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이야기를 읽게 된 것은 기독교에 대한 신앙적인 차원이 아닌 '성경'이란 그 매개체에 접근해보고 싶어서이다. '성경' 자체가 인문학의 보고이자, 사람 사이의 갈등과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종교적인 입장이 아닌 인문학적인 접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이야기는 마치 최근에 읽고 있는 신영복의 [강의]를 성경 버전으로 읽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바로 성경구절과 함께 그것을 강독해주는 구조로 되어있고 그 설명 또한 나 처럼 문외한인 사람에게도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 있었다. 책을 읽다가 저자인 김민웅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아~! 이 사람이었구나. 예전에 토론 프로그램에서 기독교 관련 이슈에 대해서 나왔을 때 본 분이다. 일부 기독교 관계자들은 교회속의 언어와 세상을 바라보면서 충돌하고 있었는데, 이 분이 기독교와 현재의 사회와의 관계 및 변화해야 할 점이라던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해나가는 것을 보고 눈여겨 본 적이 있었다.

역시 글을 읽다보니, 그 분이 옆에서 조근조근 설명해주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처럼 신앙적인 차원이 아닌 인문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더라도 한 번쯤을 읽어볼 만한 괜찮은 책인 듯하다. 그러면서 그 속에 담긴 뜻도 한 번씩 곱씹어 보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P18

하나님은 인간의 삶이 안정되었다고 여기고 그의 기운이 고이려 하는 때 일으켜 세우십니다. 안락하다고 그냥 주저앉으면 안정이 아니라 퇴보이고 무너짐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노쇠해지고 맙니다. 또한 창조적 긴장을 가져올 만한 도전을 피하고 생명력 넘치는 상상력을 상실한 습관적인 인생으로 후퇴하며 틀에 박힌 삶의 무미건조한 존재가 되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P19

과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새롭게 눈뜨고 자신을 옥죄던 운명의 사슬을 푸는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현실이 자신이 그토록 구했던 답을 줄 때 가능해집니다. 생각이 제 아무리 많아도 자신에게 닥친 현실은 단 하나이며, 선택의 여지가 하늘의 별처럼 많아도 결국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현실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당장에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우선은 유리하게 보이더라도 잠시 뒤에 가장 불리한 상황이 될 수 있고, 불리하게 여겨지는 지점도 알고 보면 유리한 고지로 가는 고갯마루일 수 있습니다.

 

P30

어딘가에 도착했다가 다시 떠돌고 장막을 세우는 일련의 과정은 소모적이거나 어리석거나 아니면 몰라서 방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정작 뿌리내려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아보는 힘을 기르는 절차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헤매고 떠도는 모든 과정이 우리의 영적 성장사가 될 수 있습니다.

 

P35

우리 역사에는 화냥년이라는 말이 있는데,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고 함부로 자기의 몸을 파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만 원래는 환향녀가 변모한 발음이라고 하지요. 과거 몽골족이 지배했던 원나라에 공물로 바쳐졌던 여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 환향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을 고향에서는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집안의 수치로 여겼고, 마을의 치욕으로 여겨 능멸하고 욕설을 해댔다고 합니다. 이처럼 암울한 역사의 상흔인 환향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었지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우리의 여인들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위안부나 정신대로 빼앗긴 역사가 있습니다.

 

P40

어떤 곤경에도 다시 길을 가는 의지와 용기가 주어지기를 기원하는 사람은 약해 보여도 결국 가장 강한 자입니다. 암담하게만 보이는 운명을 극복하는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 희망은 무너지는 법이 없습니다.

 

P45

인생에는 아파봐야만 깨닫는 게 있고, 눈물 없이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픔과 눈물, 떠도는 시간들은 모두 소중하고 결과적으로 아름답습니다. 고난 자체가 소중하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마주하는 방법, 그것을 알아가는 믿음의 지혜가 소중합니다. 아브람에게도 유랑생활은 그런 믿음과 지혜, 능력을 기르는 귀한 시간들이었지요.

 

P51

사랑하는 관계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 진상을 일일이 밝히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오히려 더 큰 악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알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진상을 밝히려다 보면 반드시 누군가의 책임을 묻고 비난하게 됩니다.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진상을 규명해야 하고, 강자가 약자를 짓누른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일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정의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로의 힘이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서로의 사랑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한 상황이라면 감정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건 자칫 서로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P67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승자는 들뜰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되면 제 자신이 잘났다는 헛된 자신감에 사로잡혀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남들을 우습게 알기 시작합니다.승리의 순간에 교만의 유혹을 이겨내기란 참 어렵습니다. 원상회복을 이루었다고 해도 이 기회에 한몫 챙기고 싶은 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P96

우리는 누군가 깊은 슬픔에 빠져 있거나 절망의 나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 “내가 위로한다고 해서 과연 위로가 될까?” 하고 회의적인 마음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한 번의 위로와 관심이 큰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슬퍼하고 낙심에 빠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마음을 나누면 그 영혼은 점차 안정되어갑니다. 따뜻한 눈길 한 번, 정성어린 말 한 마디가 큰 힘이 되어 사람을 일으킵니다.

 

P110

남자들이 성적 능력에 자신이 있으면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경향도 이러한 본능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힘을 포악하게 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성범죄와 같은 사건들은 남성의 여성들에 대한 성적 유린과 폭력입니다. 전쟁이 일어나 집단 강간이 일어나곤 하는 일들도 모두 남성의 성적 능력이 폭력적으로 변한 결과입니다. 성이 생명의 능력이 아니라 죽음의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남성의 생식력이 건강하게 유지되어 태어나는 자손들이 모두 건강하다면 좋은 일입니다. 손상된 생식력으로 병약한 자손이 태어나는 것을 바랄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남성의 생명력이 올바로 쓰이지 않으면 많은 죄와 폭력이 생겨납니다.

 

P156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좌절하는 이유가 단지 우물을 빼앗겼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것은 닥친 현실일 뿐입니다 .우리가 정작 무너지게 되는 것은 우물을 새롭게 팔 의지를 일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이 의지만큼은 잃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또 일어서면 됩니다. 누군가 우물을 메우면 다시 파면 되고, 그래도 빼앗고자 한다면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억울한 형편을 반드시 아실 거라 굳게 믿고 흔들림없이 다시 길을 떠나면 됩니다. 누구나 예기치 않은 어려움을 겪에 마련입니다. 정말 힘들게 노력해서 성취한 것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이 억울함을 풀지 못해서 사람이 변하면, 그건 자신의 인생과 존재가치를 폐허로 만드는 길입니다. 이삭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래 또 파나가면 되지했습니다. 우물을 다시 팔 수 있는 의지, 이 의지를 분명히 가지고, 그 결과가 나에게 축복이 될 것을 믿는 사람은 이삭과 같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P157

때로 인생에서 우물을 빼앗겼다고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마십시오. 우물을 파려는 의지만 있으면 언젠가 마른 땅에서 물이 샘솟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막혀버린 줄 알았던 브엘세바의 우물이 터진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그렇게 다시 물이 솟는 감격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반응형

 

 


결혼을 하고 나서 좀 지나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30년 가량을 무교로 지내오고 성향도 불교나 천주교에 가까우나 아내의 권유로 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혼란이 많다. 종교라는게 이성적으로 다가가면 안되지만 지금까지 내 사고는 그렇게 굳어져 있었다. 지금은 단순히 지난 일주일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 일주일의 안녕에 대해서 그냥 기도를 드리는 정도이다.

계속 고민중이다. 계속 다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지만 성경이라고 하면 한 번 쯤은 읽어 볼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되어졌다. 종교를 떠나서 인문학적으로 뛰어날 뿐 더러, 유럽의 문화뿐만 아니라 각종 분야에서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가끔 성경책을 펼쳐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단순히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글자 그대로 읽을 뿐이지 아무런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지나가 버렸다. 이 책은 그런 내용을 상세하게 그 배경과 내용을 풀어준다.

책을 읽다 보면 종교를 떠나서 너무나 다가오는 말이 많이 있을 뿐 더러, 나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기회를 주기도 하는 것 같다.

지난 번 [이슬람교]를 읽었을 때와 어쩌면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 든다. 만약 내가 어떠한 한 종교를 믿더라도 절대 편협하게 믿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어떠한 것은 시대와 역사를 거쳐오면서 그 근본 사상은 변함이 없지만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것들이 왜곡되어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조금 더 넓게 다가가고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알아가는 기쁨은 표현할 수 없을 듯 하다.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내 주변의 많은 것들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고 느껴야 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p57
자존감과 자만심은 다릅니다. 자만심은 자기를 스스로 높이면서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지만, 자존감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각성입니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되는대로 살지만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어떤 협박이나 유혹에도 자기를 값싸게 팔지 않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스스로 허물거나 남에게 짓밟히지 않습니다. 

p73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온 세상을 다 얻고도 너를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라는 존재,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을 때에 이 세상은 주어진 생명의 힘을 나누는 의미를 진정으로 얻게 됩니다. 그만큼 인간은 우주 생명체계의 핵심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p80
인간에게는 창조적인 상상력과 독자적이고도 개성적인 의지가 있습니다.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이 능력은 그 안에 본래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발견하고 깨우치고 발휘하는 것이 창조적 진화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단순히 환경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적응만 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치를 새롭게 길어 올리면서 발전된 모습을 만들어갑니다. 

p126
당사자가 분명하게 알아야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 내면이 진실한 눈과 정직한 생각으로 현실을 바라봤을 때 진정 자신과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혜의 힘이 나오지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일시적인 충격은 줄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진실한 자신가 마주해야 답이 나옵니다.

p130
자신과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세는 자기를 살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모든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책임져야 할 일이 있으면 당당히 책임져야 합니다. 피하려다가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주체적인 성찰과 선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택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능력은 온전하게 발휘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책임과 권리입니다. 우린 자신을 감추기 위해 걸쳤던 가면들을 모두 벗어야 합니다.

p159
참을 '인忍' 자는 칼 '도刀'자가 마음 '심心' 자 위에 턱 하니 있는 형상입니다. 그래서 참는다는 것은, 마음에 품고 있는 칼을 독하게 결심하고 뽑지 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p160
자기 성찰은 이토록 중대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찰이 깊어야 책임전가의 유혹을 이기고,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생명의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는 기회를 잃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를 경쟁적 적대감으로 대하는 존재는 생명을 파괴해도 무감각해지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경쟁과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생명의 가치를 최선의 자리에 올려놓고 살아가는 인간, 그런 공동체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원형입니다.

p269
인간의 성장사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아이가 아버지의 모순과 위선에 실망하고 그 실망이 점점 커져 아버지에 대해 내심 경멸하거나 자신과 아버지를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느꼈다고 가정해보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이 아이가 성인이 되어가면 그 자신도 아버지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인생의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모순과 위선에 빠지고,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을 것 같은 고독의 심연을 경험하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누구도 알지 못할 슬픔, 위로해 줄 수 없는 고뇌, 나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상처가 생긴다면 그때에 비로소 그는 부모 세대의 고통과 외로움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됩니다. 이건 단순한 연민과 배려의 문제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이런 인생의 시련을 지나오셨구나. 아버지가 아무리 대단하셨다고 해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뇌가 있으셨겠지. 회의하고 불안해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고, 혹시 그로 인해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괜한 걱정이라도 하게 될까봐, 그 모습을 숨기시면서 홀로 골방에서 지내신 적은 없으셨던 걸까? 그의 마음을 위로할 존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고, 그래서 때로는 혼자 술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는 시간이 아버지에게도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 말입니다.


반응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