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작가 위화의 책을 찾았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책이 있더군요. 제목은 『살아간다는 것은』 입니다. 한 참 동안 의자에 앉아 읽어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한 겁니다. 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데, 분명히 내가 들어본 내용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서재에 꽂혀 있는 위화의 『인생』이라는 책을 꺼내서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중고서점에서 새롭게 찾은 『살아간다는 것은』은 『인생』과 같은 책이었습니다. 처음에 『살아간다는 것은』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인생』으로 제목을 바꾸어 출간되었네요.


소설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한 번 읽으면 다시 읽지 않는 편 인데 이런 우연이 찾아왔으니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그 소설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기억들이 저 깊은 내면의 서랍 속에서 고개를 듭니다. 복귀라는 노인의 일생을 다룬 내용인데, 그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오늘은 소설 속의 내용 보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소설 속의 간단한 내용은 예전에 적어둔 『인생』의 감상평(http://zorbanoverman.tistory.com/472)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그 일상에 맞추어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 때는 무언가를 생각할 시간을 가지기가 힘듭니다. 예전부터 무언가를 진지하고 조금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마다 그런 방법은 다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조용히 글을 쓰는 시간이 가장 깊이 생각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민이 있거나, 생각이 깊어지거나, 한 동안 아무 생각없이 멍하게 지냈다고 생각이 되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글을 쓰기 위해 손이 갑니다. 몸이 아프면 열을 내면서 신호를 보내듯이, 마음이 아프면 저에게 이렇게 글을 써 보라고 나름의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책 제목 그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하는 걸까요?',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돌아오는 내일 아침에는 또 무엇을 해야할까요?'


한 사람의 삶은 수 없이 많은 변수에 의해서 바뀌어 갑니다. 어떤 변수는 스스로 통제가 가능하고, 어떤 변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변수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다른 결을 가지게 되고, 서로 다른 색과 향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전제 자체가 통제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겠네요. 단지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내 삶에 파고들더라도 그 변수에 무너지지 않도록 어떤 대비를 해야 할 거 같습니다. 매 겨울 마다 어떤 감기 바이러스가 유행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독감 백신 주사를 접종하듯이 통제가 힘들어 보이는 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범위로 조금씩 끌여들여야 할 거 같습니다.


이제는 통제 가능한 변수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부터 어른들이 수 없이 질문해 왔던 '꿈이 뭐니?' 와 같은 질문을 다시 듣는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옵니다. 과연 그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하면서 통계와 평균에 나를 포함시키면서 면죄부를 받으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복귀'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변수로 인해 어머니, 아내, 아들, 딸, 사위, 외손자가 먼저 삶을 떠났지만, 먼저 떠난 이들을 그의 손으로 묻어 줄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합니다. 그리고 거의 도살 직전에 있던 늙은 소를 데리고 오면서 자기와 같은 이름을 지어주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아내 옆에 묻어줄 거라는 기대가 있기에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래서 언제될 지 모르는 그의 마지막을 위해 베개 밑에 돈을 조금 놓아둡니다. 자기를 거두어 줄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인 것이죠.


아직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정말로 무엇인지? 꿈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저로서, 일을 하면서의 제 모습으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금부터 할 수 있는 것들을 사소하지만 하나씩 적어두고, 실현해 나가는 것이 지금부터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영원회귀'가 생각이 납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자신이 살았던 삶을 반복해서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이고, 제가 사는 지금의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만들어 갈 첫 번째 삶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자신이 살아왔던 지난 삶들을 곱씹고 회상하며 한 번 더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 회상이 흐뭇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직 희미하고 확실히 어떻게 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씩 하나씩 시간을 내고 수 없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다 보면 언젠가는 제 스스로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에 대한 물음에 조심스럽지만 나름의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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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책을 읽으면서 궁금한 게 많았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생각을 하며 세상을 살아갈까? 하는 궁금증이 하나씩 생겼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그의 작품에 놀라고 매료되었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나온 그의 책들을 모두 읽어보아야 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작가의 전작을 읽어야 겠다고 마음 먹은 게 무라카미 하루키와 박범신 두 명이 지금까지의 전부인 듯 하다.

 

지금까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읽은 작품들의 작가를 열거해 보면 김진명, 황석영, 정유정, 천명관, 황정은, 김민규, 조정래, 박범신 정도였다. 물론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아직은 만날 계기가 되지 않아서 접하지 못한 것은 너무 많아 말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박범신 작가의 작품이 너무 진하게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본성의 미세한 지점까지 파고드는 부분은 너무 예리해서 아프기도 하다. 사람들이 누구나 알지만 표현할 수 없는 그것들을 어쩌면 그는 과감히 표현할 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금》을 읽으면서는 몇 번이나 혼자 책을 읽으며 눈물을 떨구었는지 모른다. 그냥 많이 아프고 쓰렸다.

그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근하며 그들의 내면  속에 떨어진 작은 나뭇잎 하나의 자그마한 움직임도 민감하게 잡아낸다.

 

p198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에서

 

런 박범신 작가가 좋아졌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제목은 《산다는 것은》 이다. 

<존재의 안부를 묻는 일곱 가지 방법>이라는 부제를 담고 있는 그의 에세이를 읽고 나서 박범신이라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이 다소는 풀리는 것 같았다. 글을 쓰는 삶, 산 그 중에서도 히말라야를 사랑하는 삶, 항상 젊은 낙지, 문어(?) 한마리를 가슴 속에 안고 사는 삶, 봄꽃에 홀로 기뻐하며 소주 한 잔을 하는 그의 삶이 글을 통해 다가왔다.

 

p68

그러나 젊은 날, 자기 지향을 오지게 쫓아갈 수 있는 동력은 안정감보다 필연적으로 불균형하게 드러나는 내적 분열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나는 아직 수정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매사 상대적인 관계로써 안정감을 확보한 '젊은 그들' 보다 여전히 내부적 불균형 때문에 불편하게 살고 있는 '늙은' 내가 오히려 덜 권태롭고 덜 외롭기 때문이다.

 

p172

불타는 사랑이 없다면 누가 평생 남들 자는 시간에 홀로 깨어 앉아 원고지와 한사코 마주앉아 있겠는가. 밤새워 원고를 쓰고 난 아침에 아내는 곧잘 '당신 일하는 데 혼자 자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럴 때 내 대답은 이렇다. "미안하기로 치면 내가 미안하네. 왜냐하면 당신 재워놓고 밤새 내 주인공과 뻐근하게 연애하고 있었거든."

 

그는 무엇보다도 뼛 속까지 작가이다. 그가 절필선언을 하고 글을 쓰지 않았던 시절이 그는 편했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밤새워 원고를 쓰며 주인공과 뻐근하게 연애를 한다는 그는 분명 이별의 슬픔에 만나지 못하는 아픔에 많이 울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에세이를 읽으면서 무엇보다 이제는 만나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이 사회의 어른에게 깊은 조언을 받는 느낌을 받았다. 

 

노새를 보며 슬퍼하고 봄꽃을 보고 너무 기뻐하던 그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날 선 예리함을 드러내며 사람들이 말하기 망설여하는 것에서도 작가답게 글로써 담아낸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그의 글은 아마도 우리들의 진심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너무 드러내버리니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p210

우리는 감성과 이성의 편차가 심한 민족이다.

 

심장엔 노무현의 '지향'을 두고 머리로는 이명박의 실용적인 '보따리'를 넘보면서 양다리를 걸친 것이 누구인가. 자신의 가슴이 하는 말을 자심의 손이 알아듣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그를 버린 것이 누군인가. 그는 '미워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고 했지만 고백하건대, 우리는 남아서 미워하지 않을 수 없고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미워하는 것으로 양다리를 걸쳤던 나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원망하는 것으로 나의 명목적인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지키지 못한 것은 용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감성과 이성을 각각 딴 주머니에 넣어두고 시치미를 뚝 떼고 마는 우리의 부정직한 이중성, 혹은 과실을 핑계로 한 비겁한 삶의 전략에 그 연유가 있다. 혹시 나는, 우리는 우리 짐을 대신 짊어지게 할 '짐
꾼'을 잃어 지금 울고 있지는 않는가

 

 

 아직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읽은 네 편의 작품 《소금》,《은교》, 《촐라체》,《산다는 것은》을 만나면서 이미 많은 것을 배운 느낌이 든다. 어떻게 보면 소설 속마다 가슴 아픈 사연이 등장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기꺼이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는 느낌을 항상 받아 온다. 나 역시 삶이라는 것은 기쁘건, 아프건, 한 번쯤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에게 '산다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인 동시에,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라 생각한다.

 

p174

사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예컨대,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50퍼센트를 쓰고, 가정생활에 30퍼센트를 쓰고, 취미 활동에 20퍼센트를 쓴다. 그는 직장에서도 쉬엄쉬엄 좀 심심하게 일하고 가정에서도 대충대충 오직 습관에 의존해 산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과적으로는 100퍼세트의 에너지를 쓰고 100이라는 인생을 산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100퍼센트를 쓰고 가정 생활에서 100퍼센트, 또 취미 활동에 100퍼센트의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 이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며, 따라서 삶의 정체성을 뜨겁게 확보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300퍼센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놀라운 산술로 보면 결국 그도 100퍼센트의 에너지로 100의 인생을 살 뿐이다.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연애다. 전자의 인생엔 연애가 깃들어 있지 않으므로 혹 외형적인 성공을 거둔다 해도 권태롭지만, 후자의 스타일은 일상에 늘 연애의 본성이 깃들어 있으므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심심할 겨를이 없다. 연애를 동반한 삶은 최소한 쓸쓸하지 않다. 그는 불황 때문에 좌절하지 않으며 환경을 핑계로 도덕성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연애는 희망이고 도덕이고 마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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