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배경 소개

 

[아우슈비츠],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공간으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오늘은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가 바로 그곳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보낸 10개월 간의 체험을 기록한 <이것이 인간인가> 에 대한 글을 남겨 보려고 합니다. 작가는 아우슈비츠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감내한 공포를 세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더불어 인간의 타락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책의 겉표지에는 희미한 세로 글씨로 이렇게 씌여져 있습니다.

 

생각해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진흙탕 속에서 고되게 노동하며

평화를 알지 못하고 빵 반쪽을 위해 싸우고, 예. 아니오. 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생각해보라 이것이 여자인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이름도 엇이 기억할 힘도 없이

두 눈은 텅 비고 자궁은 한 겨울 개구리처럼 차디찬 이가.

 

그리고 겉표지에는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작품이 등장합니다.

콜피츠는 1차 세계대전에서 둘째 페테를 잃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똑같은 이름의 손자를 잃게 되면서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합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하는 작품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고통 받는 짐승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극단적이며 강력한 슬픔을 보여줍니다.

 

 

책의 겉표지의 글귀와 그림에서 부터 인간이 겪게 되는 처참함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이 작품의 배경인 그 공간 아우슈비츠는 어떤 곳이었는지 먼저 잠시 살펴 봅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나치 독일이 유럽에 있는 유태인들의 대거 학살을 그 목적으로 하는 '최종적 해결'이라는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세운 여섯 군데의 강제 수용소 중에서 그 본부 격이며, 또한 가장 악명 높은 곳이었다. 원래는 1940년 나치 독일 점령군에 의해 처음에는 폴란드인, 이후에는 소련군 전쟁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곧 여러 다른 민족들을 모두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이곳은 본격적인 대량 학살이 자행된 수용소로,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문당하고 죽음을 당했다. '아우슈비츠 1'이라는 이름의 최초 수용소는 본래 폴란드의 정치범들을 수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점차 다른 수용소들의 행정 본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2'(비르케나우)는 중심적인 집단 학살 수용소였으며, 80만 명의 유태인이 죽음을 당한 장소이기도 했다. '아우슈비츠 3'(모노비츠)은 특수 노동 수용소로, I. G. 파르벤 합성 고무 공장과 석유 추출 공장에 강제 노역을 제공했다.

 

1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살당했으며 그중 90퍼센트가 유태인이었다. 수용소에서 주된 살해 도구로 사용된 것은 치클론-B라는 독가스였으나, 과도한 노동, 굶주림, 구타, 이유 없이 행해지던 사격으로 인해 죽은 이들도 많았다.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은 요제프 멩겔레 박사가 실시하던 생체 실험은 특히 끔찍스러웠다. 1944년 말 러시아의 '붉은 군대'가 진격해 오자 수용소는 문을 닫았다. 오늘날 수용소의 잔해는 유적지가 되었다. 아우슈비츠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인간의 가치와 이상을 지지해야 한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로부터 선포되었던 유네스코 규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 네이버 지식 백과                                                           

 

 

 

책 속이야기

 

프리모 레비는 1943년 12월 13일 스물네 살의 나이에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되었습니다. 이유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파시즘에 대해 강고한 저항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만든 '정의와 자유'라는 단체의 유격대를 조직하는 일에 참여한 혐의였습니다.

 

체포된 레비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차에 태워지고 수용소로 보내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수용소로 이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SS대원이라고 불리어지는 히틀러친위대원들이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고 손가락으로 보낼 곳을 정합니다. 이 손가락 하나로 누구는 자신이 왜 죽어야하는지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힘겨운 노동을 위해 노동 수용소로 보내집니다. 이렇게 레비도 노동수용소인 아우슈비츠3 모노비츠에 들어가게 됩니다.

 

p28

이제 2막이 시작된다. 면도기, 비누솔과 가위를 가진 남자 네 명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다. 줄무늬 바지와 상의를 입고 있었고 가슴에는 숫자가 박혀 있다. 이 사람들도 오늘 저녁 봤던 그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일까? 하지만 이 사람들은 건강하고 생기가 있다. 우리는 많은 질문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붙잡아 순식간에 머리를 밀고 면도를 시켜버린다. 머리카락이 사라진 얼굴들이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네 남자는 이 세상 언어가 아닌 것 같은 말들을 한다. 물론 독일어는 아니다. 나는 독일어를 조금 알아들을 수 있다.

마침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우리는 모두 그 문 안에 갇힌다. 머리를 박박 깎인 채 알몸으로 서있다. 발이 물에 잠긴다. 샤워실이다. 안에는 우리 밖에 없다. 차츰 놀라움이 사라지면서 말을 하게 된다. 모두 묻기만 할 뿐 대답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샤워실에 알몸으로 보내졌다면 그건 샤워를 하라는 뜻이다. 샤워를 하라는 것은 아직 우리를 죽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우리를 왜 세워두는지, 왜 마실 것을 주지 않는지 아무도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우리는 신발도 옷도 없고, 모두 알몸인 채로 발을 물에 담그고 잇다. 닷새 동안 여행을 하고도 앉을 수조차 없다.

 

p35

해프틀링(포로), 나는 내가 해프틀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이름은 174517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고 죽을 때까지 왼쪽 팔뚝에 문신을 지니고 살게 될 터였다. 문신을 새길 때 약간의 통증이 있었다. 그 일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모두 한 줄로 선 뒤 우리 이름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짧은 바늘이 달린 일종의 펀치 같은 것을 든 능숙한 직원 앞을 지나갔다. 이게 진짜 시작 같았따. "숫자를 보여줘야만" 빵과 죽을 받을 수 있었다.

 

체포되어서 5일 동안 기차를 통해 수용소에 오게 된 사람들은 이렇게 머리를 박박밀고 왼쪽 팔뚝에 번호를 새깁니다. 바로 그것이 이제부터 그들의 이름을 대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두 가지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돼지 고유 식별번호를 불에 달궈 찍고 도축 후 씻는 모습과 나머지 하나는 군대 훈련소에서의 유격훈련입니다. 그때도 이름이 붙는 자리에 번호가 대신 붙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올빼미라고 합니다. 대답은 네, 아니오가 아닌 악! 하는 소리였습니다.

 

이는 어쩌면 이제부터 인간대접을 해주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개개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일을 하는 해프틀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마주할 상대가 아닌 노동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루 이틀 지나가고 노동을 하고 수용소에서 할 수 있는 일, 해서는 안되는 일에 대해서 조금씩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은 환경에 적응해갑니다. 이렇게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한 편으로는 너무나 불쌍하고 아쉽고 한 편으로는 너무나 다행입니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은 희망을 기대하고 하루하루 이렇게 버티어 나가는 것이 너무나도 다행입니다.

 

P45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쓸모 있음을 배웠다. 철사는 신발을 묶는 데, 천조각은 발을 감싸는 데 필요하고 종이는 추위를 막기 위해(불법으로) 상의에 대는 데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물건을 도둑맞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방심하면 반드시 도둑맞는 다는 것을 배운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반합부터 신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상의에 집어넣어 보따리를 만들어 베개로 베고 자는 기술을 익힌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어 나갑니다. 그 힘겨운 날들 속에서도 어떤 이들은 타인을 위해주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켜나갑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 속에서 자신만 살아남으려고 아둥바둥하고 타인들은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극한의 추위와 공포에 휘말리게 되면 타인이 아닌 자신만이 살기 위해 아둥바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의문에 답해 줄 수 있는 이들이 분명 존재하고 그들을 보며 충분히 살아나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P58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하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P187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러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내용은 예전에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도 그렇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생각했던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도 저런 상황이면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가해자가 될 수 있는가? 와 같은 가해자로서의 인간의 잔혹성에 대한 놀라움이 하나이고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는 피해자이지만 삶의 주체자인 이들의 내적 강인함에 대한 놀라움이 그 나머지다. 어쩌면 이 두가지 질문은 살면서 가끔씩 다시 한 번 고개를 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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