로 어떤 것이 나에게 맞는지 부딪혀 보는 수 밖에 없다. 지금은 그런 과정이다. 조금 더 부딪혀보고, 항상 열린 시선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2.0] 의 26인 필자 중의 한 사람인 안민용씨는 자신의 관심분야를 확인하고 조금씩 넓혀가는 방식으로 대부분의 도서관에서 사용하고 있는 한국십진분류표(FDC)를 사용한다고 한다.

000 총류
100 철학
200 종교
300 사회과학
400 순수과학
500 기술과학
600 예술
700 언어
800 문학
900 역사

 이런 분류로 보니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책은 너무 일부 분야에 치우쳐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 분야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내 관심사를 확장하고 새로운 분야를 찾아서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된다. 아마 몇 년 뒤에는 모든 분야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관심과 지식으로 조금더 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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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 이후에 읽는 두번째 책이다.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를 읽었을 을 때는 내 머리를 치는 생각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었다. 같은 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이렇게 사회의 보편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고 실천해 나갈 수 있구나! 라는 감탄을 했다.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가 교육, 공부, 학습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는 돈, 공동체, 교육이라는 주제로 전개를 하고 있다. 사실 내용의 전개 방식이나 그 컨텐츠는 사실 이 두책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도 될 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역시 또 새로운 생각을 제시하는구나! 하고 좋아라 하면서 이전 책과 너무 유사해서 다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에 '돈'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렸는데, 역시 돈에 대한 관점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것은 짐작은 하였지만 실상 돈에 대한 이야기 전개는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고미숙 작가에 대한 내 기대치가 높아서 생긴 일이다. 하지만 역시 그 참신한 컨텐츠와 공동체와 증여라는 방식으로 전개한 내용은 인상 깊었던 같다.

책 속에서 [가난뱅이의 역습],[버리고 행복하라],[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 이라는 또 다른 책에 대한 인용은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내 다음 읽을 책에 포함이 되었다.

[수유+너머 구로], 그리고 이전에 수원시 평생학습관을 통해서 알게 된 [문탁네트워크]에 대해 다시 한 번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나중에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관련 책을 모두 읽고 전체적으로 다시 한 번 글을 쓰는 기회를 만들겠노라고 작은 다짐을 하나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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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이 집에 도착했을 때, 비교적 얇은 책에 겉표지도 위의 모습처럼 살짝 장난기가 있어 보였다. 제목 또한 그런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책머리글을 읽어내려가면서 오호! 이책 괜찮은데, 이번에 괜찮은 책 하나 건졌네.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탁 쳤다. 역시 읽어내려가면서 오~~ 하는 작은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첫번째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이다. 우선 현재 교육시스템과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학교등에 대한 일침으로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은 학교와 학년, 학번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비슷한 나이대가 아닌 같은 나이의 일정한 집단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나이가 다른 사람들과의 일종의 벽을 만든 다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주변의 사람들을 잠깐 살펴보면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 동기들, 회사 동기들 이렇게 같은 나이 대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지낸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제도가 만들어낸 획일화된 것 중의 하나인 것이다.

예전 18~19세기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 박지원, 이덕무 등 이들은 나이 차이는 비록 10살을 넘나들었지만 이들은 앎과 지식이라는 토대를 통해서 우정을 쌓고 진정한 벗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제도는 이런 것을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짧은 글을 통해서 나도 아~! 내가 이런 것에 얽매여 사는 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실은 나도 선배, 후배 이런 것들에 대해 나름 중시할 때도 많이 있는데, 이것은 결국 내가 보기좋게 이 사회의 정책에 순응하고 동화되어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들에게 조금 더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벽을 만들어 사전에 차단한다는 느낌을 받아서이다.

두번째는 예전의 배움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배우고 싶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명문대, 지방대, 전문대 할 것 없이 실제적으로 교수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학생들은 별로 없다. 이것은 학생은 학교를 단순히 취업을 위한 하나의 통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뿐이고, 교수 또한 학생들과 함께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 소통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연구와 대학내 시스템내에서의 역할만을 하기 때문이다.

대학, 말그대로 (大學) 큰 학문을 배우는 곳이다. 단지 일정한 나이가 되고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다음의 길을 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큰 학문이란 과연 무엇일까? 취업에 필요한 스텍을 만드는 그런 곳이 아니란 말이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사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관찰하고, 앎과 철학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자연과 우주에 대해서 한 번쯤 고민해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성찰과 사유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지금의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앎, 지식을 가지고 서로 가르치고 배움을 받는 과정에서 '질문'이 없다는 것은 바로 제대로 된 앎과 지식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져있는 소크라테스의 많은 일화와 말들은 바로 제자들과의 문답법을 통해서 사유되고 만들어진 것 들이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단지 암기식, 주입식 시험에 나오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시험에 나오는 것은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하고 답이 있어야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런 것은 질문의 여지가 많지 않다.

이게 어떻게 제대로된 교육이고 소통을 통한 지식의 향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떤 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거나 스승, 멘토로 삼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의 깊은 사유와 사색을 이끌어낼 질문을 하고 그곳에서 그의 앎과 생각을 내 몸 속으로 체화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호모쿵푸스]는 이렇게 총체적으로 내 몸과 마음을 모두 사용하여 공부를 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준다. 공부에는 시기도 없을 뿐더러, 무엇을 배우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알기를 원해서 배우는 것이고 그 시기는 죽기전까지 아니 어쩌면 그 후에도 계속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좋았다. 공부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접근하는 방식, 고전과 인적네트워크를 통한 소통을 중시하는 내용 마음에 들었다.
고미숙 작가의 다른 책을 한 번 읽어봐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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