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에 의하면,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합리의 욕망이 있는 까닭에 세계의 뜻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세계는 인간이 알아볼 만한 아무런 뜻도 없다. 인간이 가진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합리'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것, 이러한 이율배반으로부터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카뮈의 부조리이며, 인간이 피하지 못할 숙명,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졸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습관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상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문제삼지 않는다. 그처럼 졸고 있으면 존재자의 의식일 수 없으므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부조리와 직면하여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 그것이 '반항'이다.

책의 마지막 표지를 보고, 작품설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카뮈가 29세 때, 지금 나보다 젊은 시절에 발표한 <이방인> 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라 하고 실존주의 문학이라 평한다. 그런데 부조리라는 말도 실존주의라는 의미도 나에게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실존주의 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인 것일까?
존재의 이러한 불가사의를 끝까지 질문하는 철학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실존주의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지만 그 공통점은
인간의 존재, 그것도 단독적인 개체인 나 자신의 존재에 계속 관심을 갖는 방법적 태도이다.

이방인은 한 번 읽어보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방인이라기 보다는 카뮈를 한 번 접해보고 싶어서였다.
이방인을 읽는 내내, 나는 그냥 무표정인 듯 했다. 왠지 주인공 뫼르소는 작가 카뮈를 닮고 항상 무표정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고,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아랍인을 죽이고, 재판을 받고, 그리고 사형대에도 그 무표정으로 올라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내가 있는 그대로 <이방인> 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사건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다루어진 셈이었다.
나를 참여시키지도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나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문득 나는 귀를 기울였다. "제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하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는 그런 투로 이야기를 하며, 나에 관해서 말할 때마다 '나는'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놀랐다. 나는 간수에게로 몸을 굽혀 그 이유를 물었다 ......... 나로서는 그것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놓고, 나를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고, 이를테면 그가 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방인> 의 내용의 진행과정을 보면 어머니의 죽음에서 부터 뫼르소 자신의 사형 구형이 있기까지 철저하게 뫼르소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진행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에 자고 싶어하는 뫼르소, 장례식 다음날 여자와 관계를 갖고, 재판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들 속에서 철저히 뫼르소 자신에 대한 생각을 나타낸다.

이렇게 철저히 자신의 존재만을 집중하는 것이 실존주의인가? 그렇다고 이러한 것이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 카뮈는 무엇을 말하려 하고 있던 것일까? 아직도 내 머리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누가 설명해줄 수 있는 분 얘기해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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