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술 활동과 강의 등 일 외에 나는 매년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여 3개월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2004년에는 명나라 시대의 중국 미술에 몰두했다. 일본에 관해서는 수묵화를 소장할 정도로 잘 알면서도 일본에 큰 영향을 끼친 중국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외에는 3년마다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전집을 천천히 주의깊게 읽는 것' 같은 일이다. 이는 몇 년 전에 끝마친 일인데, 나는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발자크의 대표작인 《인간희극》 시리즈에 몰두했다. 나는 대학교수 혹은 컨설턴트로 불리고, 때로는 경영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경영학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기본은 문필가다.   (p15)


한 때 경영자 혹은 직장인, 경영학을 배우는 사람들의 책꽂이에 이 분의 책 한 권 꽂혀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경영학의 아버지' 라 불리며 현대 경영학을 이끌었던 '피터 드러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칭했던 경영학자, 교수로 스스로를 칭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문필가라 한다. '문필가 피터드러커',  이런 모습이 더 매력있게 다가온다.

 

『나의 이력서』는 피터 드러커의 자서전과 같은 책이다. 그의 경영 관련 책은 몇 권 보았지만 실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생소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누군가의 삶을 엿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듯이 그의 삶의 궤적을 차근 차근 따라가며 읽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나는 어떻게 살고 싶다.' 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누군가 뚜렷한 롤모델이 있으면 좋겠지만, 한 사람의 모든 모습을 닮고 싶은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본받고 싶은 부분을 여기저기에서 조금씩 조각으로 가져온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만날 수 없는 책 속의 인물 속에서도 그 조각들을 찾아내곤 한다. 이번에는 문필가 피터 드러커로부터 조금 큰 조각을 발견했다.


예전에 <어느 95세 노인의 수기> 라는 글을 다른 블로그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젊었을 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실력을 인정받았고 존경받았습니다.

그 덕에 63세 때 당당한 은퇴를 할 수 있었죠.

그런데 지금 아흔 다섯 번째 생일에

얼마나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지 모릅니다.

내 65년의 생애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부끄럽고 후회되고 비통한 삶이었습니다.

나는 퇴직 후 '이제 다 살았다 남은 인생은 그냥 덤이다' 라는 생각으로

그저 고통 없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30년의 시간은 지금 내 나이 95세로 보면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나길 시간입니다.

그때 스스로가 늙었다고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하고 싶었던 어학 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번째 생일에

95세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항상 망설이고, 시작하기에는 늦었다라고 스스로 핑계를 만들어내는 일은 그만두어야 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항상 생각 속에서만 머무르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려고 했다. 그러던 중에 '피터 드러커'의 지난 삶에서 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피터 드러커는 2004년에 명나라 미술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피터드러커는 1909년 11월 19일에 태어나서 2005년 11월 11일에 삶을 정리했다. 그러니 2004년 그가 명나라 미술을 공부를 한 시기는 그의 나이 96세였다. 



피터 드러커는 책 속에서 여러 번 일본 미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1930년대 중반의 런던시대, 토요일에 오전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번화가인 피카데리 서커스 앞에서 갑자기 폭우를 만났다. 가까운 곳에서 비를 피하고 있자니 그곳에서는 영국 최초의 일본 회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그림에 금새 매료되었고 그후 줄곧 일본화 중독 상태로 머물러 있다. (P173)


그는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섰다. 자신이 직접 미술 작품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1986년에는 일본에서 자신의 소장품을 '수묵화 명작전'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5년간 일본 미술에 대해서 강의를 했다고 한다. 

고령화 사회가 문제로 부각되면서 '인생 이모작' 에 대한 말이 많이 들린다. 그런데 이모작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나뉘어 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분명 무너지게 되어 있다. 피터 드러커는 자신의 본업이 아닌 일본 미술에 매료되어 강의까지 하게 되었다. 이 정도까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갈 필요가 있다. 


매년 새로운 주제를 발견하여 3개월 간 집중적으로 공부, 그리고 3년 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이 부분은 조금 신중해서 접근해서 실제로 앞으로 평생을 살아가면서 염두해 둘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기는 분야에 대해서 정리해두면서 분야를 확장하고, 그 중 조금 더 깊이 관심이 생기는 부분에 대해서는 3년이라는 기간을 투자해서 집중적으로 파고 든다. 그렇게 1년의 사이클이 수십번 돌고, 3년의 사이클이 돌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통찰' 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을까.




이제 정말 그의 이력서를 펴쳐봐야겠다. 『나의 이력서』의 첫 페이지 서문을 보면 통해 간단히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그는 10대 후반 부터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 이력을 살펴보면, 글을 쓰는 문필가의 삶과 경영/경제를 이어주는 직업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기업에 자문을 해주는 역할을 해 온다.


문필가의 인생 자체가 주목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단지 저작물이 주목받을 뿐이다. 이는 문필가로서의 내 인생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내가 여러 나라에 살았고 다양한 직업에 종사해 왔다는 면에서 보면 내 인생이 재미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고, 1927년에 그곳을 떠나왔다. 그 후 독일, 영국, 미국으로 이주해서 살았으며 그 과정에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무역상사의 견습사무원(1927~1928), 증권회사 직원(1929), 경제 및 해외뉴스 담당 신문기자(1930~1933), 펀드 매니저(1934~1936)로도 일했다. 또한 여러 영국 일간지의 미국 주재기자(1937~1939)를 역임했고, 대학교수(1939~1991)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P5)


피터 드러커는 그 자신의 한 분야에 획을 그은 사람이다. 자연스럽게 그의 이력의 주변에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마치 영화 속에 유명한 배우들이 카메오로 나오듯이 이 책 속에서도 피터 드러커와 연결된 인물들을 살펴보는 재미도 적지 않다.


피터 드러커의 유년기는 특별했다. 당시는 합스부르크 제국 시대였다. 그의 아버지는 외무성의 장관이었는데 일주일에 수차례씩 홈파티를 열었고, 매주 월요일에는 아버지의 주최로 '정치의 밤'이 열려 정치가나 은행가, 학자들이 모였고, 수요일에는 어머니의 주최로 '의학과 정신분석의 밤'이 열렸다.

그의 부모님은 정신분석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오랫동안 교우를 했다. 그리고 집에 자주 찾아온 손님 중에는 조지프 슘페터나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와같은 경제학자 외에도 초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 된 토마시 마사리크도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친구분이 개최한 살롱파티에도 가면서 토마스 만을 만나기도 했다.


피터 드러커는 1939년에 그의 처녀작인 『경제인의 종말』을 출간한다. 그리고 곧 영국의 고급 신문이었던 『런던 타임스』에 하나의 서평이 등장합니다. 서평은 이렇게 적혀있었다.  '드러커 씨는 이 사람의 일이라면 뭐든지 용납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문필가의 한 사람이다. 확고한 신념을 지님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발상을 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재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서평은 1년 후에 영국의 수상이 된 윈스턴 처칠의 서평이었다.



마지막으로 '경영 컨설팅', '경영 컨설턴트' 라는 말의 탄생 배경을 알아보자. 이제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이 단어는 피터드러커가 GE과 함께 일할 때 생겨나게 된다.


GE는 특별했다. '경영컨설턴트'의 탄생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GE에서 분권화 등의 조직 개혁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은 부사장인 헤럴드 스미디 였다. 그는 컨설팅회사인 부즈앨련 앤 해밀턴 출신으로 나를 GE로 불러들인 장본인이다. 그는 개혁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대량의 보고서를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내게 집필과 편집 작업을 위임했다.


어떤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제언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부서를 어떻게 불러야 좋을까를 고민하다 나와 스미디가 함께 고안한 명칭이 '경영컨설턴트부'였다. 당시는 컨설팅업계가 요람기에 있었던 시대였으며 이것은 새로운 이름이었다.


여기에 근대적인 경영컨설턴트업의 창시자인 마빈 바우어와의 접점이 있다. 2003년 99세의 나이로 타계한 그는 맥킨지를 세계적인 컨설팅회사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나는 바우어와 친한 사이였다. 5~6년 동안 매주 토요일 오전 중에 매킨지로 가 컨설팅업에 관해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는 맥킨지의 최고경영자가 된 1950년에는 "우리 회사에 오지 않겠는가?"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혼자서 일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협력을 했다.


바우어가 '맥킨지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라고 상담을 청해 왔을 때이다. 나느 주저하지 않고 경영컨설턴트라고 제안했고 그는 그것을 수용했다. 경영컨설턴트라는 말은 스미디와 나를 통해 생겨나 맥킨지에 적용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  (P152)



『피터드러커 나의 이력서』에서 경영에 관련된 무언가를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책의 저자를 먼저 알고 나서 그가 어떤 배경에서 성장해왔으며,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아는 것은 그의 저작들을 읽을 때 분명히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피터 드러커의 저작을 읽고 싶은 사람들은 먼저 이 책을 펼쳐보기 바란다. 자연스럽게 그가 어떻게 글을 썼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두 문장으로 이 글을 마친다.


드러커 박사는 우리들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어떤 인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까?"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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