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읽고 난 다음 문득 든 생각이다.

최근에는 한참 알베르 카뮈에 빠져 있는데 『시지프 신화』의 까만 잉크를 읽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그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은 과연 어떠했을까 다른 블로그들을 찾아보았다. 누군가는 오전 중에 이 책을 읽고 세 번이나 눈물을 참았다고 한다. 지금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눈물을 쏟을 것 같으니 결과는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 안타까움을 충분히 달래준 이가 '밀란 쿤데라'이다. 책 날개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라는 짧은 소개 글이 적혀 있다. ' 아! 멋지지 않은가!' 어쩌면 그냥 '밀란 쿤데라 지음' 이라고 적혀 있었어도 충분한 작가 소개가 아니었을까. 알베르 카뮈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있게 알아보려고 하는 중인데, 이런! 갑자기 밀란 쿤데라가 이렇게 궁금해져 버리니 큰일이 나 버렸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은 책 제목은 기가 막히게 지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2년 전인가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번이 두번째 만남이다. 200페이지도 안 되는 길지 않은 소설인데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에 혼자 쇼파에 앉아 환호를 지를 정도였다. 그 때 기분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쿤데라에게 제대로 당했네!' 이다. 


『정체성』은 샹탈과 장마르크 두 연인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노르망디 해변가의 작은 도시의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샹탈이 먼저 도착하고, 하루가 지나 장마르크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샹탈은 해변가 근처로 산책을 하던 중 기분 좋지 않은 경험을 하고, 장마르크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장마르크는 걱정스레 그 이유를 물어보는데, 샹탈은 그 이유가 아닌데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그리고 이 말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간다. 


『정체성』의 정체성은 무언가 깊이 농축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길지 않지만 그 속에 이야기가 한 순간도 질리지 않게 꽉 들어 차 있다.

동시에 이 책의 독특한 매력인 두 주인공 샹탈과 장마르크의 사유가 깊이 새겨나온다.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세계관이며 동시에 우리들에게도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내면의 감정을 쿤데라는 깊이 들여다 본다.



샹탈, 그녀는 일상 속에 있지만 자유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 속에...


아들의 무덤 앞에 섰다. 그녀는 거기에 가면 항상 그에게 말을 했고 그날도 자신을 해명하고 정당화할 필요성을 느낀 듯 아들에게 얘기했다.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처럼 될 수 없었을 거야.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니.아기를 갖고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아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가 저지르는 바로잡을 수 없는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거란다. 너의 죽음을 통해 너는 너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내게서 앗아 갔지만 동시에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자유로워졌단다. 내가 감히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네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암울한 생각이 너에게 어떤 저주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네가 나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깨달았단다. 너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 내가 결국 받아들이고 만 끔찍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p68)


그녀는 장마르크와 만나기 전에 한 남자와 결혼을 했었고,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들을 먼저 가슴에 묻게 되었고, 지금의 샹탈이 되었다. 그녀도 알고 있다. 아들이 만약 살아있었더라면 아마도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누구나 결국 하나의 삶 만을 살 수 밖에 없다. 다른 삶은 정말 '만약' 이라는 세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모습들은 감춰진 채 살아갈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 대목을 읽는데 이것만으로도 샹탈의 내면을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샹탈은 유모차를 밀고 동시에 한 아이는 업고 한 아이는 안고 가는 아빠를 유혹하는 상상을 해 본다. 부인이 쇼윈도 앞에 멈춰선 틈을 타 남편 귀에 약속 시간을 속삭여 보는 것이다. 그는 어떤 행동을 할까? (중략) 샹탈은 이런 발상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유쾌해졌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남자들이 결코 더 이상 나에게는 한눈을 팔지 않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다. (p19)


그녀 앞의 남자는 거만하게 젊었고 그녀의 불쌍한 육체를 거만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불쌍한 육체를! 젊은 남자의 시선을 받으니 자신의 육체가 그 시선 아래 환한 세상에서 빠른 속도로 늙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p114)


그녀는 자신이 장미의 향이 되어 남자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상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보다 어린 장마르크와 살면서 그녀 자신의 여성성에 대해서 자존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이름 모를 이의 편지를 받으면서 다시 여자로서 설레이기도 하지만 분노에 차기도 한다.



장마르크, 존재와 관계 대한 스스로에 대한 질문


장마르크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와 관계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 


"다 용서했지.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지난번 그를 더 이상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나서 느꼈던 이상한 감정을 당신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지. 나는 그때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런 내가 흡족하기까지 했어. 그런데 그의 죽음이 이런 감정을 전혀 바꿔놓지 못하는 거야." (p53)


장마르크는 자기가 세계와 맺고 있는 유일한 감정적 관계가 그녀라고 생각했다. 죄수들, 박해받는 자들, 굶주린 자들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그들의 고통에 개인적으로 절실하게 감동받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그는 안다. 샹탈이 그들 입장이 되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내란 중 강간당한 여자들이 있다고? 그는 강간당한 샹탈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를 무관심에서 해방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다. 그가 동정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라는 매개를 통해서일 뿐이다. (p98)


장마르크는 한 친구와 어떤 이유로 관계를 접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했지만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친구에 대한 애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형식적인 어쩌면 그보다 더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를 세상에서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어쩌면 샹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두 사람의 관계에서 나이가 더 적은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과의 관계의 고리가 끊어지는 순간을 생각해보니 전혀 그렇지 않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언젠가는 이방인 혹은 떠돌이로 떨어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학업을 포기한 것은 실패가 아니었어. 그때 내가 포기한 것, 그것은 야심이었어. 나는 어느 날 돌연 야심 없는 남자가 되었던 거고 그 바람에 나는 이 세계의 변두리에 놓인 거였어. 더욱 끔찍한 일은, 내가 그 외 다른 곳에는 있고 싶지 않았다는 거지. 거기에서 떠나고 싶지 않으니 다른 어떤 위협도 무섭지 않았어. 그러나 아무런 야심도 없이 성공하고 인정받고 싶어 안달복달하지 않으면 당신은 몰락의 문지방에 턱하니 걸터앉게 되는 거야. 나는 거기에 정착했고 사실 아주 편했지. 정착하긴 했지만 그곳은 어쩔수 없이 추락 직전의 문턱이었어.  (p95)


그는 무척 피곤했고 틀림없이 이런 식으로 시작된느 것이다. 어느 날 벤치 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가 해가 떨어지면 잠드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느 날 떠돌이 틈에 끼이게 되어 그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p163)


거리에서 구걸하는 어떤 한 남자를 보면서 그는 그 사람이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자신이 비슷한 길로 갈 때의 느낌을 기억하기에 어쩌면 더 연민이 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 추락 직전의 문턱에서 벗어나야 함을 또한 알기에 벤치에 누우려 했다가 허리를 세우고 다시 앉았는지도 모른다.



정체성 그리고 장자의 호접몽


어쩌면 이런 두 인물 간의 갈등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따라가다 보면 장자의 <호접몽>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조금 뜬금 없긴 하지만, 아마도 책을 읽고 나면 생각날지도 모르기에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를 잠시 소개하며 다시 한 번 감상에 젖어 본다.


내가 지난 밤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날아다녔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나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버렸더니 나는 나비가 아니고 내가 아닌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아까 꿈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는 내가 나비인지도 몰랐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분명 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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