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뭐가 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직업의 선택은 삶을 살면서 결정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하루의 절 반 이상을 일터에서 보낸다.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도 직업에 따라서 변화되어 가기도 한다. 한 번 선택한 직업은 쉽게 바꾸지도 못한다. 감당해야 할 위험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선택인 직업을 과연 나는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앉게 되었는가? 잠시 뒤돌아 본다.

 

5살 아들에게 가끔 물어본다. "나중에 크면 뭐가 되고 싶어?" 대답은 다양하게 나온다. '공룡, 선생님, 또봇, 풍선 ...'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고등학교 1학년인 나에게 물어본다. "너는 뭐가 되고 싶니?"  대답이 없다. 되고 싶은 게 뭔지를 모른다.


고등학교 1학년 말에 문과, 이과를 선택해야 한다. 당연히 이과에 가야된다고 생각했다. 수능시험을 보았다. 이제 대학에 가야 한다. 내가 어떤 것을 하고 싶을까 하면서 관련된 과를 찾아보았을까? 특별히 하고 싶은게 없으니 가고 싶은 과도 정해진 게 없었다. 고3 담임선생님과의 상담도 학과 위주가 아닌 그 점수로 갈 수 있는 더 나은 학교를 찾는 것이었고, 그렇게 이과를 나온 나는 당연히 공대에 들어갔다.

대학교에 오니 고등학교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수업은 의미가 없었다. 그저 친구들이랑 만나서 술먹고 노는게 전부였다. 마치 고등학교에서 저녁내내 공부했던 거에 대한 보상인 듯이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건설적인 대학생활 같은 건 없었다. 동아리방에서 친구들이랑 이야기하고 술먹고 운동하는게 전부였다. 지금은 이런 생활도 그립지만...

 

군대에 갔다오고, 3학년 2학기, 4학년이 되니 이제는 걱정이다. 취업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남들처럼 취업준비를 했다. 취뽀에 가입하고 이력서를 쓰고 채용 공고가 뜬 이른바 대기업에 원서를 쓰고 기다렸다. 회사에 취직해서 어떤 일을 해야 겠다는 목표는 없다. 그저 일단 대기업 취업이 목표였다.
그리고 입사를 하고 6년째를 보내고 있다.

 

아마 위의 글을 읽은 누군가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 이거 내 얘기 아니야."
뒤돌아보면 나는 분명히 열심히한거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그저 주위에 휩쓸려서 갈 뿐이지 나의 주체적인 선택은 배제된 것이다.
지금은 이런게 너무 아쉬워 이제부터라도 무엇인가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게 없을까 하고 찾아보려고 조금의 노력은 기울인다. 다시는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가 않다.

다시 한 번 물어본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아직까지도 막연하다. 하지만 지금 대답할 수 있는 정도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싶다." 라는 정도의 대답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누군가와 무엇인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한게 나름 장하다.

 

# 엄기호의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학교와 교사들의 생활을 엿보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만난 책이 있다. 엄기호의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이다. 가르치는 직업의 대표격인 교사는 모두들 학생의 입장에서 경험했고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고등학교 때로 뒤돌아보니 지금의 시선과 그때의 시선으로 본 학교, 교사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는 알게 되었다. 책 속에서 등장하는 선생님들의 입장에 내가 직접 서보니 당황스럽고 화가 나기도 하고 가르치는 입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생겼다.


엄기호의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를 읽고 난 후의 생각을 표현하자면 '답답하다' 이다. 내가 몰랐던 문제들에 대해 가득 풀어버리고 떠나버린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단지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생, 교사, 학부모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상황과 그 속에서 발생되는 교육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시련이 드러난다.

[학생과 교사]
고등학교에서는 학생과 교사와의 관계는 철저하게 입시위주로 재편되어간다. 입시를 포기한 학생들은 교사와 관계를 유지하려 하지 않는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도 입시에 필요한 과목에 대한 교사와 관계를 유지할 뿐 기타 과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를 바란다. 학생과 교사는 암묵적으로 No Touch 를 원한다. 입시만이 아닌 학생들의 교육을 위하는 교사들은 이런 환경에 대해 극복하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교사와 학생들과의 관계 설정의 범위 또한 교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는 경우도 많이 있다. 특히 가정폭력, 성폭력 등과 같이 교사 역시 경험하지 못한 사항에 대해서 상담하는 경우에는 교사 역시 참담함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사가 어느 정도 개입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관련 분야에 대한 전문가를 통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된다, 아직까지는 교사에게 어느 정도 책임을 돌리는 듯 하다.


[교사와 교사]
학생과 교사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날 경우 교사 개인이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상당하다. 그런 정신적 스트레스는 동료교사들과의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교무실에는 그런 소통이 단절되어 있다. 매 년 학년이 바뀔 때가 되면 일부 교사들은 담임을 맡지 않으려고 한다. 담임을 맡는다는 것은 학생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인데 관계를 맺게 되면 일로 이어진다는 생각때문이다. 퇴근시간이 되면 일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이 있는 교사들은 때로는 자기가 기획한 수업방식을 도입하거나 현장학습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동료교사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받는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해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전적으로 그 교사가 책임을 지어야 한다. 결국 몇 년이 지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교사들이 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교사들은 과도한 업무와 책임이 누적되어 버리고, 정신적 스트레스 또한 학교 내 동료교사가 아닌 정신과병원이라던가 전문상담기관에 방문해서 풀어야 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교사와 학부모]
교사들이 하는 일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에 관한 것과 학생들의 생황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돌봄'으로 나뉘어진다. 둘 중 우선순위를 두기는 의미가 없겠지만 교사는 분명 가르치는 사람이기에 '교육' 이 우선일 것이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점점 '교육'에 대한 것은 자기네가 알아서 할테니 '돌봄'에 대해서만 신경써달라는 암묵적인 요구를 해온다. '교육'은 학원, 과외 등 공교육이 아닌 사교육으로 알아서 할테니 애들 사고나 치지 않게 잘 돌보라는 뜻이다. 학부모과의 관계 형성이 이렇게 되면 어떻게 가르치는지에 대해서는 무신경하더라도 자녀가 학교내 사건에 휘말릴 경우에는 교사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으려고 한다.

'돌봄'이 주된 업무가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직장에 다니다보면 퇴근을 하게 되면 직장생활과 다른 나만의 생활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교사가 '돌봄'을 주된 업무로 하게 되면 하루 종일 학생들에게 신경써야 하고, 문제가 생기면 저녁 늦게라도 학교로 뛰쳐 들어가야 한다. 내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 부분은 정말 힘든 부분이라 생각한다. 교사들도 가정이 있는데 이런 생활은 교육에 대한 부담감 이상이 될 것이다.


[교사와 교육시스템]
교사의 주된 업무는 '교육'이어야 한다. 하지만 교사가 자신의 과목에 대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교육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교과 개발이 필요한데, 그럴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그들이 교과 개발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방학이라고 한다. 평소에는 할당된 과목을 가르치고, 남는 시간에는 상급기관에서 내려오는 여러 업무는 처리하는데도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고 한다. 학생들과의 상담도 퇴근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루어질 수 있는게 현실이라고 한다.

 

상급기관, 학부모, 학생들은 이런 일들의 중심에 모두 교사를 두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교사를 추궁한다.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사가 현명한 판단을 한 것이 된다.. 이럴 때 필요한게 시스템이다. 교사들이 모든 것을 처리하게 하는게 아니고 일부 업무는 시스템에 의해 처리되게 해야 한다. 앞서 학생과의 관계에서 이야기 했던 가정폭력, 성폭력 같은 경우에 교사들이 아닌 전문 상담 기관과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과 입시는 항상 풀지 못한 숙제이지만, 교사가 어떤 창의적인 안건을 내어서 실행하다가 실패하거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 그런 구조와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 교사, 학생, 학부모가 두렵지 않은 학교를 위해서

 

두렵지 않은 학교를 위해서는 교사를 중심으로 한 학생, 교사, 학부모, 교육관계자들과의 관계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 바우만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는 세 가지 수준에서 신뢰가 붕괴하였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신뢰, 타자에 대한 신뢰, 제도에 대한 신뢰'


이 책에서는 작가가 생각하는 남다른 해결책 같은 것은 없다. 단지 지금 현재 이런 현실이니 함께 공유하고 알고 있자라는 의도인 듯 하다. 모든 문제의 해결의 시작은 끊임없는 사실의 공유와 문제제기다. 그 끊임없음이 시작입니다. 관계의 회복은 신뢰의 회복이다. 신뢰의 회복을 위해서는 자기 자리에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한 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거 같다. 나 역시 할 말은 딱히 없다. 지금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고 관심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말만 덧붙일 뿐이다.

단지 원하는 것은 지금 학생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으니?' 라고 물었을 때 아이들이 그것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
15년 전에 꿈도 없이 원하는 것도 없이 대학을 선택하고, 6년 전에 꿈이 아닌 남들이 하기 때문에 하는 취직을 했던 내 자신이 아쉬워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스스로 꿈을 찾을 수 있는 그런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

p292
바우만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세 가지 수준에서 신뢰가 다 붕괴하였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두 번째는 타자에 대한 신뢰, 세 번째는 제도에 대한 신뢰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기 자신조차 믿지 않으며, 자신이 속한 제도가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도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만 자기 주변에 배치하려고 하며 모르는 세상과의 접촉을 될 수 있는 한 끊으려고 한다. 제도와 타자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불신할 때, 안전을 위해서 자기가 자신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자기 단속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개인들은 침묵함으로써 스스로를 세계와 단절하여 고립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취향만 남게 된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감시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강도가 강해질수록 사람들은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집착한다. 취향이 같거나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상받으려는 것이다. 이른바 '사교'만 남게 되었다. 이 시대가 가진 취향과 사교에 대한 강박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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