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5

프랑스의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는 "과거에 대한 무지가 현재의 이해 부족을 초래한다"고 설파한 바 있다. 과거 공권력의 잘못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했기에 오늘날 이 잘못이 되풀이 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P17

한 나라의 문명 수준은 불법 행위와 부정의가 발생했을 때 이를 교정할 수 있는 제도적, 법적 장치의 완비 여부, 그리고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공감의 정도와 수준에 달려 있다.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는 사회적 고통에 공감하는 정도는 대중의 집단 기억, 역사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역사의식과 공감은 시민사회의 문화적, 정신적 기반이다.


1. E.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이없는 대화라고 했다. 우리는 대화를 할 때 내가 해야할 이야기를 알아야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해서 들어야 한다. 과연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진 몇 백년 전이 아닌 불과 몇 십년 전인 부모님, 조부모님의 시대에 벌어졌던 이야기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에 자문을 해본다.


2. 우리는 보통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생활을 한다. 이는 다른 말로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를 보호해야 할 국가가 어느 순간 나를 위협하는 존재로 다가온다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대항할 것 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대항한다면 이길 수 있는가.


3. 나는 그저 지시를 받았고 공식적으로 업무를 처리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이에게는 큰 상처를 받고 때로는 삶을 좌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해야할 일이다.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특수한 조직형태인 군에 소속되어 있다면 과연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경우, 상관의 명령에 반하는 행동이 얼마나 가능할까?



피고(아이히만)가 존재하던 때 나치 법률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범죄가 아니라 국가의 공식 행위이므로 (......) 복종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습니다.                           

-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의 변호인


스스로 가슴에 못 박는 소리지만 난 철저히 '상명하복'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         

- 고문기술자 이근안


대대장은 총살 집행할 권한이 없고, 연대장도 군법 권한으로는 총살 집행을 지휘할 권한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 상부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뿐이고 본인은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 한국전쟁 때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가해 부대 대대장 한동석


◆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1951년 육군 11사단 9연대가 '견벽청야(방비를 철저히 하고 곡식을 모조리 거두어들인다)작전'에 따라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경남 거창군 신원면 지역의 민간인 700여 명을 모두 모아 마을 뒤 산골짜기에서 학살했다. 같은 해에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조사 자체를 무산시키려 했다. 이후 들끓는 여론에 밀려 관계자 세 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사법처리르 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몇 개월 후 이들은 모두 사면받고 복권되었다. 유족들은 다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주민들이 나서서 유골을 모아 위령비를 세우고 묻었으나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을 금하고, 묘지도 개장령에 따라 다시 파헤쳤다. 또 박정희 정권은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의 주민 성분 조사에 참여했던 신원면장 박영복을 타살하고 유족들과 유족회 간부 열여덟 명을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유족들은 1988년이 되어서야 희생자 위령 궐기대회를 열고 위령비를 다시 세울 수 있었고, 1996년에 비로소 명예 회복에 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되었다.


◆ 국민보도연맹

1945년 6월 5일 이승만 정권이 대국민 사상 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반공단체, 좌익 세력 색출 및 통제와 회유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지역적 할당제를 비롯해 지나친 실적주의가 횡행하여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단체에 등록되는 폐해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부와 경찰은 국민보도연행원과 형무소 재소자들을 무차별 검속, 즉결 처분했고, 이는 한국 전쟁 중 최초의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 여순 반란 사건

1948년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에 반대하는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14연대를 급파했다. 이에 10월 10일 14연대 소속 지창수, 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곧 여수 시내를 장악하고, 여수, 순천을 순식간에 휩쓴 뒤 곧바로 광양, 곡성, 구례, 벌교, 고흥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해나갔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2500여 명의 군인 및 민간인이 숨졌다. 잔류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본격적인 유격전을 전개했지만 1950년 2월 대부분 소탕되었으며 호남지구에 내려졌던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좌익계와 광복군계를 포함한 모든 반이승만 성향의 군인들이 제거되었다.


◆ 제주 4.3 사건

1947년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행사에서 경찰이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4.3 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 발포에 항의해 총파업을 벌이는데, 미군정은 이를 조사하면서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열두 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된다.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이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사건 발생 후 50여 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2003년 10월 말 노무현 대통령이 이 사건과 관련해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으로 유신반대 성향이 있는 도예종 등이 기소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구속 기소된 23명 중 8명에게는 사형을, 나머지 15명에게는 무기징역 및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되었다. 2005년 12월 27일 재판부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소를 받아들였으며 2007년 1월 23일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 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서울지방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배척하면서 시국 사건 사상 최대의 배상액인 637억여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사건은 국가가 무고한 국민을 죽인 사법살인 사건이자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인권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 대구 10.1 사건

해방 이후 미군정은 한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친일파 출신들을 경찰로 임용하며 일제시대 방식 그대로 농민들의 쌀을 공출해갔다. 특히 대구, 경북 지역에서는 해방 이후 30만 명의 귀환동포가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하면서 쌀 수요가 늘고 모리배들의 사재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쌀값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6년 5월 콜레라가 유행하여 굶주림은 더 심했고, 미군정은 전염을 막는다며 차량은 물론 사람도 시 경계를 넘지 못하게 교통을 차단했다. 결국 9월부터 대구 시민들은 미군정의 식량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노동자들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벌인 9월 총파업에 맞추어 파업에 돌입했다. 10월 1일 항의하던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총격을 가한 것이 직접적 발단이 되어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정치 영역에서 좌파 정치 세력이 크게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 노근리 사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충북 영동군 노근리의 경부선 철로 주변에 피신하고 있던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미군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300여명이 살해된 사건이다. 당시 미군은 노근리 부근의 미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 명령에 따라 무차별 사격을 했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60년 민주단 정권 때 유족들이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하면서 이 사건은 외부에 드러났다. 미군은 소청을 기각했지만, 1994년 4월 대책위원회 정은용이 유족들의 비극을 담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소설을 출간하면서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1999년 말 유족들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2000년 1월 9일 미군은 전문가 등을 파견하여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유족들에 대한 보상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이후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 사업이 추진되었다.


◆ 실미도 사건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무장 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는 이른바 1.21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정부의 강경 대응 방침에 따라 대북 특수공작을 목적으로 실미도 부대가 창설되었다. 이들은 3년 4개월 동안 혹독한 훈련과 열악한 보급, 보수 미지급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견뎌내며 북파공작원으로 훈련받았다. 그러던 중 국제적인 긴장 완화와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더 이상 이들의 존재가 불필요해지자 정부는 이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공작원 스물네 명이 1971년 8월 23일 기간병 열여덟 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여 서울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군경과 교전이 벌어져 경찰, 민간인, 공작원 등 스물여덟 명이 사망하고, 이후 생존 공작원 네 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반응형
반응형