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욕이 들어있었던 책이다. 거의 일관된 하나의 욕이다. '씨발'이다. 

다 읽고 나니 그 말이 빠지면 절대 안된다. 이 작품에서 '씨발'이 빠지면 읽은 후에 절반의 여운은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쉽게 표현할 수 없었던 소재인 듯 하다. 주된 흐름은 가정 내에서의 가정폭력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이게 가정에 국한된 폭력이 아님을 알아가게 된다. 결국은 모든 폭력에 대해서 작가는 말하고 있다.



책의 중간 중간에 작가는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아마 그대는 이걸 읽고 있던 내가 맞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어디까지 왔나' 과연 그 어디는 어디인가? 책을 덮고 나서도 확실히는 모르겠다. 내가 어디까지 가야했는지를······

글을 정리하면서 생각한 건, 과연 작가가 말하는 폭력에 대해서 이해를 했느냐? 그 폭력에 당신은 개입되지 않았느냐? 방관하지는 않았느냐? 하고 되묻는거 같아서 불편하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화자는 앨리시어이다. 앨리시어는 동생과 함께 어머니에게 학대받고 아버지는 그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한 대를 더 걸쳐서 올라가면 앨리시어와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어머니는 그녀의 아버지의 폭력 속에 살아왔고 그녀의 어머니는 폭력에 무관심한 듯 하다.


P42

그녀는 그보다 어머니가 궁금하다. 어머니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왜 내다보지도 않았을까. 왜 나를 들여보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죽고 싶을 정도로 나는 씨발 추웠는데 왜 나를 궁금해하지도 않는 얼굴로 자고 있나. 식구들이 저녁으로 먹고 남긴 수제비 냄새와 낡은 이불깃과 잠든 인간들의 냄새가 섞인 따뜻한 공기속에서 아주 조용하게 씨발 년이 발아한다. 씨발 년은 아버지 곁에서 편안하게 잠든 어머니를 내려다본다. (중략)

그녀가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일 때는 평화롭고 행복할 때다. 기생들과 즐기고 놀다 돌아온 가장이 신문지에 싸서 가져온 쇠고기나 꿩고기로 고깃국을 끓여 식구들이 모두 앉아 그것을 먹을 때다. 그녀는 배부르고 평온하다.

포스트 씨발 년을 탄생시킨 씨발 년이다.


앨리시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어머니는 그녀에게 폭력을 가한 그녀의 아버지와 무관심한 어머니로부터 발아했다는 표현을 한다. 폭력의 되물림이다. 안타깝다. 그런데 어쩌면 이게 정말 현실이 아닐까.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서툴다. 심지어 상대방이 폭력으로 느끼는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다. 작가 황정은은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표현하기 쉽지 않은 표현을 뱉어낸다. 그런데 당하는 당사자들은 혹여나 부모라도 그 당시에는 그랬을 거다라는 나 역시 뱉기 힘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정폭력


앨리시어의 동생은 소위 학교에서 왕따를 받는 그런 학생인 듯 하다.  가정에서 어머니에게 폭력을 당한 동생은 학교에서도 폭력과 따돌림에서 자유롭지 않다. 학교폭력


p87

너는 병신이 아니라고 엘리시어가 대답한다.

너더러 병신이라고 말하는 새끼가 있다면 그 새끼가 나쁜 거고 진정 병신인 거다. 앨리시어의 동생이 그걸 듣고 고객를 끄덕인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는 어쩌면 국가에 대한 불신과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는 국가 역시 폭력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게 한다. 앨리시어와 친구 고미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것을 보고 구청으로 갑니다. 무엇을 물어보려 했느냐. 그건 바로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어머니를 때려도 되는가? 였다. 소설 속의 화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국가에 공권력에 호소하는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앨리시어가 처음 찾아간 구청의 복지과에서 가정폭력에 대해서 상담하는 곳이 아니고 행정업무를 보는 것이라며, 사설기관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준다. 국가는 외면했다. 다시 사설기관을 찾아간다. 사설기관 왈, 부모를 데리고 오란다. 그리고 예약을 하고 오란다. 이런 정말 '씨발이 발아한다.' 국가폭력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앨리시어의 동생은 폭력과 무관심 속에서 내쳐지고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작가는 또 묻고 묻는다. 처음처럼......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앨리시어는 갤럭시에 대해 말하면서 이런말을 한다.


P63

팽창하고 팽창해서 별들 간 간격이 엄청나게 멀어져버린 갤럭시에서 앨리시어는 한 점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한 점 먼지도 되지 않는 앨리시어의 고통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 갤럭시는 좆같다.

앨리시어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갤럭시란 엘리시어에게도 아무것도 아니다.


한 개인의 고통은 그 개인만이 알 수 있다. 그 고통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갤럭시 속에서의 개인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듯이 타인의 무관심 또한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 그리고 친구 고미의 고통을 알지 못하고 외면해버린다. 

앨리시어 같은 이는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 주변에 가깝게 존재하고 우리가 아는 어떤 이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라는 질문은 이제 그들의 고통을 얼마나 알게 됐는가하고 계속 질문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덧붙이기>

황정은 작가의 책을 처음 읽었다. 162쪽 밖에 되지 않는 두껍지 않은 책인데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서사위주의 형식보다는 등장인물의 내면에서의 움직임이 주된 이야기의 흐름을 좌우하는 듯 하다. 익숙하지 않아 쉽지는 않았으나 그러기에 더 남는다. 황정은 작가의 책을 더 읽어봐야 겠다. 색깔이 있는 것 같아서 궁금하다. 어떤 색인지



반응형

'■ 책과 영화 > □ 소설,수필,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中  (0) 2014.03.25
꽃자리  (0) 2014.03.25
인간 실격 - 다자이 오사무  (0) 2014.03.20
위대한 개츠비  (0) 2014.03.18
안녕, 내 모든 것  (2) 2014.03.08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후, 3개월이 지난 2009년 8월 18일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시대의 거인인 김대중 대통령께서 서거하셨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가이면서 한 시대의 사상가였다. 삶 자체가 민주주의 본연이었다.
그의 말과 글은 곧 그의 행동이었고, 행동은 다시 말과 글이 되었던 분이다. 


P243

1980년대 초 총칼로 권력은 찬탈한 신군부 세력이 달콤한 제안으로 회유하려 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들에게 협력하면 일시적으로는 살지만 영원히 죽는다. 그러나 당신들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일시적으로는 죽지만 역사와 국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산다. 따라서 나는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겠다."


그는 알았다. 말 자체가 그를 대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과연 처음부터 달콤한 제안을 했을까? 모진 고문과 살해 위협을 받아오면서 버티어왔다. 용기로 버티왔을 뿐이다. 우리가 아는 용기와는 다르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두렵지 않은 것을 용기라고......

너무나 두려운데 무서운데도 해야하기 때문에 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용기로 그 시대를 버티어 왔다.


김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에 참된 용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아무리 강해도 약합니다. 두렵다고, 겁이 난다고 주저앉아만 있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두렵지 않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지만,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용기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리 약해도 강합니다."


그의 행동을 나타내는 말과 글은 독서로부터 비롯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독서는 이제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을 하셨다. 책을 읽고 싶어서 다시 감옥에 가고 싶다고.

<김대중옥중서신>을 보면 항상 편지의 말미에는 다음에는 어떤 책을 찾아서 보내달라는 내용이 있다. 감옥에서 끊임없이 읽고 다시 꺼내어 사색하고 곱씹었다. 단지 읽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는 독서의 완결이란 읽은 책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서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데까지라고 했다.


P47

"나는 오랜 옥중생활을 통해서 러시아 문학을 섭렵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등 많은 러시아 고전을 탐독했습니다. 그리고 솔제니친과 사하로프의 작품들도 애독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 문학을 읽은 것만으로도 감옥에 간 보람이 있었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1999년 5월 러시아 국빈방문 모스크바 대학 연설>


민주주의에 반하는 신군부세력에게는 총칼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당당하고 강인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다들 기억한다. 대화를 할 때는 말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을 항상 배려하고 경청하고 또 경청했다. 어쩔 수 없이 지적할 상황이더라도 인격의 존중은 지켜주었다. 그런 분이었다. 강했지만 부드러웠다. 누구에게 강해야하는지 알고 있었다. 


P214

김 대통령은 자전적 에세이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화는 얼마나 말을 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대화의 요체는 수사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심리학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때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은 대화의 실격자요, 인생의 실격자다."


P289 

김대중 대통령은 꾸중을 하는 데도 원칙이 있었다. 그 원칙을 자신의 자서전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 밝힌 바 있다.

"나는 비판을 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하나는 먼저 상대방의 입장이나 장점을 인정해주는 비판, 그리고 두 번째는 상대방의 인격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하는 비판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이나 장점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상대방은 비판을 자기에 대한 비난으로 생각하고 수용해주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故김대중 대통령이 생각하는 연설문(글)과 기념사(말)을 소개한다.

글쓰기 책에서 삶을 배워간다. 나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철학자로서 사상가로서 그를 기억한다. 
글을 읽어가면서 몇 번이고 넋이 나간듯 바라보았고, 다시 곱씹어 읽어보았다.  이 글귀를 ...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전진한다." - 김대중 대통령


P49

"나는 정치를 시작한 이래 연설문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연설문에 많은 것을 담으려 했다. 집회가 있을 때면 연설 원고가 늘 걱정이었다. 원고가 완성이 안 되면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설을 했다. 한때는 정치가 곧 연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 원고를 작성했다. 중요한 연설문은 산통이 대단했다. 호텔방을 전전하며 구상하고 수없이 다듬없다. (중략)

내 연설문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작성하지 않았다. 정성을 들이고, 최선을 다했다. 내 자서전에는 연설문이 비교적 많이 실렸다. 그것은 어떤 설명보다 어느 비유보다 내 연설문이 더 정확한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내 철학과 비전, 열정과 가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삼인>


P170

"여러분께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그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을 다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 간의 화해 협력을 이룩해야 하는 모든 조건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선거 때는 나쁜 정당 말고 좋은 정당에 투표해야 하고, 여론조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4,700만 국민이 모두 양심을 갖고 서로 충고하고 비판하고 격려한다면 어떻게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일어나고, 소수 사람들만 영화를 누리고, 다수 삶들이 힘든 이런 사회가 되겠습니까? <2009년 6.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사>

 




반응형



세상을 하루 하루 더 살아갈수록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기보다는 쌓여가기만 합니다. 책을 한 권, 한 권 읽어나갈수록 의문이 풀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마치 다이달로스가 크노소스 궁전의 지하에 만들어놓은 미로 속을 아리아드네의 실 없이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너무나도 무심하게 세상을 살아간 게 아닐까하는 자책 아닌 자책도 해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미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했습니다. 미움이나 증오가 생기는 이유는 그만큼 좋아했기에, 사랑했기에 믿었기에 그 반감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그 기저에는 사랑이라는 것, 바로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담겨있습니다. 이에 반해 무관심은 너무나 무섭습니다.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취급되는 그런게 때로는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가 아니면 어떤 내가 알지 못하는 시스템에 의해서 무관심이 남모르게 조장되고 있는게 아닌지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빅브라더가 남모르게 우리의 선택을 조정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호기심과 과연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인 요인들은 어떤게 있을까. 라는 의문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최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중에 하나는 이 속세의 세상을 사는데 빠질 수 없는 돈, 바로 경제에 대한 관심으로 어떠한 요소들이 경제에 영향을 주고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지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무관심해지기 쉬운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그런 관심에 대한 개론서의 역할을 합니다. 저 역시 이 책을 계기로 사회학에 대해 관심의 폭을 넓혀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제목은 <세상물정의 사회학>, 부제는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입니다.

세상물정, 세속,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맞닥드리게 되는 주제입니다. 피하려해도 그 틀 안에서 움직이게 되고 모순이 생기는 그런 곳이 바로 세속이며, 그래서 더욱 알아야 하는 것이 세상물정인 듯 합니다.


상식, 명품, 프랜차이즈, 해외여행, 열광, 언론, 기억, 불안, 종교, 이웃, 성공, 명예, 수치심, 취미, 섹스, 남자, 자살, 노동, 게으름, 인정, 개인, 가족, 집, 성숙, 죽음, 이 단어들이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대부분이 일상에 관련이 있습니다. 너무나 일상적이지만 그 속에는 저희가 알지 못하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쩌면 저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노트북으로 정리를 하는데 18장이나 되는 많은 분량을 적었습니다. 그만큼 생각해볼만한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가지만 정리하고 나머지는 조금 더 제가 더 많은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공부하면서 정리를 해나가야할 것 같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해서 47권의 책들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 책들을 읽으면 사회학에 대한 틀을 잡을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도 가지게 하고 저 같이 지금까지 사회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사람들도 개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상식

p27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상식은 힘이 세다. 상식은 분명 양적 다수에 근거한 보편성이기 때문이다. 상식을 잘 이용하는 사람은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기 쉽다. 자신의 생각을 시대의 상식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장악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이 만든 생각을 세상의 보편적 상식으로 만들 수 있는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면, 시중에 떠도는 상식을 이용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조정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둔한 사람은 힘으로 지배하지만, 교묘한 사람은 상식을 이용해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p29

상식에는 없는 올바름을 갖추고도, 양식은 상식과의 경쟁에서 대체 왜 늘 지고 마는 것일까? 이유는 상식과 양식의 말투 차이에 있다. 상식은 상냥하고 어루만져 주는 어투를 사용하지만, 양식은 공식적이고 엄격하고 훈계하는 말투를 사용한다. 상식이 나를 무조건 이해해 주는 연인 행세를 한다면, 양식은 냉정한 심사위원과도 같다.


상식의 힘은 상식을 넘어섭니다. 예전부터 왕이 배라고 한다면, 백성들은 배가 다니는 바다, 바로 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의 불규칙성과 높낮음의 변화가 바로 민심의 변화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날카로운 지적이 아닙니다. 그저 삶의 아픔을 만져줄 수 있는 따뜻한 손길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마치 아내나 여자친구가 다른 사람과 갈등이 있을 때 이성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아내나 여자친구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듯이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 올바름은 진정한 올바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제가 다른 경험으로 깨달은 소중한 경험입니다.  



성장

p128

개인적 성공은 소유한 승용차의 크기와 은행 잔고로 측정될 수 있겠지만, 사회의 성공 여부는 공감이 제도화된 복지의 크기와 넓이로 가늠할 수 있다. 하늘이 혹은 계급이 선택한 소수의 사람만 성공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동정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특권을 독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회가 홀로 성공하는 게 더 좋다. 성공의 단위는 하늘이 돕는 개인뿐이라는 오래된 사유의 관습과 이별할 때, 우리는 비로소 복지국가와 만날 수 있다. 그 나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자기 계발서가 그 나라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얼마 전에 어떤 기사에서 인문학을 배우는 한 학생이 한 말을 적어두었습니다.

인터뷰 질문은 이런 저런 사회적 활동이 많은 그 사람에게 "다른 평범한 젊은이처럼 돈 많이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느냐"는 것이었다. 그 질문의 답이 무엇인가 울림이 있었고 경종이 있었습니다.

대답은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집을 사드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부모님이 갑자기 길에 쓰러졌을 때 '누군가 구해주겠지'라는 믿을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더 가치 있는 일 아닐까요." 였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회, 안전한 사회는 단지 희망사항일까.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그런 날은 머나먼 미래의 일인지, 아니면 과거의 우리의 모습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현재인데 지금은 아니네요.

얼마 전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딸은 둔 저희 누나가 저에게 요새 초등학교 문제를 하나 냈습니다.

문제 : 길을 가는데 누군가가 짐이 무거우니 저기까지만 들어다 줄래? 라고 요청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분명히 제가 학교에 다닐 때 답은 "네 도와드릴게요. 라고 친절하게 대답한 후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준다." 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조카들의 답안은 다릅니다.
"네, 제가 그 짐 들어드릴 수 있는 어른을 모시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라고 대답한다. 가 답이라고 합니다.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인정

p205

투쟁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싸움을 즐기는 싸움꾼이 아니다. 투쟁하는 사람은 보다 많은 여물을 달라고 요구하는 돼지와 같은 조재도 아니고, 돈을 받고 영혼을 저당 잡힌 채 왜 사워야 하는지 이유조차 알려 하지 않는 '용역'도 아니다. 싸워야만 하는 유전자를 내재한 싸움꾼도 아닌 정신대 할머니들이, 부당해고 당한 노동자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철거민들이, 폭력과 고문에 항의하는 인권운동가들이, 등록금에 절망한 대학생들이 왜 길거리에서 그리고 크레인 위에서 투장하는 궁금할 때,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책이 악셀호네트의 1992년 출간된 <인정투쟁>이다.


p207

인간은 배부르면 만족하는 돼지가 아니다. 아무리 위장이 꽉 차있어도, 자기 존업이라는 그릇이 비어 있다면 인간은 만족할 수 없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개인의 욕구는 자기의 밥그릇에 보다 많은 음식을 채워 넣고 싶은 물욕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인정에 대한 절실함은 보다 많은 돈도 넘치는 권력이 아니라, 자기 존엄이라는 스스로 부여한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각종 시위현장을 보여줄 때, 그저 스쳐지나가는 소식의 하나였습니다.. 뉴스 앵커의 "오늘 어디에서 누가 어떤 시위를 했습니다.." 라는 멘트 하나로 그 시위는 우리 사회에 인식될 뿐입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면 그저 그렇게 인식할게 아닌거 같습니다. 모든 것들이 그렇겠지만, 우리에게 별 것 아닌 기사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자신의 삶을 걸고 나서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타인이 죽을 것 같이 아픈 것보다 살짝 긁히고 까진 부분에 대해서 더 아파하는 존재가 우리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은 다른 이들에게는 타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제 아픔이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무엇인가 불편합니다. 그 불편함을 조금 줄이기 위해서라도 타자를 위해 한 번더 생각해보고 그들의 자기 존엄에는 상처를 남기지 않는게 중요한 듯 합니다.

정말 말이 쉽고, 글이 쉽습니다. 저 역시 그저 이렇게 밷어놓기만 하는게 부끄럽습니다. 위선이 아니길 바랍니다.
그저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조금 나아지겠지! 라는 생각에 적어봅니다.


성숙

p234

칸트는 계몽이란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칸트는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완성 가능성을 배움에서 찾았다. 그래서 배움에 대해 남다른 기대를 걸었다. 부모님은 배움을 통해 '자녀들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입신양명하는 일에만 마음을 쓰고"있을 뿐이며, 국가의 통치자는 배움을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한갓 도구" 정도로 생각하지만, 철학자의 눈에는 배움 속에서 인간이 야만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과정이 보였다.


p245

성장했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배운 지식을 사용해 금융 사기를 친다. 배우지 못한 장발장은 고작 촛대나 훔칠 뿐이지만, 배웠지만 성숙하지 못한 인간은 못배웠지만 성실한 사람들의 삶을 통째로 파괴하는 짓을 서슴치 않고 있다.


예전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보다보면 마을에 어떤 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그 마을에 하나 있는 학교의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주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은 자기는 잘 모르겠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래도 배운 사람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선생님이 말해 달라 거듭 요청을 합니다.


위의 선생님들은 지금 이 시대의 여러 분야의 배운 사람들을 뜻합니다. 어떤 배운 사람들은 그 배움을 성숙이 아닌 단순한 개인의 영달을 위한 성장을 위해서만 사용합니다.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 사용하는 배움에 대해서는 아무도 비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 파장은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결국 사회에서는 고리가 약한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그 고리가 약한 부분은 상당 수가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범인들입니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살짝 들추어서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더 궁금해집니다. 살짝 들추어진 곳에서는 앞의 조금만 보았을 뿐입니다. 그 뒷부분은 앞으로의 제 자세와 관심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사회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자." 이것만은 가져가려합니다.








반응형

'■ 책과 영화 > □ 인문, 역사, 미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1) 2014.02.27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0) 2014.02.23
한국 탈핵  (0) 2014.02.11
처음 읽는 유럽사  (0) 2014.01.15
강신주의 다상담 (사랑, 몸, 고독)  (0) 2014.01.05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