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
녀를 위한 파반느>

책을 읽는 도중에 인터넷에 '박민규'를 검색해 보았다. 도대체 이런 작품을 쓴 사람이 누구인가?
작년부터 책 속에 빠져들면서, 여러 작가들과 간접적으로 만나왔는데 이런 이야기 전개는 처음 보는 것이었으며 영화식스센스를 넘어서는 반전이 숨어있고 책을 덮으면서 우와~! 라는 탄성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숨을 들이 쉴 수 밖에 없었다.


피아노 연주곡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제목을 책의 제목으로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들 중 못생긴 한 시녀를 주목하여 만든 표지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바로 이 표지는 이 책의 내용을 맗해준다. 우리는 항상 [시녀들]속에서 금발의 귀여운 하얀 드레스를 입은 가운데 아이를 본다. 그림에도 주변은 대개 어두운 계통인데 비해 그 아이만 밝은 옷을 입고 있다. 우리의 사회의 모습이다. 아름답고 부유한 것만 바라보고 부러워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그 옆의 못생긴 시녀에 대해서는 무관심함을 넘어서서 가혹하게 대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한쪽이 밝아질수록 점점 그 주변은 어둠속에 파묻히게 되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떠날 때 남긴 편지에는 그녀의 외모때문에 겪은 억울하면서도 비참하기까지 한 그녀의 과거 경험이 드러난다. 그녀는 남보다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변방으로 몰리고 또 그 주변으로 떨어지게 되는 모습을 보며 단지 외모로 비유하고 있으나 여러 요소들이 현재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을 중심에서 소외하게 만드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여자는 철저하리만큼, 마치 자기가 입은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그녀의 모든 것을 뱉어내듯이 그녀의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모든 걸 뱉어내어 그녀 자신을 드러내는 그 장면이 너무나도 강하게 뇌리에 기억에 남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그리고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명예의 유무를 떠나서 그렇게 접근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에서 부터 새로운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을 나 또한 알게 되었고, 그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내 가슴의 폐부를 찌르고 말았다. 그것은 나에게는 어쩌면 작은 충격이기도 했다.

어쩌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이기도 하면서도, 이 사회를 향해 내뱉는 포효일 수도 있는 이중적인 작품이었다.
정말 책을 덮으면서 심장이 뛰고 깊은 숨을 들이 쉴 수 밖에 없는 올해 내가 접한 소중한 책이며, 작가였다.

(39p)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p58)
시간이 흐를수록 더 분명해진 느낌이야. 나... 예전의 엄마가 너무 좋았어.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 달라고는 말 못하겠어. 그런 일을 당하고 어느 누가 예전처럼 살 수 있겠어. 그래도 죽지는 마. 그것만 빼곤 나 다 괜찮아. 설령 어떻게 변한다 해도 달라진 엄마를 좋아하면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있어주기만 하면 돼.

(p102)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놀라운 걸요. 놀랍지. 여자들에겐 네트웍을 위한 장기 하나가 따로 몸속에 있지 않으까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 혀를 차며 요한도 얘기했었다.

(p144)
공부 공부... 그러다 죽는 거잖아. 1등 1등... 그러다 죽어야 하고... 돈 돈 그러다 죽는 거잖아.

(p149)
어머니께선 너무 많은 말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단 한 줄도 쓰지 못하셨을 거예요. 그건... 제가 소설을 써봐서 알아요.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땐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 게 인간이거든요

(p156)
인간은 대부분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自我)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 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p175)
그런 생각도... 해본 적 없어요. 그런데 형, 저는 한 가지는 알아요. 그 어떤 인간도 실은 나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거... 이러쿵저러쿵 말들은 해도 실은 누구도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뿐이란 거. 그건 정답이야, 하고 요한은 얘기했다. 하지만 명심해, 앞으로의 길에는 정답이 없어. 뭐, 이러쿵저러쿵 말은 하지만 나 역시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인간이니까

(p193)
변기에 앉은 자신의 엉덩이가 낸 소리보다는, 더 크게... 더 많이 <사랑해>를 외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p270)
이름으로 저를 부르는 아이들은 없었습니다. 저에겐 늘 지독한 별명이 따라다녔고, 별명이 늘어날 때마다 어둠의 영역도 커져만 갔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놀림을 받아야 했는지 지금도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어떤 피해를 준 건지... 타인의 얼굴을 공격하는 일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이었는지 저로선 알 길이 없습니다. 지독한 몇몇 앙치들과는 싸움을 벌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싸움을 할 때마다 또 새로운, 더 지독한 별명 하나가 추가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메주였던 별명이 미친 메주가 된다거나... 호박이나 돼지에서 괴물이나 산돼지로 변한다는 사실을 말이죠

(p281)
화장을 시작한 여자에겐 두 개의 얼굴이 생긴다는 것을... 그리고 여자에겐 두 개의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꺄아~ 선생님이 직접 완성한 아이의 변화 앞에서 모두가 탄성을 질렀던 순간도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하거나 누구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p287)
바라는 모든 걸 얻는 것이 인생의 가치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겨우, 가까스로 얻은 것을 지키고 보살피는 것이 인생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포기하고 포기하면 세상을 살아온 저 같은 여자에게... 인생의 '가치'는 그런 것입니다.

(p292)
얼마나 먼 길을 걸어가야만 한 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먼 바다를 건너가야만 갈매기는 쉴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포탄이 날아다녀야 우리에겐 평화가 올까

오 친구여 묻지를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p296)
사용할 일이 전혀 없는 지식을 왜 배우는 걸까. 이를테면 f(x+y) = f(x) + f(y)를 가르치면서도 왜, 정작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왕조의 쇠퇴와 몰락을 줄줄이 외게 하면서도 왜, 이별을 겪거나 극복한 개인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가. 지층의 구조를 놓고 수십 조항의 문제를 제출하면서도 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교육은 시키지 않는 것인가.  아메바와 플라크톤의 세포 구조를 떠들면서도 왜, 고통의 구조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는가. 남을 이기라고 말하기 전에 왜, 자신을 이기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

(p315)
미녀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관대함에 나는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뭐랄까, 그것은 부자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관대함과도 일맥상통한 것이란 기분이 들어서였다. 관대함을 베푸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가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나 역시 무작정 그들에게 관대했던 인간이었고, 그로 인해 가혹한 삶의 조건을 갖추어야 할 인간이었다.

(p329)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세상의 풍경들을 그저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름다워지는여자들... 아름다워 <져야만>하는 여자들과 ... 학력을, 차를, 또 집을... 말하자면 힘을 <가져야만>하는 남자들... 서로에 의해, 서로에 비해, 올라선 서로를 위해 구축하던 프리미엄과... 올라서지 못한 서로에게 요구되던 또 그만큼의 스펙에 대해... 그러나 전혀 달라지지 않는 삶의 성질에 대해... 오로지 스펙과... 프리미엄만 늘어날 뿐인 이 삶에 대해... 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p361)
누군가를 사랑한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반응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